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한님에게 제사를 지내고 모시는 민족 천제단과 인류와 환민족의 3성조인 환인-환웅-단군조선을 모시는 민족성전을 수도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 건립하여 자기조상과 부모의 피와 뼈까지 호적정리로 바꿔버리는 반민족적 시대상황을 청산함(호주제 복원)은 물론이고, 조상숭배와 국민화합과 민족통일의 구심이 되게 해야 한다.
[환국을 계승한 대환민국]환인이 환웅에게 환국의 국통을 물려준 증표로써 정신문명의 종주국의 상징인 천부경을 전수했다는 차원에서 환국-배달국-단군조선-부여의 국통을 이어받은 고구려를 계승한 대진국(발해), 대진국 멸망 후 대진국 왕족들이 고려로 망명했으니 오늘날 한반도안에 환국부터 대진국까지 환국의 씨종자들이 살아 있으며, 대한민국이 인류의 장자민족인 이유다.
규원사화 단군기에 의하면 단군 왕검의 네 아들은 '부루, 부소, 부우, 부여'이니 부루 태자는 초대 왕검 단군을 이어 2세 단군이 되었고, 나머지 세 아들은 모두 왕검 단군에 의하여 제후국의 왕이 된다. 즉, 둘째가 부소[夫蘇 : 구려(원시 고구려, 고리국)의 제후에 봉해짐], 셋째가 부우[夫虞 : 진번국(요동의 제후에 봉해짐)],넷째 가 부여국[백악산 아사달,지금의 길림성 장춘)의 제후로 봉해짐]이것이 원시부여다.
[고두막의 졸본부여와 고추모의 고구려]그리고, 동명성왕 설화의 주인공은 주몽이 아니라, 북부여를 졸본부여로 변경한 북부여 5대 단군 고두막한을 의미한다. 단군조선 마지막47대 단군 고열가 후손이자, 고리국왕과 시비녀 사이에서 태어나 고리국왕에게 버림받은 아들이 되버린 고두막한은 후일 부여를 침략한 한나라를 격퇴시킨 부여의 민족영웅으로 북부여를 개국한 해모수 왕조를 몰아내고 고두막한 왕조를 개국한 사람이다. 고두막한의 아들 고무서가 아들이 없어 동부여에서 도망온 해모수의 증손자 고추모에 왕위를 맡기니 고추모는 고두막한의 신화를 부여국통을 내세우는 차원에서 수용하여 고추모의 신화와 접합시킬 수 밖에 없었다.
[부여.고구려를 계승한 백제]부여족인 구태가 대방(황해도)에 나라를 세우고 나중에는 동이의 큰 나라가 되었다 고 중국문헌에 전하고 있다.이 구태가 강성해져 발해만 지역에 소서노가 개국한 어하라(비류백제)가 망한 후 온조백제(십제)에 통합되고, 다시 온조백제는 북부지역에서 남하한 구태백제에 의해 통합되어 마한의 중심지역인 한반도 서남해지역를 거점으로 무역를 관리하는 22[담로]제도를 통하여 일본,중국북남부 해안지역과 동남 아시아를 연결하는 거대한 해상무역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동아시아 해상제국으로 우뚝 섰으니 "동이의 큰 나라가 되었다"는 중국문헌이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할 것이다. 백제사 하면 온조/비류백제로만 인식하고 있는데, 백제강국의 주역이 된 구태백제사에 대한 인식도 부각되야 할 것이다.
[KBS2-바람의 나라]고구려 3대 대무신왕 무휼
휘(諱)는 무휼(無恤). 유리왕(琉璃王)의 셋째 아들. 어머니는 송양(松讓)의 딸. 14년(유리왕 33) 태자(太子)로 책봉되어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아보다가 유리왕이 죽은 뒤 즉위하였다. 22년(대무신왕 5) 동부여를 공격하여 대소왕(帶素王)을 죽이고, 고구려에 병합(倂合)하였다. 또 26년(대무신왕 9) 개마국(蓋馬國)을 쳐서 이를 병합하여 국토를 살수(薩水) 이북까지 확대하였다.
한편 을두지(乙豆智) 같은 인재를 등용하여 국사(國事)를 맡겼는데, 28년 한(漢)나라의 요동 태수(遼東太守)가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그의 지략(智略)으로 이를 물리쳤다. 32년 왕자(王子) 호동(好童)을 시켜 최씨 낙랑국(樂浪=낙랑국은 소위 한나라의 한사군과는 완전 별개의, 우리 단군민족이 평양 지역에 세운 나라로 최숭이 세워서 최씨들이 왕으로 다스렸기 때문에 최씨 낙랑국이라고도 한다. 참고로 번조선의 제후들이 한나라와 연대하여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된 한사군은 지금의 산동지역에 위치했는데, 일제 식민사관에 의해 한반도지역으로 왜곡되었다)을 정벌하게 하였으며, 37년 재차 공략(攻略)하였다. 왕의 시호(諡號)가 대무신왕인 것은 재위 중에 주위의 많은 나라를 공략하여 무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왕의 능(陵)은 대수촌원(大獸村原)에 있다.
[해모수의 후손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신라는 지금의 경상도 지역 6개 씨족에서 출발한 진한의 후신으로 진한을 통합한 신라의 시조는 바로 박혁거세다. [한단고기]가 전하는 박혁거세의 출생설화는 다음과 같다.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공주가 혼인전에 임신을 하여 왕이 내쫓자, 동부여를 떠나 낯설고 물 설은 진한(나을촌)으로 가서 아이를 낳았으며, 소벌도리라는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키워 장성하자, 6부 촌장들이 합의하여 신라왕에 추대했다. 신라개국 시조 박혁거세는 북부여의 해모수왕조를 몰아내고 졸본부여를 개국한 고두막한이 ?아낸 해모수의 손자로 동부여를 개국한 해부루의 손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박혁거세는 해모수의 직계 증손자로 해모수의 직계 증손자인 고추모와도 친척이 되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신라는 흉노문화를 가지고 진시황의 부역을 피하여 한반도로 들어온 진한족으로 추정되는 김알지 세력이 신라권력을 잡으면서 신라살아남기차원에서 숭당사대주의 노선을 취하면서까지 고구려와 백제를 공멸시켜버린 반민족적 역사를 기록했을 뿐이다.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설화를 지니고 있다. 나정우물에 표주박 모양의 알이 있었고, 왕만이 탈 수 있는 용마가 무릎을 꿇고 지켰다는 것은 박혁거세가 왕의 혈통임을 증명해 준다. 그렇다면 박혁거세는 부여왕실과 어떤 혈연적 관계가 있었을까.
이에대해 '삼한비기(三韓秘記)' 구지(舊誌)에는 "박혁거세의 생모는 본래 부여제실(扶餘帝室)의 여자(공주)다"고 했다. 즉, "사로(斯盧: 신라)의 시왕(始王)은 선도산(仙挑山: 경주) 성모(聖母)의 아들인데, 옛 부여 제실(왕궁)의 여자 파소(婆蘇)가 남편없이 처녀 잉태하여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게 되자 눈수(嫩水: 흑룡강성에 인접한 강, 송하강의 지류)로부터 동옥저에 이르러 또다시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의 내을촌(柰乙村)에 이르러… 거서간(임금)이 되고, 서라벌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진한 또는 사라(斯羅: 신라)라 칭하였다."
또 김교헌(金敎獻)의 '신단실기(神壇實記)'에는 "부여제실의 여자 동신성모(東神聖母)인 파소(婆蘇)가 남자와 혼인하지 않은채 잉태하여… 진한 땅에 와서 혁거세를 낳았다… 계림서악(鷄林西岳)에 성모사(聖母祠)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성모는 지선(地仙)이 되고 혁거세는 천선(天仙)이 되었다고 한다. 예수를 낳은 성모 마리아의 처녀 잉태설을 연상케 한다.
[중원도모를 제의한 연개소문]연개소문은 김춘추와 백제 의자왕에게 중원을 도모하여 3한이 분할하자고 제의했으나, 신라 김춘추의 소극성으로 인해 실현되지 않았다.고구려 당시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와 당나라를 개국한 주역들도 사실 뿌리를 올라가면 환국의 12연방의 하나였던 선비국의 후손들이다. 단지, 환국의 국통을 계승한 차원에서 환인에게 천부경을 전수받은 환웅의 신시배달국과 단군조선과 부여를 계승한 고구려가 천자국의 자격이 있었기 때문에 천자국 행세를 하면서 고구려를 넘본 수나라와 당나라와의 300여만이 동원되는 세계최대의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천자국 고구려는 승리했고, 수나라는 망하고 당나라 이세민은 고구려침공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병으로 죽었다. 고구려 패망의 근본요인은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과 연개소문이 후계자를 명확히 정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인해 벌어진 권력투쟁으로 인한 국론분열에서 기인했다. 고구려의 당당함은 결국 민족사에 대한 바른 인식과 정립에서 오는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민족정신에 있었던 것이다.
[자료]단군조선과 고구려를 잇는 부여
유럽의 불가리아도 부여족이 서진하여 개국한 나라
1. 원시 부여
원시 부여는 삼한조선 초대 단군 왕검의 막내 아들인 부여가 세운 제후국이다. 원시 부여가 존재하였음은 소도경전본훈에 보인다. "부여인 왕문의 서법은 부적류를 닮아 전서와 비슷하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왕문은 단군조선 31세 등올 단군 때 사람이니 대부여가 서는 44대 구물 단군 이전 사람이 된다. 원시 부여사에 대한 가장 많은 기록을 가지고 있는 책은 규원사화다. 규원사화 단군기에 의하면 단군 왕검의 네 아들은 '부루, 부소, 부우, 부여'이니 부루 태자는 초대 왕검 단군을 이어 2세 단군이 되었고, 나머지 세 아들은 모두 왕검 단군에 의하여 제후국의 왕이 된다.
초대 왕검 단군의 기록에 있어 환단고기와 규원사화는 조금 다른 경향을 보인다. 9년 홍수에서의 부루 황태자의 눈부신 활약을 보인 책이 환단고기인데 반해, 상대적으로 규원사화에서는 군사 분야에 있어 부여 왕자의 눈부신 활약상을 기술하고 있다. 원시 부여국은 처음 나라의 서쪽에 세워진 이래 북쪽인 우수주로 옮겨졌고, 이후 부여족의 한 갈래가 서쪽의 알유 땅에 되니 이들은 맥족으로 불리게 된다. 규원사화에 이 맥족은 처음 엄려 북서쪽에 옮겨 살게 됨으로 람씨의 백성이 되었다 하였으니, 31세 등올 단군 시대 때 한수 사람 부여인 왕문이 이두법을 지어 바쳤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은 규원사화에서 이미 남씨의 백성이 된 맥족 왕문을 뜻한다. 람씨는 22세 색불루, 23세 아홀 단군 때 그 힘이 절정에 달하여 은나라를 쳐부수고 회, 대 지방을 점령하였고 빈, 기 지방 공략에도 힘을 보탠 단군 조선의 유력한 제후였으니 부여계 맥족은 이 때 빈, 기 지방에 정착한 것이 된다.
2. 대부여
'부루, 부소, 부우, 부여'는 모두가 동방에 떠오르는 태양의 광명을 상징하는 이름들이다. 우리 한겨레는 원래 광명을 숭상하는 백의 민족이었다. 그래서 모든 이름에 광명의 뜻을 담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니 환인, 환웅, 단군은 각기 천, 지, 인의 광명을 뜻하고, 환국, 배달, 조선, 북부여, 고구려, 대진, 고려, 조선 모두가 광명의 뜻을 담고 있다.
대부여의 시조 구물 단군께서 동방의 대광명을 뜻하는 이름이 무수히 많다고 해서 조선의 이름을 단순히 '동쪽에서 뿌옇게 떠오르는 태양'이란 의미를 가진 순우리말 '뿌옇다'를 취하여 대부여로 바꾼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부여란 이름이 광명의 정신을 이 땅 동방에 실현하는데 강력한 인상을 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규원사화에 "부여가 단군의 명으로 갑비고차에서 일어난 남이의 난을 평정함에 이 곳의 백성들이 신의 감화를 많이 받았으니, 후에 청구 백성을 비롯하여 이곳에 건너오는 사람이 많았다"는 기록을 보이니, 이것은 부여가 군사적 재능 뿐만이 아니라 문화적 역량 또한 출중하여 그 명성이 대단하였음을 뜻한다.
한민족의 역사를 살펴보면 국말국초에는 개국 시조께서 흩어진 민심을 하나로 모으고 침체된 국정을 쇄신하기 위하여 극단적인 처방책으로 국명을 바꾸는 전통이 있었다. BCE 425년 조선이 대부여로 국명이 바뀌게 된 까닭은 반란 때문이었다. 43세 물리 단군 때 사냥꾼 무리 우화충의 반란으로 나라가 이미 망하였으므로, 이를 평정하고 제장들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오른 44세 구물 단군으로써는 제한들이 쟁패하는 시대에 이르러 국정을 쇄신하고 국력을 다시금 하나로 모으고자 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구물 단군은 국력 결집 및 정권 강화를 위한 분위기 조성 차원에서 극단적인 처방으로 국명을 바꾸었으니 그것이 곧 대부여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부여란 이름은 환국, 배달, 청구, 조선, 삼한 다음으로 권위적인 이름이었음을 증명하여 주는 것이니, 여기서 대부여란 원시 부여인 제후국 소부여와 구분됨으로 상대적으로 크다는 의미의 '대'자가 붙는다. 소도경전본훈에는 "한은 곧 황이요, 황은 곧 대이며, 대는 곧 일이다."하였으니 여기서 대부여란 "한 없이 넓은 부여, 황제가 다스리는 부여, 한이 다스리는 부여"란 뜻이 된다.
규원사화의 기록에 부여가 단군 왕검의 명을 받아 갑비고차에서 일어난 남이의 난을 평정하고, 40년에 뭇 제후를 모아 서쪽 험윤의 족속인 알유를 평정한 것은 백민성 욕살이었던 구물이 물리 단군의 명을 받아 서북 36군과 도성인 백악산 아사달을 함락시킨 사냥꾼의 무리 우화충의 난을 평정한 공로와 비슷하다. 더불어 이것은 단군 조선이 44대에 이르러 국명을 바꾸어야 했던 간절한 이유가 바로 국난 극복에 있었음을 뜻하니, 난의 진압 후에 부여 왕자가 신교 문화를 중흥시키는데 큰 힘을 기울였듯이 이제 대부여도 신교를 중심으로 힘을 결집해야 함을 천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역사는 대부여 초대 구물 단군의 뜻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삼조선 체제로 이루어진 대부여가 전쟁개시권과 평화교섭권을 제후들에게 나누어 주게됨으로써 더 한층 제한들이 패권을 다투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장당경에 도읍하였으므로 장당경 시대라고 부르며, 47세 고열가 단군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3. 북부여
북부여는 전후로 나뉘어지니 전기 북부여는 삼한조선 47세 고열가 단군의 뒤를 이어 해모수 단군께서 BCE 239년에 여신 나라 이름이다. 시조 해모수가 임술년에 웅심산에 내려와 부여 고도에서 나라를 일으켰을 때 다음 해인 계해년에는고열가 단군이 후사를 정하지 않고 퇴위하셨으니 이를 수습한 해모수 단군께서는 대부여의 이름을 고쳐 북부여라 불렀다.
하지만 북부여가 서기까지 오가가 공동 통치하는 육년간의 공화정 시대가 있었다. 오가 공화정 시대가 가져 온 큰 변화는 삼한관경체제의 완전한 붕괴다. 대단군이 부재한 상황에서 오가가 진한을 통치하게 됨으로 대단군의 간접 통치를 받고 있는 마한과 번한이 완전 독립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부여를 이어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의 명령은 진한 일역에 한정되었으니 해모수 단군은 다시 한 번 국명을 바꿔 국정 쇄신을 꾀하게 된다. 그래서 탄생한 이름이 바로 북부여다. 여기서 북부여란 해모수가 일어난 북쪽 부여를 뜻하니, 북이란 삼신오제본기의 기록처럼 천도가 일어나는 북방을 뜻한다. 또한 신시본기에 북쪽은 일출의 근본이 되는 곳이니 곧 천자가 제후들을 남면하는 곳이다.
삼한에는 북삼한과 남삼한이 있다. 북삼한이란 단군 왕검께서 건국하신 조선의 삼한관경을 뜻하며, 남삼한이란 훗날 번한의 부단군 기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도망감으로 상장 탁이 마한 땅 월지에 이르러 세운 중마한을 뜻한다. 이 때 탁이 세운 마한은 마한 중심의 삼한 체제로 이루어졌으니 북쪽의 삼한과 구분하여 남삼한이라 하고, 또한 뒤에 세워진 삼한이므로 후삼한이라 불렀으니 단군 왕검께서 세운 원래의 삼한은 전삼한이 된다.
후삼한이 성립된 까닭은 삼조선 체제의 붕괴에서 비롯된다. 해모수가 군사를 일으켜 재위에 오른 것은 번한의 부단군인 기비의 힘이 컸다. 그런 까닭으로 해모수 옹립의 일등 공신인 번한 기비는 그 권한이 더욱 많아졌는데, 그 아들 기준이 부단군에 올라 한나라의 망명객위만을 받아 주었던 것은 바로 이 때 비대해진 권한 때문이었다. 결국 기준은 본국은 해모수의 명을 끝까지 기다리지 않고 위만을 받아줌으로서 그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으니 남삼한의 성립은 결과적으로 북삼한의 붕괴로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 단군이 공화정을 철폐하고 오가에 의해 추대를 받아 진한의 대단군에 오른 날은 BCE 232년이니 전기 북부여는 제2세 모수리, 제3세 고해사, 제4세 고우루, 제5세 해부루로 이어진다.
전기 북부여는 후기 북부여에 계승되었으니 후기 북부여는 동명국을 일컫는다. 동명국은 북부여기 하편의 기록처럼 대부여 마지막 황제인 고열가 단군의 후손인 동명제 고두막이 북부여 제4세 고우루 단군을 계승하여 제위에 오른 나라를 뜻한다. 이 동명국은 BCE 108년에 졸본 지방에서 일어났으므로 일각에서는 졸본부여 또는 동명부여라 부르기도 하는데, BC 87년에 북부여의 수도에 입성한 동명국 고두막 단군이 북부여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함으로 이를 후기 북부여라 부른다.
후기 북부여는 제5세 고두막의 아드님인 제6세 고무서 단군의 사위인 고주몽이 유명으로 제위를 물려받아 제7세 북부여 단군이 된 후BCE 37년 국호를 고구려로 바꿈으로써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고주몽 단군께서 제위에 오른 다음 해인 BCE 36년에는 박혁거세가 신라를 건국하였으니 신라의 뿌리 또한 북부여의 황실이다. 고구려국본기에는 옛 부여의 제실 황녀 파소가 아비 없이 임신함으로 도망하여 난 아들 박혁거세가 진한 6부의 추대를 받아 거서간이 되고 서라벌을 도읍으로 삼아 진한을 개국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박혁거세가 진한의 거서간이 된 때는 13세 때이니 이 때 고주몽의 나이는 23세로 10살 차이가 난다. 그러므로 정황상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는 동명국의 시조 고무서 단군일 가능성이 가장 많으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고무서 단군의 딸이어야만 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졸본부여왕은 딸이 셋이니 둘째 딸은 고주몽과 결혼했다함으로 첫째 딸이 파소일 가능성이 있다 할 수 있으나,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사대를 위해 북부여의 역사를 난도질하여 훼손시킴이 극심하니 이 책에서 역사의 진실을 밝혀 국통을 세우기는 불가능하다 하겠다.
여기에 덧붙여 중부여가 있으니 북부여기 상편의 다음 기록 "2세 단군 모수리 기유 3년에 해성을 평양도에 속하게 하고 황제의 아우 고진에게 해성을 수비하도록 하니 중부여 일대가 모두 북부여를 따랐으므로 양식을 주었다."처럼 중부여란 나라 이름이 아니라 해성인 북평양 일대를 가리킨다.
4. 동부여
동부여는 동명왕 고두막한의 협박에 의하여 굴복하고 물러난 전기 북부여의 제5세 황제 해부루가 고두막의 배려로 북부여의 동쪽 분릉이라고도 불리는 통하 연안의 가섭원 땅에 BCE 87년에 세운 나라다. 동부여는 가섭원 땅에 있었으므로 가섭원 부여라고도 하는데, 시조 해부루, 2세 금와, 3세 대소로 이어지며, 대소왕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게 됨으로서 망하게 된다.
그 후 대소왕의 아우가 압록곡으로 달아가 해두왕을 죽이고 그 백성을 거두어 나라를 세워 왕이 되니 그 나라 이름은 갈사라 부른다. 갈사국은 그 후 고구려 태조 무열제 융무 16년 8월에 고구려에 항복함으로 3세 47년 만에 망하고 마는데 태조 무열제는 도두를 우태로 삼아 혼춘을 식읍으로 주어 동부여후로 봉한다. 여기서 우태란 도두가 받은 벼슬이니 연타발의 딸 소서노가 전 남편인 우태와의 사이에서비류와 온조를 낳았다고 한 삼국사기의 혹설은 거짓이다. 소서노는 고무서 단군의 딸이자 처녀로서 고주몽과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아 고구려와 백제 건국의 일등 공신이 된 여인이되 김부식의 붓장난에 의하여 재가한 상인의 딸이 되고 말았으니 역사적으로 가장 한이 많은 여인이다.
5. 서부여
서부여는 동부여의 뒤를 이어 연나부 낙씨의 후손이 세운 나라를 뜻한다. 부여의 서쪽에 있었으므로 서부여라 된다. 연나부 낙씨란 대소왕의 아우가 대소왕 서기 22년 2월에 죽자 그 해 여름 4월에 탈출하여 갈사국을 세우고 가을 칠월에 항복함으로 고구려가 그를 연나부에 안치하고 봉하여 왕으로 삼았는데 그의 등에 띠무니가 있으므로 낙씨라 한 것이다. 훗날 낙씨는 자립하여 개원 서북으로부터 백랑곡으로 옮겨 갔다가 다시 연나라와 가까운 곳으로 옮겼는데, 문자열제 명치 갑술년인 서기 494년에 이르러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항복함으로 영원히 망하게 된다.
6. 남부여
남부여는 백제 중흥을 꿈꾸었던 백제 성왕이 서기 523년에 백제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남쪽에 있는 부여이므로 남부여라 하였다. 백제는 원래 고주몽과 소서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온조가 세운 나라다. 온조 백제는 성씨를 부여로 삼았으니 모두가 부여의 후손임을 자처한 것이다. 9천년 한민족 역사상 마지막 남은 부여인 백제는 서기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사비성이 함락되어 영원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니 그 수도 사비성은 현재의 부여다.
당시에 단군왕검의 교화는 사방에 두루 미쳐 북으로는 대황에 다다르고 서쪽은 설유를 거느리며, 남쪽으로 회대의 땅에 이르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닿으니, 가르침이 퍼져 나가 물들어 감은 위대하고도 넓은 것이었다. 이에 천하의 땅을 구분하여 나누고 공훈이 있는 친족에게 주어 제후로 삼았다.
치우씨의 후손에게는 남서쪽의 땅에 봉하니,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기에 남국(藍國)이라 이름하고 엄려홀(奄慮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신지씨의 후손에게는 북동쪽의 땅에 봉하니, 물길이 수려하고 산악이 장엄하며 바람의 기운은 굳세고 웅장하기에 속진국( 國) 또는 숙신(肅愼)이라 일컬었으니, 방언으로 호걸 장엄함을 말하며, 숙신홀(肅愼忽)에서 다스리게 하였다. 고시씨의 후손에게는 남동쪽의 땅에 봉하니, 산하가 빼어나게 수려하며 초목이 무성하여 청구국(靑丘國)이라 이름하고 낙랑홀(樂浪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주인씨의 후손은 개마국(蓋馬國)에 봉하고, 여수기는 예(濊)의 임금이 되게 하였으며, 부소와 부우 및 작은 아들인 부여는 모두 나라의 서쪽 땅에 봉하니, 구려(句麗=고리)와 진번(眞番=청구지역) 및 부여(夫餘) 등의 여러 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그 후에 부루가 또 동쪽에서 온 세 사람을 각지에 봉했는데, 후세의 옥저(沃沮)와 졸본(卒本) 및 비류(沸流) 등의 명칭은 모두 이 봉함을 받은 나라의 이름에서 생겨났다. 단씨(檀氏)의 시대를 통하여 무릇 큰 나라는 아홉이요 작은 나라는 열둘로서, 나누어 천하의 모든 고을을 다스렸는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환한님에게 제사를 지내고 모시는 민족 천제단과 인류와 환민족의 3성조인 환인-환웅-단군조선을 모시는 민족성전을 수도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 건립하여 자기조상과 부모의 피와 뼈까지 호적정리로 바꿔버리는 반민족적 시대상황을 청산함(호주제 복원)은 물론이고, 조상숭배와 국민화합과 민족통일의 구심이 되게 해야 한다.
[환국을 계승한 대환민국]환인이 환웅에게 환국의 국통을 물려준 증표로써 정신문명의 종주국의 상징인 천부경을 전수했다는 차원에서 환국-배달국-단군조선-부여의 국통을 이어받은 고구려를 계승한 대진국(발해), 대진국 멸망 후 대진국 왕족들이 고려로 망명했으니 오늘날 한반도안에 환국부터 대진국까지 환국의 씨종자들이 살아 있으며, 대한민국이 인류의 장자민족인 이유다.
규원사화 단군기에 의하면 단군 왕검의 네 아들은 '부루, 부소, 부우, 부여'이니 부루 태자는 초대 왕검 단군을 이어 2세 단군이 되었고, 나머지 세 아들은 모두 왕검 단군에 의하여 제후국의 왕이 된다. 즉, 둘째가 부소[夫蘇 : 구려(원시 고구려, 고리국)의 제후에 봉해짐], 셋째가 부우[夫虞 : 진번국(요동의 제후에 봉해짐)],넷째 가 부여국[백악산 아사달,지금의 길림성 장춘)의 제후로 봉해짐]이것이 원시부여다.
[고두막의 졸본부여와 고추모의 고구려]그리고, 동명성왕 설화의 주인공은 주몽이 아니라, 북부여를 졸본부여로 변경한 북부여 5대 단군 고두막한을 의미한다. 단군조선 마지막47대 단군 고열가 후손이자, 고리국왕과 시비녀 사이에서 태어나 고리국왕에게 버림받은 아들이 되버린 고두막한은 후일 부여를 침략한 한나라를 격퇴시킨 부여의 민족영웅으로 북부여를 개국한 해모수 왕조를 몰아내고 고두막한 왕조를 개국한 사람이다. 고두막한의 아들 고무서가 아들이 없어 동부여에서 도망온 해모수의 증손자 고추모에 왕위를 맡기니 고추모는 고두막한의 신화를 부여국통을 내세우는 차원에서 수용하여 고추모의 신화와 접합시킬 수 밖에 없었다.
[부여.고구려를 계승한 백제]부여족인 구태가 대방(황해도)에 나라를 세우고 나중에는 동이의 큰 나라가 되었다 고 중국문헌에 전하고 있다.이 구태가 강성해져 발해만 지역에 소서노가 개국한 어하라(비류백제)가 망한 후 온조백제(십제)에 통합되고, 다시 온조백제는 북부지역에서 남하한 구태백제에 의해 통합되어 마한의 중심지역인 한반도 서남해지역를 거점으로 무역를 관리하는 22[담로]제도를 통하여 일본,중국북남부 해안지역과 동남 아시아를 연결하는 거대한 해상무역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동아시아 해상제국으로 우뚝 섰으니 "동이의 큰 나라가 되었다"는 중국문헌이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할 것이다. 백제사 하면 온조/비류백제로만 인식하고 있는데, 백제강국의 주역이 된 구태백제사에 대한 인식도 부각되야 할 것이다.
[KBS2-바람의 나라]고구려 3대 대무신왕 무휼
휘(諱)는 무휼(無恤). 유리왕(琉璃王)의 셋째 아들. 어머니는 송양(松讓)의 딸. 14년(유리왕 33) 태자(太子)로 책봉되어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아보다가 유리왕이 죽은 뒤 즉위하였다. 22년(대무신왕 5) 동부여를 공격하여 대소왕(帶素王)을 죽이고, 고구려에 병합(倂合)하였다. 또 26년(대무신왕 9) 개마국(蓋馬國)을 쳐서 이를 병합하여 국토를 살수(薩水) 이북까지 확대하였다.
한편 을두지(乙豆智) 같은 인재를 등용하여 국사(國事)를 맡겼는데, 28년 한(漢)나라의 요동 태수(遼東太守)가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그의 지략(智略)으로 이를 물리쳤다. 32년 왕자(王子) 호동(好童)을 시켜 최씨 낙랑국(樂浪=낙랑국은 소위 한나라의 한사군과는 완전 별개의, 우리 단군민족이 평양 지역에 세운 나라로 최숭이 세워서 최씨들이 왕으로 다스렸기 때문에 최씨 낙랑국이라고도 한다. 참고로 번조선의 제후들이 한나라와 연대하여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된 한사군은 지금의 산동지역에 위치했는데, 일제 식민사관에 의해 한반도지역으로 왜곡되었다)을 정벌하게 하였으며, 37년 재차 공략(攻略)하였다. 왕의 시호(諡號)가 대무신왕인 것은 재위 중에 주위의 많은 나라를 공략하여 무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왕의 능(陵)은 대수촌원(大獸村原)에 있다.
[해모수의 후손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신라는 지금의 경상도 지역 6개 씨족에서 출발한 진한의 후신으로 진한을 통합한 신라의 시조는 바로 박혁거세다. [한단고기]가 전하는 박혁거세의 출생설화는 다음과 같다.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공주가 혼인전에 임신을 하여 왕이 내쫓자, 동부여를 떠나 낯설고 물 설은 진한(나을촌)으로 가서 아이를 낳았으며, 소벌도리라는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키워 장성하자, 6부 촌장들이 합의하여 신라왕에 추대했다. 신라개국 시조 박혁거세는 북부여의 해모수왕조를 몰아내고 졸본부여를 개국한 고두막한이 ?아낸 해모수의 손자로 동부여를 개국한 해부루의 손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박혁거세는 해모수의 직계 증손자로 해모수의 직계 증손자인 고추모와도 친척이 되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신라는 흉노문화를 가지고 진시황의 부역을 피하여 한반도로 들어온 진한족으로 추정되는 김알지 세력이 신라권력을 잡으면서 신라살아남기차원에서 숭당사대주의 노선을 취하면서까지 고구려와 백제를 공멸시켜버린 반민족적 역사를 기록했을 뿐이다.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설화를 지니고 있다. 나정우물에 표주박 모양의 알이 있었고, 왕만이 탈 수 있는 용마가 무릎을 꿇고 지켰다는 것은 박혁거세가 왕의 혈통임을 증명해 준다. 그렇다면 박혁거세는 부여왕실과 어떤 혈연적 관계가 있었을까.
이에대해 '삼한비기(三韓秘記)' 구지(舊誌)에는 "박혁거세의 생모는 본래 부여제실(扶餘帝室)의 여자(공주)다"고 했다. 즉, "사로(斯盧: 신라)의 시왕(始王)은 선도산(仙挑山: 경주) 성모(聖母)의 아들인데, 옛 부여 제실(왕궁)의 여자 파소(婆蘇)가 남편없이 처녀 잉태하여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게 되자 눈수(嫩水: 흑룡강성에 인접한 강, 송하강의 지류)로부터 동옥저에 이르러 또다시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의 내을촌(柰乙村)에 이르러… 거서간(임금)이 되고, 서라벌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진한 또는 사라(斯羅: 신라)라 칭하였다."
또 김교헌(金敎獻)의 '신단실기(神壇實記)'에는 "부여제실의 여자 동신성모(東神聖母)인 파소(婆蘇)가 남자와 혼인하지 않은채 잉태하여… 진한 땅에 와서 혁거세를 낳았다… 계림서악(鷄林西岳)에 성모사(聖母祠)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성모는 지선(地仙)이 되고 혁거세는 천선(天仙)이 되었다고 한다. 예수를 낳은 성모 마리아의 처녀 잉태설을 연상케 한다.
[중원도모를 제의한 연개소문]연개소문은 김춘추와 백제 의자왕에게 중원을 도모하여 3한이 분할하자고 제의했으나, 신라 김춘추의 소극성으로 인해 실현되지 않았다.고구려 당시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와 당나라를 개국한 주역들도 사실 뿌리를 올라가면 환국의 12연방의 하나였던 선비국의 후손들이다. 단지, 환국의 국통을 계승한 차원에서 환인에게 천부경을 전수받은 환웅의 신시배달국과 단군조선과 부여를 계승한 고구려가 천자국의 자격이 있었기 때문에 천자국 행세를 하면서 고구려를 넘본 수나라와 당나라와의 300여만이 동원되는 세계최대의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천자국 고구려는 승리했고, 수나라는 망하고 당나라 이세민은 고구려침공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병으로 죽었다. 고구려 패망의 근본요인은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과 연개소문이 후계자를 명확히 정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인해 벌어진 권력투쟁으로 인한 국론분열에서 기인했다. 고구려의 당당함은 결국 민족사에 대한 바른 인식과 정립에서 오는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민족정신에 있었던 것이다.
[자료]단군조선과 고구려를 잇는 부여
유럽의 불가리아도 부여족이 서진하여 개국한 나라
1. 원시 부여
원시 부여는 삼한조선 초대 단군 왕검의 막내 아들인 부여가 세운 제후국이다. 원시 부여가 존재하였음은 소도경전본훈에 보인다. "부여인 왕문의 서법은 부적류를 닮아 전서와 비슷하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왕문은 단군조선 31세 등올 단군 때 사람이니 대부여가 서는 44대 구물 단군 이전 사람이 된다. 원시 부여사에 대한 가장 많은 기록을 가지고 있는 책은 규원사화다. 규원사화 단군기에 의하면 단군 왕검의 네 아들은 '부루, 부소, 부우, 부여'이니 부루 태자는 초대 왕검 단군을 이어 2세 단군이 되었고, 나머지 세 아들은 모두 왕검 단군에 의하여 제후국의 왕이 된다.
초대 왕검 단군의 기록에 있어 환단고기와 규원사화는 조금 다른 경향을 보인다. 9년 홍수에서의 부루 황태자의 눈부신 활약을 보인 책이 환단고기인데 반해, 상대적으로 규원사화에서는 군사 분야에 있어 부여 왕자의 눈부신 활약상을 기술하고 있다. 원시 부여국은 처음 나라의 서쪽에 세워진 이래 북쪽인 우수주로 옮겨졌고, 이후 부여족의 한 갈래가 서쪽의 알유 땅에 되니 이들은 맥족으로 불리게 된다. 규원사화에 이 맥족은 처음 엄려 북서쪽에 옮겨 살게 됨으로 람씨의 백성이 되었다 하였으니, 31세 등올 단군 시대 때 한수 사람 부여인 왕문이 이두법을 지어 바쳤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은 규원사화에서 이미 남씨의 백성이 된 맥족 왕문을 뜻한다. 람씨는 22세 색불루, 23세 아홀 단군 때 그 힘이 절정에 달하여 은나라를 쳐부수고 회, 대 지방을 점령하였고 빈, 기 지방 공략에도 힘을 보탠 단군 조선의 유력한 제후였으니 부여계 맥족은 이 때 빈, 기 지방에 정착한 것이 된다.
2. 대부여
'부루, 부소, 부우, 부여'는 모두가 동방에 떠오르는 태양의 광명을 상징하는 이름들이다. 우리 한겨레는 원래 광명을 숭상하는 백의 민족이었다. 그래서 모든 이름에 광명의 뜻을 담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니 환인, 환웅, 단군은 각기 천, 지, 인의 광명을 뜻하고, 환국, 배달, 조선, 북부여, 고구려, 대진, 고려, 조선 모두가 광명의 뜻을 담고 있다.
대부여의 시조 구물 단군께서 동방의 대광명을 뜻하는 이름이 무수히 많다고 해서 조선의 이름을 단순히 '동쪽에서 뿌옇게 떠오르는 태양'이란 의미를 가진 순우리말 '뿌옇다'를 취하여 대부여로 바꾼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부여란 이름이 광명의 정신을 이 땅 동방에 실현하는데 강력한 인상을 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규원사화에 "부여가 단군의 명으로 갑비고차에서 일어난 남이의 난을 평정함에 이 곳의 백성들이 신의 감화를 많이 받았으니, 후에 청구 백성을 비롯하여 이곳에 건너오는 사람이 많았다"는 기록을 보이니, 이것은 부여가 군사적 재능 뿐만이 아니라 문화적 역량 또한 출중하여 그 명성이 대단하였음을 뜻한다.
한민족의 역사를 살펴보면 국말국초에는 개국 시조께서 흩어진 민심을 하나로 모으고 침체된 국정을 쇄신하기 위하여 극단적인 처방책으로 국명을 바꾸는 전통이 있었다. BCE 425년 조선이 대부여로 국명이 바뀌게 된 까닭은 반란 때문이었다. 43세 물리 단군 때 사냥꾼 무리 우화충의 반란으로 나라가 이미 망하였으므로, 이를 평정하고 제장들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오른 44세 구물 단군으로써는 제한들이 쟁패하는 시대에 이르러 국정을 쇄신하고 국력을 다시금 하나로 모으고자 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구물 단군은 국력 결집 및 정권 강화를 위한 분위기 조성 차원에서 극단적인 처방으로 국명을 바꾸었으니 그것이 곧 대부여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부여란 이름은 환국, 배달, 청구, 조선, 삼한 다음으로 권위적인 이름이었음을 증명하여 주는 것이니, 여기서 대부여란 원시 부여인 제후국 소부여와 구분됨으로 상대적으로 크다는 의미의 '대'자가 붙는다. 소도경전본훈에는 "한은 곧 황이요, 황은 곧 대이며, 대는 곧 일이다."하였으니 여기서 대부여란 "한 없이 넓은 부여, 황제가 다스리는 부여, 한이 다스리는 부여"란 뜻이 된다.
규원사화의 기록에 부여가 단군 왕검의 명을 받아 갑비고차에서 일어난 남이의 난을 평정하고, 40년에 뭇 제후를 모아 서쪽 험윤의 족속인 알유를 평정한 것은 백민성 욕살이었던 구물이 물리 단군의 명을 받아 서북 36군과 도성인 백악산 아사달을 함락시킨 사냥꾼의 무리 우화충의 난을 평정한 공로와 비슷하다. 더불어 이것은 단군 조선이 44대에 이르러 국명을 바꾸어야 했던 간절한 이유가 바로 국난 극복에 있었음을 뜻하니, 난의 진압 후에 부여 왕자가 신교 문화를 중흥시키는데 큰 힘을 기울였듯이 이제 대부여도 신교를 중심으로 힘을 결집해야 함을 천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역사는 대부여 초대 구물 단군의 뜻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삼조선 체제로 이루어진 대부여가 전쟁개시권과 평화교섭권을 제후들에게 나누어 주게됨으로써 더 한층 제한들이 패권을 다투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장당경에 도읍하였으므로 장당경 시대라고 부르며, 47세 고열가 단군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3. 북부여
북부여는 전후로 나뉘어지니 전기 북부여는 삼한조선 47세 고열가 단군의 뒤를 이어 해모수 단군께서 BCE 239년에 여신 나라 이름이다. 시조 해모수가 임술년에 웅심산에 내려와 부여 고도에서 나라를 일으켰을 때 다음 해인 계해년에는고열가 단군이 후사를 정하지 않고 퇴위하셨으니 이를 수습한 해모수 단군께서는 대부여의 이름을 고쳐 북부여라 불렀다.
하지만 북부여가 서기까지 오가가 공동 통치하는 육년간의 공화정 시대가 있었다. 오가 공화정 시대가 가져 온 큰 변화는 삼한관경체제의 완전한 붕괴다. 대단군이 부재한 상황에서 오가가 진한을 통치하게 됨으로 대단군의 간접 통치를 받고 있는 마한과 번한이 완전 독립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부여를 이어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의 명령은 진한 일역에 한정되었으니 해모수 단군은 다시 한 번 국명을 바꿔 국정 쇄신을 꾀하게 된다. 그래서 탄생한 이름이 바로 북부여다. 여기서 북부여란 해모수가 일어난 북쪽 부여를 뜻하니, 북이란 삼신오제본기의 기록처럼 천도가 일어나는 북방을 뜻한다. 또한 신시본기에 북쪽은 일출의 근본이 되는 곳이니 곧 천자가 제후들을 남면하는 곳이다.
삼한에는 북삼한과 남삼한이 있다. 북삼한이란 단군 왕검께서 건국하신 조선의 삼한관경을 뜻하며, 남삼한이란 훗날 번한의 부단군 기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도망감으로 상장 탁이 마한 땅 월지에 이르러 세운 중마한을 뜻한다. 이 때 탁이 세운 마한은 마한 중심의 삼한 체제로 이루어졌으니 북쪽의 삼한과 구분하여 남삼한이라 하고, 또한 뒤에 세워진 삼한이므로 후삼한이라 불렀으니 단군 왕검께서 세운 원래의 삼한은 전삼한이 된다.
후삼한이 성립된 까닭은 삼조선 체제의 붕괴에서 비롯된다. 해모수가 군사를 일으켜 재위에 오른 것은 번한의 부단군인 기비의 힘이 컸다. 그런 까닭으로 해모수 옹립의 일등 공신인 번한 기비는 그 권한이 더욱 많아졌는데, 그 아들 기준이 부단군에 올라 한나라의 망명객위만을 받아 주었던 것은 바로 이 때 비대해진 권한 때문이었다. 결국 기준은 본국은 해모수의 명을 끝까지 기다리지 않고 위만을 받아줌으로서 그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으니 남삼한의 성립은 결과적으로 북삼한의 붕괴로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 단군이 공화정을 철폐하고 오가에 의해 추대를 받아 진한의 대단군에 오른 날은 BCE 232년이니 전기 북부여는 제2세 모수리, 제3세 고해사, 제4세 고우루, 제5세 해부루로 이어진다.
전기 북부여는 후기 북부여에 계승되었으니 후기 북부여는 동명국을 일컫는다. 동명국은 북부여기 하편의 기록처럼 대부여 마지막 황제인 고열가 단군의 후손인 동명제 고두막이 북부여 제4세 고우루 단군을 계승하여 제위에 오른 나라를 뜻한다. 이 동명국은 BCE 108년에 졸본 지방에서 일어났으므로 일각에서는 졸본부여 또는 동명부여라 부르기도 하는데, BC 87년에 북부여의 수도에 입성한 동명국 고두막 단군이 북부여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함으로 이를 후기 북부여라 부른다.
후기 북부여는 제5세 고두막의 아드님인 제6세 고무서 단군의 사위인 고주몽이 유명으로 제위를 물려받아 제7세 북부여 단군이 된 후BCE 37년 국호를 고구려로 바꿈으로써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고주몽 단군께서 제위에 오른 다음 해인 BCE 36년에는 박혁거세가 신라를 건국하였으니 신라의 뿌리 또한 북부여의 황실이다. 고구려국본기에는 옛 부여의 제실 황녀 파소가 아비 없이 임신함으로 도망하여 난 아들 박혁거세가 진한 6부의 추대를 받아 거서간이 되고 서라벌을 도읍으로 삼아 진한을 개국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박혁거세가 진한의 거서간이 된 때는 13세 때이니 이 때 고주몽의 나이는 23세로 10살 차이가 난다. 그러므로 정황상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는 동명국의 시조 고무서 단군일 가능성이 가장 많으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고무서 단군의 딸이어야만 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졸본부여왕은 딸이 셋이니 둘째 딸은 고주몽과 결혼했다함으로 첫째 딸이 파소일 가능성이 있다 할 수 있으나,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사대를 위해 북부여의 역사를 난도질하여 훼손시킴이 극심하니 이 책에서 역사의 진실을 밝혀 국통을 세우기는 불가능하다 하겠다.
여기에 덧붙여 중부여가 있으니 북부여기 상편의 다음 기록 "2세 단군 모수리 기유 3년에 해성을 평양도에 속하게 하고 황제의 아우 고진에게 해성을 수비하도록 하니 중부여 일대가 모두 북부여를 따랐으므로 양식을 주었다."처럼 중부여란 나라 이름이 아니라 해성인 북평양 일대를 가리킨다.
4. 동부여
동부여는 동명왕 고두막한의 협박에 의하여 굴복하고 물러난 전기 북부여의 제5세 황제 해부루가 고두막의 배려로 북부여의 동쪽 분릉이라고도 불리는 통하 연안의 가섭원 땅에 BCE 87년에 세운 나라다. 동부여는 가섭원 땅에 있었으므로 가섭원 부여라고도 하는데, 시조 해부루, 2세 금와, 3세 대소로 이어지며, 대소왕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게 됨으로서 망하게 된다.
그 후 대소왕의 아우가 압록곡으로 달아가 해두왕을 죽이고 그 백성을 거두어 나라를 세워 왕이 되니 그 나라 이름은 갈사라 부른다. 갈사국은 그 후 고구려 태조 무열제 융무 16년 8월에 고구려에 항복함으로 3세 47년 만에 망하고 마는데 태조 무열제는 도두를 우태로 삼아 혼춘을 식읍으로 주어 동부여후로 봉한다. 여기서 우태란 도두가 받은 벼슬이니 연타발의 딸 소서노가 전 남편인 우태와의 사이에서비류와 온조를 낳았다고 한 삼국사기의 혹설은 거짓이다. 소서노는 고무서 단군의 딸이자 처녀로서 고주몽과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아 고구려와 백제 건국의 일등 공신이 된 여인이되 김부식의 붓장난에 의하여 재가한 상인의 딸이 되고 말았으니 역사적으로 가장 한이 많은 여인이다.
5. 서부여
서부여는 동부여의 뒤를 이어 연나부 낙씨의 후손이 세운 나라를 뜻한다. 부여의 서쪽에 있었으므로 서부여라 된다. 연나부 낙씨란 대소왕의 아우가 대소왕 서기 22년 2월에 죽자 그 해 여름 4월에 탈출하여 갈사국을 세우고 가을 칠월에 항복함으로 고구려가 그를 연나부에 안치하고 봉하여 왕으로 삼았는데 그의 등에 띠무니가 있으므로 낙씨라 한 것이다. 훗날 낙씨는 자립하여 개원 서북으로부터 백랑곡으로 옮겨 갔다가 다시 연나라와 가까운 곳으로 옮겼는데, 문자열제 명치 갑술년인 서기 494년에 이르러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항복함으로 영원히 망하게 된다.
6. 남부여
남부여는 백제 중흥을 꿈꾸었던 백제 성왕이 서기 523년에 백제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남쪽에 있는 부여이므로 남부여라 하였다. 백제는 원래 고주몽과 소서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온조가 세운 나라다. 온조 백제는 성씨를 부여로 삼았으니 모두가 부여의 후손임을 자처한 것이다. 9천년 한민족 역사상 마지막 남은 부여인 백제는 서기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사비성이 함락되어 영원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니 그 수도 사비성은 현재의 부여다.
당시에 단군왕검의 교화는 사방에 두루 미쳐 북으로는 대황에 다다르고 서쪽은 설유를 거느리며, 남쪽으로 회대의 땅에 이르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닿으니, 가르침이 퍼져 나가 물들어 감은 위대하고도 넓은 것이었다. 이에 천하의 땅을 구분하여 나누고 공훈이 있는 친족에게 주어 제후로 삼았다.
치우씨의 후손에게는 남서쪽의 땅에 봉하니,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기에 남국(藍國)이라 이름하고 엄려홀(奄慮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신지씨의 후손에게는 북동쪽의 땅에 봉하니, 물길이 수려하고 산악이 장엄하며 바람의 기운은 굳세고 웅장하기에 속진국( 國) 또는 숙신(肅愼)이라 일컬었으니, 방언으로 호걸 장엄함을 말하며, 숙신홀(肅愼忽)에서 다스리게 하였다. 고시씨의 후손에게는 남동쪽의 땅에 봉하니, 산하가 빼어나게 수려하며 초목이 무성하여 청구국(靑丘國)이라 이름하고 낙랑홀(樂浪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주인씨의 후손은 개마국(蓋馬國)에 봉하고, 여수기는 예(濊)의 임금이 되게 하였으며, 부소와 부우 및 작은 아들인 부여는 모두 나라의 서쪽 땅에 봉하니, 구려(句麗=고리)와 진번(眞番=청구지역) 및 부여(夫餘) 등의 여러 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그 후에 부루가 또 동쪽에서 온 세 사람을 각지에 봉했는데, 후세의 옥저(沃沮)와 졸본(卒本) 및 비류(沸流) 등의 명칭은 모두 이 봉함을 받은 나라의 이름에서 생겨났다. 단씨(檀氏)의 시대를 통하여 무릇 큰 나라는 아홉이요 작은 나라는 열둘로서, 나누어 천하의 모든 고을을 다스렸는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