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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7:13~20>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어떻게 하면 생명을 얻을 수 있는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며, 협착한 길로 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즉 문과 길을 잘 만나는 것이 생명을 얻는 열쇠인 것이지요. 오늘 본문 중에서 이해를 돕기 위해 14절 일부 번역을 원문대로 수정한다면, ‘찾는 이가 적다’ 부분에서 찾다는 말이 원문의 ‘휴리스코 인데 발견하다, 만나다는 뜻이므로 ‘발견하는 이가 적다’ 혹은 ‘만나는 이가 적다’로 해야 문맥이 정확해 집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싶어 하지만, 잘못된 문과 어그러진 길로 안내 받음으로, 생명이신 하나님을 발견하거나 만나지를 못한다는 의미이지요. 한국에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통상 20%정도 되고 대다수 사람들이 극성스럽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새벽기도회, 철야예배, 각종 제단 쌓기, 일천제사... 등등 세계 유일무이의 특심으로 하나님을 찾지만, 전부가 성경적인 찾음이 아니라, 진리에서 벗어난 일들이지요.
즉 엄청난 노력으로 애쓰나 하나님을 발견하는 이가 적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문과 길에서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문과 길은 가르침이요, 가르치는 자들인데 그들이 양들을 바르게 인도하지 못하여 생명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주님은 양의 문이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주님 자신이 생명의 문이시고 길입니다. 또한 주님의 영을 받은 제자들도 문이며 길입니다.
<요10:7~8>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계21:12~14>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길)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주님이 문인데 주님을 통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면 다 절요요 강도가 되겠지요. 이는 역사적으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율법사가 주님 보다 먼저 와서 사역한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지만, 영적으로는 영과 생명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주님 보다, 먼저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는 모세의 영을 받은 율법 교사들을 통칭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문으로 통하지 않고 먼저 온 것은 문이 아직 생기기 전에 왔다는 말이니, 담치기를 했다는 말이겠지요. 이는 창 3장에서 하와를 꾀려고 뱀이 에덴동산의 담을 넘어온 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몰래 들어온 자는 언제나 연약한 여자를 미혹해서 사람을 죽이는 선악과를 먹이는데, 뱀이 그랬듯이 바리새인들이 그 영을 받아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답니다. 언제나 율법 교사들은 자신들이야 말로 참된 문이요, 길이라 자부하고 있거든요.
양의 문으로 들어가려면 ‘정결함’ 이라는 규격에 맞아야 합니다. 번제단의 제물이 되려면 우양의 상태가 건실하고 깨끗해야 하겠지요. 만일 눈이 멀었거나 다리를 절고 기타 흠이 있다면 통과할 수 없답니다. 이는 영적인 비유로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혼의 상태에 대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죄얼이 계속해서 양심을 가책하고 참소해서 견디지 못하는 자들로서, 죄를 감추고 살기에는 너무 괴로워서 다리 뻗고 잠을 못 자기에 차라리 대가를 치르고라도 죄를 자백하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백하고 토설한 자들인 창기와 세리와 죄인들을 상징하는 말이지요. 이들을 하나님은 두 손 벌려 환영하시며 반갑게 만나주십니다. 양의 문으로 들어온 정결한 우양은 제사장이신 주님의 손에 의해 가죽이 벗겨지고, 각이 쳐지며, 제단 불에 올려져 깨끗이 태움이 되어 연기로 올라갈 때 하나님은 흠향하신답니다. 이런 자들을 희년을 만난 자들이라 하고 혹은 구원 받기로 예정된 자들이라 합니다.
반면에 다른 문인 넓고 큰 길이란 의문에 따른 율법말씀으로 문자대로 가르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을 의문대로 보면 필연코 종교로 전락되게 되어있습니다. 주님이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가 얼마 안가서 로마교로 변질된 것은 성경을 문자 액면대로 실행하는 율법교사들 때문이었지요. 급기야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신종 종교가 탄생된 것입니다. 종교는 의식을 강조하여 따르게 되는데, 자연히 영은 소멸되어 버리고 외식으로 흐르는 패턴으로 흘러가는 것이지요.
누가 하나님을 바라고 찾습니까? 영적인 배고픔을 느끼는 자들이지요.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죄를 안 짓고 싶은데 왜 그리 나라는 존재는 연약한가?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고민하며 해답을 구하는 자들에게 그 해답을 찾아주는 것이 참된 목자들이지요. 영적이고 정신적인 문제에 대한 분명한 빛을 밝혀서 어두움에서 죽어가는 인생들에게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어야 하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까?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이 땅의 것들(물질, 건강, 자녀의 형통)을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호도하여 많은 사람들을 꼬드겨서 건물을 크게 짓고, 큰 부흥을 이루었다고 장담합니다만, 전혀 성경과는 정 반대의 가르침을 통해 몰려오는 중생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마음에 세상 욕심으로 가득한 사람들을 부추겨 더더욱 큰 욕망을 꿈꾸게 하여 성전 뜰에 가득채워진 사람들은 전혀 ‘규격에 안 맞는’ 흠집투성이의 우양들이지요. 그야말로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배우자가 소유한 재물을 보고 결혼한 '다고다고'의 더러운 영, 거머리의 후손들입니다.
이렇게 모여진 큰 무리를 계17장에서는 큰 음녀라 합니다. 음녀는 많은 물 위에 앉았는데 이물은 한마디로 세상의 모든 사상들(방언, 백성, 무리, 열국)이지요. 구원 받아서 물과 결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물을 타고 앉아 있다는 말입니다. 이 음녀는 또한 붉은 빛 짐승을 탔다고 합니다. 붉은 빛 짐승은 용, 옛 뱀, 마귀, 사단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의 등에 올라타서 사단의 이끄는 대로 가는 교회라는 말이니,,, 얼마나 흠짓한 일입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주도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그러했고, 그 뱀의 영을 그대로 받은 이시대의 기독교가 음녀요 큰 성 바벨론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사망의 문과 멸망의 길로 사람들은 달려갈까요? 그것은 인도하는 자들의 외모에 반해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즉 가르치는 자들의 외적인 캐리어가 너무도 잘나고 화려해서 깜박 속는다는 말이지요. 미국이나 유럽등지의 해외 유학파 신학자, 목회학 박사, 교수 출신, 방송인 출신, 연예인 출신 목사, 40일 금식기도 이력, 대형교회 사역 이력 등등이 명함에 박혀 있으면 마치 ‘하나님의 친구’로 인식들을 하는가 봅니다.
하와도 선악과를 먹은 이유가 바로 나무를 보고 반해서 미혹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답니다.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나무가 어떻게 멋있었다고요? 네, 나무가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다고요. 그러다보니 자동으로 연결되는 것이 '열매는 볼 것도 없이 대단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고 눈감고 선악과는 따먹었지요. 선악과는 먹으면 죽는 겁니다. 율법을 문자 액면대로 받아들여 따르면 영이 다 죽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열매를 보고 나무를 판단해야 한다고 경고 합니다. 뱀은 변장술의 명수입니다. 뱀에게 속은 하와만 나무랄 일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화려한 경력과 학력을 구비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찾아오는 목회자의 진위를 가릴 능력이 있습니까? 양의 옷을 입은 이리를 분간할 수 있느냐고요?... 성경은 ‘네가 못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키가 크고 핸섬 했나요? 머리에 포마드 말라서 백으로 넘긴 헤어스타일은 ‘얼짱’의 으뜸이 아닌던가요? 그러나 성경은 사람들의 상상을 뒤집는답니다. 이사야서 52장 이하에 보면 얼굴이 타인 보다 상하고 상해서 오히려 사람들이 피해갈 정도였답니다. 간고를 많이 겪어 질고를 아시는 분이랍니다. 그러니 30대 초반인데도 50대로 보일 정도였다고(요8) 증언하잖습니까?
주님이 사역의 마무리 부분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을 입성하는 모습을 그려보세요. 작고 보잘 것 없는 뒤우뚱 거리는 나귀를 안장도 없이 타고 가는 모습은 너무도 우스꽝스런 광경이겠지요. 거기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외치는 제자들과 부녀자들의 모습은 광대 아니면 마치 거지 왕초의 행각이라고나 할까요? 이렇게 주님의 나무됨은 보잘 것 없는 초라함의 극치를 이루었지만, 그 분이 바로 우주의 주인이요, 만왕의 왕이시며, 창조주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열매로 나무를 알라고 오늘 본문은 강조합니다. 못된 나무라면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면 나쁜 열매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나쁨’입니다.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아주 좋은 것이라는 말이지요. 좀 전의 지적대로 세상 복 준다고 사람들을 미혹하여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은 부흥이 얼마나 사람들이 볼 때는 대단한 업적입니까? 종교적인 갖가지 성과들이 즐비하고 거기서 파생되는 떡고물인 부와 명예와 영광과 권세가 그 열매들입니다.
이것들을 사람들이 볼 때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된 것으로 여겨 그를 높이고 칭송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불법을 행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의 친구는 세상 권력자요, 가진자요, 기득권층들이 아닙니까? 반면에 주님의 친구는 누구였나요? 베다니에서 사는 자들로 예표 된 창기와 세리와 죄인들 이지요... 제자들이 모두 그러한 자의 대표들입니다. 베다니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들의 거쳐라는 의미입니다.
아름다움 열매를 맺는 주님과 제자들의 열매는 눈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는 내면의 신성한 인격을 건축한 것인데 밖에서 보일 리가 없지요. 주님이 가신 길을 가는 것,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진리의 길을 가는 순례자, 주님 외에는 다른 그 어떠한 것도 마다하는 신앙의 정조, 어찌하든지 자신의 자아를 깨뜨려 산제사를 드리려는 신앙의 자세를 가진 자들의 삶이 열매입니다. 모두 성령의 열매를 뜻합니다.
본문의 두 종류의 문과 두 종류의 길은 마24장의 밭에 있는 두 남자와 매를 가는 두 여자와 맥을 같이하는 말입니다.
<마24:40~41> 그 때에 두 사람(남자)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남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서 밭으로 비유된 사람의 마음을 개간하여 열매 맺도록 씨뿌리는 사역자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결과적으로 하늘로 들림 받고, 나머지 한 사람은 땅에 버림을 당한다는 뜻이지요. 또한 여자란 말씀을 듣는 성도를 지칭하는 말인데, 매를 간다 함은 곡식인 말씀을 잘게 분쇄하여 영양으로 섭취하는 모습인데, 말씀의 자체화를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똑같이 신앙생활을 했지만 한 사람은 버림을 당한다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신앙에는 두 노선이 있음을, 성경은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까지 줄기차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두 남자의 비교인 가인과 아벨, 아브라함과 롯,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으로 대비시키고 있답니다. 두 여자도 사라와 하갈의 비유는 너무도 유명한 비유가 아니겠습니까? 그냥 무턱대고 생각 없이 믿을 일이 절대 아니지요. 과연 나의 믿음은 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를 금갈대인 말씀으로 척량을 해가면서 살아가야 한답니다.
큰문과 넓은 길로 비유된 거짓 선지자는 율법교사들인 가라지를 뿌리는 자들로서 악한자의 아들들이요, 좁은 문과 협착한 길로 비유된 주님의 제자들은 알곡을 뿌리고 추수하는 천국의 아들들입니다.
여기서 ‘좁다’의 헬라어는 ‘탄식, 억압, 고난’이라는 어원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탄식과 고난을 양식삼아 가야하는 곤고한 여정임을 암시하는 말이지요. 그리고 협착한 길에서 ‘협착’이란 헬라어로 ‘들리오’라 해서 ‘환란과 핍박’이라는 의미입니다.
<히11:36~38>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신앙생활은 영적인 싸움의 연속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의 로마의 정치적인 압제와 탄압은 현대사회에서는 북한 같은 일부의 특수한 환경 외에서는 일어나기 힘들지요. 그렇다고 평안하다 안전하다하며 안일에 빠진 신앙을 하라는 말입니까? 어쩌면 진정한 핍박과 억압은 내안에서 요동치는 죄성의 엄습함일 것입니다. 내면에서 시류와 세속에 영합하려는 속삭임은 태산의 파도처럼 밀려오는 원수의 세력이 아닌지요?
신앙의 나날은 이것들과 끊임없이 싸워야하는 전쟁터이어야 합니다. 때로 싸워서 넘어질 때에는 오호라! 주여,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 주옵소서... 라고 엎드려 기도해야하고, 계속된 이김을 위해 날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 안에 있기를 소망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강한 자가 없답니다. 다만 이기는 자가 강한자이지요. 피흘리기까지 싸우라는 사령관의 음성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며, 협착한 길로 가는 신앙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