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막한 극장 안. 스크린에 불이 들어옵니다. 절대적인 고독의 시간, 침묵의 시간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몇 년 전, 경험하지 않은 것에 관해서 함부로 말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적 있습니다.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감정에 대해 경험하지 못한 내가 섣불리 말한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자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 영화의 감정, 근원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나는 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멜랑콜리아>, 이 영화의 정체는 바로 인간의 두려움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지는 쓸쓸한 감정, 두려움에 대한 영화였습니다.
우리는 행복해질 권리,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삶에 의미가 없을 때 삶에서 사라질 권리를 배우지는 못했습니다. 삶은 아름답지만 죽음을 향한 긴 여정입니다. 기억은 멀어지고 흔적은 지워지며 시간은 흐릅니다. 삶은 죽음을 향해 바람처럼 스며듭니다. 현실에서 비롯된 두려움의 기억은 구름이 되고 눈비가 되었다가 바다로 흘러가 다시 빗물이 되어 지상으로 스며듭니다. 이처럼 두려움은 끝없이 반복되고 순환되며, 가슴이 서늘할 만치 조용히 사그라집니다. 사랑이 녹으면 두려움의 수위가 높아진다고 하지요. 두려움이 뛰어오르거나 넘쳐나는 것을 막기 위해선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멜랑콜리아>를 보고난 뒤, 한참 후에야 저는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이 불가해한 두려움의 세계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쿵쿵쿵 누군가 내면을 두드리는 소리,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의 외침과 두려움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영화감독은 영화에 주어진 비평적 물음과 더불어 사회 전반에 나타나는 금기의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인간의 가장 강렬한 금기는 두려움이 아닐까요. 두려움으로 인해 우리는 일탈을 하고 방황하기도 하며, 가해와 폭력을 저지르기도 하니까요. 이 영화에서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두 자매의 심리와 소통을 아름다운 영상으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멜랑콜리아>는 회화예술의 조건인 캔버스의 표면에 대한 장인적 프로세스가 탁월한 영화입니다. 수십 차례의 재촬영 끝에 얻어낸 입체적 화면 구성과 특이한 공간감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국내외의 미니멀리즘 혹은 실험주의 감독들이 이 같은 영상을 실험했지만 <멜랑콜리아>는 독보적입니다. 화면에서 파생한 공간과 꿈이 교차하면서 차별화된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라스 폰 트리에는 그만의 장인적 기질로 시공간을 숨결과 생명이 충만한 여백으로 탁월하게 이끌어냈습니다. 감독의 작업 형식은 회화의 영향에서 출발했지만 이번 영화로 동양에서 축출된 절제된 서정과 감흥의 미감을 한 단계 높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처럼 우울증을 앓고, 거대한 힘에 좌절하고, 고개를 조아리면서 저항하지 못한 채 사는 것. 그 자화상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의 기억을 사랑으로만 덮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두려움에 대한 공포가 아닌 신의 섭리에 따른 평화로운 안식일 것입니다. 신은 우리에게 무한한 자유와 선택을 주셨습니다. 초자연적인 두려움이 올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고 받아들이는지는 절대적으로 자신의 마음가짐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두려움의 행성이 하나씩 있습니다. 즐거운 고통이든, 고통스러운 즐거움이든,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 삶은 바로 이것이겠지요. 영화 속에서 새로운 인물을 만나며 끝없는 질문을 할 수 있는 것, 그러면서 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영화를 통해 얻는 기쁨의 선물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