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의 노신사, 웃음소리조차 한 편의 음악과도 같은 지휘자 윤학원. 인천시립합창단 예술감독 겸 지휘자인 그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유명인이 되었지만, 사실은 오랫동안 한국 합창계를 이끌어온 백전노장이다.
선명회 어린이합창단, 대우 합창단, 서울레이디스 싱어즈, 인천시립합창단 등 그의 손을 거친 합창단은 마술처럼 모두 세계 최고의 합창단으로 거듭났다. 사람의 목소리만큼 아름다운 악기는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일흔을 훌쩍 넘긴 지금도 ‘합창이 없는 인생은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하는 그에게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는 법’을 듣는다.
<지휘자 윤학원 인터뷰 영상>
초등학교 1학년 때 음악 선생님이 저더러 노래를 참 잘한다며 다른 반 수업에도 데리고 다니시며 시범창을 시키셨어요. 그때부터 '나는 음악을 할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성악가를 꿈꾸게 되었고, 대회에 나가 상도 많이 받았어요.
그러다 첫 번째 시련이 중학교 2학년 때 찾아왔어요. 경연대회에 나갔다가 무대 위에서 목소리가 안 나오는 바람에 깜짝 놀라 펑펑 울면서 내려오고 말았거든요. 변성기였던 건데 그 당시에는 '성악은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죠. 게다가 음악하면 먹고 살기 힘들다는 게 그 시대의 통념이다 보니 아버지께서도 음악을 그만두고 화학자가 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인천공고 응용화학과에 들어갔어요.
신기하게도 인천공고에 밴드부가 있었어요. 끌리듯 밴드부에 들어갔고, 그게 오히려 음악에 심취하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어릴 때부터 다니던 교회 성가대에서도 계속 활동을 했고요. 고3 때는 지휘도 시작했죠. 그 당시 교회 지휘자였던 전석환 선생님이, 너는 꼭 지휘자가 돼야 한다, 면서 직접 연세대 작곡과 입학원서를 사가지고 오셨어요.
하지만 제 스스로 지휘자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건 대학교 3학년 때였어요. SCA 합창단 지휘를 맡아 '바흐 칸타타 106번'을 한국에서 최초로 연주하면서, 제가 지휘자로서 역량이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죠.
사람의 목소리는 악기와는 달라요. 목소리에는 사람의 감정이 그대로 묻어있거든요. 마음에 있는 생각이 목소리에 배어져 나오는 거죠. 더 나아가 살아온 인생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는 게 아주 매력적이에요. 게다가 합창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조화를 이뤄 화음을 만드는 거잖아요. 아주 아름다운 일이죠.
청춘이라…, 제 청춘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본격적인 청춘의 시작은, 대학을 졸업하고 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인 것 같아요. 그때 제가 인천에서 조직한 합창단이 네 개였어요. 제가 맡은 반 아이들을 데리고 아침에 한 시간, 방과 후에 한 시간씩 연습을 해서 전국대회에 나가서 1등을 하기도 했고요.
시작은 동네 꼬마들을 15명을 모아 어린이합창단을 만든 거였어요. 노래를 잘해서 뽑은 아이들이 아니었고, 사탕 사주고 아이스크림 사주면서 데리고 온 애들이었죠. 집에서 연습했는데, 마루와 안방 사이 미닫이문을 열어놓아야 겨우 다 앉을 수 있었어요.
그렇게까지 하면서 어린이 합창을 했던 건 대학교 4학년 때 곽상수 교수님께 배웠던 소년 합창단 지도법을 꼭 한번 실험해보고 싶어서였어요. 머릿속에 온통 합창에 대한 생각만 들어있었을 때였죠. 연주회는 예식장을 빌려서 했는데, 포스터까지 직접 만들어 시내 여기저기 붙이러 다녔어요. 애들이 생각 외로 굉장히 훌륭하게 노래를 하니까 학부모님들이 엄청 좋아하셨어요. 인천문화원의 제안으로 그 아이들과 인천문화원 어린이합창단을 만들게 되었고, 아이들이 커서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극동방송 소년소녀합창단이 꾸려졌죠.
나중에 녹음한 걸 들어보니 선명회 합창단과 소리가 거의 같았어요. 제 방법이 맞았구나, 확인을 한 거죠. 사람의 목소리는 올바른 방법으로 꾸준히 연습하면 몰라보게 아름다워질 수 있어요.
과도기가 있었죠. 극동방송에서 합창단을 지휘하던 중 극동방송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게 되었어요.
PD 겸 아나운서 겸 엔지니어 일을 하는 건데, 수천 장이 넘는 클래식 LP판을 들으며 일할 수 있다는 게 엄청난 매력이었어요. 문제는 당시 극동방송 월급이 교사의 절반밖에 안 된다는 거였는데, 집사람이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이해해줘서 옮길 수 있었어요. 돈에 대한 욕심을 버렸던 집사람이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하다 싶어요.
하루 30분씩 클래식 해설을 했는데, 2년 정도 하니까 바흐부터 현대음악까지 한 바퀴를 돌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유명한 합창단의 연주를 비교할 수 있었던 게 어디서도 할 수 없는 귀한 공부였어요. 그 시간을 거치면서 지휘자로서의 기반을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이후 지휘자로서의 삶이 본격적으로 펼쳐졌을 때, 극동방송에서 매일 차곡차곡 쌓았던 내공이 정말 큰 힘이 되었어요.
저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에요. 하지만 열심히, 오랫동안 하는 건 누구보다 잘한다고 자부합니다. 선명회 어린이합창단을 맡아 34년 동안 지휘했고, 영락교회 성가대도 38년, 그리고 중앙대학교 교수도 은퇴할 때까지 25년을 했으니까요. 서울레이디스싱어즈도 아들한테 물려줄 때까지 10년을 했고요. 인천시립합창단도 16년째예요. 어찌 보면 융통성이 없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하나를 맡으면 꾸준히 하는 것 하나가 내세울 만한 거죠.
결국은 제가 좋아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겠죠. 한 번씩 제게 합창이 없었더라면 어찌했을까 싶을 때가 있을 만큼, 합창을 할 때 행복하고 기뻐요. 오래해도 지루하지도 않고요. 따지고 보면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데, 합창에 대해서만큼은 자신이 있어요. 어긋나고 좋지 않았던 소리가 아름다운 소리로 바뀔 때 그 희열은 이루 말할 수가 없거든요.
물론 다른 지휘자의 자리나 다른 음악가의 삶이 더 크고 좋아보일 수도 있지만, 현재 제가 하고 있는 게 가장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야만 한다는 신념이라기보다는 그냥 그렇게 살아온 습관인 것 같아요.
지휘자는 합창단을 놓고 작업을 하는 사람이지요. 바느질 한 땀 한 땀이 모여 옷이 만들어지는 것과 같아요. 한 땀이라도 건너뛰어서는 완벽하고 좋은 옷이 될 수가 없듯이, 합창에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정확한 음정과 박자를 바탕으로 소리를 엮어야 훌륭한 합창이 됩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잘해야지 누구 한 명이라도 제 역할을 못하면 무너지는 게 합창이거든요. 그래서 한 명도 소홀히 할 수 있는 단원이 없어요. 지휘자는 혼자 성과물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단원들을 통해서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니까요.
지휘자가 해야 될 일은 생각보다 아주 많아요. 지휘뿐만이 아니라, 일 년 계획 및 프로그램 결정, 악보 분석, 단원 교육법 개발 및 단원 관리, 연주회 홍보 등등, 끝이 없어요. 하다못해 포스터 하나, 단원들이 입을 옷 하나까지 신경을 써야 하지요. 그런 것들이 모여 좋은 연주회가 되는 거니까요.
그러기 위해서 지휘자는 올바른 목표를 세우고, 거기에 따라 누구보다 성실하게 계획하고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다른 분야의 리더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카리스마는 곧 신뢰라고 생각해요. 리더의 말을 믿을 수 있으면 그 리더에게는 카리스마가 있는 거죠. 카리스마는 강압적으로 억눌러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속의 지휘자는 현실에서는 참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인물이죠. 허허.
극동방송이 인천에서 서울로 이사하면서 저도 서울로 올라왔어요. 서울에 와서는 마드리갈 합창단을 만들었는데, 처음 보는 지휘자라 그런지 사람들이 모이지 않더라고요. 인천에서야 네 개의 합창단을 지휘하면서 어느 정도 이름이 있었지만 서울에서는 완전히 무명이었으니까요. (오시자마자 또 합창단부터 만드셨군요?) 네. 하하. 그래서 교회 성가대 반주자를 하던 여학생한테 친구들을 좀 데려와라 했더니 글쎄, 그 친구가 전공자들로만 20명 정도를 데리고 온 거예요. 예쁜 여학생들이 있으니까 남자 합창단원들도 저절로 모여 멋진 합창단이 만들어졌죠.
합창단 결성 두 달 만에 크리스마스 페스티벌에 나갔는데, 마드리갈 합창단이 1등을 했던 걸로 기억해요. 바로 그 자리에 선명회 원장님이 오셔서 저를 보신 거죠. 선명회 합창단 이전에는 모두 제가 만든 합창단이었는데, 처음으로 기존의 합창단에 발탁이 된 거였어요.
제가 맡기 전 10년 동안 세 분의 지휘자가 있었는데 모두 아파서 그만 두셨죠. 세계 순회 연주를 한 번 나가면 6개월씩 다녀야 했으니 그럴 만도 했어요. 100개가 넘는 도시를 돌아다니며 연주하는 엄청난 강행군이었으니까요. 제가 맡았을 때는 그나마 4개월 정도로 줄었어요. 또 선임 지휘자분들에 비해 나이도 많이 어렸고요.
그때는 애들하고 합창하는 게 너무 좋아 힘든 줄도 모르고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다녔던 것 같아요. 정말 열정적으로 했죠. 그런데 미국 순회공연을 2개월쯤 했을 때쯤 어느 날 밤, 이동하는 버스에 앉아 무심코 창밖을 보다가 유리창에 비친 제 얼굴에 눈물 자국이 나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던 일이 있어요. 나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몸이 많이 지쳐있었구나, 했죠.
애들은 잠만 자고 나면 기운이 펄펄 나더라고요. 오히려 어른들이 아침마다 절절 맸죠. 선명회 합창단에는 사정이 어려운 어린이들이 많았어요. 선명회 초기에는 고아들만 받았었어요. 제가 맡았을 때는 고아가 3분의 1정도였는데, 그 외의 아이들도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넉넉한 집 아이들은 없었어요. 그래서인가 잘 사는 나라에 공연을 가면 애들이 어찌나 빨리 크는지, 4개월이 지나 순회 연주가 끝날 때쯤에는 가져갔던 옷이 안 맞을 정도였죠.
자주 이야기하는 에피소드인데, 호주 캔버라 공연에서 연주가 끝나고 무대 뒤에서 애들이 울더라고요. 그날 공연이 특별히 좋았거든요. 연주가 잘 되면 지휘자가 굳이 손짓을 크게 하지 않아도 눈과 눈만으로도 충분히 교감이 이뤄지는데 그날이 바로 그랬죠. 뻔히 알면서도 애들한테 왜 우냐고 물었어요. 아이들이 음악이 너무 좋아서요, 그러는데 저도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런 날은 우리의 교감을 알아챈 청중들도 많이 울어요. 서로 다 느끼는 거죠.
음악에는 치유의 힘이 있거든요. 노래가 잘 되면 아주 뭉클한 전율의 순간이 오고, 바로 그때 심신이 말끔하게 정화되고 영혼이 고양되는 느낌을 받게 되죠. 근심과 걱정은 사라지고 열정과 충만함만이 남아요.
지금은 좀 덜하지만 예전에는 음악에 관해서는 굉장히 엄격한 지휘자였던 게 사실입니다. 그래도 아이들과는 참 가깝고 좋은 사이였어요. 진심이 통한다고 할까요? 선생님이 무슨 마음으로 야단을 쳤는지 어린이들도 이해하고 느끼는 거죠. 물론 야단맞고 우는 녀석들도 많았죠. 그래도 ‘좋은 것'을 향해 함께 고생해 성취하는 기쁨을 아이들도 알았어요. 다들 눈이 얼마나 초롱초롱했는데요. 요즘도 제 생일이 되면 잊지 않고 그 옛날 단원들이 축하 메시지를 보내와요.
인천시립합창단이 내부 문제로 해체된 뒤 6개월쯤 지났을 때 제안을 받았어요. 프로 합창단은 다시는 안 맡겠다고 결심했을 때라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고심 끝에 용기를 내서 맡기로 했죠. 이왕 하는 거면 잘해야 한다는 게 제 신조였기 때문에, 목표를 '세계 정상을 향하여'로 잡았어요. 중앙대에서 받은 안식년 6개월을 이용해 기초부터 다져나가기 시작했어요. 저로서는 인천시립합창단을 세계 최고의 합창단으로 만들고 싶은 게 희망이고 욕심이었죠.
ACDA 컨벤션은 세계 합창계의 가장 큰 행사 가운데 하나인데, 그 무대에 인천시립합창단이 서면서 세계 4대 합창단으로 인정을 받았어요. 첫 곡에서 기립박수를 받은 건 ACDA 50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ACDA 회장이 말하더군요. 우리가 고생하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보람이었죠.
16년 전에 인천시립합창단 지휘를 시작하면서 인천시에 전임 작곡가를 요청했었어요. 전임 작곡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대우 합창단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독일에 가서 바흐의 곡을 연주했을 때였어요. 그 자리에 함께한 독일 합창단 지휘자에게 솔직한 평가를 부탁했더니, 소리도 음정도 다 좋은데 단 하나, 독일인의 정신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때 느낀 건 독일 사람이 아니면 바흐를 세계 최고로 연주하기는 힘들겠구나, 세계 최고가 되려면 우리 음악을 해야겠구나, 하는 거였어요.
작곡가 우효원 씨와 함께 '한국적인, 세계적인, 현대적인' 음악을 모토로 잡고 작업을 시작했고, ACDA 컨벤션에 선 것도 그 결실이라고 생각해요.
저희 합창은 대체로 움직이는 편이죠. 그건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기도 해요. 움직이는 합창을 시작한 건 선명회 어린이합창단 초창기부터에요. 시대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음악인들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해요. 그래야 청중들이 노래를 즐겁게 듣고 연주회에 온 보람을 느낄 수 있죠.
연주회 일 년 계획이 나오면 프로그램마다 어떤 변화를 줄 것인지 생각해요. (혼자서 하시나요?) 그럴 리가요? 안무가를 초청하기도 하고 작곡가가 아이디어를 내기도 하고 또 저도 의견을 내고 그러죠. 혼자만의 머리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걸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일이죠. (준비 과정부터 함께한다는 것 역시 합창의 정신과 맞는 것 같습니다.) 네, 바로 그렇습니다.
이제 나이가 많으니까 젊은 사람과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하죠. 요즘은 페이스북을 아주 열심히 합니다. 한국 사람뿐만 아니라 외국 사람의 페이스북도 많이 찾아다녀요. 좋은 아이디어가 아주 많더라고요. 젊은 감각을 얻는 데 아주 그만인 것 같아요. (생각나시는 게 있다면요?) 수도사 옷을 입고 모자로 눈까지 가리고 큼지막하게 쓴 글자를 들고 할렐루야를 부르던 거나 오케스트라가 연주 도중 갑자기 일어나 합창을 하는 영상을 보면서 아, 정말 신선하다고 느꼈어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습니다.
합창을 하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게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듣는 거예요. 초중고 때부터 합창을 한다면 그런 훈련이 저절로 되는 거죠. 자기 소리만 질러서는 결코 합창이 되지 않거든요. 민주주의 사회의 밑바탕이 합창을 통해 세워질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해요.
합창 안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함축되어 있어요. 나와 상대방 사이의 약속을 지켜야 하고, 자기 것을 지키면서 상대방을 배려해야 하죠. 이기주의는 고독과 고립감만을 불러오지만, 합창을 통해 다른 사람과 마음을 모으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다 보면 충만한 행복을 느낄 수 있어요.
그리고 합창에도 때때로 독창자가 있잖아요? 독창자는 자기의 의무를 확실하게 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은 독창자를 질투하는 게 아니라 독창자가 돋보이도록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해요. 그런 과정을 통해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배포와 아량이 생기고 인간성이 좋아지는 거죠.
혼자서만 공부하고 혼자 무언가 했던 사람은 다른 사람과 뭘 하는 걸 좋아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합창한 사람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함께 해결하려고 하고요.
음, 선명회 어린이합창단 시절에 아이들도 남달랐어요. 예를 들어 몇 십 분 시간이 남을 때, 지금 잠을 자면 좀 있다가 공연을 더 잘 할 수 있지 않겠냐고 하면 다들 들어가서 양말 벗고 잤어요. 보통 아이들 같으면 투덜대면서 그냥 놀 텐데 그러지 않았죠. 그 힘으로 4개월을 다닐 수 있었어요. 합창을 통해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보다 공동체를 먼저 생각할 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야 아마추어 합창단이 많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요. 아마추어 합창단원들은 음악이 좋아서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스스로 모여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사람들이에요. 합창을 하며 행복해서 어쩔 줄을 모르거든요.
인천시립합창단은 시민의 세금으로 움직이는, 즉 시민들을 위해 존재하는 합창단이에요. 그러니까 '찾아가는 음악회'는 인천시립합창단의 의무와 같은 거죠. 얼마 전에도 임대 아파트에서 음악회를 열었는데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분이 무대 뒤로 오시더니 자그마한 선물과 편지를 주시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노래를 하고 싶었는데 여건상 할 수가 없어서 속상했는데 이렇게 시립합창단의 노래를 들을 수 있어서 참 고맙다는 내용의 편지였어요. 그런데 그분이 편지를 전해주실 때 우시더라고요. 덩달아 가슴이 뭉클했죠.
저는 아직도 젊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려고 애쓰고 있어요. 저보다 훨씬 오래 사시고 훌륭한 연주를 하셨던 분들을 롤 모델로 삼고 있지요. 한 분은 미국 최고의 지휘자 로버트 쇼예요. 88세까지 사셨는데, 86세 때 ACDA 컨벤션에서 브람스를 연주했죠. 그때 청중들이 모두 울었어요. 그 자리에 있었는데 눈물이 그냥 솟구쳐 오르더라고요. 음악이 그만큼 아름다웠어요. 또 한 분은 스웨덴의 에릭 에릭손이란 분이에요. 그분은 지금 90세가 훨씬 넘었는데도 여전히 현역 지휘자로 활동하고 계세요.
그에 비하면 저는 아주 젊지 않습니까? 이분들을 생각하면서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냥 늙는 게 아니라, 음악적인 경륜을 쌓고 질적인 발전을 거듭해서 나이가 들수록 더 감동을 주는 음악을 해야겠다고 다짐하죠.
표현이 좀 그렇지만 '잘 늙은' 사람들을 보면 모두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우리가 하는 많은 것들이 시간이 흐르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많아요. 그러니 어떤 것에 너무 집착할 필요가 없는 거죠. 그래서 시시때때로,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지 않은지 점검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물론 어떤 것은 꼭 집착해야 할 것도 있어요. 예를 들어 훌륭한 합창을 하겠다는 것에는 집착을 해야죠. 그러나 1등을 하는 것에 집착하면 상처를 받을 수도 있잖아요? 솔로몬의 구절은 삶의 여유를 갖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또 긍정적인 포기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죠.
성실을 다시 강조하고 싶어요. 설령 능력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성실하게 해나가다 보면 일은 이루어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는 법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