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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로이드존스 스크랩 로이드존스의 메시지 설명방법 / 정근두목사 / 울산교회
한아름 추천 0 조회 164 12.08.25 22: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로이드존스의 메시지 설명방법 / 정근두목사 / 울산교회
글쓴이: grace   08.11.17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RkzJ/8170

 
 

로이드 존스의 메시지 설명방법

 

정근두 목사 / 울산교회

 

연속적인 설교방법


전편에 걸친 강해설교
로이드 존스 강해설교의 일반적인 특징은 연속설교를 한다는 점이다. 물론 연속적인 본문이든지 비연속적인 본문을 택해 설교하든지 둘 다 타당하다는 입장이지만, 로이드 존스 자신의 설교습관을 살펴볼 때 그는 연속설교를 더 좋아한 것은 사실이다.


출판된 그의 설교를 살펴보면 「영적침체」에서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정한 측면을 여러 다른 본문으로부터 취급하거나, 「산상설교집」처럼 한 부분을 조직적으로 다루든지, 아니면 로마서나 에베소서 강해설교처럼 성경 중의 한권을 택해서 세밀히 설교를 하는 등 연속설교의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은 그 자체가 타당한 방법일 뿐 아니라 다가오는 주일의 설교 본문을 찾기 위한 설교자의 부담을 경감시켜준다. 또한 한 사람의 설교에 강조점의 변화를 가져다주는 동시에 한교리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을 피하고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살펴보도록 한다고 로이드 존스는 믿는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로이드 존스의 입장은 스펄전보다는 오히려 청교도나 개혁자들, 특히 성경 중의 한 책을 택해서 어떤 때는 매우 자세하게 그리고 계속적으로 설교했던 칼빈과 쯔빙글리를 따르고 있다(1982C: 189;Ca1vin,1979:ix; Catherwood, 1981:8;Philip,1984:302).


. 하지만 로이드 존스는 특별한 절기가 주는 유익을 무시하지 않았기 연속설교를 중단하기도 했다 이런 면에서 그는 청교도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는 않았다. "정말로 연속 설교는여러분의 마음속에 중단해야 되겠다는 특별한 부담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중단되어야 합니다"(1982C:190). 이'성령의 자유로움'(1982:189)에 대한관심은 타당할 뿐 아니 라 필수적 이 라고본다.

세밀하고 현미경적인 연구방법

로이드 존스는 전 성경을 망원경적으로 조명하는 것보다 성경의 한 부분을 세밀하게 현미 경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훨씬 더 유익하다고 말한다. 본문이 특별하게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때나 우리의 삶에 중요한 의미를 지닐때, 그는 이 세밀하고도 현미경적인연구방법을 채택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필요하다면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장(章)앞에 몇 시간이고 머물러 서서 그것을 관찰하고 그 부요한 의미를 전반적으로 그리고 세세하게 살펴보는 편이 훨씬 더 낫습니다. 성경은 우리 영혼의 양식을 공급하고 우리의 지성을 부요하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의도된 책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경험을 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본문과 함께 머물러야 하며 그 충만함을 들여 마셔야합니다(1978B:171~172).


만약 어떤 사람이 에베소서에 기록된 사도의 서론을 한 설교에서 전부다루고자 한다면 "거기에 포함된 풍성한 교리와 진리를 남용하고 놓치는 것"(1978B:160)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세세한 모든 것에 충분한 무게 와 강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방법은 궁극적으로 그의 영감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만약 여러분이 전 성경 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다면‥‥성경을 살펴야 하는것은 ‥‥ 진술 하나하나를 살피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1978B:84).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철저히 읽고 거기에 담긴 모든 의미를 파악해야 합니다"(1980:14). 더 나아가서 이와 같은 그의 방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로마서와 같은 서신은 사도 바울이 설교했던 것의 요약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루니아 역시 같은 의견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신약은 그 자체가 설교의 결과요 설교의 한 형태이다. 내 생각으로는 형식 비평학이 설득력 있게 보여준 바대로 복음서에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료의 대부분은 근본적으로 구두전승의 기간을 통해서 초대교회의 설교 속에 전달되어진 것임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Runia: 1978:5).


그러므로 설교자의 직무는 "사도에 의해서 요약된 형태로 여기 주어진 것을 펼쳐놓는 것"(1978A:xii)이다. 그는 성경에 대한 많은 주석들이 너무 간략하다고 보며 강해설교로 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강해설교로 돌아갈 때에 성경과 그 메시지의 영광과 위엄을 찬연히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l978A:xii).

연속설교의 길이에 관한 고찰

연속설교는 짧아야 한다고 로이드존스가 한 때 말했던 것을(1982C:197)기억한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로마서를 12년 동안 설교했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는 에베소서 4장4-6절에 나오는 '한 몸''한 성령 ' '한세례' 등을 가지고 각기한편의 설교를 했다. 또한 기독교인의 전신갑주에 관한바울의 비유에서 무기 하나하나를 가지고 한편의 설교를 했다. 그의 생애 후기에 가서는 요한복음 1장12-13절을 본문으로 해서 24편의 설교를 했으며, 요한복음 1장16절을 본문으로 해서 37편의 설교를 했다. 하지만 로이드 존스는, 연속설교는 길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여 이런 문제에 관한한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특정 설교자의 성품에 달려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발전 정도에도 달려있습니다. 설교자는 항상 성장하고 진보하며 발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가 젊은 날 할 수 없었던 것도 중년이나 노년에 가서는 할 수 있어야합니다(1982C:197).


자신의 강단에서 로이드 존스처럼 성경을 현미경적으로 다루는 방석을 채택했다면, 실패를 면하기 위해서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cf'. Macleod,1983:209).로이드 존스는20년이라는 강단사역을 한 다음,1946년에 베드로후서라는 한 책을 택해서 본격적인연속설교를 시작했다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그의 방법을 추종할 때에 기억해야할 사항은 "천재적 인 능력을 가진 그의 의사가 마침내 도달했던 곳에서 시작하려고 노력하는"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King, 1981:18).

일반적인 데서 특수한 데로

로이드존스의 설명을 살펴보면 일률적으로 일반적인 데서부터 시작해서특수한 데로 나아간다. 이것은 로이드 존스의 가장 특징적 인 설명 방법의 하나이다. 해석을 할 때도 동일한 방법을 사용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자기가 진리를 이해했던 방식으로 설명한다고 말할 수 있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접근 방식이 오늘날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1969:70),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전문가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문가는 세밀한데 너무 빠져서 원리를 때로는 잊어버리기도 합니다"(1981B:181). "세세한데 너무 몰입되어 있고 특정사항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짐으로 우리가 당면하게 되는 최대의 위험은 이 장엄한 전체를 놓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정한 사항에 비정상적으로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1981D:16).


그러나 그는, 현명한 교사는 먼저 일반적인 원리를 진술하고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원리는 그 자체로서 충분하지 않고 반드시 특수한 데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로이드 존스는, 동일한 설교 내에서 일반적인 진술로 끝내는 법이 없고 특정한 데로 항상 친행한다. 그는 일반적인 진술을 몇 가지 특수한 진술로 구분해서 전개 한다.


또한 그는 이것이 바울 사도가 언제나 행하던 습관임을 보여주고 있다(1978B:364; 1975C:86~87, 92-93;1980:197; 1976B:16; 1977A:170).사도바울은 결코 일반적인 원리를 말하지 않고 특수한 데로 들어가는 법이 없다. 그는 항상 일반적인 진술을 분명히 한 다음에 특수한 영역으로 들어간다. 더 나아가 근본 원리로부터 출발하는 방법은 주님에게서도 볼 수 있다. 즉 마태복음5장 17-20절에서 주님은의 (義)의 문제를 일반적으로 다룬 다음에 여섯 가지 자세하고도 특수한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마 5:21-48).

부정 먼저, 긍정 다음


긍정을 포함한 부정

로이드 존스의 또 하나의 특징적인 설명방법은 '부정 먼저, 긍정 다음'으로 설명될 수 있다. 로이드 존스는, 이미사람들이 주어진 문제에 대해서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에 부정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자신의 해설을제시하기 전에 대안적인 해석을 먼저 고찰한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어날 수 있는 예상되는 반대와 어려움들을 내다보고 미리 그것을 부정적인 명제로써 진술한다.
오늘날 유행하는 구호처럼 "항상적극적이어야 하고 부정적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전적으로 비성경적 이라고 거부한다. 비록 부정적이고 잘못을 폭로시키고 부인하는 것은 즐길 만한 것이 못되지만 청중들의 영적 인 유익을 위해서 경고를 발하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긍정적이고 완벽한데에 도달하기 위해서 먼저 부정적으로 명제를 취급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라고 생각한다.


복음은 청교도들이 '율법사역 '으로 부르곤 했던 부정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복음은 나아가서 인간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을 선언한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그러나 나는 여러분을 부정에만 머물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나로 하여금 긍정적인 데로 가게 하십시오"(1981F:9)."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부정적인 것에 멈추도록 하시지 않은 것을 감사 합니다‥‥ 그러므로 나도 부정하는데 머물지 않겠습니다"(1981F:10).


기독교의 영광스러운 측면은 그 메시지가 부정으로 끝나지 않고 항상 긍정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로이드 존스는 이점에 .있어서 기독교와 도덕의 차이를 발견한다. "부정은 절대로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만약 복음이 부정적인 데 멈춘다면 그것은 도덕이지 복음일 수 없습니다. 이것은 도덕이 아닙니다. 이것은 기독교입니다. 이것은 영성입니다"(1979A:170).


이 근본적인 이유 때문에 로이드존스는 기독교의 진리를 부정과 긍정이란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한다. 그의 설교에는 요소요소에 이런 방식을 볼 수 있다. 짧은 구절 내에도 그것을 활용할 때가 있다.
그러면 '세상'이라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물리적 우주를 의미하거나 사람들의 집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부정적). 그것은 관점과 정신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사물을 보는 방식과 인생 전반을 바라보는 방법을 의미합니다(긍정적)(1981C:79).


「산상설교」에 나오는 팔복을 다루는 설교마다로이드 존스는 주제를 먼저 부정적으로 다루고 나서 긍정적으로 설명한다.

사도와 주님의 방법

로이드 존스는 '부정 먼저, 긍정다음'이 사도 바울의 특징적인 방법이라고 본다. 바울은 이 방법을 그의 직설법에도 사용하고(롬6:11,18;8:5,9절 등)명령법에도 사용하고 있다(롬6:13;엡 5:18,6:4등).로이드존스는 또한 이것이 우리 주님의 특징적인 방법 이라고 주장한다(1981C:45, 80).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진술은 부정과 긍정이란 이중방식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항상 순서가 아닌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우리주님께서는 가끔 긍정적인 진술을 먼저하고 부정 적인 진술로써 그것을 뒤에 강조하기도 한다. 마태복음7장24절과25절의 진술은 긍정 적이고 26절과27절은 부정적인 진술이다. 주님은 강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 순서를 선택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살펴볼 때, 로이드존스는 이 순서의 문제에 너무 매여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이 갖는 타당성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로이드존스가 이 방법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청중에 대한 신학적인 견해 때문이다. 그는 사람이 깨끗한 백지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인생 전반에 관해서 잘못된 생각을 이미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메시지를 가져오기 위하여 먼저 그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에 대해 있을 수 있는 오해와 잘못된 생각들을 살펴보고 반박하는 일을 먼저 한다.

반복


좋은 가르침의 본질로서의 반복

반복은 로이드 존스의 특징적인 설명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는 참된 이해를 위해서는 반복이 필수적이고, 또한 '좋은 가르침의 본질적인요소'(1979B:26)라고 본다. 우리는 진리를 파악하는데 느리며 사물을 쉽게 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반복이라고 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로이드 존스는 생각한다. 또한 그는 우리 주님께서도 동일한 생각을 했다고 본다.


주님은 반복의 중요성을 아셨습니다. 그는 우리가 얼마나 멍청한지, 얼마나 느린지, 또 실제로는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얼마나 쉽게 생각하는지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사실을 끊임 없이 우리가 회상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아십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중요한 원리를 기억함에 있어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1981C:241).


로이드 존스는 여기에 에세이와 설교문의 차이가 있다고 본다.
수필에 있어서 반복은 나쁜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에 있어서 반복은 좋은 것입니다. 반복은 가르침과 설교에 있어서 본질에 속하는 부분이며, 거기에는 반드시 반복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요점을 기억하게 하고 분명하게 해줍니다(1982C71, cf.Adams,1982:42-46).

본문 자체에 의해서 요구되는 반복

로이드 존스는 본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진술에 충분한 무게를 주기 위해서 반복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저자인 바울자신이 그렇게 자주 반복을 하고 있는 로마서와 같은 서신을 설교할 때는 많은 반복이 있을 것을 예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로이드 존스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도는 이 구절 속에 명백히 깊고도 의미심장한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면 바울사도는 이 구절을 반복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1978B:97). "그는 진리의 여러 가지 측면에 의해서 너무 감동했기 때문에 그것을 거듭거듭 말하고 있습니다."(l978A:xiii).


만약 로이드 존스가 이 사도적인 방법을 따르려고 노력했다면 그는 그가"반복해야 할 가치가 있는 어떤 것"(1978B:188)을 알았기 때문이고,"결코 너무 자주 말한다고 할 수 없는 위대한 어떤 것"(1979B:26)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위대한 사도는 이러한 사실을 반복하기를 즐깁니다. 그와 같은 사실의 반복을 우리가 얼마나 즐기느냐가 우리가 신앙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하는 척도입니다. 이러한 반복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쩌면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도있고, 만약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볼품없는 그리스도인들일 것입니다(1979A:286).
달리말해 기독교 메시지의 성격 자체가 반복을 요구한다.

반복 방법

그 목적에 따라서 로이드 존스가 하는 반복을 이와 같이 분석할 수 있다.
1. 사물의 새로운 국면을 소개하기 위해서 : 예수님의 반복하는 방법으로부터 로이드 존스는 다음과 같은 것을 관찰하고 있다. 즉 예수님은 불필요하게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거기에는 반드시 그가 나타내려고 애쓰고 있는 새로운 국면이 있습니다"(1981:294).사도 바울도 동일한 반복을 하고 있다. "그가 반복할 때 마다 ‥‥ 그는 무엇인가를 첨가합니다‥‥거기에는 부가적인 사상이 있습니다‥‥"(1979A:286).


2. 논지의 주요한 핵심을 요약하기위해서 : 가끔 주의 깊게 듣고 있는 청중들로 하여금 주요논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적용 직전에 반복을 하고 있다.


3. 강조를 위해서: 로이드 존스는 여러 곳에서 바울과(1975C:351)우리주님께서 (1981B:170, 245, 246, 277, 283;1981C:198-199,251etc.)강조를 위해서 반복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더크루이터는 로이드 존스의 이러한 반복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De Kruyter, 1976B:9l).


끝으로 로이드 존스가 한 반복에 대해서 사람들이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여기서 살펴보는 것은 부적절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세세한 강해 속에 반복이 있다면, 그 사상은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속에 확실하게 새겨주기 위해서 반복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Marshall, 1972:282).
계속적인 반복이 있다‥‥하지만대부분의 반복은 유용한 것이다(De Kruyter,1976A:83).
‥‥그가 주석을 쓰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설교를 함으로 상당한 양의반복은 설교의 가치를 높이는데 기여한다(Bremer, 1975:89).
그 주요한 기능 때문에 로이드 존스의 반복방법은 주의 깊은 관심을 받아야 마땅하다.

예증


예증에 대한 그의 입장

로이드 존스는 진리를 명백하게 하고 분명히 하는 데에만 예증을 사용해야한다고 본다. "예증은 진리를 증명 하도록 의도된 것이지 과 자체를 나타내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예증 자체에 주의를 너무 집중시켜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선포하고 있는 그 진리를 밝히 보도록 사람들로 하여금 돕는 수단입니다"(1982C:233).


그러므로 예증은 다만 그 목적만을 위해서 주의 깊게 사용되어야 하지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로이드 존스는 어떠한 예증이 라도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러므로 예증을 너무 세세한 것까지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일반적인 예증의 활용

로이드존스는 성경적인 실례 (1981B:49050, 65~67, 99, 134,229;1981E:81,94-95),찬송가(1981B:115,234,241),교회사(1981B:281,291~292;1978B:324;1982A:49~50;1975C:126,127; 1981E:104~105),
일상생활(1975B:85,310;1975D:36;1980:18-19;1975C362-363),


일반 독서 (1981B:19;1981C:71), 목회경험(1975B:145;1981E:67~68-1982B:27~28),


일화(l981B:145;1981C:16~]7, 95-96),그리고 개인생활로부터 (1981E-.131, 259)예증거리를 찾는다. 어떤 예화는 한번 이상사용하기도 한다. 그의 예화는 예외 없이 짧은 것이 특징이다.


그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수단으로 예증을 사용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 그는 예증을 드물게 사용하고, 진리를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서만 주의 깊게 사용한다. 그가 예증을사용 할때는 필연적으로 해야 하는 경우다. 킹은 이 점을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예증이 사용될 때는 진리를 나타내기 위한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King, 1981:18).

예증으로서의 구약사건 활용

구약에 나오는 사건들을 예화로사용하는 문제에 대해서 논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로이드 존스는 때때로 구약사건을 영해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Macleod, 1983:208).로이드 존스는 구약사건을 영해하는 것과 구약사건을 예증으로 사용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 차이는 이렇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사람들에게 밝혀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해주어야합니다. 그것이 역사에서 일어난 특정한 사건이지만 동일한 원리가영적인 영역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주어야 합니다(1982C:230~231).


이 둘 사이를 구별할 수 있다면 로이드존스뿐 아니 라 청교도들을 이런 문제로 비난하는 것은 삼가 할 수 있다.

예증 사용에 있어서의 문제점

예증을사용하는 데는 확실히 위험이 따른다. "예증 자체에 관심을 끌기 위해 예증을 사용하는 것은 매춘행위나 다를 바 없습니다"(1977B:100). 설교자 다운설교자는 그것을 멀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설교에 예증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 또한 잘못이다.


예증을 오용하는 문제에 대한 긍정적인대답은 그것을 어떻게 바르게 사용하는지 배우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엄격한자기 통제 아래서 예증을사용하는 좋은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설교나 설교자의임무가 말씀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는 것인 한 설교자가 예증을 사용해서문제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필수적이다. 바울은 자기 청중의'연약함' 때문에 예증을 사용해야했었다(롬6:19).

상상


상상의 활용에 대한 그의 입장

오늘날사람들은 너무 과학적이 되어서 상상을 위한 여지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로이드 존스는 개탄한다(1982C:235).그는 "상상은 진리를 선포하는 데 있어서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여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상은 진리를 생생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1982C235)라고 생각한다.


"설교에 있어서 언어의 기능은 개념의 생생하고 구체적이며 감정적인 심상을 창조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한 개념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은혜스럽게 알려 주시는 계기가 될 수 있다"(Anon, 1977:363)고 말하는 그의 스승 에드워즈와 로이드 존스는 입장이 같다.


설교에 있어서 상상의 중요성은 많은 설교학자들에 의해서 입증되고 있다(Stott, 1982:239;Jabush, 1981:197f;Broadus, 1979:220ff).그러나 상상은 위험할 수 있다.
상상은 지나치게 멀리 나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느 지점까지는 그것이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그 선을 쉽게 넘어서서 상상 그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상을 시작하게 했던 진리와 무관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상상이, 상상을 통해서 여러분이 본 진리보다 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1982C.:236).


하지 만 로이드 존스는 민족적인 기질에도 불구하고 그의 상상은 위험한 지점까지 나아가지를 않는다. 그는 항상 상상을 진리에 복종시켰다. 왜냐하면"우리의 임무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진리이지 우리의 상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상상과 관련한 오늘날개혁주의 강단의 문제는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는 문제보다는 오히려 너무 적게 사용하는 데 있다.

논증

설교에서의 논증에 대한 그의 입장

논증이 없는 설교를 로이드 존스로부터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로이드 존스의 설교는 모두 절정을 향한 논증이기 때문이다(Packer cited in Fant&Pinson, 1972:268).
물론 로이드 존스는 설교의 기본적인 임무가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본다. "설교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행하신 것을 선포하고 또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1983A:23;cf. 1982C:261).동시에 그는 성경을 곳곳마다 논증하고 이유를 밝혀주는 논리로 가득한 책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임무는 거기에 있는 논리를 발견하고 활용하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에게 있어 신앙이란 순수하게 신비적인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논리적인 것이다 (1981C:129~130).


그래서 본문 내에 있는 논증을 찾는 것은 본문의 진리 속에 내포된 특징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논증은 이성을 설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는 논증을 사용하는 것을 옹호한다.
논증하는 것은 무조건 영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논증할 뿐만 아니라 특정 한 방식으로 논증하고 있습니다‥‥그는 너무 영적이어서 사람들의 사고과정에 있어서 전적으로 잘못된 것을 나타내 보여주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이러한 종류의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보다 더 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의 모범과 방법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소위 사도보다도 더 거룩해지고 신약성경보다도 더 성경적이 되려는 커다란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된 종류의 경건입니다(1979A:197~198).

상식에 기반을 둔 논증의 활용

로이드 존스는 성경으로부터 여러 가지 유형의 논증이 있다는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 그는 성경이 자주 상식에 기초한 논증을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로이드 존스는 그의 설교에서 동일한 논증 방법을 활용하고 특히 이런 논증 방법이 불신자들에게 유용하다고 생각한다....그가 그리스도인이 되기까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상식과 이성과 심리학에 기초한 논증을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달리할 수 있는 방안이 없습니다"(1981E:84,cf. 150-151).

'간접접근의 전략' 활용

로이드 존스는 바울 서신의 연구를 통해서 교리뿐만 아니라 논증하고 토론하고 자기 입장을 변호하는 방법까지 배운다. 왜냐하면 바울은 논리적 사고를 한 사람으로 (1976A:173~174;1979A:149, 301; 1975B:1~2;1979B:11),로이드 존스는 그를 가리켜 간접접근 전략에 통달한 사람라고 생각한다. 로이드 존스는 이 접근 방식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요점에 접근적하지 않습니다. 그는 항상 폭넓은 기만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고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명백한 것에서부터 명제를 설정합니다. 여러분이 토론을 할 때에 그것을 망각하지 마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의 반대자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대방이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받아 들여야 만하는 어떤 원리를 발견한다면 거기에서부터 출발하십시오. 특별한문제로 바로 뛰어들지 마십시오. 일반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십시오. 먼저 기반을 확보하시고 여러분의 입장을 점차적으로 세워나가십시오(1975B:16~17).
'일반적인 데서부터 특수한 데로'설명하는 그의 독특한 장법과 연역적 전개방식은 이러한 논증의 범주에 속한다.

성경에 기초한 논증의 활용

로이드 존스의 또 하나의 특징적인 논증방법은 성경을 활용하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그의 명제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다는 성경을 인용한다. 엄청난 양의 그의 성경 인용은 그가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인 것을 입증하고 있다. 설교 중에 그것을 자유롭게 기억하는 능력은 인상적이다. 로이드 존스로부터 우리는 성경을 통해 회중을 교육하고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때때로 그는 먼저 구약 예언서를 인용하고, 그다음 사도들의 말을 인용하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순서는 주님에게 궁극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것을 보여준다. 또 로이드 존스는 논점을 지지하는 방편으로 성경전체를 인용하는 것은 성경의 단일성에대한 분명한 그의 신념을 나타내준다.


성경에 기반을 둔 논증 방법은 성경을 인용함으로써 물리쳤고, 또 그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도 성경 말씀을 인용했다(눅4:1-13,24:25-27).사도 바울도 성경으로 유대인들과 논쟁했고(행 17:2-3),아볼로 역시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행 18:24-28).신약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논증을 밝히기 위해서 성경을 인용하고 있다.

논증 사용에 관한 몇 가지 고찰

캐서우드(Catherwood, 1982;4~5)는 로이드 존스가 독서를 많이 하고 의사로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로이드 존스는 논리적 사고가 '웨일즈 사람의 특징적인 사고는 이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분명하고 질서 있게 하기를 원합니다. 끝까지 논리를 추구하고 일관성을 요구합니다"(Murray, 1982:315).


로이드 존스는 학식이 없는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고 동시에 석학들도 놀랄만한 논리적 논증을 그의 메시지에서 전개한다. 논리적 논증이 그의 설교에 골격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를 일컬어 감정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cf. Murray, 315-316).
더욱이 신앙에 있어서 감정이 차지하는 자리가 있지만, 그는 항상 지성의 위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감정은 부수적인 것으로 여긴다.

강해설교의 기본요소인 설명

로이드 존스는 모든 설교가 '주해에다가 설교학과 적용을 더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1981A:5). 이 '주해 더하기 설교학'이라는 것은 강해를 의미한다. 그래서 모든 설교는 강해와 적용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에 의하면 설교의 두 가지 기본요소는 교리의 강해와 그것의적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설명은 강해의 본질이기에 강해설교는 반드시 교리를 설명하고 해설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는 설교의 임무가의미를 분명하게 그리고 명백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로이드존스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설명방법을 사용한다.


진리를 깨닫는 것은 전인적인문제이다. 그러나 진리는 먼저 지성을 통해서 수납되어야 한다. 로이드 존스는, 참된 설교는 먼저 지성에 충격을 주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진리는 먼저 지성에 도달하고 그리고 우리의 전 존재에 다가옵니다. 진리는 이론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성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진리는 근본적으로 이해의 문제입니다"(1978B:373).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의 강해설교에서 설명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의 메시지는 먼저 지성에 호소해서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cf.1982B:44,50,72,75-76,80-81). 진리는 먼저 지성에 다가오지만 반드시 마음을 움직여야하고, 다음에 의지를 움직여야한다(cf.1981:60, 110-111, Henry,1980:160).로이드 존스는 바른 순서대로이것이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1981E:61). "진리가 먼저입니다. 교리가 먼저 와야 하며 진리의 규범과 복음의 메시지가 먼저 와야 합니다.11
이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서는 설교 속에 진리가 반드시 명백하고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어야하며, 또한 이성이 그 진리를 수납할 수 있어야 한다.

주謝

1 로이드 존스는 이 순서를 고집한다. 인간에 대한 그의 이해에 비추어서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설교에 있어서 서술법과 직설법 사이에 있는 실제적인 순서로서 이해해서는 안된다(Coetzee, 1985:23참조).로이드 존스에게 있어서 이러한 논의는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설교d[서 두 가지 요소를 서로 분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는 성경적 교리를 적용한 강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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