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전직 로이터통신(Reuters) 기자였던 앤드류 맥그레거 마샬(Andrew MacGregor Marshall)이 2013년 10월 31일에 자신의 자신의 블로그 '젠 저널리스트'(ZENJOURNALIST)에 공개한 논문이다. 이 글은 이제까지 태국 정치 및 왕실에 관해 발표된 글 중 가장 심도 있는 내용이며, '위키리크스'(Wikileaks)가 폭로한 미국 정부의 비밀 외교전문을 광범위하게 분석해, 태국 정치의 심연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했고, 동영상 등 일부 자료를 추가했다. 전편을 먼저 읽어보려면 여기(1편, 2편, 3편, 4편, 5편, 6편, 7편, 8편, 9편, 10편, 11편)를 클릭하라.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12)
กลียุค — Thailand’s Era of Insanity
푸미폰 국왕의 외출과 기득권 진영의 반격
2012년 5월 25일,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 1927년생) 국왕이 2009년 9월부터 입원해 있던 '시리랏 병원'(Siriraj Hospital)에서 휠체어를 타고 나와, 2년여 만에 방콕(Bangkok) 바깥으로 나갔다. 이 여행에는 시리낏(Sirikit: 1932년생) 왕후와 [차녀인] 마하 짜끄리 시린톤(Maha Chakri Sirindhorn: 1955년생) 공주가 동행했다.
세심하게 연출된 이 이벤트엔 전쟁을 형상화시킨 메세지가 깃들어 있었다. 푸미폰 국왕은 [군 통수권자 계급장이 부착된] 육군 군복을 착용했고, '폭스바겐'(VW)이 제작한 승합차에 탑승해 [오후 6시경] 아유타야(Ayutthaya) 도의 퉁마캄영(Thung Makham Yong)에 도착했다. 퉁마캄영은 400여년 전 버마 군의 침입 당시, 태국(= 당시의 아유타야 왕국) 군대가 그에 대항해 싸웠던 전쟁터이다. 당시의 전쟁에선 시 수리요타이(Sri Suriyothai) 왕후가 직접 전투용 코끼리를 타고 참전해, 자신의 남편인 국왕을 구한 후 죽었다고 전해진다.
이 지방 행차는 퉁마캄영 전투와의 관련성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왕실 가족은 수리요타이 왕후의 동상 앞에 잠시 멈춰 헌화를 했다. 푸미폰 국왕이 이 행사의 취지를 이해한 상태에서 동의했던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시리낏 왕후와 군부를 선양해주는 행사에 푸미폰 국왕이 동원됨으로써, 그가 왕궁 및 기득권 세력에 이용당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국왕 일행은 퉁마캄영에서 [수상 특설무대의 공연을 지켜본 후] 병원으로 돌아왔다.
보수 영자지 <방콕포스트>(The Bangkok Post)는 다음날 1면 머릿기사 제목으로 <국왕께서 역사적 귀환을 하셨다>(King makes historic return)고 선언했다. 하지만 1면 사진의 정중앙에는 푸미폰 국왕이 아니라 시리낏 왕후가 위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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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012년 5월 26일자 <방콕포스트> 1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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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Richard Barrow) 2012년 5월 26일, 태국 주요 일간지들은 모두 전날에 있었던 푸미폰 국왕의 행차 소식을 1면 머릿기사로 다뤘다. 조간신문 <델리 니우>(데일리 뉴스)의 1면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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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태국 TV 방송화면) 2012년 5월 25일 행사의 피날레를 장식한 수상 특설무대 공연. 각종 국왕 찬가들이 독창 및 합창으로 이어진 후, 관중들이 '국왕폐하, 만수무강하소서'를 연호한다. 잉락 친나왓 총리와 부총리를 비롯한 고위 인사들까지 무대 위로 올라와 촛불을 점등하고 함께 합창한다. |
푸미폰 국왕의 행차 다음날, [극우 보수 왕당파] '옐로셔츠 운동'(PAD)은 [정부 여당이 추진 중이던] '국가화합 법안' 반대 대규모 시위를 시작했다. 그 사이 아피싯 웻차치와(Abhisit Vejjajiva: 1964년생)의 [보수 야당] '민주당'(Democrat Party)은 이 법안을 심의하는 국회 일정을 고의적으로 방해 했다. 5월30일, 솜삭 끼얏수라논(Somsak Kiatsuranont: 1954년생) 국회의장이 국가화합 법안을 긴급상정 안건으로 투표에 부치려 하자, 민주당 의원들이 물리력을 동원해 국회의장을 의장석에서 끌어내고 의자도 치워버렸다. 결국 경위들이 동원돼 장내 질서를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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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Chana Katanyu / The Bangkok Post) 2012년 5월 30일, 솜삭 끼얏수라논(중앙, 착석한 이) 국회의장이 국가화합 법안을 상정하려 한 직후, 여야 국회의원들이 의장석 주변으로 몰려나와 뒤엉켜 있다. |
5월31일, 집권 '프어타이 당'(Puea Thai party: 태국을 위한 당) 소속 의원들은 국가화합법안을 긴급안건으로 심의할 것임을 투표해버렸다. 그러자 '민주당' 의원들은 욕설과 고함을 지르며 국회의장을 향해 문서들을 집어던졌다. 아피싯 총재는 '민주당'의 품위유지보다는 국익이 중요하다며 자당 의원들의 행위를 변호했다.
6월1일 옐로셔츠 시위대가 국회를 봉쇄했고, 국가화합 법안의 심의 일정도 재조정하지 않으면 안됐다. 이날 오후, '헌법재판소'는 매우 이례적이고 지지받기 어려운 명령을 내렸다. 즉, 헌재가 <2007년 제정 헌법> 개정 시도의 위헌 여부 및 그것이 "국왕을 국가수반으로 하는 태국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일인지 검토를 마칠 때까지, 국회가 국가화합 법안의 최종 심의인 제3차 심의를 연기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국회의 적법한 개헌 시도를 사법부가 방해했다는 넓은 차원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내용 자체가 헌재가 결정할만한 사안이 아니란 점에서 이 명령은 월권적 행위에 해당했다.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원래 검찰의 소관이다.
'민주당'의 방해와 편파적 성향인 사법부가 개입하면서, 이 모든 공조체제가 국왕과 왕후의 기묘한 아유타야 방문을 통해 왕실의 승인을 받은 일이란 점이 명백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자, 탁신과 '프어타이 당'은 몸을 낮추며 국가화합 법안 및 헌법개정안 심의를 보류했다.
기득권 진영이 자신으로 하여금 정치적 최정상에 오르도록 내버려두지 않자,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1949년생) 전 총리는 충격을 받고 분노했다. 탁신은 허둥지둥 '레드셔츠 운동'(UDD)이 노를 젓는 배에 다시금 올라탔다.
6월2일, '레드셔츠 운동'은 논타부리(Nonthaburi) 도의 므앙 텅타니(Muang Thong Thani)에서 대규모 집회를 개최했다. 탁신은 화상전화를 통해 이 집회에서 연설했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말했던 "불완전한 메세지"를 사과하면서, 레드셔츠들이 노여움을 거두고 국가화합 법안을 지지해달라고 부탁했다. [인류학자] 짐 태일러(Jim Taylor)는 탁신의 이날 연설 중 일부를 발췌 번역해 호주의 온라인 저널 <뉴 만달라>(New Mandala)에 공개했다. 탁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국민들이 순종할만한 법치의 일관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법률에 명백하게 부도덕한 요소를 더욱 강화시키면서, 일관성과 기본적 정직성마저 말살시키려는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2중 잣대를 사용하고 있고, 그것은 해소 불가능한 깊은 분열을 낳고 있습니다. 사회적 분열 상황은 분명히 더욱 나빠질 것입니다.
여성 총리는 타인과 논쟁하길 싫어하므로 나라의 평화를 위한 환경을 조성할 것이라 생각하는 분들도 게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특정한 권력의지에 대항해서 작동한다면,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만일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국민의 투표로] 선출된 정부에 투입된 권력을 그들이 붕괴시키고 말 것인데, 저는 이러한 일을 우리가 가만히 두고 봐야만 하는지 국민 여러분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피플 파워'(=국민의 권력)는 최상의 권력입니다. 다 함께 상황을 면밀히 감시합시다. 의회의 절차에 영향력을 발휘할 권리가 없는 이들의 결정을 우리가 수용해야만 하는지, 국회가 나서 검토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태국의 화해가 도래할 것이라 기대하면서 우리의 피를 희생했습니다.
저는 [저명 정치논객] 솜삭 찌얌티라사꾼(Somsak Jeamteerasakul: 1958년생) 교수의 [레드셔츠의 독자적 행보를 촉구하는] 글도 읽어보았고, 그분이 말씀하신 많은 내용이 사실 정확하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많은 말씀을 드릴 수는 없지만, 솜삭 교수의 염려와 호의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날 비록 [야당의] 일부 정치인들이 선거 네트워크에 지뢰밭을 묻어둔 상태긴 하지만, 우리는 태국 민주주가 복원될 수 있도록 도와야만 합니다. 우리는 완전한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이 과정을 뚫고 나가야만 합니다. |
6월22일, 와산 서이피숫(Wasan Soypisudh: 1947년생) 헌법재판소장은 보도진에게, 자신은 정부 여당이 제출한 헌법개정안이 군주제를 전복시킬 의도를 지닌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러한 발언은 분명 내용도 어이가 없었지만, 자신의 직업윤리를 노골적으로 위반한 것이기도 했다.
7월13일, 헌법재판소는 [죽도 밥도 아닌] 판결을 내렸다. 헌재는 개헌 시도가 군주제에 대한 공격은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대신 <2007년 제정 헌법>이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된 헌법인 만큼, 국회는 개헌 이전에 먼저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들에게 개헌 허용 의사를 물어봐야만 한다고 결정했다.
한편, 푸미폰 국왕은 7월7일 다시 한번 휠체어를 타고 '시리랏 병원' 바깥으로 외출했다. 이번에는 해군 군복 차림이었다. 푸미폰 국왕과 시리낏 왕후는 전용 유람선을 타고 여행하면서 [국왕의 발의로 시작됐던] 다양한 관개사업 현장들을 시찰했다. 아마도 푸미폰 국왕과 왕실에서는 이 여행을 통해, [대홍수로 실추됐던] 수자원 관리에 관한 국왕의 신비적 능력이란 믿음이 회복되길 바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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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The Bangkok Post) 2012년 7월 7일, 국왕 전용선인 태국 해군 소속 유람선 '앙사나'(Angsana) 호가 '시리랏 병원'의 부두에서 출항하자, 뱃전에 앉아 있던 푸미폰 아둔야뎃(우측) 국왕과 시리낏(중앙) 왕후, 그리고 마하 짜끄리 시린톤(좌측) 공주가 웃음을 보이고 있다. |
시리낏 왕후가 쓰러지다
기득권 진영은 푸미폰 국왕의 보다 가시적 역할을 복원시키기 위해 분명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국왕이 7월17일 라차부리(Ratchaburi) 도를 방문할 것이라는 예고도 발표했다. 하지만 불과 일주일도 안 돼 국왕은 또 다른 건강상의 위기를 겪었고, 여행 계획도 무기한 연기됐다.
'궁내청'(Royal Household Bureau, RHB: 왕실청)은 항상 푸미폰 국왕의 질병이 심각하지 않다면서 상투적인 거짓말을 하는 경향이 있다. (국왕의 건강은 항상 기적적으로 호전되기만 할 뿐, 결코 악화되는 경우가 없다.) '궁내청'은 이번에도 국왕에게 뇌출혈이 있었지만 이미 상당히 호전됐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실제 푸미폰 국왕의 건강은 상당히 안 좋은 상태였다. <하이쏘 태일즈>(Hi-S Tales)라는 '페이스북' 계정은 태국 왕실에 관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업데이트한다. 이 계정의 운영자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왕족들 및 궁정 최측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책략들이나 건강 정보에 관해서라면 무시무시할 정도로 정확한 모습을 보여왔다. 이 계정의 '제196번 게시물'에 따르면, 푸미폰 국왕이 경미한 뇌졸증을 일으켰고, 그 치료과정에서 지주막하 출혈(subarachnoid haemorrhage: 거미막하 출혈)로 이어졌다고 한다. 또한 이 게시물은 시리낏 왕후가 쁘렘 띠나술라논(Prem Tinsulanonda: 1920년생) 의장 및 '추밀원'(Privy Council: 국왕자문기구)에 대해, 국왕이 금치산자 상태에 빠졌음을 선언하라고 종용하는 중이라고도 전했다.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시리낏 왕후는 국회의 승인 절차를 거칠 필요도 없이 섭정 지위를 확보하게 될 터였다. 하지만 시린톤 공주가 그 같은 계획을 반대했고, '시리랏 병원' 내에서 모녀 간에 서로 저주를 퍼부을만큼 격한 언쟁이 벌어졌었다고 한다.
7월21일, 시리낏 왕후가 '시리랏 병원'에서 졸도했다. '궁내청'은 왕후가 이날 '시리랏 병원'에서 "현기증으로 잠시 비틀거린 후, 경미한 뇌 혈액공급 부족 증세"로 진단받았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낙관적인 발표를 했다. 하지만 실상은 왕후가 심각한 뇌졸증을 일으킨 후 바닥에 쓰러졌고, 이후 며칠간 움직이거나 말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궁내청은 왕후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물론이고,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었다는 사실조차 새어나가지 않도록 억압했다. 아마도 왕궁은 이런 내용이 왕실의 위신을 실추시킬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득권층과 군 수뇌부는 이 사태의 이면에서 쇼크 상태에 빠져 있었다. 하늘이 무너진 것이다. 시리낏 왕후가 심각한 활동불능 상태에 빠졌다는 것은 금새 명확해졌고, 의사들은 왕후가 결코 완벽하게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 왕후는 걸을 수가 없었고, 언어 기능도 심각히 저하됐다. 탁신 및 마하 와치라롱꼰(Maha Vajiralongkorn: 1952년생) 왕세자를 반대하는 기득권 진영에게 있어서, 왕후가 다시 한번 염감과 지도력을 제공하며 두드러진 역할을 재개해주리라 기대하는 것은 전혀 현실성이 없었다. 이제 그녀가 섭정이 되는 일은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와치라롱꼰 왕세자는 일주일 뒤인 7월28일에 환갑(60세)을 맞이했다. 불교도에게 있어서 환갑은 중요한 기념일이다. 하지만 산만한 대중 행사들은 국민들과 기득권 진영의 왕세자에 대한 지지가 얼마나 빈약한지만 보여줬다.
8월12일, 활동불능 상태에 빠진 시리낏 왕후가 팔순(80세)을 맞이했다. 왕후의 건강이 심각하다는 것은 아직도 국민들에게는 비밀이었다. 세르핫 위날디(Serhat Ünaldi)는 <뉴 만달라>에 기고한 훌륭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태국이 변하고 있다. 마하 와치라롱꼰 왕세자의 환갑 및 시리낏 왕후의 팔순 기념행사들을 분석해보면, 태국의 군주제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아마도 그것은 두번 다시 이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첫째, 7월28일 왕세자 환갑맞이 공식 기념행사가 왕실 마당이기도 한 '사남 루웡'(Sanam Luang)에서 개최됐는데, 참석한 군중 규모가 기대에 못미쳤다고 말하는 것은 완곡한 표현에 해당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 행사 전체가 쑥스러울 정도였다. 8월12일의 시리낏 왕후 팔순 행사는 '시리랏 병원'에서 열렸고, 왕후는 이곳에서 "뇌 혈액공급 부족" 증세를 계속해서 치료받고 있다. 남편인 푸미폰 국왕이 사망한 후, 시리낏 왕후가 섭정을 맡아 왕위계승 과정을 준비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런 이론은 더 이상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번 생일행사들은 현재의 짜끄리 왕가 통치기의 종말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음을 상기시켜주었다.
이번 기념행사들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왕세자가 차기 국왕으로 즉위할 시기가 다가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국왕을 [우상화해왔던] 선전선동 기제가 왕세자를 위해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 일을 한다면, 환갑만큼 좋은 기회는 없지 않은가? 자신들의 차기 국왕을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시키는 데는 많은 일이 필요하다. 하지만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런 일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역시 처음 즉위했을 때는 오늘날과 천지차이의 위상을 보이고 있었다. 왕세자의 까불거리던 여성편력과 외교적 실수들, 그리고 소소한 범죄들이, (우연한) 동족살해죄만큼 결코 납득할만하게 해소시킬 수 없는 일이란 말인가? 사실 인터넷이라든지 변화하는 국내외 정치 환경은 모든 것을 쉽게 만들어주진 않는다. 하지만 왕당파 입장에서 보면, 이미 검증된 그들의 이념적 도구들을 사용해 왕위계승을 관리하는 일이 그저 시간의 문제 아닐까?
의사결정권자들은 의견 불일치를 보인 것 같다. 왕세자 생일을 앞두고 신문사 웹사이트들에서 왕실 관련 배너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왕당파의 선전선동 당사자들이 가진 열정이 부족함을 보여주는 여러 징후들 중 하나일 뿐이다. 예전 같으면 온라인 뉴스를 읽고자 하는 독자들이 신문사 홈페이지에 접속할 때, 먼저 축하 내용이 들어있는 전면 팝업창을 클릭하지 않으면 안 됐다. 사설들 역시 왕세자 관련 내용은 싣지 않기로 했다. 언론 보도를 보면, 왕세자 생일과 왕후 생일에 관한 내용이 보도의 배열 크기에서 현저한 불균형을 보였다. 주요 일간지 <델리 뉴>(Daily News: 데일리 뉴스)와 <타이 랏>(Thai Rath)을 무작위로 비교해보면, <타이 랏>은 사남루웡에서 진행된 왕세자 생일 축하행사 다음날 보도에서 83줄 분량의 기사를 실었다. 반면 왕후의 생일 행사는 143줄 분량이었다. <델리 뉴>는 왕세자 생일에 관해 103줄 분량의 보도를 했고, 왕후 생일에 관해선 287줄 분량의 기사를 실었다. (특히 왕후 생일 관련 보도는 세 면의 지면에 걸쳐 보도됐다.)
태국의 한 언론인에게 언론이 왕세자를 그토록 지지하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자, 그는 먼저 왕세자가 부왕만큼의 위상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솔직하게 밝혔다. 둘째는 푸미폰 국왕이 아직 생존해있는데도 와치라롱꼰 왕세자를 과도하게 선양하는 일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는 "왕세자는 현 국왕보다 결코 돋보일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언론인은 TV 방송들의 왕실관련 보도들에서 와치라롱꼰 왕세자의 어린 시절 모습의 비중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는 점은 지적했다. 이런 보도에 나타나는 왕세자의 모습은 아직 순진무구해보이던 시절의 모습이란 것이다. 왕세자의 어린 시절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연결지으려는 이 같은 시도가 왕세자의 대중적 인기를 증가시켜 줄 수 있을지는 오직 시간만이 대답해줄 것이다.
이제 왕세자의 위상과 왕후의 위상 사이의 차이를 정확한 수치로도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왜냐하면 왕세자의 생일과 그 모후의 생일을 기념하여 새로운 지폐들이 발행됐기 때문이다. 왕후는 아들보다 5배의 위상을 지닌다. 왕세자 환갑 기념 지폐는 액면가 100바트(약 3300원) 짜리로 1천만장이 발행됐다. 그리고 시리낏 왕후 팔순 기념 지폐는 액면가 80바트(약 2500원)라는 특별한 단위로 2백만장만 발행됐다. 또한 왕세자가 그려져 있는 100바트 지폐는 일상적인 방식으로 시중에 유통됐지만, 왕후가 그려진 80바트 지폐는 왕실 자선행사를 통해 120바트에 팔릴 예정이라고 보도됐다. 필자가 은행에 가서 소지한 100바트 지폐를 왕세자 얼굴이 들어 있는 100바트 지폐로 교환이 가능한지 묻자, 그들은 혼란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그런 요청을 한 사람이 필자가 처음인 모양이었다. 언론과 마찬가지로 은행들에서도 왕세자가 자신의 부모와 동일한 위상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또한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분명 그러하다. 대중의 압도적 다수가 방콕의 여러 곳에 설치해둔 [왕세자 생일] 축하 방명록에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살펴볼 수 있었던 것도 매우 흥미로왔다. 필자는 '시암 파라곤'(Siam Paragon) 쇼핑몰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면서, 줄곧 왕세자를 위해 설치된 시설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왕세자의 실물 크기 사진 및 기념 조형물 앞에는 축하 방명록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백지 상태의 페이지만 펼쳐져 있었다. 1시간 이상 지켜봤지만 단 한사람도 방명록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 같은 쑥스러움이 계속되자 쇼필몰 경비원들이 나와 방명록에 모범 사례용 서명을 했다. 방명록은 그제서야 수치스런 상태를 벗어났다. 많지는 않았지만 몇몇 사람들이 경비원의 권유에 따라 서명했다. 하지만, 시리낏 왕후를 위한 기념 방명록은 훨씬 더 인기가 있었고, 상대적으로 빠른 시간 내에 사람들의 서명이 축적됐다.
왕세자 생일이었던 2012년 7월 28일, '사남루웡'의 행사장에 모습을 나타낸 사람들은 태국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 뿐이었다. 명령에 따라 '사남루웡'에서의 행진을 준비하던 정부 관리들이나 공무원들을 빼고 나면,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무료로 제공되는 음식과 음료를 받기 위해 모여든 이들 뿐이었고, 제대로 세탁도 되지 않은 옷을 입고 있었다. 과거 이런 왕실 행사에서 볼 수 있었던 익숙한 모습들, 즉 잘 차려입은 중산층 사람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경비원들은 마치 부끄러움을 깨닫기라도 한듯, VIP 구역에 설치해뒀던 일반인용 천막들을 철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30여명 정도인 '국민'(prachachon, 쁘라차촌)의 하층민 대표들에게 자리를 비워달라고 부탁한 후, 반대편의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아주었다. 이후 잉락 친나왓 (Yingluck Shinawatra) 총리가 그 천막에 들어와 앉아 있다가, 무대 위로 올라가 촛불행사를 가졌다. 그 "VIP용 천막들" 대부분은 그날 밤 나머지 시간 동안 거의가 텅빈 채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왕후 생일 축하행사 때는, 중산층 사람들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에, 해당 천막이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됐다.)
그런데, 잉락 총리가 도착하자 이들 "쁘라차촌" 사람들은 다시 한번 실망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잉락 총리의 검은색 승합차가 바로 그들 앞에 정차한 후, 잉락 총리가 그 반대편 문으로 내렸던 것이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은 그녀를 볼 수도 없었다. 총리는 광장을 가로질러 간 후 착석했다. 그리고 행사를 이끌기 위해 무대로 올라갔다. 이날의 행사는 <국왕 찬가>(플렝 산선 프라 바라미)로 끝났는데, 그것은 필자가 지금까지 들어본 <국왕찬가> 연주 중 최악의 연주로서 이날 행사에 어둠을 드리웠다.
하지만 시리낏 왕후의 팔순 축하행사는 폭우가 내리는 가운데 진행됐지만, 대중적으로는 더욱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8월12일의 '사남루웡' 행사에 관해, <방콕포스트>의 보도처럼 "사남루웡이 가득찼다"고 서술하는 것은 과장이다. 언론이 전파한 사진 대부분은 정부 관계자들과 고적대들(=마칭밴드)의 모습이었고, 고적대들은 사전에 어디로 움직일 것인지도 지시를 받은 것처럼 보였다. 왕후의 생일 축하행사에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군중들이 참석하긴 했다. 하지만, 2007년의 푸미폰 국왕 팔순 기념행사에 비하면 왜소하기 그지 없었다. 2007년 행사 때는 군중들이 '사남루웡'을 가득 채운 것은 물론이고, '라차담는 가'(Ratchadamnoen Avenue) 거리 전체를 메웠고, 심지어는 짜오프라야 강(Chao Phraya River) 건너편인 톤부리(Thonburi) 구까지도 이어졌다. 축하행사들을 준비한 정권이 어떤 정권인가에 따라 군중 규모에 차이가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2007년의 군사정권이 왕실을 극도로 숭상하는 정권이었다면, [잉락 총리의] 민주적 선거로 선출된 정부는 왕당파로서의 선명성에 보다 덜 의존하는 정부이다. 따라서 이들 두 정권 사이에 차이가 있었는가 하는 문제에 논란의 여지는 존재한다. 그렇지만 아마도 2007년의 푸미폰 국왕이 2012년의 시리낏 왕후보다 더욱 인기가 있었던 차이일 뿐일 것이다.
그러나 왕세자 생일을 축하하는 쇼가 주목할만큼 무관심 속에 있었다는 점 및 그와 관련된 재미없는 방식의 선전선동을 보면, 현 시점에서 왕세자를 선양하려는 우호적 의식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일각에서는 이번 생일행사를 상투적인 행사가 아니었다고 보면서, 왕세자를 대중적으로 홍보하기 위한 느리지만 확고한 출발점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와병 중의 현 국왕이 존경받기 때문에 그 후계자를 보다 활발하게 선양하는 활동이 자제됐다는 것은 정말일까? 태국 엘리트 계층 사이에 일종의 합의가 이뤄진 가운데, 그들이 일반적으로 경계하고 있는 내용 때문에 그런 현상이 발생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태국을 장악한 일부 의사결정권자들이 사회정치적 질서의 중심축에서 군주제를 넘어서려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은 아닐까?
와치라롱꼰 왕세자의 환갑 축하행사는 그 무엇보다도 왕세자 역시 더 이상 젊은이가 아니란 점을 상기시켜주었다. 왕세자의 건강 상태를 고려하면, 그가 과연 60년 이상 재위한 자신의 부왕과 동일한 과정을 안정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인지 의심을 갖게 만든다. 따라서 왕당파들이 '재시작'(리셋) 버튼을 누르기 위한 가장 현명한 해법은 어떤 방식으로든 왕세자가 왕위를 포기토록 하는 일일 것이다. (물론 그러한 일은 차기 국왕의 적법성에 관해 의심의 여지가 없는 방식으로 이뤄져야만 하며, 가령 너무도 편리한 시기에 선택적으로 이뤄지는 죽음과 같은 방식이 해법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왕세자로부터 의절을 당한 채] 미국에서 망명생활 중인 왕세자의 네 아들을 불러내, 그 중 한명을 즉위시키는 방식이 될 것이다. 푸미폰 국왕이 미국에서 태어나 스위스에서 성장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왕세자의 장남인] 젊은 국왕 쭈타와촌 마히돈(Juthavachara Mahidol: 1979년생) 역시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일 것이지만, 이후 새로운 주형틀을 통해 군주제를 개조해나갈 기회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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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Serhat Ünaldi) 2012년 7월 28일, '사남루웡'에서 개최된 왕세자 60세 생일 축하행사에 참석한 방콕의 빈곤층 및 노숙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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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Serhat Ünaldi) 잉락 친나왓 총리(중앙)가 '사남루웡'의 왕세자 60세 생일 축하행사에서 촛불행사를 주도하고 있다. 그녀는 8월12일 왕후 80세 축하행사에서도 동일한 역할을 맡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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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Serhat Ünaldi) 왕세자 60세 축하행사장에는 대부분 동원된 학생들과 공무원들이 관중석을 채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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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Serhat Ünaldi) 2012년 8월 12일, '사남루웡'에서 개최된 왕후 80세 축하행사에는, 왕세자의 60세 축하행사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국민대표용 천막에 자리를 잡은 중산층 주축의 일반인들. |
시리낏 왕후가 뇌졸증으로 쓰러져 거동이 불가능해진 이후, 태국 기득권 진영은 와치라롱꼰 왕세자가 의절해버린 아들들, 즉 위와차라웡(Vivacharawongse) 4형제와 실질적인 접촉에 들어갔다. 기득권 진영은 이제 이들 네 형제를 최후의 희망처럼 여기게 됐다.
시리낏 왕후가 쓰러진 일은 그녀가 미래에 섭정을 맡을 가능성만 배제시킨 것이 아니라, 태국 정치에서 시리낏의 적극적 참여가 끝났음도 의미했다. 왕당파들은 자신들의 우두머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짜놓았던 왕위계승 계획도 상실한 것이다.
기득권 진영의 많은 이들이 '옐로셔츠 운동'의 명분에서 이탈하기 시작했고, 계속해서 싸우자는 열성분자들만 남아 점차 고립되기 시작했다. 쁘라윳 짠오차(Prayuth Chan-ocha: 1954년생) 육군사령관 및 그의 군부 내 고위급 동지들은 더 이상 왕실 내에서 자신들에게 명령을 내려줄 사람을 갖지 못했다. 그리하여 군 수뇌부는 태국 군부의 전통적 관행인 실용주의 노선으로 선회했다. 왕당파 기득권 진영 내의 강경파들은 여전히 탁신과 와치라롱꼰을 제지시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더 이상 군부의 지원을 얻을 수는 없게 됐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싸움을 계속하려 했다. 그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바로 우리가 보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 시리즈물 바로가기 :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2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3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4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5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6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7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8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9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0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1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2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3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완결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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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가능하면 2편으로 나눠서 끝내볼까 합니다...
격변이 일어나기 전에 정리는 해야겠지여.. ;;;
읽으면 읽을수록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그렇죠..
대단한 친구입니다..
아마 동일한 문헌자료 및 휴민트(=사람을 통한 정보)를 줘도..
아무나 이렇게 긴장감 있는 진행으로 글을 쓰지는 못하죠..
게다가 양 진영 모두에 비판적 시각을 충분히 갖고 있는 냉정한 시각도 돋보입니다.
@울트라-노마드 관광으론 평온한 나라인 태국이 정치적으로는 여러 문제를 안고 있네요 ~
휴~~~ 이제야 1~12편 정독하였습니다.
보다 말다를 반복하다가, 어제 오후부터 널널한 시간이 생겨 전편을 완독!
대단한 친구의 글도 글이지만, 이 글을 이렇게 잘 정리해서 옮겨주신 울노님께,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요즘 낮에도 종종 스콜이 오기 시작합니다. 사무실 앞의 주문제작한 대형평상에,
쐐줏파들이 모이는 시간도 점점 많아지네요!!
앙코르의 싸늘한 비수기....! 암울할만치 어두운 우리나라의 실상.....!
음주횟수가 많이 늘어날 것입니다.
저나, 울 회원님, 특히!!! 울노님 늘 건강 잘 챙기세요!!
ㅎㅎ 선배님 건강하시죠..
요즘 저도 소주가 그립습니다..
여기저기 복잡하게 돌아가니, 술먹는 회수가 4분의1로 감소하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