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보 사찰 통도사 통도사 대웅전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下北面) 영취산(靈鷲山)에 있는 사찰이며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있어 불보(佛寶)사찰이라고도 한다.
사찰의 기록에 따르면 통도사라 한 것은,
이 절이 위치한 산의 모습이 부처가 설법하던
인도 영취산의 모습과 통하므로 통도사라 이름했고(此山之形通於印度靈鷲山形),
또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이 계단(戒壇)을 통과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했으며(爲僧者通而度之),
모든 진리를 회통(會通)하여
일체중생을 제도(濟道)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 절의 창건 유래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신라의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돌아와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왕명에 따라 통도사를 창건하고
승려의 규범을 관장, 법식(法式)을 가르치는 등
불법을 널리 전한 데서 비롯된다.
이때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하고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쌓아,
승려가 되고자 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득도케 하였다.
이렇게 창건된 이 절은 이후 계율의 근본도량이 되었고,
신라의 승단(僧團)을 체계화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창건의 정신적 근거이며 중심인 금강계단은
자장과 선덕여왕이 축조하여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한 이후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이 사찰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하고 있어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는 적멸보궁이기도 하다.
법보 사찰 해인사 장경각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伽倻面) 가야산 남서쪽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이다.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 때의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우두산(牛頭山:가야산)에
초당(草堂)을 지은 데서 비롯된다.
그들이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마침 애장왕비가 등창이 났는데
그 병을 낫게 해주자,
이에 감동한 왕은 가야산에 와서 원당(願堂)을 짓고
정사(政事)를 돌보며 해인사의 창건에 착수하게 하였다.
순응이 절을 짓기 시작하고 이정이 이었으며,
그 뒤를 결언대덕(決言大德)이 이어받아 주지가 되었다.
918년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당시의 주지 희랑(希郞)이
후백제의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國刹)로 삼아
해동(海東) 제일의 도량(道場)이 되게 하였다.
1398년(태조 7)에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고려팔만대장경판(高麗八萬大藏經板)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 곳으로 옮겨와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다.
그 후 세조가 장경각(藏經閣)을 확장·개수하였으며,
그의 유지를 받든 왕대비들의 원력(願力)으로
금당벽우(金堂壁宇)를 이룩하게 되었다.
제9대 성종(成宗) 때 가람을 대대적으로 증축했고,
근세에 이르러서는 불교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 사찰은 창건 이후 일곱 차례의 대화재를 만나 그때마다 중창되었는데,
현재의 건물들은 대개 조선 말엽에 중건한 것들로
50여 동에 이른다.
창건 당시의 유물로는 대적광전(大寂光殿) 앞뜰의 3층석탑과
석등 정도가 있을 뿐이다.
특히 국보 제32호인 대장경판과 제52호인 대장경판고(大藏經板庫) 및
석조(石造) 여래입상(보물 264)은 유명한데,
불가사의한 일은 몇 차례의 화재를 당하면서도
팔만대장경판과 장경각만은 화를 입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있는 일이다.
통도사(通度寺:佛寶사찰)·송광사(松廣寺:僧寶사찰)와 더불어
삼보(三寶)사찰 가운데 하나로 법보(法寶)사찰로 유명하다.
현재는 불교학원인 해인총림(海印叢林)이 있어 많은 학인(學人)들로 붐빈다.
부속 말사(末寺)는 75개에 달하고
부속 암자로 백련암(白蓮庵)·홍제암(弘濟庵)·약수암(藥水庵)·원당암 등이 있다.
승보 사찰 송광사 국사전
조계종의 발상지로서 현재는 선수행(禪修行)의 도량이며,
조계총림(曹溪叢林)이 있는 곳이다.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이다.
한국의 삼보(三寶)사찰 가운데 승보(僧寶)사찰로서 유서깊은 절이다.
송광사지(松廣寺誌)에 따르면 신라 말기에 혜린(慧璘)이 마땅한 절을 찾던 중,
이곳에 이르러 산 이름을 송광이라 하고
절 이름을 길상(吉祥)이라 하였는데,
사찰의 규모는 불과 100여 칸에 지나지 않았고
승려의 수효도 겨우 30∼40명을 넘지 못하였다.
처음에 이렇게 창건된 뒤 고려 인종(仁宗) 3년(1125)에
석조(釋照)가 대찰을 세울 뜻을 품은 채 세상을 뜨자,
1197년(명종 27) 승려 수우(守愚)가 사우(寺宇) 건설을 시작하였다.
3년이 지난 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정혜사(定慧社)를 이곳으로 옮겨와 수선사(修禪社)라 칭하고,
도(道)와 선(禪)을 닦기 시작하면서, 대찰로 중건하였다.
조계종은 신라 때부터 내려오던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총칭으로,
고려 숙종(肅宗) 2년(1097)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일으킨
천태종(天台宗)과 구별해 이렇게 부르기도 하였다.
그 뒤 보조국사의 법맥을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이어받아 중창한 때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180년 동안
16명의 국사를 배출하면서 승보사찰의 지위를 굳혔다.
경내에는 이들 16 국사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국사전(國師殿)이 따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