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바리.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기억한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현란한 기술과 악착같은 승부근성으로 민속씨름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는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의 뇌리 속에 경량급의 최강자로 우뚝 서게 만들었다. 지금은 지도자로 변신, 16년째 울산 성신고 씨름부를 지도하고 있는 구봉석(49) 감독을 만났다.
◇금강장사 최다 우승 구봉석이 민속씨름에 남긴 발자취는 실로 대단하다. 86년 2월에 프로 현대중공업에 입단해 은퇴한 91년 3월까지 수립한 금강장사 9회 우승의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여기다 태백장사 2회 우승기록까지 보태면 가히 경량급의 최강자로 손색이 없다. 다른 경량급 장사들과 마찬가지로 구봉석도 빠른 발기술이 특기다. 공격보다는 수비가 능해 상대를 제풀에 지치게 만든 뒤 전매특허나 다름없는 앞무릎치기로 상대를 괴롭히고 안다리와 배지기로 승부를 짓는 스타일이다. 이 과정이 재미있다. 넘어질듯 하면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그의 씨름은 관중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랬기에 명승부도 많이 연출됐다. 그가 네 번째 금강장사에 올랐을 때에 결승에서 맞붙었던 라이벌 김부영 장사(금강장사 7회 우승)와의 맞대결은 경량급의 백미로 손꼽힐 정도. 두 판을 먼저 내준 불리한 상황에서도 앞무릎치기와 안다리, 뒤집기로 내리 세 판을 따내며 극적인 역전우승을 일궈냈던 이 경기는 경량급의 묘미를 그대로 보여준 경기였다. ◇키가 작았던 아이 1961년 8월에 마산에서 태어난 그가 처음 샅바를 잡은 것은 무학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다. 워낙 키가 작아 입단거절까지 당한 구봉석은 마산중, 마산상고를 거치며 씨름선수로의 꿈을 이어나갔다. 중1때 그의 키는 고작 142㎝에 체구까지 왜소했으니 황경수 마산중 감독은 일년 동안 씨름을 중단시킬 정도였다. 그러다 키가 150대 중반까지 자라자 다시 씨름부에 복귀한 그는 중3학년 때는 최욱진, 이승삼 등과 함께 전국소체에 경남대표로 나가 충북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산상고로 진학한 뒤에도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그래도 매일같이 악착같이 훈련을 하며 꿈을 키워나갔다. 그런 그에게 빛이 비추기 시작한 것은 1979년에 열린 제36회 전국선수권대회였다. 고 3으로 이 대회에 출전한 구봉석은 70㎏급에서 처음으로 3위를 차지했다. 한동안 실감이 안 나 입상 트로피만 하염없이 쳐다봤다는 그에게 자신감은 가장 큰 수확이었다. 이후 경남대 시절부터 자신의 진가를 발휘했다. 대학 1학년 때 선수권대회에서 2위를 차지한 구봉석은 이듬해 4위, 3학년 때는 마침내 1위를 차지하며 그의 씨름인생은 탄탄대로가 열리는 듯 했다. ◇첫 태백장사 등극후 펑펑 울어 그러나 그에게 예기치 못한 슬럼프가 찾아왔다. 그가 대학 4학년이던 1983년 4월에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1대 천하장사대회. 두 해 후배인 이만기가 초대천하장사에 오르며 포효하는 순간 그는 고개를 떨궈야 했다. 태백급에 속한 구봉석은 강력한 우승후보로 손꼽혔음에도 32강전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이후부터 그는 참가하는 대회마다 줄줄이 초반에 나가떨어졌다. 힘에서 밀렸다. 태백급의 한계체중은 75㎏급. 그러나 다른 선수들이 감량을 하고 이 대회에 출전을 하는 상황에서 그는 오히려 살을 찌워야하는 처지였다. 어려운 집안 형편 탓에 잘 먹지 못하다 보니 기본적인 힘에서 딸려 제대로 실력발휘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후부터는 방황의 연속이었다. 자신감까지 잃어버린 구봉석에게는 참으로 힘겨운 시련의 날들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이가 있었다. 바로 당시 실업팀인 부산공동어시장 고광술 감독이었다. 순전히 그의 가능성만 보고 그에게 스카웃 제의를 한 것. 꿈같은 일에 구봉석도 어리둥절했다. 굳이 자신을 선택한 이유도 묻지 않았다. 이후부터 구봉석은 다시 씨름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선택한 팀의 믿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런데 부산공동어시장 입단하면서 그의 고민이 일거에 해결이 됐다. 잘 먹다보니 체중이 늘고 근력 또한 붙기 시작했다. 전국체전 제패와 두 번의 태백장사에 오르며 화려하게 재기했다. 첫 태백장사에 올랐을 때는 그동안의 마음고생에 우승트로피를 보며 밤잠을 못 이뤘다. “살면서 그때만큼 울었던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자다가 벌떡 일어나 얼굴을 꼬집어 볼 정도로 그때의 우승은 저에게는 너무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재기에 성공한 그는 프로무대가 출범하면서 중학교 은사인 황경수 감독의 부름을 받고서 86년부터 5년 동안 현대중공업에서 활약했다.
◇지도자의 길 한 체급을 올려 금강급에서 아홉 번의 우승기록을 세우며 승승장구하던 구봉석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상품성이 없다는 이유로 금강급이 폐지된 것.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길로 은퇴를 선언했다. 이때가 91년 3월,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지금도 그 때를 떠올리며 마음이 너무 아파요. 차라리 그때 씨름인들이 힘을 합쳐 막았어야 했는데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비록 샅바는 놓았지만 그의 씨름인생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2년간 팀의 트레이너로 지내다 지난 1993년에 지금의 울산 성신고에 부임한 직후 16년 동안 씨름부를 지도하고 있다. 그동안 숱한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고 김유황(금강급) 등 뛰어난 후배들을 배출하면서 지도자로서 능력을 입증했다. 지난 5월에는 강원도에서 열린 제46회 대통령기 전국장사씨름대회에서 경북 의성고를 4-2로 꺾고 단체전 정상에 올랐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갈수록 씨름을 하겠다는 애들이 줄고 있습니다. 중도에 포기하는 아이들도 많아 걱정입니다.” 구 감독은 유독 씨름근성을 강조한다. 선수라면 모름지기 강한 승부욕은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도철학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선수를 찾아보기 힘들어 많이 아쉽다고 한다. 이제 금강급이 다시 부활했다. 그의 최다우승기록도 언제가는 깨어질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경기에서 언제나 최선을 다해 멋진 승부를 펼쳤던 그를 기억할 것이다. “학창시절부터 고 김성률 교수님이나 황경수 감독님 등 많은 분들이 제게 아낌없는 관심과 사랑을 보내주셨었어요. 그런 분들이 없었으면 오늘의 저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 제가 받은 사랑과 따듯한 관심을 돌려주고 싶을 뿐입니다.”
사진설명=구봉석장사가 현역시절 결승전에서 승리해 금강장사 등극 후 환호하고 있다.(위) 씨름대회 출전 후 성신고 씨름선수들과 기념촬영하는 모습.(뒷줄 왼쪽에서 두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