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乘景公同草腐 천승 수레끄는 경공도 풀과 같이 썩는데
一瓢顔子柱天榮 한쪽박의 안자는 하늘의 영화를 기둥삼네
是知仁義眞良貴 이로서 알겠느니 인의가 진실로 참되고 귀한 것을
莫道公侯謾姓名 공후를 말하여 성명을 오만하게 하지 않을 것이니.
1) 정개청의 생애와 사상
박순 이중호 노수신에 이어 호남의 서경덕학파의 대표자이었던 정개청은 본관은 고성(固城), 자 의백(義伯) 호는 곤재(困齋)이며, 시호는 문청공(文淸公)으로 중종 24년(1529)에 부 세웅과 모 금성 나씨 사이에서 나주 금성산 아래 대곡동에서 태어났다가 중년에 나주 곡강촌(현재 동강면)으로 이거하였으며, 1570년경 무안 엄담(淹潭) 윤암(輪岩. 현재의 함평 엄다면 엄다리 제동-濟洞)에 정착하여 정사를 짓고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그간 많은 재상들의 천거가 있어 교정랑청에 불려가고 곡성현감 등에 부임하였으나 그 관직생활은 1년이 못되었다.
서경덕의 문인으로 나주와 무안 함평에 재지적 기반을 가지면서 강의계 등을 중심으로 학문을 가르치며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갔는데 그는 예학과 역학 뿐만이 아니라 역사 천문 지리 의약 산수(算數) 복서(卜書) 덕공력(德功力)의 기술 등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박순에 의하여 왜적을 막을 수 있는 팔도도원수로 추천되기도 하였다.
그의 문인은 매우 많아 이중호의 문인이었던 나사침(羅士枕)의 아들인 나덕명(羅德明) 덕준(德峻) 덕윤(德潤) 등과 그의 사위인 정식(鄭湜), 나세찬(羅世纘)의 손자인 나덕원(羅德元), 안응정(安應鼎) 문하이었던 안중묵(安重黙), 최경회(崔慶會)의 조카이었던 최홍우(崔弘宇), 유몽정(柳夢井)의 종질인 유양(柳瀁), 윤형정(尹衡貞)의 아들이었던 윤제 (尹濟) 등 나주 화순 함평 보성 등의 유력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평생을 격물치지하는 바의 학문에 힘을 쏟아 공리와 관직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이같은 시가 전하고 있다.
千乘景公同草腐 천승 수레끄는 경공도 풀과 같이 썩는데
一瓢顔子柱天榮 한쪽박의 안자는 하늘의 영화를 기둥삼네
是知仁義眞良貴 이로서 알겠느니 인의가 진실로 참되고 귀한 것을
莫道公侯謾姓名 공후를 말하여 성명을 오만하게 하지 않을 것이니.
그래서 그의 인품과 학식에 대하여 박순은 주자 정자 이후의 단 한사람이며 윤선도에게서는 동방의 진유로서 이황에 버금간다고 하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당대의 명성은 붕당을 달리한 유희춘 이이 등에게서도 ‘미암 유희춘(眉岩柳希春)은 선생의 간절하고 깊은 함양(涵養)을 마땅히 여기어 후학의 사표로 근덕(勸德)을 하여 덕준 등이 이에 종사(從師)케 하였으며 율곡 이이(栗谷李珥)도 또한 덕준 등에게 이르기를, 정모(鄭某)는 학행(學行)이 독실하여 가히 사람들의 스승이 될만 함으로 모름지기 자주 종유(從遊)하라’며 인정되고 격찬을 받는 정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