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을 지키는 인물은 문무대왕외 김석규 시인과 야초, 첩첩산중도 있다.. 野 草
2003.11.06 (17:03:18)
"닭은 언제우는가"
울산하면 외지의 사람들은 뿌옇 연기가 하늘을 덮어 공해에 찌던 곳이라 단정하는 사람이 많다.
그 뿐이면 다행이다. 어떤 이는 그기에 사는 사람까지 부옇게 본다.
물론 공해도 있고 천성이 깨끗하지 못해 뿌옇 사람도 있다.
그러나 현대 조선소가 있는 울기공원을 한번이라도 찾아본 사람은 그 비경과 자연스러움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어느 정권시절에는 모 재벌이 이 곳까지 확장하여 조선소로 만들겠다고 입맛을다신 적도 있었다. 대왕암이 있는 해변 끝은 오랫동안 군사 경계 목적으로 철조망을 쳐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 하였다.
울기(蔚岐)란 ‘울산의 끝’이라는 뜻을 그대로 옮겼다. 해남의 땅 끝 이랄까?
대왕암은 문무대왕비의 넋이 호국용이 되어 문무대왕과 같이 동해를 지키다 대왕암 밑으로 잠겨 용신 이 되었다 한다. 그리고 이곳을 지키는 인물은 문무대왕외 김석규 시인과 야초, 첩첩산중도 있다는 걸
몇 사람 빼고는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공원 내 울창한 해송 림은 여름철에도 싸늘한 느낌을 주며 피서지로 인기이다. 또 공원 끝 자락에 위치한 촛대처럼 생긴 울기등대는 울산에서 포항 부산에 이르는 동해남부 항로의 중 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특히 울기공원은 주변 일산해수욕장과 함께 여름철 피서지로는 좋은 곳이다. 여기서 나와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면 일본시절의 황금어장 방어진이 있다.
지금도 활어 회 센터로 시끌벅적하다. 그리고 이 공원 안에는 방어진 중학교와 울산시 교원 연수원이 있다. 바닷가 송림 속의 학교 운동장에서 뛰놀던 학생들을 보며, 너희들은 참 행 복한 사람이다 고 속으로 부러워 한 적이 있었다.
학교와 등대는 다 일제시절부터 지어져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옆에 느닷없이 교원 연수원이 지어졌다. 일반 주택이 전혀 들어 갈 수 없는 공원 구역 안이다. 저 석유화학 단지 옆 같은 곳으로 가면 교통도 좋을 텐데?
그런데 이곳 연수원의 원장님이 김석규 시인 이였다. 금년 9월에 정년퇴임 하셨다.
그의 시 <섬>에서 볼 때 말년에 영원한 시의 고향인 바다가 그리워, 한직인 이곳 연수원장을 을 자진 해 오신 것 같다. 내 친구도 목구멍만 아니면 벌써 목탁 다 집어 던지고 지리산으로 갔을 속내를 말 안 해도 나는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시시때때로 자세히 이야기 다 해 줄 테니, 니는 장가 가지마라” 했는데도.....,
☞남겨 두고 온 서정의 한 끝 어떻게 할까.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게
날이 저물면서부터
시작하는 그리움의 이 바다
다 둘러 마시고 갈 수는 없지 ☜
어떤 시인은 지구에 있는 술을 다 둘러 마시고 가지 못해 한이다.
김석규 시인은 청마 유치환 선생과의 인연이 각별하다.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시 '파수병'이 당선 될 때 유치환 선생이 심사를 맡았다. 그 이후 김석규의 고향 가까운 실상사에서 하늘같은 청마와 함께 일주일간 실상사에서 지내며, 청마는 “실상사 실기”를 쓰기도 했다.
1941년 경남 함양 출생이며, 부산대 사대를 졸업했다.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서민적 삶을 토속적으로 노래하며 현실적 상황에 대한 투철한 역사의식과 윤리의식으로 비판을 던지는 시세계를 갖고 있다. <경남문화상><현대 문학상>
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파수병><늪에다 던지는 토속><닭은 언제 우는가><남강하류에서> <대문을 열어 놓고><풀잎><먼 나라>가 있다.
"그 분은 더운 여름날 전교 조회 때 여학생들 예쁜 얼굴 탈까봐, 또 땡볕에 더워 땀 흘릴까봐 자기만 지휘대에서 마이크 잡고 말씀하시고 학생들은 나무 그늘 밑 의자에서 듣게 했다"
훌륭한 스승 밑에 훌륭한 제자라 했나? 김석규는 청마를 빼 닮았다고 할까? 이러한 기행(?)도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부산의 예술 혼 청마>를 그리워하며 독백처럼 쓴 김석규의 글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청마에 있어서의 사랑이란 궁극적으로 자기완성을 위한 노력이요 수단인 것이다.
청마는 무한히 자유로웠고 순수하였으며 결코 편협 된다거나 옹졸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대범하고 묵중하면서도 항시 남을 위해 애쓰고 배려하는 자상함이 있었으며 온후함
과 함께 깊은 사려를 지닌 분이었다.
경남여고에서 부산 남여상으로 발령 났을 때 주변에서 좌천이라고 얘기하자 선생은 '내가 맨 날 교장실에 들어앉아서 시만 쓰고 학교는 등한히 한다고 해 쌓더만 기어이 보내는가
보제'하고 허허 웃기만 했다.
결재도 일일이 따져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도장을 책상 위에 내어놓고 경리관계 서류까지
도 마음대로 찍어가게 한 것, 운동장에 학생들을 모을 때 동작이 굼뜨거나 대오가 맞지 않는다고 꾸짖는 것을 보고는 우리 아이들이 말 안 듣는다고 소문이 나면 누가 며느리로 데려 가겠느냐면서 앞으로 나무랄 때는 절대로 확성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것, 어느 청명한 가을 아침 교정모임에서 국민의례를 할 때 그 위로 펼쳐져 있는 하늘이 너무도 고와 그것을 보고만 있었다고 하는 학교장 훈화는 청마가 아니고는 아무도 할 수 없으리라.”
내사 바다하면 싱싱한 회나 해산물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곰이나 뱀이나 가을에 식욕이 당기는 것은 사람과 똑 같다. 가을에 많이 먹어놓아야, 겨울을 추위에 떨지 않고 잘 보낼 수 있다. 기름기가 많은 전어 회 밥도 지금쯤 땡초 넣고 얼큰하게 먹어야한다. 잠이나 많이 자려했는데, 늙어 가며 웬 공부거리는 이리도 많이 생기는지....
나도 좌천당하기 전에 절필(?)하고 돈이나 벌어야지./ 모진인연, 뿌옇인간[疊疊山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