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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핵폐기물은 산업의 끝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 전기를 생산한 뒤에 핵폐기물의 책임이 시작된다
대부분의 산업은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면 생산자의 역할이 상당 부분 끝난다. 발전산업도 석탄이나 가스를 태워 전기를 만들고 나면 발전소의 운영과 환경오염을 관리하는 문제가 주로 남는다. 그러나 원자력은 다르다. 원자로에서 전기를 생산하는 순간부터 방사성폐기물이 만들어지고, 그중 일부는 발전소의 수명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인간과 환경으로부터 격리해야 한다.
따라서 핵폐기물은 원자력산업의 ‘뒷처리’가 아니다. 오히려 원전을 시작하는 순간 국가가 함께 떠안는 장기적인 의무다.
문제는 시간의 비대칭성이다.
원전 한 기의 운전기간은 수십 년이다. 발전소를 건설한 기업도, 운영하는 회사도, 규제기관도 언젠가는 조직이 바뀌거나 사라질 수 있다. 원전에서 생산된 전기도 생산되는 순간 소비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발생한 사용후핵연료와 고준위방사성폐기물은 그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관리되어야 한다.
IAEA도 방사성폐기물 관리의 최종단계를 단순한 저장(storage)이 아니라 적절한 공학적·자연적 다중방벽을 이용한 처분(disposal)으로 보고 있다. 특히 사용후핵연료와 고준위폐기물의 최종처분은 세계 방사성폐기물 관리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다.
한국의 사정은 더욱 절박하다. 원전은 이미 수십 년 동안 가동해 왔고 사용후핵연료는 계속 발생하고 있지만, 최종 처분할 장소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원전 부지의 저장공간이 부족해지자 건식저장을 확대해야 한다는 압박은 커지고 있고, 한편에서는 영구처분장 부지 선정에 앞서 연구용 지하연구시설(URL·Underground Research Laboratory)을 건설하는 정책도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우리는 폐기물을 만들어내는 기술뿐 아니라 그것을 마지막까지 책임질 기술·제도·비용까지 준비하고 원전을 확대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생각해 보기 위해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우리에게는 이미 하나의 중요한 경험이 있다. 경주의 중·저준위방사성폐기물 처분장이다.
1절. 경주 방폐장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
― 처분장은 땅속에 시설을 짓는 토목공사가 아니다
1. 처분장 하나를 정하는 데만 20년이 걸렸다
한국은 1978년 고리 1호기를 상업운전하기 시작했지만 방사성폐기물을 처분할 장소는 없었다. 원전에서 발생하는 중·저준위폐기물은 각 발전소에 쌓아두었다.
정부가 본격적으로 처분시설 부지 확보에 나선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다. 이후 여러 지역에서 후보지 선정이 추진됐지만 지역사회의 반발과 정책 혼선으로 번번이 무산됐다.
결국 2005년 주민투표를 거쳐 경주시가 중·저준위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 부지로 선정됐다. 1986년 처분장 확보 사업을 시작해 약 20년 만인 2005년 경주를 선정한 것이다.
여기서부터 중요한 교훈이 시작된다.
한국이 어렵게 확보한 첫 처분장은 사용후핵연료나 고준위방사성폐기물을 묻는 시설이 아니다. 작업복, 장갑, 필터, 폐수지, 오염된 기기 등 상대적으로 방사능 준위가 낮은 중·저준위폐기물을 처분하는 시설이다.
그런 중·저준위폐기물 처분장 하나의 부지를 확보하는 데에도 약 20년이 걸렸다.
그렇다면 수십만 년 이상의 장기 안전성을 논해야 하는 고준위방사성폐기물 처분장은 어떨까.
경주 방폐장은 이 질문에 대한 일종의 예고편이었다.
2. 땅을 파보니 예상보다 문제가 복잡했다
경주 방폐장 1단계 시설은 지하에 여섯 개의 대형 사일로를 건설하여 약 10만 드럼을 처분하도록 설계됐다. 사일로는 해수면 기준 약 80~130m 아래에 위치한다. 2008년 건설이 시작됐으며 운영 승인은 2014년 말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건설과정에서 지역사회가 가장 크게 문제를 제기한 것 가운데 하나가 암반과 지하수였다.
2014년 방폐장 안전성 공개토론회에서는 차수공사를 했음에도 당시 하루 약 1,300톤의 지하수가 배수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것을 암반상태와 장기안전성의 문제로 볼 것인지, 지하시설 공사에서 나타날 수 있는 관리 가능한 지하수 유입으로 볼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따라서 ‘1,300톤’이라는 숫자만으로 방폐장이 위험하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다른 데 있다.
지하처분시설에서 지하수는 단순히 공사할 때 퍼내면 끝나는 물이 아니다.
IAEA의 지질처분 연구자료에서도 지하시설 굴착은 터널로 지하수를 유입시키고 주변의 수두와 지하수 흐름조건을 변화시킨다고 설명한다. 처분시설의 장기안전성에서 수리지질 조건을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다.
방사성폐기물을 처분하고 시설을 폐쇄한 뒤에는 상황이 더 중요해진다. 펌프도 언젠가는 멈추고 인간의 적극적인 관리 역시 종료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처분장은 사람이 계속 물을 퍼내야 안전한 시설이어서는 곤란하다. 최종적으로는 부지 자체의 지질·수리지질 특성과 공학적 방벽이 결합해 안전성을 확보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저장’과 ‘처분’의 근본적인 차이다.
3. 더 중요한 문제는 ‘무엇을 묻는지 정확히 아는 것’이다
경주 방폐장이 보여준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은 폐기물 자체의 특성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방폐장에는 아무 드럼이나 가져와 묻을 수 없다.
원자력안전위원회 기준에 따라 처분시설 운영자는 그 시설의 특성을 반영한 폐기물 인수기준을 설정해야 한다. 폐기물을 넘기는 쪽은 포장물 단위의 방사능 농도 등 정해진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이것은 서류를 위한 행정절차가 아니다.
처분장 안전성평가는 어떤 핵종이 얼마만큼 들어 있는지를 전제로 계산한다. 코발트-60, 세슘-137, 탄소-14처럼 핵종마다 반감기와 환경에서의 이동특성이 다르다. 폐기물에 무엇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잘못 알고 있다면 그 데이터를 이용해 계산한 장기 안전성 역시 신뢰하기 어렵다.
실제로 2019년 원자력안전위원회 조사에서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이 2015년 이후 경주 방폐장에 인도한 2,600드럼의 분석자료 약 6만 개를 전수검증한 결과, 2,111드럼에 기재된 일부 핵종농도 정보에서 오류가 확인됐다. 원안위는 원인으로 분석절차와 관리·감독 부족, 검증되지 않은 자체 개발 소프트웨어, 검증절차 부재 등을 지적했다. 다행히 오류를 바로잡아 다시 평가한 결과 처분농도 제한치를 초과한 폐기물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제 방사능이 제한치를 넘었느냐만이 아니다.
처분시설의 안전성을 입증하는 가장 기초적인 입력자료 자체가 제대로 관리되고 있었느냐는 문제다.
더구나 2026년 비슷한 문제가 또 반복되어 나타났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이 2025년 경주 방폐장에 보낸 694드럼에 대해 인수검사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제출서류와 실제 검사내용의 불일치가 발견됐고, 해당 물량은 처분되지 않은 상태에서 원안위 조치를 기다리게 됐다.
보도된 검사내역에 따르면 694드럼은 29개 로트로 구성되어 있고 표본검사에서 여러 부적합 사례가 발견됐다. 따라서 이를 ‘694개 드럼 하나하나가 모두 부적합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정확한 의미는 표본검사에서 부적합이 확인되어 694드럼으로 구성된 해당 반입물량을 그대로 처분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2019년 대규모 핵종분석 오류를 겪고도 불과 몇 년 뒤 다시 폐기물 정보의 신뢰성 문제가 제기됐다는 사실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4. 처분장의 안전은 세 가지가 동시에 맞아야 한다
경주 사례를 통해 처분의 원리를 오히려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처분장의 안전은 크게 세 요소가 동시에 맞아야 한다.
첫째는 폐기물이다.
어떤 핵종이 얼마만큼 들어 있고, 어떤 물리·화학적 형태로 존재하며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지 알아야 한다.
둘째는 공학적 방벽이다.
드럼, 콘크리트 구조물, 충전재와 처분고 등이 방사성물질의 이동을 억제해야 한다.
셋째는 자연방벽이다.
암반, 지하수 흐름, 지질구조와 지구화학적 환경이 방사성핵종의 인간 생활권 이동을 지연시키고 제한해야 한다.
어느 하나만 좋아서는 충분하지 않다.
좋은 용기를 만들었다고 나쁜 부지가 좋은 부지가 되는 것도 아니고, 좋은 암반을 찾았다고 폐기물의 핵종분석을 부실하게 해도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IAEA는 처분시설의 안전성을 개별 설비 하나가 아니라 부지와 시설, 폐기물 특성, 장기간의 변화와 불확실성을 종합한 Safety Case(안전성 입증체계)로 설명하도록 요구한다. 경주 처분시설에 관한 한국 측 국제보고에서도 건설·운영 단계별 정보를 지속적으로 반영하여 Safety Case를 발전시키는 것이 국제 안전기준에 부합하는 방향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원칙은 다음의 한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다.
처분은 폐기물을 땅속에 넣는 기술이 아니라, 그 폐기물이 다시 인간의 생활환경으로 돌아오지 않도록 전체 시스템의 안전성을 입증하는 기술이다.
5. 경주의 진짜 교훈은 고준위폐기물에 있다
경주 방폐장을 실패한 처분장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현재 운영되고 있으며 규제기관의 관리도 이루어지고 있다.
오히려 그렇게 접근하면 이 사례의 더 중요한 의미를 놓치게 된다.
경주가 보여준 진짜 교훈은 방사성폐기물을 실제로 처분하는 순간부터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문제의 복잡성이다.
부지를 선정하는 데 약 20년이 걸렸다. 땅속에 들어가자 암반과 지하수 문제가 논쟁거리가 됐다. 시설을 만들었다고 끝난 것도 아니었다. 폐기물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핵종과 방사능량을 정확하게 분석해야 했고, 그 기초적인 데이터 관리에서도 대규모 오류가 발생했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중·저준위방사성폐기물 이야기다.
앞으로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사용후핵연료와 고준위방사성폐기물은 차원이 다르다. 강한 방사선과 붕괴열을 발생시키며, 훨씬 긴 시간 동안 안전성을 고려해야 한다. 저장용기와 처분용기, 완충재와 암반, 지하수와 핵종의 이동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다뤄야 한다.
그래서 경주에서 던져야 할 질문은 “방폐장이 안전한가, 위험한가” 하나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중·저준위폐기물 하나를 최종 처분하는 데도 부지선정에서 지하수, 폐기물 분석, 장기 안전성까지 이렇게 많은 문제가 뒤따랐다. 그렇다면 우리는 수십만 년을 내다봐야 하는 고준위방사성폐기물을 처분할 준비가 정말 되어 있는가?
경주 방폐장은 그 답을 주지는 않는다.
대신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그리고 그 질문은 곧바로 다음 문제로 이어진다.
폐기물을 만들어낸 원전사업자와 수십 년, 수백 년 뒤까지 그것을 관리해야 할 국가 사이에서 과연 누가 마지막 책임을 지는가.
이것이 2절에서 살펴볼 문제다.
2절. 원전에서 폐기물은 나오는데 최종 목적지는 없다
― 발생자의 책임과 국가의 책임 사이
1. 전기는 팔렸지만 사용후핵연료는 발전소에 남았다
원자로 안에서 핵분열을 마친 핵연료는 더 이상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워지면 원자로 밖으로 꺼낸다. 이를 사용후핵연료라고 한다. 그러나 ‘사용후’라는 말 때문에 일반 산업폐기물처럼 처리가 끝난 물질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원자로에서 갓 꺼낸 사용후핵연료는 강한 방사선과 붕괴열을 내뿜는다. 먼저 원자로 건물 안의 수조에서 여러 해 동안 냉각해야 하고, 이후에도 장기간 안전하게 저장해야 한다. 최종적으로 폐기하기로 결정한다면 고준위방사성폐기물로 분류하여 인간의 생활권으로부터 격리해야 한다.
문제는 한국의 원전이 1978년부터 상업운전을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사용후핵연료가 도달할 최종 목적지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원전은 계속 전기를 생산했고 그 과정에서 생긴 사용후핵연료는 고리·한빛·한울·월성 등 각 원전 부지에 쌓였다. 처음에는 수조에 보관했고, 월성원전에서는 저장공간이 부족해지자 캐니스터와 맥스터라는 건식저장시설을 추가했다. 이제 다른 원전에서도 수조가 포화될 것에 대비해 부지 안 건식저장시설을 건설하려 하고 있다.
전기는 발전소 밖으로 나가 전국에서 소비됐지만, 전기를 생산하고 남은 위험은 원전 지역에 머문 셈이다.
이것은 단순한 시설 부족의 문제가 아니다. 원전에서 사용후핵연료가 계속 발생하는 동안에도 이를 언제, 어디로, 어떤 방식으로 옮겨 최종 처분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원전은 이미 운영 중인데 핵연료주기의 마지막 단계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원자력은 연료를 원자로에 넣는 순간 시작되지만, 사용후핵연료의 마지막 행선지를 마련해야 비로소 끝나는 산업이다.
2. 발생자에게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기서 한 가지는 정확히 짚어야 한다.
원전사업자인 한국수력원자력이 사용후핵연료 관리에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용후핵연료가 원전 부지에 있는 동안에는 원전사업자가 안전하게 저장하고 관리해야 한다. 저장시설을 건설·운영하고 방사선과 냉각상태를 감시하며 물리적 방호와 핵물질 통제를 유지해야 할 책임도 있다.
비용 부담도 존재한다.
「방사성폐기물 관리법」은 원자력발전사업자에게 사용후핵연료의 종류와 발생량을 기준으로 사용후핵연료관리부담금을 부과하도록 규정한다. 이 부담금은 방사성폐기물관리기금에 귀속되어 사용후핵연료의 저장·처분과 관련 사업의 재원으로 사용된다. 2008년 이 법을 제정한 이유도 발생자가 자체적으로 쌓아두던 충당금만으로는 장기간 필요한 재원을 안정적이고 투명하게 확보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방사성폐기물 관리법」 제정 이유
따라서 “원전사업자는 폐기물 관리비용을 한 푼도 부담하지 않는다”고 쓰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원전사업자는 사용후핵연료를 현장에서 관리하고 법정 부담금을 납부한다.
그러나 여기서 더 중요한 질문이 시작된다.
비용을 납부하는 책임과 폐기물의 안전을 마지막까지 책임지는 것은 같은 일인가?
그렇지 않다.
부담금은 미래에 필요할 것으로 추정되는 비용을 현재의 제도와 가정에 따라 계산하여 적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처분장은 아직 부지도, 처분방식도, 상세설계도 확정되지 않았다. 건설 시점이 늦어지거나 설계가 바뀌고, 안전기준이 강화되며, 자재·인건비가 상승하면 실제 비용은 당초 추정치를 크게 넘어설 수 있다.
원전사업자가 정해진 부담금을 납부했다고 해서 수십 년 뒤 발생할 모든 기술적·재정적 불확실성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3. 비용을 내는 사람과 최종 책임자가 다르다
한국의 방사성폐기물 관리체계는 발생과 장기관리를 분리한다.
원전사업자는 사용후핵연료를 발생시키고, 관리사업자에게 인도하기 전까지 원전 부지에서 안전하게 관리한다. 반면 사용후핵연료를 인수해 중간저장하고 최종 처분하는 사업은 별도의 공적 관리체계가 맡는다. 이러한 분리는 발생자가 폐기물의 처리와 처분까지 모두 담당할 때 생길 수 있는 이해충돌을 줄이고, 전문성과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도입됐다.
실제로 2008년 「방사성폐기물 관리법」 제정 당시 정부는 발생자와 처리·처분 담당자가 같아 안전성·전문성·투명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며 별도의 관리공단과 관리기금을 설치했다.
2025년 제정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도 발생자와 관리사업자의 책무를 함께 규정하고 있다. 양자는 안전 관련 법령을 준수하고, 주요 정보를 공개하며, 지역사회와 협력해야 한다. 특별법은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를 단순한 보관이 아니라 인수·저장·처분·운반·안전성 평가를 포함하는 전체 활동으로 정의한다.
이런 분업 자체는 필요하다. 발전회사가 영구처분장의 부지선정과 수십만 년의 안전성 입증까지 독자적으로 담당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문제는 책임이 분업되는 과정에서 최종 책임의 경계가 흐려질 수 있다는 점이다.
| 단계 | 주된 책임 주체 | 남는 질문 |
| 사용후핵연료 발생 | 원전사업자 | 발생량을 줄일 유인이 충분한가 |
| 원전 부지 내 저장 | 원전사업자 | 저장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지면 누가 추가비용을 부담하는가 |
| 부담금 부과·기금 관리 | 정부·공적 기금 | 장래의 실제 비용을 충분히 반영했는가 |
| 중간저장·운반·처분 | 관리사업자 | 지연·사고·설계변경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
| 폐쇄 후 장기 안전 | 국가적 관리체계 | 사업자와 기관이 바뀐 뒤에도 책임이 유지되는가 |
원전사업자는 “법에 따라 부담금을 냈다”고 말할 수 있고, 관리사업자는 “아직 인수할 시설과 부지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정부는 “장기계획에 따라 추진 중”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각각의 설명은 제도적으로 틀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폐기물은 그 사이에도 계속 발생한다.
4. 지연과 비용 증가의 위험은 결국 국가로 돌아온다
사용후핵연료 관리에서는 시간이 곧 비용이다.
중간저장시설과 영구처분장이 예정대로 건설되지 않으면 원전 부지의 저장기간이 늘어난다. 건식저장용기는 한 번 제작해 영원히 사용하는 시설이 아니다. 장기저장 중에는 용기와 구조물의 열화, 밀봉 건전성, 부식, 방사선 차폐, 지진과 침수, 감시와 검사 가능성을 계속 확인해야 한다. 저장기간이 길어지면 용기의 교체나 재포장, 시설 보강이 필요할 수도 있다.
더구나 부지 내 건식저장용기가 미래의 운반과 처분 조건에 그대로 맞는다는 보장도 없다. 최종 처분장의 지질조건과 처분개념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저장용기를 먼저 대량 제작하면, 나중에 별도의 운반용기나 처분용기로 다시 옮겨 담아야 할 가능성이 있다.
이 과정에서 비용이 증가하면 누가 부담할까.
원전사업자에게 부담금을 추가로 부과할 수는 있다. 그러나 원전이 이미 폐쇄됐거나 발전사업자의 재무상태가 악화됐을 수도 있다. 전기요금에 비용을 반영하면 현재의 전력소비자가 부담하고, 정부 재정이 투입되면 전체 국민이 부담한다. 부족한 비용을 미래로 넘기면 원전에서 생산된 전기를 사용하지 않은 세대가 부담하게 된다.
결국 고준위폐기물 관리가 실패하거나 장기간 지연됐을 때 국가는 손을 놓을 수 없다. 폐기물을 방치할 수 없고, 관리사업자가 사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철수하게 할 수도 없다.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감시와 저장, 운반과 처분을 계속해야 한다.
이것이 일반 산업폐기물과 다른 핵심적인 차이다.
일반 기업의 제품은 회사가 사라진 뒤에도 반드시 국가가 수십만 년 관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용후핵연료는 발생시킨 기업이나 원전이 사라진 뒤에도 남는다. 결국 최종적인 안전책임과 부족한 비용의 위험은 국가와 미래세대로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
발생자는 비용을 낼 수 있지만, 최종 실패의 위험까지 완전히 이전할 수는 없다.
5. 발생자는 사라질 수 있지만 폐기물은 사라지지 않는다
원전은 언젠가 폐쇄된다. 발전사업자의 조직과 명칭도 바뀔 수 있다. 관리기관이 통폐합되고 법률과 정책이 달라질 수도 있다. 지금 기금을 관리하는 사람도, 처분장 건설계획을 세운 사람도 수십 년 뒤에는 그 자리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용후핵연료는 그대로 남는다.
이 때문에 고준위폐기물 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히 “누가 현재 비용을 내는가”가 아니다. 폐기물의 전 수명에 걸쳐 책임이 끊기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발생자는 저장과 비용 부담의 책임을 져야 하고, 관리사업자는 안전한 인수·운반·저장·처분을 책임져야 한다. 규제기관은 사업 추진과 독립하여 안전성을 심사해야 하며, 국가는 세대가 바뀌어도 제도와 재원을 유지해야 한다. 또한 비용이 늘어날 때 그 부담을 원전 지역이나 미래세대에 일방적으로 넘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원자력의 경제성을 평가할 때에는 발전소 건설비와 연료비, 운전비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부지 내 저장부터 중간저장, 운반, 처분장 건설과 폐쇄 후 안전관리까지 포함한 전체 비용을 물어야 한다. 그 비용이 불확실하다면 불확실성 자체도 원전의 비용이자 위험으로 다뤄야 한다.
발생자는 사라질 수 있지만 폐기물은 사라지지 않는다. 원전의 책임은 전기를 판매한 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사용후핵연료가 안전하게 처분되고 그 안전성이 장기간 유지될 때까지 계속된다.
그런데 최종 처분시설이 없는 현실에서 당장 저장수조의 포화가 다가오고 있다. 정부와 원전사업자는 우선 원전 부지 안에 건식저장시설을 확대하려 한다. 그러나 ‘임시’ 또는 ‘한시적’이라고 부르는 부지 내 저장이 실제로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아무도 확정할 수 없다.
3절. 처분장은 없고 건식저장시설부터 늘어난다
― 임시저장이 사실상의 장기저장이 되지 않을 것인가
1. 저장수조가 차면 원전을 멈춰야 한다
원자로에서 꺼낸 사용후핵연료는 곧바로 건식저장용기에 넣을 수 없다. 처음에는 물이 담긴 저장수조에서 강한 방사선을 차폐하고 붕괴열을 식혀야 한다. 일정 기간 냉각해 열이 충분히 낮아진 뒤에야 금속용기와 콘크리트 구조물 등을 이용한 건식저장으로 옮길 수 있다.
문제는 원전 부지의 저장수조 용량이 무한하지 않다는 데 있다.
저장수조가 가득 차면 새로 발생하는 사용후핵연료를 넣을 공간이 없어진다. 원자로에서 핵연료를 꺼낼 수 없으므로 결국 원전 가동도 계속하기 어렵다. 사용후핵연료 저장공간은 원전의 부속시설이 아니라 원전의 계속운전을 결정하는 핵심 설비인 셈이다.
정부가 2023년 제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반영해 다시 계산한 결과에 따르면, 별도의 저장시설을 확충하지 않을 경우 한빛원전은 2030년, 한울원전은 2031년, 고리원전은 2032년부터 저장시설 포화가 예상됐다. 발전량과 저장수조 운영방식 등에 따라 포화시점은 달라질 수 있지만, 한빛·한울·고리의 경우 2030년대 초반부터 대응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월성원전은 이미 오래전부터 저장수조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중수로인 월성원전에서는 경수로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용후핵연료 다발이 발생한다. 이에 따라 금속용기인 캐니스터와 콘크리트 모듈형 시설인 맥스터를 설치해 건식저장을 확대해 왔다.
이제 경수로인 고리·한빛·한울에서도 부지 내 건식저장시설을 건설하는 문제가 현실로 다가왔다.
건식저장은 충분히 냉각된 사용후핵연료를 물속에서 꺼내 밀봉된 용기에 넣고, 자연대류 등을 통해 열을 제거하는 방식이다. 냉각수를 계속 순환시키는 습식저장에 비해 능동설비 의존도가 낮고 장기간 저장에 유리하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저장수조 포화에 대응해 건식저장으로 전환하는 것 자체는 국제적으로도 일반적인 관리방법이다.
그러나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과 정책의 순서가 타당하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한국에서는 최종 처분장의 부지도, 지질환경도, 처분개념도 정해지지 않았다. 중간저장시설 역시 아직 부지가 없다. 그런데 원전 운영을 계속하기 위해 가장 앞단에 있는 부지 내 건식저장시설부터 확대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핵연료주기의 마지막 단계는 결정하지 못했는데, 저장수조 포화라는 시계는 이미 돌아가고 있다.
2. 법에는 ‘부지 내 저장’, 현실에서는 얼마 동안인가
2025년 제정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은 부지 내 저장시설의 용량을 해당 원전 부지에서 건설 또는 운영 중인 원자로의 설계수명 동안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양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했다. 또한 시설계획 수립 과정에서 지역주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고준위방사성폐기물관리위원회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무제한으로 폐기물을 반입해 원전 지역을 사실상의 전국 단위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저장소로 만드는 것을 방지하려는 장치다. 그러나 저장할 수 있는 ‘양’을 제한한 것과 실제 ‘저장기간’을 보장한 것은 다르다.
특별법은 중간저장시설은 2050년 이전, 처분시설은 2060년 이전에 운영을 시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운영을 개시해야 한다’는 확정적 의무가 아니라 ‘운영을 개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부지선정이 지연되거나 주민투표에서 무산되고, 심층조사에서 부적합한 지질조건이 발견되거나, 인허가와 건설이 늦어진다면 그 시점은 뒤로 밀릴 수 있다.
한빛원전의 건식저장시설이 2030년대 초에 필요해지고 중간저장시설이 2050년에야 운영된다고 가정해도 부지 내 저장기간은 이미 약 20년에 이른다. 중간저장시설 운영이 2060년이나 2070년으로 늦어지면 저장기간은 30∼40년으로 늘어난다.
더 큰 문제는 중간저장시설이 생겼다고 사용후핵연료가 곧바로 처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간저장시설에서도 처분장이 운영될 때까지 다시 수십 년간 보관해야 한다. 처분시설의 건설과 처분작업에도 오랜 기간이 필요하므로, 먼저 발생한 사용후핵연료는 부지 내 저장과 중간저장을 합쳐 100년 이상 관리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IAEA는 현재의 연구와 운영경험에 비추어 사용후핵연료를 50∼100년 저장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동시에 저장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최종 관리방안의 결정을 무기한 미뤄도 된다는 뜻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건식저장은 처분을 대신하지 않는다.
저장시설은 감시하고 점검하며 필요하면 폐기물을 꺼낼 수 있도록 관리하는 시설이다. 반면 처분시설은 폐쇄 후에는 지속적인 인간의 관리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방벽과 공학적 방벽으로 장기 안전성을 확보해야 한다.
따라서 ‘임시’라는 명칭만으로 임시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임시저장이 언제 끝나는지는 저장시설을 건설할 때가 아니라, 폐기물을 옮겨갈 다음 시설이 실제로 운영될 때 결정된다.
3. 저장용기·운반용기·처분용기는 같은 물건이 아니다
사용후핵연료를 담는 용기는 겉보기에는 모두 두껍고 견고한 원통형 구조물처럼 보이지만, 수행해야 할 기능은 서로 다르다.
| 구분 | 주된 기능 | 반드시 고려해야 할 조건 |
| 저장용기· 저장시스템 | 일정 장소에서 열 제거·차폐·밀봉 유지 | 장기 열화, 부식, 지진, 침수, 감시와 검사 |
| 운반용기 | 도로·철도·해상으로 안전하게 운반 | 충돌, 낙하, 관통, 화재, 침수와 운반 중 임계안전 |
| 처분용기· 처분시스템 | 지하처분장 폐쇄 후 장기간 격리 | 지하수, 암반응력, 부식환경, 완충재, 장기 핵종이동 |
하나의 캐니스터를 저장과 운반에 함께 사용하는 이중목적용기 시스템도 있다. 이 경우 사용후핵연료를 담은 밀봉 캐니스터를 저장시설에서 꺼내 별도의 운반용 덧용기 안에 넣어 이동시킬 수 있다.
그러나 저장 승인을 받았다고 자동으로 운반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미국 NRC도 실제 운반 전에 캐니스터와 내용물이 운반용기의 승인조건과 운반규정을 충족하는지 별도로 확인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결함이 격납경계를 관통했거나 구조·밀봉성능을 저해하면 그대로 운반할 수 없다.
처분은 한 단계 더 복잡하다.
처분용기의 재질과 두께, 크기와 형상은 사용후핵연료의 특성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처분장 암반의 종류, 지하수의 화학성분과 흐름, 온도, 처분공 간격, 완충재의 종류, 용기 회수방식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구리 처분용기를 사용하는 개념과 탄소강 또는 주철 기반 용기를 사용하는 개념은 전제가 다르다. 결정질암, 점토암, 암염층에서도 요구되는 방벽체계가 달라질 수 있다. 처분장이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단지 묻을 장소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에 담아 어떤 조건으로 처분할지도 아직 확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다음 질문은 충분히 타당하다.
처분용기와 처분환경이 결정되지 않았는데 저장용기를 먼저 대량 제작하면, 결국 저장용기·운반용기·처분용기를 각각 따로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다만 이 질문을 “반드시 사용후핵연료를 세 번 옮겨 담아야 한다”는 뜻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저장 캐니스터를 그대로 운반하고, 처분장에서 별도의 처분용 덧용기 안에 넣는 개념도 가능하다. 반대로 저장 캐니스터의 크기·재질·건전성이 미래 처분개념과 맞지 않으면 사용후핵연료 집합체를 꺼내 다시 포장해야 할 수도 있다.
핵심은 저장용기와 처분용기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처분개념과 운반체계를 확정하지 않은 채 저장시스템을 먼저 대량 도입하면, 미래의 선택 폭이 좁아지고 추가 이송·재포장·시설 건설 비용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4. 100년 저장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나중에 꺼낼 수 있는가’이다
건식저장용기는 설치하는 날의 성능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수십 년 동안 온도와 방사선, 염분과 습기, 외부환경에 노출되면 재료는 변한다. 금속 캐니스터의 용접부에서는 잔류응력과 염화물이 결합해 응력부식균열이 발생할 수 있다. 콘크리트 구조물은 염분 침투, 탄산화, 철근 부식, 동결·융해와 고온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밀봉재와 중성자 차폐재도 장기간 열과 방사선에 노출되면 성능이 변할 수 있다.
사용후핵연료 자체도 그대로인 것은 아니다. 핵연료 피복관은 원자로 운전 중 이미 고온·고압·방사선에 노출됐으며, 저장 중에는 크리프, 수소화물 재배열, 산화와 취성화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 특히 고연소도 핵연료는 장기간 저장 후 운반과 취급과정에서 피복관 건전성이 유지되는지를 별도로 확인해야 한다.
미국 NRC의 NUREG-2215는 건식저장시스템의 심사를 다음과 같이 폭넓게 나누어 다룬다.
부지특성과 설계기준
구조·열·차폐·임계 안전성
재료와 핵연료 피복관
밀봉과 방사선방호
운전절차와 품질보증
폐기물 관리와 해체
사고분석과 기술사양
즉, 건식저장의 안전성은 ‘두꺼운 용기에 넣었으니 안전하다’는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다. 저장기간 전체에 걸쳐 열 제거, 차폐, 미임계, 밀봉과 구조 건전성이 유지되는지를 각각 입증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해안에 원전이 집중돼 있다는 특성도 중요하다. 해염입자가 유입되는 환경에서 용기 표면의 염화물 축적과 습윤조건을 어떻게 감시할 것인지, 캐니스터 용접부를 실제로 얼마나 가까이에서 검사할 수 있는지, 콘크리트 덧용기 내부처럼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을 어떤 방법으로 검사할 것인지 구체적인 기준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직 한국에는 구체적인 건식저장 안전기준이 존재하지 않고 있어 준비를 서두를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시공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더 어려운 문제는 이상을 발견한 뒤다.
밀봉 캐니스터에 균열 의심부가 발견되면 현장에서 검사와 보수가 가능한가. 용기를 들어 올려 옮길 수 있는가. 사용후핵연료를 다시 꺼내야 한다면 방사선을 차폐하면서 정비가 가능한 습식시설이나 핫셀, 재포장시설이 준비되어 있는가.
원전이 해체된 뒤에도 이러한 설비를 사용할 수 있는지도 따져야 한다. 원전의 저장수조와 취급설비를 먼저 철거하고 건식저장용기만 부지에 남겨놓았다가 문제가 발생한다면, 사용후핵연료를 다시 포장할 시설을 새로 건설해야 할 수 있다.
그래서 장기저장의 핵심은 단지 용기가 견디는가가 아니다.
필요할 때 검사하고, 보수하고, 회수하고, 다시 포장하여 운반할 수 있는가가 장기저장의 진짜 안전성이다.
5. 급하니까 저장부터 하자는 정책이 남길 비용
저장수조 포화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건식저장시설을 건설하지 않으면 원전 가동이 어려워질 수 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부지 내 건식저장시설은 필요하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엄격한 원칙이 필요하다.
첫째, 부지 내 저장기간을 40∼60년으로만 가정해서는 안 된다. 중간저장시설과 처분시설의 지연 가능성을 고려해 100년 이상으로 연장될 경우를 가정하여 필요한 감시·검사·보수·교체·재포장 전략까지 미리 마련해야 한다.
둘째, 용기 선정 단계부터 미래의 운반 가능성을 입증해야 한다. 장기간 저장 후에도 운반규정을 충족할 수 있는지, 충족하지 못할 때 어떤 시설에서 어떻게 보수하거나 재포장할 것인지 정해야 한다.
셋째, 처분개념과의 연계성을 검토해야 한다. 처분장 부지가 정해지지 않았더라도 예상 가능한 복수의 지질환경과 처분개념을 놓고 저장 캐니스터의 크기·재질·용량이 미래 선택을 지나치게 제한하지 않는지 평가할 수 있다.
넷째, 원전 해체계획과 건식저장계획을 함께 세워야 한다. 회수와 재포장에 필요한 수조, 크레인, 이송설비와 핫셀 가운데 무엇을 언제까지 유지할 것인지 결정하지 않은 채 원전부터 해체하면 안 된다.
다섯째, 비용도 전 수명주기로 계산해야 한다. 최초 저장시설 건설비만이 아니라 장기 감시와 검사, 용기 교체, 운반용 덧용기, 재포장시설, 중간저장시설로의 이송, 처분용기 제작까지 포함해야 한다.
이런 준비 없이 “원전 부지 안에 건식저장시설을 지으면 당장의 포화 문제는 해결된다”고 설명하는 것은 절반의 해답에 불과하다.
부지 내 건식저장은 폐기물 관리의 종착지가 아니라 다음 단계로 넘기기 위한 교량이어야 한다. 그런데 강 건너편의 중간저장시설과 처분장이 언제 만들어질지 알 수 없다면, 그 교량은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이 거주해야 하는 인공섬으로 변할 수 있다.
그 부담은 원전 지역에 집중된다. 전기는 전국이 사용했지만 고준위폐기물은 원전이 폐쇄된 뒤에도 해당 지역에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설의 이름을 ‘임시저장’ 또는 ‘부지 내 저장’이라고 정하는 것만으로 이러한 지역의 우려를 해소할 수는 없다.
건식저장은 필요하다. 그러나 처분정책 없이 저장시설부터 늘리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의 시간을 뒤로 미루는 일일 수 있다.
한국이 지금 결정해야 할 것은 용기 제품 하나가 아니다. 저장에서 운반, 중간저장과 처분까지 이어지는 전체 시스템이다. 이 연결고리가 없다면 당장의 포화를 피하기 위해 선택한 건식저장이 미래에는 이중·삼중의 용기 제작과 재포장, 장기 감시비용을 남길 수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아직 처분장 부지도 정하지 못했는데, 처분기술을 연구한다는 지하연구시설부터 먼저 건설하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하연구시설은 무엇을 검증해야 하며, 실제 처분부지와 분리된 연구시설이 처분장의 안전성을 어디까지 입증할 수 있는가.
4절. 세계는 왜 60년 동안 핵폐기물의 마지막 문을 열지 못했는가
― 유카마운틴이 보여준 영구처분의 기술적 난제
1. 땅속 깊이 묻는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원자력발전은 1950년대부터 상업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자로에서 꺼낸 사용후핵연료를 최종적으로 어디에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는 해결되지 않은 채 발전소부터 건설됐다.
1957년 미국 과학아카데미는 고준위방사성폐기물을 깊은 지질층에 격리하는 방식이 가장 유력하다고 제안했다. 지하 수백 미터의 안정된 암반에 처분시설을 만들고, 사용후핵연료를 금속용기와 완충재로 둘러싼 뒤 터널을 폐쇄하면 방사성물질이 인간의 생활환경으로 돌아오는 것을 오랫동안 막을 수 있다는 구상이었다.
원리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방사성폐기물을 지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넣고, 폐기물용기와 완충재 같은 공학적 방벽, 암반과 지질환경이라는 자연방벽을 여러 겹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한 방벽이 열화되더라도 나머지 방벽이 방사성물질의 이동을 늦추는 ‘다중방벽’ 개념이다.
그러나 원리를 설명하는 것과 실제 부지에서 장기 안전성을 입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과 막대한 자본을 가진 미국도 60년이 넘도록 상업용 사용후핵연료 처분장을 운영하지 못했다. 네바다주의 유카마운틴에는 수십 년간 지질·지하수·화산·지진·부식·핵종이동을 연구하기 위한 막대한 비용과 인력이 투입됐다. 미국 회계감사원은 유카마운틴이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연구된 처분 후보지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했다. 미국 에너지부는 2008년 마침내 원자력규제위원회에 건설허가를 신청했지만 처분장은 건설되지 않았다.
핀란드의 온칼로가 세계 최초의 상업용 사용후핵연료 처분장 운영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점은 함께 설명할 필요가 있다. 핀란드는 2024년부터 실제 사용후핵연료를 넣지 않은 종합 시운전을 진행했고, 2026년 현재 운영허가 절차가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는 “처분 문제가 쉽게 해결됐다”는 사례가 아니다. 부지조사와 사회적 합의, 지하연구시설 건설, 설계와 안전성 평가에 수십 년이 걸린 결과다. 온칼로는 오히려 처분장을 하나 열기 위해 얼마나 긴 시간과 일관된 정책, 지역사회의 신뢰가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유카마운틴을 보며 던져야 할 질문은 “미국에 터널을 뚫을 기술이 없었는가”가 아니다.
처분기술이 없어서 못 지은 것인가, 아니면 수십만 년 뒤의 안전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사회적으로 승인받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던 것인가?
유카마운틴이 멈춘 이유를 살펴보면 후자에 더 가깝다.
2. 유카마운틴에서 드러난 것은 ‘암반 하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유카마운틴은 네바다 사막의 화산암 지대에 있다. 연간 강수량이 적고 처분터널이 지하수면보다 높은 불포화대에 위치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고준위폐기물 처분에 유리한 곳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건조한 지역이라고 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비와 눈이 지표 아래로 스며들면 암반의 균열을 따라 이동할 수 있다. 물이 처분터널에 도달해 폐기물용기와 접촉하면 부식을 일으키고, 용기가 손상된 뒤에는 방사성물질을 녹여 지하수계로 운반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현재 물이 얼마나 적은가만이 아니다. 수만 년 뒤 기후가 변하고 강수량이 증가할 가능성, 암반의 균열구조와 침투경로가 변할 가능성까지 다뤄야 한다.
사용후핵연료의 붕괴열도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높은 온도는 터널 주변의 물을 증발시키지만, 시간이 지나 폐기물이 식으면 수증기가 다시 응축될 수 있다. 온도 변화는 암반의 응력과 균열, 지하수 화학, 염류의 농축과 금속 부식에도 영향을 준다. 열·물·응력·화학반응을 각각 떼어 분석해서는 실제 처분환경을 설명하기 어렵다.
NRC 인허가 중 유카마운틴에서 검토된 핵심 쟁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기술적 쟁점 | 장기 안전성에서 제기되는 질문 |
| 물의 침투 | 강수와 지표수가 암반 균열을 따라 처분터널까지 얼마나 도달하는가 |
| 폐기물용기 부식 | 고온·수분·염류 환경에서 금속용기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손상되는가 |
| 핵종의 용출과 이동 | 용기 손상 후 요오드-129, 테크네튬-99, 넵투늄-237 등이 얼마나 빠르게 이동하는가 |
| 열-수리-역학-화학 결합 | 붕괴열이 물의 이동, 암반균열, 부식과 핵종용해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
| 터널의 장기 건전성 | 터널 붕괴와 낙반이 폐기물용기와 물받이 구조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
| 지진과 단층 | 장기간의 지진동과 단층변위가 터널·용기·지하수 흐름을 어떻게 바꾸는가 |
| 화산활동 | 마그마가 처분장을 관통하거나 폐기물을 지표로 운반할 가능성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
| 기후와 생태계 변화 | 빙하기·강수량·지하수위·인간 생활양식의 변화를 어떻게 가정할 것인가 |
| 인간침입 | 미래 인간이 처분장의 존재를 모르고 시추하거나 개발할 가능성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
| 모델의 불확실성 | 관측할 수 없는 수십만 년을 수학적 모델로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는가 |
OECD 원자력기구와 IAEA가 공동 수행한 유카마운틴 성능평가 국제 동료검토에서도 처분터널의 붕괴 정도와 그것이 공학적 방벽에 미칠 영향, 폐기물용기 주변에 액체 상태의 물이 실제로 존재할 가능성 등이 중요한 불확실성으로 지적됐다.
그렇다고 이것을 “유카마운틴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 심사팀은 중단된 인허가 절차 속에서도 안전성평가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는 일정한 조건과 모델을 전제로 폐쇄 전 안전성과 폐쇄 후 성능이 대체로 규제요건을 충족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반면 토지소유권과 수리권 등 일부 법적·행정적 요건은 충족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즉, 유카마운틴은 기술적 부적합 판정을 받아 폐기된 부지가 아니지만, 최종 허가를 받아 건설·운영된 처분장도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술적으로 가능하다”와 “실제 부지에서 장기 안전성이 최종 입증됐다”를 구별하는 것이다.
심층처분은 공학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이다. 그러나 처분장의 안전성은 터널의 깊이나 암반의 강도 하나로 입증되지 않는다. 지질·지하수·폐기물용기·완충재·열·부식·핵종이동·지진과 인간침입이 오랜 기간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하나의 논리체계로 설명해야 한다.
이것이 처분장의 안전성 입증체계, 즉 Safety Case다.
좋은 암반을 찾았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암반과 공학적 방벽이 불확실성 속에서도 폐기물을 장기간 격리한다는 것을 증거·실험·해석·모델로 일관되게 설명해야 한다.
3. 1만 년이면 충분했던 기준이 왜 100만 년이 되었는가
유카마운틴의 난점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은 안전성 평가기간을 둘러싼 논쟁이다.
미국 환경보호청은 2001년 유카마운틴 방사선방호기준을 제정하면서 처분 후 1만 년까지의 개인 피폭선량을 규제기준으로 설정했다. 인간이 경험하거나 기록한 역사와 비교해도 1만 년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긴 시간이다. 행정기관의 입장에서는 그보다 더 먼 미래를 정량적으로 계산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고준위폐기물의 시간은 인간의 역사와 다르게 흐른다.
요오드-129의 반감기는 약 1,570만 년이고, 넵투늄-237은 약 214만 년이다. 플루토늄-239도 약 2만4천 년의 반감기를 갖는다. 처분 초기에는 폐기물용기가 방사성물질을 가두고 있어 외부 피폭위험이 낮게 계산될 수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용기가 부식되고 핵종이 지하수로 이동하면 오히려 위험의 정점이 1만 년 이후에 나타날 수 있다.
미국 과학아카데미는 유카마운틴에 적용할 방사선방호기준이 위험이 최대가 되는 시기까지를 고려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위험의 정점이 1만 년 뒤에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데도 1만 년에서 계산을 끝내는 것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취지였다. 또한 유카마운틴의 지질환경이 장기적으로 비교적 안정적이라는 전제 아래, 주요 지질학적 과정은 대략 100만 년 범위까지 평가할 수 있다고 보았다.
2004년 워싱턴 D.C. 연방항소법원은 이 문제에 결정적인 판단을 내렸다.
Nuclear Energy Institute v. EPA, 373 F.3d 1251 (D.C. Cir. 2004) 사건에서 법원은 환경보호청의 1만 년 규제기간이 「에너지정책법」이 요구한 과학아카데미의 연구결과 및 권고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1만 년의 규제기간을 포함한 환경보호청과 원자력규제위원회 규정의 해당 부분을 무효화했다.
이 판결은 법원이 직접 “유카마운틴은 100만 년 동안 안전해야 한다”고 공학적 결론을 내린 사건은 아니다. 법원은 의회가 환경보호청 기준을 과학아카데미의 권고에 근거하도록 했는데도, 환경보호청이 1만 년이라는 기간을 충분한 근거 없이 선택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결과 환경보호청은 2008년 기준을 개정했다. 처분 후 최초 1만 년에는 연간 15밀리렘, 즉 0.15밀리시버트의 개인선량한도를 적용하고, 1만 년 이후 100만 년까지는 연간 100밀리렘, 즉 1밀리시버트의 한도를 적용하도록 했다.
이 과정이 보여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인간이 규제기간을 짧게 정한다고 방사성핵종의 수명이 짧아지는 것은 아니다. 안전평가의 시간은 행정기관이 다루기 편한 기간이 아니라, 위험이 나타나는 시간에 맞춰야 한다.
그러나 100만 년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니다.
그 기간의 강수량과 지하수 흐름, 지진과 화산활동, 용기 부식속도, 인간의 거주형태를 단일한 값으로 맞힐 수는 없다. 장기 성능평가는 미래를 예언하는 작업이 아니라, 가능한 현상과 불확실성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여러 시나리오와 확률분포를 통해 규제기준을 넘지 않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평가기간이 길어질수록 모델의 불확실성도 커진다. 결국 처분장의 안전성은 “100만 년 뒤의 상태를 알고 있다”는 주장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범위까지 포함해도 방사선 위험이 허용한도를 넘지 않는다는 합리적 확신을 제시하는 데 달려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과학은 기술자의 계산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떤 현상을 포함하고 제외할 것인지, 어떤 확률을 받아들일 것인지, 미래세대에게 어느 정도의 위험을 허용할 것인지라는 규제적·윤리적 판단이 개입한다.
4. 기술문제는 정치·사회문제와 분리될 수 없었다
유카마운틴이 중단된 이유를 “네바다 주민들이 과학을 믿지 않고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1982년 미국 「핵폐기물정책법」은 여러 후보지를 조사하고 비교해 처분부지를 선정하는 절차를 마련했다. 그러나 1987년 법 개정으로 다른 후보지 조사가 중단되고 유카마운틴 한 곳에만 부지특성조사가 집중됐다. 네바다주에서는 이를 공정한 과학적 비교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힘이 약한 지역에 부담을 떠넘긴 결정으로 받아들였다. 이 개정은 비판적으로 ‘네바다 때리기 법안’이라는 뜻의 ‘Screw Nevada Bill’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절차는 상당히 멀리 진행됐다. 2002년 대통령이 유카마운틴을 처분장 부지로 추천했고 의회가 이를 승인했다. 미국 에너지부는 2008년 원자력규제위원회에 건설허가를 신청했다. 그러나 2009년 오바마 행정부가 사업 종료 방향을 밝힌 뒤, 2010년 에너지부는 허가신청 철회를 요청했다. 철회 권한을 둘러싼 법적 다툼과 의회의 예산 중단이 이어지면서 인허가 절차는 사실상 멈췄다.
따라서 유카마운틴을 기술적으로 실패한 처분장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주민 반대 때문에 무산된 사업이라고만 말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유카마운틴은 다음의 문제가 중첩되면서 멈춘 사업이다.
수십만 년 장기 안전성을 둘러싼 과학적 불확실성
1만 년과 100만 년 사이의 규제기준 논쟁
단일부지로 압축된 선정절차의 정치적 정당성
네바다주와 지역사회의 불신과 반대
연방정부·의회·규제기관 사이의 권한과 예산 갈등
정권교체에 따라 달라진 국가정책
심층처분이 공학적으로 가능하다는 과학계의 판단과, 특정한 부지에 실제 처분장을 건설할 수 있다는 사회적 결정은 같은 말이 아니다.
처분시설은 지질조건만으로 선정되지 않는다. 사용후핵연료를 수십 년간 전국에서 운반해야 하고, 운영 중 사고에 대비해야 하며, 폐쇄 후에도 규제기관과 사회가 안전성 입증을 신뢰해야 한다. 부지선정 과정이 불공정했다고 인식되면 아무리 많은 기술자료를 제시해도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다.
핀란드 온칼로가 유카마운틴과 다른 길을 걸은 데에도 이러한 차이가 있다. 핀란드는 원전 지역과 지방자치단체가 초기 단계부터 의사결정에 참여했고, 지방정부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에서 수십 년에 걸쳐 합의를 축적했다. 이는 핀란드의 암반이 특별히 완벽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기술개발과 사회적 동의가 함께 진행됐기 때문이다.
처분장의 안전성은 지질학자가 발견하고 기술자가 계산한 뒤 정부가 발표하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 계산을 규제기관이 검증하고, 지역사회가 선정절차를 신뢰하며, 국가가 세대를 넘어 책임지겠다고 약속할 때 비로소 성립한다.
5. 그런데 한국은 처분부지를 정하기 전에 URL부터 짓는다
한국의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은 두 종류의 지하연구시설을 구분한다.
첫째는 처분부지 선정 전에 유사한 지질환경에서 처분시스템의 성능과 안전성을 연구하고 기술개발을 수행하는 연구용 지하연구시설이다.
둘째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 제2조에 따르면 실제 처분부지가 결정된 뒤 해당 부지의 지질특성과 처분시스템 성능을 연구·실증하는 처분시설 부지 내 지하연구시설이다.
연구용 지하연구시설을 건설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지하 수백 미터에서 암반의 굴착손상, 균열을 통한 물의 이동, 지하수 화학, 완충재의 팽윤과 침식, 폐기물용기의 부식, 터널 밀봉과 장기 모니터링 등을 연구하려면 실제 지하공간이 필요하다. 지상 실험실과 컴퓨터 모델만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현상을 실규모로 시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URL은 중요한 기술개발시설이다.
문제는 연구용 URL에서 얻은 결과가 미래의 처분부지에 어느 범위까지 적용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화강암이라고 모두 같은 화강암은 아니다. 암반의 생성과 변형 이력, 단층과 절리의 방향·간격·연결성, 수리전도도, 지하수의 염도와 산화환원조건, 지중응력과 깊이별 온도가 부지마다 다르다. 한 지역에서 물이 거의 흐르지 않았다고 해서 미래의 처분부지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핵종이동은 암반의 평균적인 성질보다 일부 연결된 균열과 우선 흐름경로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 연구용 URL에서 개발한 계측기술과 해석모델은 다른 부지에도 활용할 수 있지만, 거기에서 얻은 수리전도도나 지하수 이동속도, 부식자료를 미래 처분부지의 값으로 그대로 대체할 수는 없다.
따라서 연구용 URL과 처분부지 내 URL의 역할은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 시설 | 주된 역할 | 대신할 수 없는 것 |
| 연구용 URL | 시험기술·조사방법·처분시스템·해석모델 개발 | 실제 처분부지의 고유한 지질·수리지질 자료 |
| 처분부지 내 URL | 실제 암반과 지하수 조건 조사, 현장 실증, Safety Case 자료 확보 | 장기간의 규제심사와 독립적 검증 |
| 실제 처분시설 | 허가된 설계에 따른 폐기물 처분과 폐쇄 | 불확실성을 무시한 채 연구시설 결과를 단순 전용하는 것 |
연구용 URL에서 ‘한국형 처분시스템’을 완성했다고 선언하더라도, 그것이 곧 처분장 안전성의 완성을 뜻하지 않는다. 실제 부지가 결정되면 그곳의 지질·수리지질 조건에 따라 처분용기, 완충재, 처분공 간격과 깊이, 열적 한계, 배수와 밀봉개념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은 URL 건설 자체가 사업의 성과로 바뀌는 것이다.
처분정책의 목적은 지하연구시설을 건설하는 데 있지 않다. 부지배제기준과 적합성 기준을 세우고, 복수 후보지를 과학적으로 비교하고, 지역사회가 참여하는 절차를 거쳐 실제 처분부지를 선정한 뒤, 그 부지의 Safety Case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처분부지의 수리전도도 기준조차 명확하지 않고, 단층과 지진, 지하수 연령과 이동경로, 해수 또는 심부 염수의 영향, 장기 기후변화에 대한 규제요건도 충분히 구체화되지 않은 상태라면 연구용 URL부터 짓는 것만으로 처분정책이 진전됐다고 말하기 어렵다.
공간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질문이다.
어떤 지질조건이면 처음부터 처분 후보지에서 제외할 것인가.
수리전도도와 균열 연결성을 어떤 방법과 규모로 평가할 것인가.
지진·단층·융기·침식과 장기 기후변화를 어느 기간까지 고려할 것인가.
어떤 핵종과 피폭경로가 장기 위험을 지배하는가.
자연방벽과 공학적 방벽의 성능을 각각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모델의 불확실성과 지식의 한계를 규제판단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지역주민에게 무엇을 공개하고 누가 독립적으로 검증할 것인가.
이 질문이 정립되지 않으면 URL은 거대한 연구시설이 될 수는 있어도 처분장을 향한 올바른 출발점이 되기는 어렵다.
유카마운틴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땅속 깊이 터널을 뚫는 기술의 어려움만이 아니다. 100만 년 뒤까지 안전하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그 설명을 규제기관과 지역사회, 그리고 위험을 물려받을 미래세대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이다.
한국이 먼저 확보해야 할 것은 지하연구시설이라는 ‘공간’이 아니다. 어떤 부지를 왜 선택하고, 그곳에서 무엇을 검증하며,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까지 허용할 것인지를 판단할 과학적·규제적 기준이다.
고준위폐기물 처분은 아직 해결된 기술이 아니라는 말도 정확하지 않고, 이미 기술적으로 해결됐으니 부지만 정하면 된다는 말도 정확하지 않다. 심층처분의 기본원리와 공학기술은 상당히 축적됐지만, 실제 부지의 장기 안전성과 사회적 정당성은 국가마다 새롭게 입증해야 한다.
결국 원자력산업의 마지막 책임은 원전을 건설하거나 폐기물용기를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수십만 년 동안 지속될 위험을 어느 지역에 맡길 것인지 결정하고, 그 결정의 과학적 근거와 비용, 실패 가능성을 현재세대가 감당하는 데까지 이어진다.
그 마지막 문을 열지 못한 채 원전을 계속 확대한다면, 국가는 해결책보다 더 빠른 속도로 폐기물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와 같이 원전에서 생산된 전기는 오늘 모두 소비한다. 그러나 그 전기를 생산하면서 생긴 고준위폐기물은 전기를 사용하지도 않은 미래세대가 관리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되물어야 한다. 원전이 싸다는 계산에는 핵폐기물의 마지막 한 드럼, 마지막 한 다발이 최종 처분될 때까지의 비용이 정말 들어 있는가?
결과적으로 핵폐기물은 원자력산업의 부산물이 아니다. 원전을 시작하는 순간 국가가 함께 인수하는 장기부채다. 따라서 핵폐기물의 마지막 책임을 설명하지 못하는 원자력 정책은 원전의 경제성도, 지속가능성도, 국가전략산업으로서의 타당성도 완전히 설명한 것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