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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리초등학교총동창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화구(57회)
익산 친구들의 추석 귀향이야기
어제는 추석명절을 보내기 위해 익산으로 내려온 친구들과 현재 익산에 살고 있는 친구들이 함께 모여 저녁을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제 모임에 참석한 8명의 친구들 중 대부분은 고등학교 학창시절 우리가 이리에서 전주로 기차 통학하던 통학생들이 많았고, 다른 친구로 봉동출신 최규춘 친구는 30년 이상 익산시민으로 살아왔고, 전주출신인 김종권 친구는 익산에서 20년 이상을 살아온 친구라 함께 모였다.
또한, 어제 모임은 지난 7월 22일 우리 곁을 떠난 황인철 친구의 49재(四十九齋) 기일이 추석날(9월 8일)이라 전야제를 겸해서 친구를 추모하며 기억하는 자리이기도 하였다.
나의 1박 2일간의 귀경 일정을 카메라 앵글에 담아 올려본다.
【아래 그림】나는 KTX로 익산으로 내려왔다.
♪달려라 고향열차 설레는 가슴안고 ~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 ~ ♪♬
【아래 그림】익산역에 얽힌 ‘고향역 이야기’ 가수 나훈아 씨가 불러 국민 애창곡이 된 ‘고향역’의 배경무대가 익산역이다.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 ~ 이쁜이 꽃뿐이 모두 나와 반겨주겠지 ~ ♪♬
【아래 그림】나는 KTX로 익산으로 내려와 잠시 군산에 인사하러 들렸다가 열차로 통학하던 시절의 추억이 베어있는 춘포역사를 찾았다.
기차로 통학하던 당시의 역사(驛舍) 중 예전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은 춘포역(대장촌)과 북전주역뿐이다. 이리역도 당시 폭발사고로 역사를 새로 지었고, 동이리역, 삼례역, 동산촌역, 전주역은 새로운 곳으로 이전하였고, 덕진역은 1981년에 전라선 전주시 도심구간 이설로 폐역이 되었다.
【아래 그림】춘포역은 현재는 열차가 서지 않는 무인역으로 오래 전 역무원도 떠났고 역만 홀로 남았다.
춘포역 또한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곳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군산으로 실어 날랐다.
【아래 그림】춘포역사에 자리한 빨간 우체통
빨간 우체통을 보니 통학하던 시절 짝사랑했던 여학생에서 내 가슴 속에 묻어놓은 나만의 가슴앓이를 그림엽서에 적어 전해보련만은 50대 중반의 이 나이가 되어서도 용기가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나만의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파 그런지 그러질 못하고 아쉬워 마음속으로나마 푸른 가을하늘을 배경삼아 하얀 구름으로 그리운 모든 이에게 가을편지를 쓰노라.
가을편지 / 고은(高銀)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매인 마음 보내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낙엽이 사라진 날 헤메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아래 그림】대장촌역은 현재는 지명이 춘포역으로 바뀌었다.
춘포역은 이리∼전주간 전라선이 개통된 때 지어진 건물로 슬레이트를 얹은 맞배지붕의 구조로 농촌지역 간이역사의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래 그림】통학하던 시절이 38년이 지나 비록 그날 그땐 지금은 없을지라도 50대 중반 중년이 된 내 마음의 강물은 끝없이 흐르고 있었다.
1914년 건립돼 ‘넓은 들’이란 의미의 대장촌이란 지역 명을 본 따 당초엔 대장역(大場驛)으로 명명됐지만 1996년 현재의 이름 춘포역으로 바뀐 후 올해로 100년을 맞이하였다.
【아래 그림】옛 대장촌역의 역명이 지금은 춘포(봄 나루)역으로 바뀌었지만 나에게는 우리가 통학할 때 역명인 그냥 ‘대장’이란 이름이 좋다. 왜냐고? 대장역은 나에게는 특별히 가슴속에 그리움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이다.
♬ 그 역 앞 ♬
♪♬ 오가며 그 역 앞을 지나노라면 ~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 ♪♬
【아래 그림】나는 춘포역을 둘러보고 일제강점기 수탈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구 일본인 농장 가옥을 찾았다.
이 가옥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 항상 문이 개방되어 있는 것 같았다. 집주인께 인사라도 드리고 얘기라도 몇 마디 나누고 싶었지만 주인양반께서는 오수를 즐기고 계신 것 같아 차마 깨울 수 없어 조용히 구경만 하고 나왔다.
【아래 그림】전라북도 익산시 춘포면 춘포리에 있는 일본인의 옛 농장 가옥이다.
당시 이 근처에 일본인농장이 설립되면서 ‘대장촌’이라는 일본인 이민촌이 형성되었다.
‘대장’이란 지명은 일본인 농장주인 호소가와(細川)가 자신의 농장일대인 춘포를 오오바무라(大場村 ; 넓은 뜰이라는 뜻)라 명명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아래 그림】구 일본인 농장 가옥은 2005년 11월 11일 등록문화재 제211호로 지정됐다. 1940년대에 건립된 이 건물은 대농장에 소속된 건물로 일제의 농업 수탈 현장을 증언하고 있다.
【아래 그림】춘포의 근대사를 잘 보여주는 일본식 가옥
1층은 정방형에 가까운 평면이며. 2층에는 외부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발코니가 돌출되어 있어 독특한 외관을 이루고 있다.
【아래 그림】전라북도 지역의 대규모 농장 중에서도 대표적인 호소카와[細川] 농장 안에 있었다.
전 일본 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의 아버지 소유였으며 일본인 마름이 살았던 곳이다.
【아래 그림】부분적으로 수리하거나 변형되었지만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편이다. 전라북도 농업 수탈 지역이었던 춘포의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아래 그림】뒤편에서 바라본 가옥의 모습
1940년대에 농장 안에 지은 2층 건물이다. 나무판자를 잇대어 지은 일본식 가옥이다.
【아래 그림】이 동네 이름은 ‘중촌(中村)’이다. 우리말로 해석하자면 ‘가운데 마을’이다. ‘중촌(中村)’은 일본인의 성씨 “나카무라 (中村 중촌)”이기도 하다. 왠지 ‘중촌(中村)’이란 동네 이름도 일제시대의 흔적을 보는 것 같았다.
【아래 그림】당시 이 지역의 근대사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일부 수리 및 변형되었으나 전체적으로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 지역사적, 주거사적, 건축적 중요한 가치가 있는 유적이다.
【아래 그림】춘포면(대장촌)에는 일제 강점기 호소가와 농장이 있던 곳으로 그 지역에 큰 변화가 없어 유적들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
【아래 그림】나는 익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산동에 있는 단군성묘(단군사당)에 들렸다. 추석명절 연휴라 그런지 단군산당은 개방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래 그림】담장 너머로 바라본 단군사당의 모습. 단군성묘는 1951년 지역 유지들의 성금을 모아 건립되었다. 묘당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500여 평의 대지 위에 단군 영정을 모신 본당과 서재, 봉성원, 묘직사, 외삼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 그림】단군사당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핀 과꽃을 바라보니 새삼 가을이 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 누나는 과꽃을 좋아했지요. ~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 ~ ♪♬
【아래 그림】길가에 핀 가을꽃은 수수한 빛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봄꽃은 봄빛을 닮아서인지 화사하고, 여름 꽃은 정열적인데 비해 가을꽃의 수수함엔 차분한 기운이 있어 마치 한여름 들떠 밖으로 밖으로만 향하던 우리의 마음을 잡아 다소곳이 내면을 들여다보며 사색에 들라는 몸짓 같기도 하다.
♪♪ 과꽃 예쁜 꽃을 들여다보면 ~ 꽃 속에 누나 얼굴 떠오릅니다. ~ 시집간 지 온 삼년 소식이 없는 ~ 누나가 가을이면 더 생각나요. ~ ♪♬
【아래 그림】추석명절이라 익산으로 귀향한 예전에 함께 전주로 기차 통학하던 친구들과 익산에 거주하던 친구들이 몇이서 함께 모여 수주 한잔 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래 그림】사실 추석명절이나 설날이 아니고는 많은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이기가 그리 싶지는 않다.
【아래 그림】김종권 친구는 익산출신은 아니나 익산에서 20년 이상 익산시민으로 살아왔다. 현재 "SK E&S" 전북에너지서비스 집단에너지사업본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아래 그림】이방희 친구는 지난달 말 전역을 하고 현재 인생2막을 준비하고 있다. 좌로부터 이방희/소헌영/김종권/김영주
【아래 그림】최규춘 친구도 익산출신은 아니나 익산에서 30년 이상 익산시민으로 살아왔다.
최규춘 친구는 철도대학을 출신으로 현재 익산기관차사업소에서 철도기관사로 근무하고 있다.
【아래 그림】함께 했어야 할 익산출신의 친구들이 더 있는데 함께하지 못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유광년, 한경선, 오민규, 채희준, 김재현 친구들은 연락은 되는데 고만곤, 탁민, 박영일 친구들은 연락이 닿질 않는다.
【아래 그림】오른편에 있는 노란셔츠를 입은 친구는 같은 학교 출신은 아니나 당시 함께 전주로 기차 통학하던 친구로 소헌영, 김영주, 배헌귀 친구랑 중학교(원광중) 동창생이다.
【아래 그림】노란셔츠를 입은 서병찬 친구는 현대자동차 전북본부 본부장을 지낸 친구로 전주 신흥고 출신으로 우리와 함께 이리에서 전주로 함께 열차 통학하던 친구다.
【아래 그림】배헌귀 친구는 전북상대 출신으로 보험사에 근무하다 그만두고 한때는 한의대를 다시 가려고 준비하다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철도공사에서 입사하여 여객전무로 근무하다 현재는 황등역에서 지상근무를 하고 있다.
【아래 그림】소헌영 친구는 언제 봐도 부잣집 아들답게 귀공자 같은 모습니다.
【아래 그림】사실 김종권 친구는 그날 전주 아버님 댁에 있다가 내가 전화를 하니 전주에서 익산으로 금세 달려온 친구다.
【아래 그림】나도 친구들과 함께 한 컷
【아래 그림】사실 나이 들어가면서 명절 때 고향에 와서 이렇게 친구들 만나 소주라도 한잔하면서 사는 게 인생이 아닌가 싶다.
우리 나이에는 잘나고 출세한 게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렇게 만나서 소주 한잔 하면서 친구들이랑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게 인생을 더 풍요롭게 사는 것이다.
【아래 그림】1차 후 헤어지자니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 한잔 더하러 갔다. 추석명절 전날이라 음식점이 문을 여는 곳이 없는데 익산경찰서 앞에는 새로 개발된 신도시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아래 그림】1차는 익산에서 영어선생님으로 근무하는 있는 김영주 친구가 샀는데 2차까지 쏘았다. 김영주 친구는 고3때 1년간 나와 같은 방에서 둘이 함께 하숙하던 친구로 사회에 나와 내가 결혼할 땐 사회까지 봐준 친구다.
친구야! 덕분에 잘 먹고 잘 마셨다.
【아래 그림】김영주 친구와 이방희 친구의 공통점은 학창시절 키 크고 잘생겨서 여학생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다. 두 친구는 여름에 하복을 입을 때 상의교복 팔 길이가 다른 친구들보다 훨씬 길게 입었던 멋쟁이들이었다.
【아래 그림】그런데 세월이 흘러 김영주 친구는 머리칼은 다 날아가고 우리도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다.
함께 했어야 할 친구 중 지난 7월에 우리 곁을 떠난 황인철 친구를 볼 수 없어 그 친구가 그립다.
【아래 그림】나는 추석날 오전 일찍 지난 7월에 우리 곁을 떠난 황인철 친구를 만나러 익산시내에 있는 ‘관음사’라는 사찰에 들렸다. 추석날이 황인철 친구의 49재 기일이었다.
【아래 그림】나는 불교신자는 아니나 부처의 가르침이 훌륭하여 불교관련 서적을 많이 보고 공부도 많이 하였다.
관음사 법당내부의 모습이며, 맨 오른쪽에 봉안된 보살상은 ‘목조보살입상’으로 문화재적 가치를 높이 인정받아 전라북도로부터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아래 그림】법당 왼편으로는 오늘이 친구의 49재 기일이라 친구의 영정이 놓여있었다.
법당에 들어서니 오늘이 이승에 다시 오는 날이라 그런지 친구가 환한 얼굴로 나를 맞이하는 것 같았다.
금년 구정명절 때 돌아가신 황인철 친구의 아버님께서 관음사신도회회장을 맡으실 만큼 독실한 불자셨다.
우리 전라고 9회 친구 중 서훈석(시인 서정주 선생 조카) 친구를 기억하는 친구들이 많을 게다. 서훈석 친구도 관음사에서 신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들었다.
49재(四十九齋)는 6세기경 중국에서 생겨난 의식으로 유교적인 조령숭배사상과 불교의 윤회사상이 절충된 것이다.
불교의식에서는 사람이 죽은 다음 7일마다 불경을 외면서 재(齋)를 올려 죽은 이가 그 동안에 불법을 깨닫고 다음 세상에서 좋은 곳에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비는 제례의식이다.
이 49일간을 '중유(中有)' 또는 '중음(中陰)'이라고 하는데, 이 기간에 죽은 이가 생전의 업(業)에 따라 다음 세상에서의 인연, 즉 생(生)이 결정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마치면서】
추석명절을 맞이하여 모처럼 고향에 내려와 학창시절 통학하던 추억이 서려있는 곳도 찾아가보고 그리운 친구들도 만날 수 있어 보람찬 명절을 보낸 것 같다.
그리고 지난 7월 우리 곁을 떠났던 황인철 친구가 추석날 49재 기일을 맞이하여 이승에서 좋은 인연을 찾아가 10개월 뒤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기를 기원해본다.
이화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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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화구야 고향에 다녀갓구나..그리운 친구들도 만나고..나이가 들어가니 옛것이 많이 생각나지..역시 우리들은 추억을 가슴에 담고 사는것 같다,,
그대의 글에 잠시 옛생각에 잠겨 봅니다. 어릴적 코흘리개에서 사춘기 깍깍머리의 고등시절까지...
세월이 훌쩍 지나서 이제는 제법 흰머리가 어울리는 그런 나이가 되어가고 있네~~~
화구 후배님! 잘읽고 가네. 그대 멋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