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춘동(東春洞)
⚫동막(柬苒)
동춘동은 구한말 인천부(仁川府) 시절, 원우이면(遠又余面) 척전리(尺前里.)와 동막리(柬幕里) 등 작은 마을들이 모여 있던 곳이다.
이들 이름 가운데 遠又介(원우이)’는 우리말 이름 ‘먼우금’을, ‘尺前里(척전리)’는 우리말 이름 ‘자앞마을’을 각각 한자로 옮겨 쓴 것이다.
지금도 그 이름이 남아있는 ‘자앞마을’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자〈尺〉의 앞마을’이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인데, 이는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과 관련이 있다.
이에 따르면 동춘동 뒤쪽에 서있는 청량산(淸凉山)은 원래 ‘척량산(尺量山)’ 인데 ‘청량’과 ‘척량’의 발음이 같아 잘못 바뀐 것으로 본다.
‘척량’은 풍수지리설에서 ‘금(金)으로 만든 자〈尺〉로 땅을 재는 생김새’를 나타내는 말, 즉 ‘금척량지형(金尺量地形)’의 준말이라 한다. 청량산의 형세가 그렇다는 얘기인데, 그 자〈尺〉의 앞에 있는 동네여서 ‘자앞마을’이라 불리게 됐다는 해석이다.
풍수지리적 해석의 타당성은 판단할 수가 없으나, 어쨌든 이 해석에 따라 이 동네는 한자로 ‘尺前里’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1789년 정조 임금 때 나온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이미 ‘척 전리’라는 이름이 나온다.
그리고 이곳에서 뿌리를 박고 대대로 살아온 연일(延日) 정씨(鄭氏) 집안이 청량산을 명당(明堂)으로 쓰며 그 정기(精氣)를 받았기에 크게 번성했다고도 한다. 한때 이곳에는 이 집안에서 지은 ”칸짜리 큰 집도 있었다 한다. 지금도 청량산 끝자락에 있는 이 가문의 묘역(墓域〉은 오래된 소나무 숲과 함께 잔디밭, 비석 등이 잘 가꿔져 있어 집안의 역사와 가풍(家風)을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는 ‘자앞마욜’을 ‘잣나무가 많은 마을’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 해석은 이 마을 뒤 봉재산의 동남쪽 기슭에 있는 ‘선바위’를 그 근거로 삼고 있다.
이 선바위는 마을 사람들이 ‘초당(草堂)바위’라 부르던 것으로, 바위 위에 지푸라기 등으로 지붕을 엮은 작은 집 ‘초당’을 지어놓았었다고 한다.
인천시립박물관의 조사에 따르면, 이 바위에는 큰 글씨로 ‘栢村洞天(백촌동천)’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중 ‘동천(洞天)’은 ‘신선(神仙)이 사는 곳’이라는 뜻으로, 도교사상(道敎思想)에 따라 경치가 무척 좋은 곳에 붙이는 말이다. 강화도에 있는 ‘함허동천계곡’에도 이 ‘동천’이 쓰였다.
‘백촌(栢村)’은 이 동네의 옛날 이름이거나, 이 지역 출신 선비의 ‘호(號)’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백촌’을 호로 썼던 인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이구징(李久澄; 1568∼1648)이 있다. 그는 병자호란 때 임금을 남한산성에 수행해 뒷날 형조참의와 공조참판을 지냈다. 하지만 그는 인천과 별다른 인연이 없기 때문에 이 바위에 새겨진 ‘백촌’이 그의 호일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그래서 시립박물관 조사단은 ‘백촌’이 이 동네의 이름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栢’은 ‘잣나무’라는 뜻이므로, ‘백촌’은 ‘잣나무가 많은 마을’이라는 뜻을 갖는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잣말’쯤이 될 텐데,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예전부터 동네 인근에 잣나무가 많았다고 한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자앞마을/자앞말’은 원래 ‘잣마을/잣말’이었는데 이를 한자(漢字)로 기록한 사람이 ‘잣말’을 ‘자앞말’로 생각해 ‘척전(尺前)’이라 썼다고 보는 해석이다.
또 다른 해석은 ‘자앞’의 ‘자’를 ‘성(城)’을 뜻하는 우리 옛말 ‘잣’의 변형으로 본다.
실제로 우리말이나 땅 이름에서 ‘잣’은 ‘자’나 ‘재’ 등으로 바뀌어 쓰인 경우가 무척 많은데, 이곳도 그렇게 보아 ‘성앞 마을’로 해석하는 것이다.
비류 백제의 전설로부터 이어져 온 문학산과 문학산성, 그리고 그 일대 지역이 예로부터 인천의 중심지였으니 이곳은 그 성의 앞에 있는 마을로 볼 수도 있다. 이곳이 대략 훈학산성의 남쪽에 있는데, 우리 조상들에게 남쪽은 앞쪽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척전’의 ‘척(尺)’은 우리말 ‘자(잣)’을 표현하기 위해 한자의 소리만 빌려 쓴 글자가 된다.
1914년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 때 이 척전리와 동막리가 합해져 동춘리(東春里)라는 새 동네 이름이 생겼고, 이것이 광복 뒤인 1946년에 그대로 동춘동이 됐다.
그때 일본인들이 왜 ‘동춘리’라고 이름을 지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지역에서는 이곳에 터를 잡고 산 ‘연일(延日) 정씨(鄭氏)’ 집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기에 이를 활짝 핀 봄꽃에 비유해 동춘동이라는 이름을 만들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동네 이름이 생긴 시점으로만 보아도 타당성은 거의 없는 얘기다.
이와 달리, 동춘이 원래 ‘동쪽 마을’이라는 뜻의 ‘동촌(東村)’이었다가 발음이 바뀌어 생긴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이곳은 인천부의 중심이었던 관교·문학동 일대에서 볼 때 동쪽이 아니라 남쪽에 있기에 타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이와 조금 다르게 청량산의 동쪽이어서 ‘동촌’이라 했다는 설명도 있다. 하지만 동춘동은 청량산의 동쪽이라기보다는 남쪽이라 할 수 있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결국 동춘동은 일본인들이 지역의 유래와는 별 관계없이 마음대로 지어 붙인 이름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동막
앞서 말했듯 동춘동에는 동막리(東幕里)라는 마을이 있다.
‘동막’은 지금도 그 이름이 남아 있고, 인천지하철 1호선 동막역도 이 동네의 이름을 딴 것 이다.
지금은 온통 아파트촌으로 바뀌었지만, 예전의 동막은 동네 앞이 바로 바다였다. 그리고 이곳 넓은 갯벌에서 동죽, 상합, 맛살, 가무락 등의 조개가 개흙만 긁으면 쏟아져 나올 만큼 많이 났던 곳이다. 그런 만큼 조개탕과 인천의 명물인 꽃게찜으로 수 십 년씩 이름을 날리던 집들도 많이 있었다.
2005년 개봉된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보듯 ‘동막’이라는 이름은 전국 곳곳에 많이 있는데, 한자로는 이곳처럼 대부분이 ‘東幕’이라고 쓴다.
이 때문에 ‘동막’이라 하면 이 한자 그대로 ‘동쪽〈東〉에 있는 막사〈幕〉’라 해석하고, “옛날 이곳에 군부대의 막사가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흔하다. 이곳 동막에 대해서도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언제 어디쯤에 군부대의 막사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근거를 대지 못하니 너무 막연한 얘기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전국 곳곳에 있는 ‘동막’이라는 마을들이 꼭 동쪽에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東幕’의 ‘東’자를 글자의 뜻 그대로 ‘동쪽’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만큼 ‘幕’도 ‘막사’라는 뜻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동막’에 대한 해석은 이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동네의 동쪽이 (산이나 바다에) 막혀 있다”는 뜻으로 보거나 “둑을 쌓아 막는다”는 뜻의 ‘동(堈)막이하다’에서 나온 말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곳 동막은 동쪽이 막혀있는 지형(地形)이라고 볼 수는 없어 이 해석은 타당성 이 없다.
또 ‘동막이’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둑을 막아 물을 담아놓는 일을 말한다.
하지만 이곳은 바닷가여서 어업이 주민들의 주업(主業)이며, 조선시대에 어장(漁場)을 두고 국가에서 세금을 거두던 일이 이어져온 곳이기에 농사를 위해 동막이를 했다고 보기도 어렵 다.
그런데 이렇게 국가가 관리하는 어장을 두었던 일에서 ‘동막’이라는 이름이 생겼을 수도 있다는 견해가 있다.
조선시대에 인천 송도 갯벌에는 ‘어전(漁箭)’ 또는 ‘결망처(結網處)’라 불린 6개의 어장이 있었다. ‘어전(漁箭)’은 물고기를 잡는 작살과 같은 장치를 말한다. ‘결망처(結網處)’란 물고기를 잡는 그물을 쳐놓은 곳이라는 뜻이다.
그 중 이곳 동막 쪽에 있던 어장의 이름이 ‘동포결망처(束浦結網處)’였는데, 여기서 ‘동’과 ‘망’을 합해 ‘동망’이라 하다가 발음이 바뀌어 ‘동막’이 됐다는 말이다.
이 해석은 그 타당성을 판정하기가 어렵다.
‘동포결망처’를 줄여 ‘동망’이라 불렀다고 단정 짓기가 쉽지 않은 반면, ‘동포결망처’의 운영 은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 예로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숙종 34년 12월30일자 기록을 보면 “동포결망처에서 나오는 세금은 정명공주방(貞明公主房)에서 거둔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동막에 대한 해석은 이밖에도 둘이 더 있다.
첫째는 ‘독을 만드는 곳’이 있어 ‘독막’이라 부르던 것이 동막이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다른 지역에는 이런 이유 때문에 동막이라 불리는 곳들이 있다.
이곳에는 조선 후기 천주교인들을 탄압한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피난을 왔다는 교인들의 얘기가 전해온다. 이들은 원래 경기도 포천에서 살던 교인들이었는데, 당시 탄압을 피해 충청도로 피난 갔다가,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이 동네로 넘어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으로 온 뒤에는 도자기를 구워서 팔며 생활해 갔다는 것이다. 이곳에 있는 땅 이름 ‘옹암(瓮巖)’이 여기서 나왔다고도 한다.
하지만 1866년에 일어난 병인박해보다 24년 전에 나온 「인천부읍지」에 이미 원우이면(遠又 木面) 옹암리(瓮巖里)가 나오는 것을 볼 때 이 이야기를 동막의 이름 유래로 받아들이기는 어 렵다.
‘瓮(장독 옹)’자를 쓴 동네 이름이 있다는 것만으로 실제 독을 만드는 곳이 있었다고 단정 짓기도 어렵다. 땅 이름에 쓰인 한자는 그 해석에 변수(變數)가 워낙 많기 때문이다.
‘옹암(瓮巖)’은 ‘독바위’라는 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옮겨 쓴 것이다.
그런데 ‘독’을 ‘장독 만드는 곳’으로 해석하면 ‘바위’라는 다음 말과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옹암은 ‘장독처럼 생긴 바위’라고 해석해야 가장 그럴듯한데, 이럴 경우 ‘독’은 ‘독 만드는 곳’이라는 뜻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말 땅 이름에서 ‘독’은 ‘장독’뿐 아니라 울릉도 옆 독도(獨島:독섬)처럼 ‘돌〈石〉’ 의 뜻을 가질 때도 많다.
따라서 이곳 동막을 ‘장독 만드는 곳’과 연관 지어 설명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좀 더 확실한 증거가 나올 때까지 유보(留保)해 두어야 할 것 같다.
둘째는 동막을 ‘둠/두무’의 변형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 땅 이름에서 ‘둠’은 분지(盆地)처럼 ‘주변이 산 등으로 빙 둘러싸여 있는 곳’ 등을 말한다. (→‘둠’에 대해서는 미추홀구 ‘도화동 + 쑥골 十 수봉산’ 편 참고)
이 ‘둠’은 우리나라 전국 곳곳에서 매우 다양한 변형(變形)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중에 ‘동막’도 들어 있다.
이련 이름이 들어간 곳들은 대부분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동네이고, 때로는 뒤에 산이 둘려서 있고 앞은 물가인 곳에 자리 잡은 동네인 경우도 있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무대인 ‘동막골’은 6·25 전쟁이 터졌는데도 한동안은 전쟁이 났는지도 모를 만큼 산 속 깊은 곳에 있는 동네로 묘사된다.
실제로 그랬을 만큼 깊은 산 속의 마을이기 때문에 ‘동막골’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이곳 동막은 그처럼 깊은 산 속 마을은 전혀 아니다. 하지만 근처에 봉재산이 있고, 앞은 바다였으니 ‘둠’이 바뀌어 동막이라 불리게 됐다고 해석해도 무조건 잘못됐다고 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