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보호감호소 취재를 준비하다 문득 시인 정호승의 시 <갈대를 위하여>를 떠올렸다. 그러다 중얼거렸던 구절, ‘쓰러지지 않아야만 뿌리는 뿌리다’. 사회는 수감자들이 쓰러지지 않도록 보호한다는 구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정녕 거기서 힘들어 쓰러진다고 하는 이율배반-.
눈보라가 친다 사라지지 마라
눈보라가 친다 흩어지지 마라
눈보라가 친다 길이 끊어진다
이미 살아갈 날들까지 길은 다 끊어진다
(중략)
사랑이 깊으면 증오도 깊다
눈보라 사이로 밤열차는 지나간다
피리소리는 끊어지고 바람소리만 들린다
쓰러지지 않아야만 뿌리는 뿌리다
흙을 움켜잡고 있을 때에만 뿌리는 뿌리다
청송보호감호소 수감자들은 자신의 죗값에 맞는 형량을 다 채우고도 다시 보호감호라는 사회보호법에 의해 사회와 격리돼 교도소와 진배없는 생활을 하며 기한을 채운다. 그들은 정해져 있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절망감과 무기력으로 살아갈 날들까지 포기하기 일쑤다. 흙을 움켜잡을 기운마저 소진해 사회로 복귀할 심신의 기력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쓰러지지 않아야만 뿌리라고 하잖는가?
툭하면 ‘대가리 세기’…그렇게 가는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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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우회 관계자는 “동양 최대 규모의 교도소가 있는 곳이라는 소문 때문에 서울에서는 청송 사람들과는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며 “산자수명하고 인심 좋은 고향이 나쁘게 비칠까봐 상영중지가처분신청을 냈다”고 회고했다. 청송의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고향 사람들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지적이다.
경상북도에서도 산세가 수려하기로 유명한 주왕산! 하늘을 찌를 듯 솟은 기암과 절벽들로 둘러싸인 절골계곡·신성계곡·무계계곡의 절경을 떠올리면 이들의 주장이 결코 무리가 아님을 실감한다. 중앙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인 1980년대만 해도 청송은 너무 오지였다. 삼면이 반변천으로, 뒷면은 광덕산으로 둘러싸인 형국이었으니까.
이런 조건을 감안해 1980년 들어선 신군부는 보호감호소를 여기에 만들지 않았나 싶다. 당시 보호감호소의 위치는 청송이 아니라 서해 안마도가 유력하게 검토되었다. 그러나 식수와 보안 등의 이유로 오지인 BYC(봉화·영양·청송의 이니셜) 벨트에 최종 낙점됐다는 후문이다.
최초의 보호감호 대상자는 2,400명의 삼청교육생들이었다. 삼청교육생들은 처음 1년간 일반 군부대에 수용된 상태에서 고된 교화교육을 받았다. 그러다 청송보호감호소가 완공된 1981년 12월 감호소에 최초로 수용됐다.
75만 평으로 동양 최대. 초기 제1, 2, 3 보호감호소로 설립됐다. 그후 교도소 기능이 추가돼 1교도소와 1, 2감호소로 운영됐다. 1992년에는 제2교도소가 신설됐다. 2005년 감호소 수감자들이 줄어들면서 제1감호소가 청송직업훈련교도소로 바뀌었고, 제2감호소도 청송감호소로 명칭이 변경됐다. 교도소와 감호소 시설에는 5,700명을 수용 가능하다.
새벽 6시40분. 수감자들은 기상한다. 눈을 들어 한여름의 푸름을 자랑하는 광덕산에 흘낏 시선을 던진 후 모포를 갠다. 아침방송이 요란하다. 후다닥 세수와 청소를 한 후 이어지는 것은 아침 ‘대가리 세기(점호)’! 밤새 이상 없음. 다시 나팔소리 울려 퍼진다. 휴~ 이상 없음. 아침 급식을 위해 그릇을 식기 투입구에 가지런하게 정렬한다. 그러고는 두 줄로 앉아 식사를 한다. 식사를 끝마친 시간은 오전 8시5분.
이제 공장에 출력(작업) 갈 차례다. 다른 곳으로 간다는 것 자체가 즐겁다. 4명이 부대끼는 2.6평(독실은 0.96평)공간으로부터 유일한 탈출이기에 늘 기분은 ‘업’된다. 작업장에 도착하면 다시 ‘대가리 세기’다. 오전 작업은 8시15분부터 11시30분까지.
일이라고 해야 고작 비닐장갑 갯수 세어 포장하기, 종이 쇼핑백에 손잡이용 끈 끼워 접기 , 장기수의 경우 상여 꽃 만들기 등 단순하기 그지없지만,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등급 심사에 지장이 있기 때문에 다들 열심이다. 눈과 어깨 통증을 견디느라 힘겨운 모습들이다.
11시30분에서 오후 1시까지 점심식사와 휴식. 점심은 작업장에서 먹는다(독방과 환자는 각자의 방에서 먹는다). 다시 오후 작업을 하고 대가리 세기를 한 다음, 4시10분에 각자의 방으로 입실한다. 입실하고 나면 4시45분까지 또 대가리 세기가 이어진다. 5시30분까지 저녁식사를 한 후, 이제는 휴식이다. 아, 중간에 운동이 있다.
운동은 조마다 시간이 달라 오전 혹은 오후에 한다. 30분씩 바깥바람을 쐬는 정도다. 운동 나가기 전후, 물론 대가리 세기를 한 번씩 더 한다. 온종일 대가리 세다 볼일 다 본다. 저녁 8시30분까지 교화 방송을 듣는다. 그러고 나면 취침이다. 하지만 소리를 죽이고 각자의 시간을 갖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도관이 순찰할 때는 잠자는 척한다. 이렇게 수감자의 밤은 깊어간다.
“266명 피감호자 하루빨리 석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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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장갑 한 켤레 훔친 죄로 6년5개월(징역 1년6개월, 보호감호 4년11개월)을 청송에서 보낸 K씨도 있다. 그런가 하면 강도죄로 7년 징역에 보호감호 4년, 합해서 11년을 청송에서 보낸 S씨는 감호소 생활 때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접하고 장례식만은 가보겠다고 탄원했지만 거절당했다.
지난 6월29일 임시국회에서 그동안 이중처벌과 재범 우려에 대한 판단 기준의 모호성 때문에 논란이 된 사회보호법폐지법률안이 통과됐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의 국가보위입법회의가 삼청교육생들을 사회로부터 격리하기 위해 만든 사회보호법이 25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사회보호법폐지법률안은 2004년 열린우리당 법사위원인 최용규 의원이 발의하고 150명의 열린우리당 의원 전원이 서명해 그해 12월14일 법사위 소위원회에 회부됐다. 법안은 2005년 6월22일 공청회를 거쳐 6월29일 소위원장 심사보고와 법안 수정작업을 거쳐 전체회의에서 의결되었던 것이다.
이번 사회보호법 폐지는 2002년부터 계속된 보호감호소 안팎의 노력이 낳은 결실이었다. 청송감호소 피감호자들은 7차례의 단식으로 법의 부당성을 호소했는데, 결국 1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여기에 22개 시민·인권단체 모임인 ‘사회보호법 폐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도 활동을 펼쳤다. 국회의원과 인권운동가들의 움직임 또한 간단치 않았다.
2003년 5월 피감호자 760여 명 중 550여 명이 동참한 단식이 분위기를 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들은 근로보상금 인상과 가출소 확대, 사회보호법 폐지 등을 요구했다. 그해 9월29일 사회보호법 폐지를 골자로 한 단식농성은 다시 이어졌다. 모두 450명이 가세했는데 급기야 10월4일 피감호자 박모 씨가 숨졌다.
일련의 단식농성사건에는 <코리안 마피아>의 저자 이상훈 씨가 빠지지 않는다. 조폭 두목 출신인 이씨는 사회보호법에 의해 13년6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면서 이 법의 폐습을 가장 절실하게 실감한 인물. 결국 그는 인권운동가로 변신해 법 폐지운동에 앞장섰다.
잠시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지나가야 할 것 같다. 이상훈 씨는 폭력조직 대호파 두목으로 활동하다 체포돼 1983년 10월 범죄단체 조직 등의 혐의로 징역 5년, 보호감호 5년을 선고받고 청주교도소에 수감됐다. 당시 청주교도소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수감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한 교도관이 김 전 대통령이 애지중지 기르던 화단의 꽃을 꺾어버리는 것을 보고 그 교도관을 폭행하는 등 수차례 난동을 일으킴에 따라 청송보호감호소로 이감됐다. 하지만 그는 이미 청주교도소에서 민주화 사범을 면회 오던 서울대 운동권 학생들이 넣어주는 이념서적을 통해 인권의식을 키우고 있었다.
1994년 출감한 이씨는 보석상으로 성공한 후 청송보호감호소 단식농성 중 사망한 박모 씨 사망사건을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에 보내 위원회로부터 그가 교도관들의 집단폭행으로 사망했음을 인정받았다. 15년여에 걸친 피땀어린 투쟁의 결실이었다. 이씨는 법 통과 후 청송감호소에 수감되어 있는 266명의 피감호자들을 하루빨리 석방하라고 법무부에 강하게 촉구했다.<상자기사 참조>
문제는 사회보호법을 대신할 치료감호법안이다. 청송보호감호소 수감자들은 사회보호법이 폐지됐음에도 바로 사회의 일원이 되지 못한다. 가출소 심사에 의해 곧바로 나오지 못하는 266명의 피감호자들과 사회보호법 폐지에도 불구하고 그 혜택을 전혀 보지 못하는 500여 명의 감호병과자들은 최악의 경우 선고받은 형기를 다 채운 후 이미 폐지된 사회보호법에 의해 다시 감호소에서 보호감호기간을 채워야 하는 괴이한 일을 당해야 할 판이다. 결과적으로 청송보호감호소는 앞으로도 무려 10년이나 더 유지돼야 한다는 계산에 부닥치고 만다.
법 폐지됐지만 ‘청송’ 10년 더 유지될 판
한나라당 장윤석 의원은 “현재 청송보호감호소에 수감돼 있는 사람들은 법무부로부터 조기 가출소를 약속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법무부 관계자의 말은 다르다. “국회에서 사회보호법이 폐지돼도 원칙적으로 현재 청송보호감호소에 있는 사람들은 예정된 수용기간을 다 채워야 한다.
그러나 법 폐지의 취지를 고려해 이들의 조기 가출소를 검토하고 있다”는 것. 말하자면 개별 심사 결과에 따라 수용 여부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처지다.법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릇에 어떠한 내용을 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 외국에서도 유용하게 제정돼 사용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법을 만든 근본 취지 때문에 대표적 악법이라는 불명예를 떨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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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필명이 ‘시골의사’인 안동 신세계병원장 박경철 씨 이야기로 이어가 보자. 그는 청송에서 가까운 안동에 산다는 이유로 청송교도소나 감호소 사람들을 치료하며 그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결실이 단행본 <아름다운 동행>.
박 원장은 수형자들이 병원으로 찾아오면 썩 반갑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외부진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은 대개 무기수이기 때문. 그들은 삶에 대한 희망을 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건강을 돌보지 않기 일쑤고, 극단적으로는 자해라도 해서 오랜만에 바깥세상을 구경하러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중에서 칫솔이나 못을 삼킨 환자들이 가장 많았다. 이들은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두리번 두리번 바깥 구경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한다. 창피함은 안중에도 없고 산천과 사람들 냄새가 그리워 눈이 카메라 렌즈라도 된 듯 무수한 영상을 찍는다고…. 청송에 수감될 정도면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범자들인데, 이런 모습을 보면 가슴이 짠하다고 했다. 그들은 상처가 커 오래 입원치료받는 것을 무슨 큰 영광으로 생각하며 얼굴에 희색이 돈다는 것이다.
청송의 경비는 살벌하기로 소문났다. 1개도 아니고 4개의 교도소와 감호소 시설이 있는 만큼 교도경비대의 경비도 삼엄하다. 일반 교도소는 1개 소대가 경비를 하는데, 청송의 경우 대대병력이 감당한다. 제2교도소 옆에서는 따로 1개 소대가 경비를 한다. 이곳은 무기수나 장기간 수형생활을 하는 수형자들을 수용하기 때문에, 교도관들이나 경비가 특히 삼엄할 수밖에 없다.
각 건물의 옥상에서 총을 들고 주위를 살피는 군인들의 모습은 전쟁터를 연상케 한다. 이곳에 근무하는 교도관은 대략 1,000여 명으로, 직원 아파트 18개 동이 있다. 이 정도면 작은 마을 규모인데, 이들이 소비하는 물자가 지역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청송 출소자 재수감률 80%에 이른다는 통계도
이곳 교도관 자녀들의 교육 또한 문제점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살벌한 교도소이고, 군인들이 총을 들고 경비하는 문을 지나 학교에 오간다. 또한 초등학교는 가까운 면으로 다니는데, 중·고등학교는 좀 더 큰 도시로 보내려는 교육열 때문에 직원의 절반 정도가 안동에서 출퇴근한다. 환경이 이러니 교도관들이 이곳 청송으로 오는 것을 싫어하여, 직원 충당으로 애를 먹는다고 이곳 관계자가 귀띔했다. 수형자는 보호감호를 받을 정도의 노련한 범죄자들인데 교도관들은 지역에서 새로 충당한 신참이니 수감자들을 관리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다. 교도관들은 그들 자신과 가족들의 많은 고충과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우리 사회의 안전망 구실을 하고 있다.
사회보호법폐지법률안통과에 대해 걱정스러운 입장을 보이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다. 말하자면 일종의 직업의식. 한 관계자는 “청송교도소·감호소 수감자들은 평균 전과 7범이고, 4범에서 10범이 넘는 경우도 많다. 또한 이곳 출소자 중 재수감률이 80%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다. 따라서 이들이 일시에 사회로 풀려나가면 사회의 안전망에 구멍이 뚫리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고 말했다.
법무부나 검찰·교정국 등의 제도권에서 내는 목소리는 더 직설적이다. 비록 시민운동가 등이 인권을 외치며 출감을 요구하지만, 정작 본인이든 주변 사람들이든 한 번 당하면 생각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검찰국장 출신인 한나라당 장윤석 의원은 “그동안 보호감호제도에 대해 비판이 많았고, 시대가 감호제도의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에 국민적 요구를 수용해 보호감호를 폐지하되 사회보호를 위해 상습 범죄자에게 누진해 형량을 높이는 삼진아웃제도를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새로 입법된 치료감호법안의 치료시설 수용 기한은 15년을 초과할 수 없다는 규정은 결과적으로 심신장애 또는 마약·알코올류 등의 중독자들의 치료에 기한을 두는 것이어서 참으로 우려할 만하다. 세계에서 치료 기한을 법으로 정하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며 이는 법리상으로도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사회보호법 폐지를 줄기차게 주장해 폐지법안을 대표로 발의한 민변 출신 변호사인 열린우리당 최용규 의원은 새로운 치료감호법안을 마련해 입법을 이끌어냈다. 최 의원은 “16대 국회 때는 사회보호법 폐지를 아무리 외쳐도 귀 기울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인권의식이 높아진 17대에 비로소 뜻을 관철했다”고 말했다.
치료감호법안 악용 여부 놓고 또 신경전
최 의원은 “사회보호법 입법 자체가 전두환 군사정부 시절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만든 대표적 악법이고, 법을 만든 의도 자체가 불순했다”며 그 입법 의도를 두 가지 꼽았다. “첫째는 사회적으로 깡패나 흉악범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것이고, 둘째는 법원의 온정주의를 불신했기 때문이었다”고 지적했다. 감호소 수감자들이 아무리 중범죄자들이기는 하지만, 사람에 대한 희망의 끈만은 놓을 수 없다는 의미다.
사회보호법 폐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의 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2003년 3월 22개의 인권·시민단체가 모여 사회보호법의 위헌성과 인권침해 요소들을 알리기 위해 출범한 연대 기구는 2002년 청송감호소 내 피감호자들의 농성을 이끌면서 법무부 장관 면담과 공개토론회, 집단 헌법소원 등의 일을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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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보호법이 폐지되는 데 따른 최대 수혜자는 폭력조직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57) 씨다. 그는 보호감호 수감 중 받았던 심장협심증수술 후유증으로 구속집행정지를 신청했다. 검찰은 이를 받아들여 지난 6월30일 오후 안양교도소에서 그를 풀어줬다. 담당 판사는 “김씨에 대한 보호감호 처분 항소심 결과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보호법이 폐지된 만큼 풀어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김씨는 ‘인천 뉴송도호텔 사장 폭행사건’으로 1987년 징역 5년, 보호감호처분 7년을 선고받았고, 이어 1990년에는 범죄단체 ‘신우회’ 구성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김씨는 지난해 5월 형 집행이 만료되면서 보호감호처분에 따라 안양교도소에 수감됐다.
인권운동가 겸 사랑의빵나누기운동본부 상임대표 이상훈 씨는 친구인 김태촌 씨가 언론과 지나친 사회적 관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희망했다. 건강 악화로 서울대병원에 입원 중인 김태촌 씨는 앞으로의 인생을 신앙생활로 보낼 것이라고 했다
청송감호소에 수감 중인 266명의 피감호자들과 감호병과를 받은 500여 명은 7월 말까지 새로 구성되는 치료감호위원회의 심사를 받는다. 치료감호위원회는 치료를 강화한 새 법안(치료감호법안)의 취지에 맞춰 정신과 의사를 한 명 더 늘려 3명으로 하고, 다른 위원도 교체해 9명으로 이루어진다. 이와 관련, K검사는 8월 초에 구체적인 내용을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치료감호법의 구체적 시행 방법을 놓고 벌써 논란이 거세다.
작은 희망의 뿌리 생각하며 해법 찾아야
사실 법무부도 이 부분을 아예 외면하거나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4년 인권위원회의 사회보호법 폐지 권고에 부응해 피감호자를 대폭 줄여나갔던 것. 2003년 600여 명, 2004년 700여 명이 풀려나 2005년 6월 말에는 수감자가 266명으로 크게 줄었다. 피감호자가 줄어들자 법무부는 제1감호소를 직업훈련교도소로 전환하고, 제2감호소는 청송감호소로 명칭을 바꿨다
이를 감안하면 치료감호법을 악용할 것이라는 판단은 아직 섣부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국민의 안전과 피감호자의 인권 사이에서 가장 합리적인 대안을 찾아낼 것이라고 믿어야 할 뿐이다.필자의 취재를 동행하면서 소상한 설명을 곁들여준 홍남용 교화위원의 말을 옮길 필요가 있겠다. 그는 30여 년을 교도소 교화위원으로 일하고 법무부 교정대상까지 받았다.
“60이 넘은 한 전과자는 홍 위원의 오랜 교화에도 얼마 전 또다시 잡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뻔하지 않습니까? 또 한 건 했습니다’라며…. 나는 분노와 실망이 겹쳐 ‘다시는 내게 전화하지 말라’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면서 그는 “죄는 밉지만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되는데, 그때는 너무 미웠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지금 청송에 있다.
지난 2월22일 있었던 청송보호감호소의 미담 하나를 소개하며 글을 맺자. 그날 감호소에서는 “살아서 지은 죄 죽어서 장기 기증으로 갚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장기 기증 서약이 있었다. 재단법인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는 청송보호감호소 감호자 160명의 장기 기증 우편 서약서가 도착했다.
자필 서명 대신 꾹 눌러 찍은 빨간색 지장. 보는 이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처럼 그들도 따스하고 착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다. 우리 사회의 작은 희망을 먼저 떠올리며 길을 찾는다면 복잡하게 얽힌 매듭이 술술 풀리지 않을까? 사람만이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