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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요글방 원문보기 글쓴이: 고요[koyo]
荀子 ‘欲望論’의 이론적 근거
1. 들어가는 말
2. 宋銒의 ‘寡欲’과 道家의 ‘去欲’ 비판
1) 송견의 ‘寡欲’에 대한 비판
2) 노자의 ‘去欲’에 대한 비판
3. ‘自然義’로써의 ‘욕망’
1) ‘性’․‘情’․‘欲’의 관계
2) ‘욕망’과 ‘악’의 문제
4. ‘욕망’의 규제와 보장
1) ‘마음’의 사려 판단
2) ‘마음’의 ‘道’에 대한 인식
5. 맺음 말
1. 들어가는 말
순자는 후대에 남긴 많은 사상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성악설’을 주장했다는 점 때문에 그의 사상은 후대로 가면서 학자들의 폭 넓은 이해를 동반하지 못한 채, 지나친 편견과 왜곡으로 점철되어 갔다. ‘성악설’이 비록 논의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대부분은 맹자 ‘성선설’의 논의를 위한 하나의 방편적 차원에서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악설’은 ‘성선설’과 동일한 층차에서 논의될 수 있는가? 과연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전적으로 악하다는 말인가? 분명히 순자의 ‘성악설’은 戰國 시대라는 혼란한 현실적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면 인간은 어떠한 이유에서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여 사회의 혼란을 조장하는가?’, 한편 ‘그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자연적 본성을 이 세상에 어떻게 적용시켜 나갈 것인가?’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바로 ‘성악설’이 어떤 근원적 문제에 대한 인식보다는 현실에 대한 철저한 자각과 냉철한 비판 의식에서 나왔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것은 ‘심성론’의 영역만이 아니라 정치․경제․문화․역사 등 모든 영역에서 파생된 문제점을 설명할 수 있는 기본 토대를 구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성악’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특히 ‘성’과 ‘악’은 필연적 관계를 가지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성악’의 근거는 어디에 있으며', 또한 그 ‘악’은 무엇에 의해서 ‘선’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먼저 순자가 제시한 ‘성악설의 확장’인 ‘욕망론’의 논의가 전제 되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뒤에서 보겠지만 그의 제출한 ‘욕망’은 실제로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性情’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실제로 우리의 행위 활동을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도덕’은 ‘욕망’의 끊임없는 추구에 대한 배제․제거로부터 등장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도덕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인간이라면 누구나 ‘욕망’을 버리고 ‘도덕’을 그 자신의 삶의 궁극적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순자에 근거하면 우리는 ‘욕망’을 전적으로 배제한 상태에서 우리의 삶을 영위해 나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욕망’은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것의 만족을 추구함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욕망’은 그 출발부터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닐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간다움을 파괴하기만 하는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순자가 논의의 대상으로 삼은 ‘욕망’은 그러한 자연적 경향으로써의 ‘욕망’이 아닌 것이다. 그에게서 문제의 관건은 ‘욕망’의 기본 속성이 결코 만족할 줄 모른다는 점 때문에 그것의 끊임없는 추구가 현실적으로 인류 사회에 하나의 아주 큰 위협적 존재가 된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그는 그러한 ‘욕망’이 가는 데로 그냥 내버려두고 그것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지 않는다면 인류 사회의 조직은 무너져 버릴 것이고, 결국 인간의 생존조차도 유지될 수 없음을 인식했던 것이다.
이제 순자의 관심은 어떻게 인류 생존을 위협하는 현실의 혼란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으며, 인류 사회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가에 집중된다. 그리하여 그는 그 문제에 대한 보다 객관적․현실적 접근을 시도하는 속에서, 먼저 ‘욕망’에 대한 보다 세밀하고도 심도 있는 분석을 전개해 나갔다. 특히 그는 기타의 선진 제자들이 ‘욕망’의 분석에서 대부분 깊이 있는 분석을 하지 않은 것과는 달리, ‘욕망’ 자체를 인정하고 그것의 만족을 추구하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이고 독창적인 분석을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그는 ‘욕망’의 문제에서 ‘節欲’과 ‘道欲’을 주장하고, 그 당시의 유행한 두 가지 ‘욕망’ 관념-宋銒의 寡欲과 도가의 無欲․去欲-에 대한 관점을 전면적으로 비판한 데에서 충분히 보여진다.
2. 宋銒의 ‘寡欲’과 道家의 ‘無欲’ 비판
1) 宋銒의 ‘寡欲’에 대한 비판
송견에서 ‘욕망’의 핵심 내용은 ‘寡欲’인데, 이것은 맹자의 ‘寡欲’과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간단하게 말해 맹자에서 ‘욕망’은 인간에게 없을 수 없는 것이면서도 그것은 결국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추구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을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우리는 그것의 부정적인 측면에 함몰되어, 결국 인간의 선한 본성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맹자의 관점은 ‘욕망’ 자체에 대한 분석보다도 단순히 그것을 단속하여 어떻게 인간의 선한 본성을 잘 유지해 나갈 수 있는가에 집중된다. 이것이 바로 ‘욕망’에 대한 ‘節制’이다. 즉 “입․코․귀․눈․사지의 욕망은 비록 사람들에게 없을 수 없는 것이지만 많아서 조절하지 못한다면 그 본심을 잃지 않은 것이 없다”가 그것이다. 따라서 맹자의 ‘寡欲’은 실지로 ‘節欲’의 의미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하지만 송견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욕망은 많기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사람의 情이란 많기를 욕망하는 것(欲多)이 아니라 적기를 욕망하는 것(欲寡)”이라는 ‘寡欲’을 주장한다.
송견이 말했다. 사람의 情은 적기를 욕망하는 것이지만, 일반인들은 모두 자기의 정으로 많기를 욕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허물이다. 그래서 그 무리를 이끌고, 그 말을 변론하고, 그 비유를 밝혀서, 장차 사람으로 하여금 정은 적기를 구하는 것임을 알게끔 해야 한다.
과연 ‘인간의 정이 적기를 욕망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순자에 근거하면 인간의 情欲이란 입․코․귀․눈․형체가 그 본래의 기능을 발휘하는 것뿐이다. 만약 그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눈은 아름다운 색을 볼 수 없게 되고, 귀는 아주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없고, 입은 아주 좋은 맛을 느낄 수 없고, 코는 아주 좋은 냄새를 맡을 수 없고, 형체는 아주 좋은 편암함을 향유할 수 없을 것이다.” 뒤에서 보겠지만 순자가 강조하는 ‘욕망’ 자체는 단지 인간의 생리 기능일 뿐이기 때문에 우리가 많기를 욕망하는 것은 자연스런 경향에 속한다. 따라서 사람의 정이 적기를 욕망하고 많기를 욕망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정을 부귀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재화를 욕망하지 않는 것이고, 아름다운 색을 좋아하면서도 서시를 미워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순자의 관점에서 송견의 주장은 “사람들이 욕망하지 않은 바로써 상을 주고 사람들이 욕망하는 바로써 벌은 주는” 모순된 행위를 만들어 내기에 충분하다. 즉 만약 사람의 ‘情’이 진실로 많기를 욕망하지 않고 적기를 욕망한다면 ‘賞’과 ‘罰’은 모두 사람의 재부를 증가시키거나 사람의 재부를 감소시키는, 그 발생 작용을 따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순자의 “정치를 논하여 백성들이 욕망을 적게 하기를 필요로 하는 자는 욕망을 절제하는 것을 알지 못하여 욕망이 많은 것에 괴로워하는 자이다”와 “송자는 욕망에 가려 얻는 것을 알지 못했다”라는 비판은 충분히 근거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2) 老子의 ‘去欲’에 대한 비판
老子에서 인간의 ‘욕망’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움’을 회복하는데 최대의 방해가 되는, 즉 인간의 인위성을 보여주는 최대의 극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자의 기본 입장은 바로 ‘無欲’으로 드러나는데, 이것은 그의 세계관과 깊은 관계가 있다. 즉 노자에서 만물의 본원은 ‘道’로써, 이것은 만물을 생장하지만 그 자체에는 어떠한 욕망․의지․목적이 없다. 다시 말해 道가 비록 만물을 낳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만물을 소유하지 않고 주재하려 들지 않는다. 이와 같이 세계의 본체인 ‘道’는 우리들에게 어떠한 것을 요구․구속․제한하지 않고 그냥 스스로 그러하듯이 우리의 세계에서 작용할 뿐이다. 따라서 그러한 ‘도’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그것에 자신의 몸을 맡기기만 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욕망도 드러냄이 없이, 결국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無爲自然’적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세계가 그러한 욕망이 없는 ‘도’의 세계로 나아가려면 우리에게 처음부터 ‘無欲’만을 강조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즉 大道가 없어진 상황에서는 ‘無欲’을 과도하게 요구할 것이 아니라 그 요구의 수준을 조금 낮추어야 한다. 여기서 노자는 ‘寡欲’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과욕’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知足’으로, 우리들의 榮辱․生存․禍福을 결정짓는 최대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그것을 주관상 우리들의 재산을 분변하는 표준으로 볼 때, 만약 우리가 ‘만족함을 안다면’(知足) 비록 객관적으로 재산이 많지 않다고 하더라도 주관상 역시 스스로 부유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만족함을 알기 때문에 항상 만족하고(常足), 항상 만족하기 때문에 당연히 부유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재산이 비록 많다고 하더라도 주관적으로 만족함을 알지(知足) 못한다면 탐하여 만족함이 없을 것이고, 결국 자신의 파멸이라는 극심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老子에서 ‘寡欲’과 ‘知足’은 나눌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 왜냐하면 ‘寡欲’을 할 수 있으면서 ‘知足’하지 않는 자는 없고, ‘寡欲’하지 못하면서 ‘知足’할 수 있는 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노자의 ‘無欲’․‘去欲’은 우리 세계에서 실현 가능한가? 다시 말해 인간은 모든 ‘욕망’을 제거하고, 그 속에 어떠한 욕망도 없는 ‘道’의 세계로 나갈 수 있는가? 순자에 근거하면 우리는 ‘욕망’과 영원히 떨어질 수 없는 필연적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절제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영원히 제거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그는 노자의 주장을 다음의 한마디로 일축한다.
대저 정치를 논하여 백성들의 욕망을 제거하기를 필요로 하는 자는, 욕망을 지도하는 것(道欲)을 알지 못하여 욕망이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는 자이다.
여기서 보듯이 우리가 만약 ‘去欲’에 근거하여 국가를 다스리고, 그 ‘욕망’에 적당한 만족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욕망’에 막혀서 ‘국가를 올바르게 다스려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그러한 결과가 왜 생기는가에 대한 순자의 명확한 설명이 없지만 그것은 아마도 ‘욕망’이 사람의 생리 기능이기 때문에 ‘去欲’․‘無欲’․‘節欲’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이 분란을 일으키는 것도 역시 필연적 결과라는 생각에 기초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결국 순자의 노자에 대한 비판은 그가 ‘욕망’에 대한 기본 인식부터 잘못했음을 강조한 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3. ‘自然義’로써의 ‘욕망’
앞에서 보듯이 순자는 인간에게 ‘욕망’이 없을 수 없고, ‘욕망’에 만족을 부여함을 필연적 귀결로 보고서 송견의 ‘寡欲’과 도가의 ‘去欲’을 반대했다. 그렇다면 그에게서 ‘욕망’ 그 자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그것은 ‘성악’의 ‘악’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는가? 이제 논자는 ‘성’․‘정’․‘욕’의 관계를 규명할 때에만 그 문제의 본질에 접근해 갈 수 있다는 입장에서, ‘욕망’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1) ‘性’․‘情’․‘欲’의 관계
순자에서 ‘性’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성’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하늘에서 부여한 본질로써의 ‘성’이다. 이 ‘성’은 ‘生의 필연성’과 ‘자연스런 경향’으로, 노력하지 않고도 저절로 그렇게 되는 ‘天’과 같은 의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태어나면서 있는 그대로의 다듬어지지 않는 자연 상태, 즉 그 내부에 어떠한 의미나 가치도 가지고 있지 않는 ‘자연적 본성’을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어떠한 가치적 판단도 내릴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순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性이라는 것은 자연스런 경향이다. (그것은) 후천적으로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니고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고 노력해서 될 수도 없는 것으로써 인간에 갖추어져 있는 것은 性이라고 한다.
“性이라는 것은 本始 材朴이다”
生의 所以然을 性이라고 한다. 性의 和에서 생하는 바가 있고, 精이 합함에 감응이 있으며, 일삼지도 않고 스스로 그러한 것을 性이라고 한다.
둘째는 하늘에서 부여한 본능으로써의 ‘성’이다. 이 ‘성’은 ‘性의 조화된 상태가 외부 사물과 감응하여 어떠한 인위적 힘도 가함이 없이 처음부터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작용’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앞의 “精이 합함에 감응이 있으며……”에서 보듯이, ‘精合이란 정신과 사물이 서로 접촉하는 것이고, 感應은 사물이 사람에 感하고 사람이 그것에 應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말은 혹자의 주장처럼 “사람의 마음이 외래의 자극을 받은 것으로써, 일종의 주관적 반응을 표시한다”고 볼 수 있는가? 물론 그 말은 그렇지 않는 것으로 보여진다. 뒤에서 보겠지만 순자에서 ‘마음’은 항상 ‘知’의 작용을 함유하고, ‘知’의 결과는 ‘僞’에 가깝지, ‘性’이 아니다. 오직 외부 사물의 자극을 접수한 오관의 감각은 조금도 인의의 힘을 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성’이다. 그리하여 “精이 합함에 감응이 있으며”는 바로 “생의 소이연”과 “일삼지 않고서 스스로 그러함”(不事而自然)의 실질적 근거라는 점에서, 그것은 인위를 기다리지 않고 그러한 것으로 ‘성’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눈이 색을 좋아하고 귀가 소리를 좋아하고 입이 맛을 좋아하고 마음이 리를 좋아하고 신체가 안일을 좋아함 같은 것은 모두 인간의 ‘성’에서 저절로 그러한 것이지 일삼기를 기다린 뒤에 생긴 것이 아니다. 즉 “지금 사람의 性은 태어나면서 이익을 좋아함이 있다.……태어나면서 악한 것을 미워함이 있다.……태어나면서 이목의 욕망이 있고, 聲色을 좋아함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능’으로써의 ‘성’에는 ‘맹목적인 좋아함(好)과 싫어함(惡)만 있을 뿐이지 합리적으로 맞이하거나 항거하는 것은 없으며, 또한 실지로 生物의 生命 활동만 있을 뿐이고 마땅히 도덕 가치의 취향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순자에서 중요한 사실은 ‘성’의 실질적 근거가 다름 아닌 ‘정’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외부 사물과 합하여 감응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성’이 아니라 ‘정’이기 때문이다. 즉 그의 “정은 성의 바탕이다”가 그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정’과 ‘성’은 동일한 층차의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성’과 ‘정’을 합칭하여 ‘性情’․‘情性’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실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정’은 사람의 ‘자연 정서’를 가리켜서 하는 말이지, 결코 동물과 구별되는 고급 정감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순자의 ‘天情’이다.
인간의 육체가 갖추어지고 정신이 생기면 여기에는 좋아함․미워함․기뻐함․노함․슬퍼함․즐거워함이 깃든다. 대저 이것을 天情이라고 한다.”
성의 좋아함․미워함․기뻐함․노함․슬퍼함․즐거워함은 情이라고 한다.
즉 ‘성’의 바탕이 ‘정’이라는 점에서, ‘정’도 ‘성’과 마찬가지로 태어나면서 갖추어진 것이지 외부에서 가해진 것이 아니다. 그의 주장처럼 ‘정’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본래 가지고 있고”, “기다리지 않고 그러한” 것인 까닭에 그것은 군자와 소인․우와 걸을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모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정’은 이미 태어나면서 있기 때문에 ‘정’의 발현도 역시 어떠한 제제를 받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외부에서 가해진 것이라고 하여 규제를 받아야 할 대상이라면 그것은 앞에서 보았듯이 “사람의 정을 부귀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재화를 욕망하지 않고, 아름다운 색을 좋아하면서도 서시를 미워하는” 모순된 행위를 만들어 내기에 충분하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의 정은 입이 맛있는 것을 좋아하고,……귀는 좋은 소리를 좋아하고,……눈은 여색을 좋아하고,……형체는 안일함을 좋아하고……마음은 이익을 좋아한다.
이 길흉과 근심과 즐거움의 정은 안색에서 발현하는 것이고,……聲音에서 발현하는 것이고.……음식에서 발현하는 것이고,……의복에서 발현하는 것이고,……거주지에서 발현하는 것이다. 이 두 개의 정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본래 있는 단서이다.
대저 눈은 색을 좋아하고, 귀는 소리를 좋아하고, 입은 맛을 좋아하며, 마음은 이익을 좋아하고, 형체는 안일함을 좋아한다. 이것은 모두 사람의 情性에서 생하는 것이다.
영화를 좋아하고 욕됨을 싫어하며, 이익을 좋아하고 해로움을 싫어하는 것은 군자와 소인에서 같은 것이다.……이는 사람이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것이고, 기다리지 않고 그러한 것이며, 성군인 우와 폭군인 걸에서 같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정’의 기본 속성이 항상 외부 사물에 대한 끊임없는 감응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즉 “욕은 정이 응한 것이다”에서 보듯이, 그 감응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욕망’이다. 이러한 ‘性情’이 외부 사물과 접촉하여 이끌어지는 본능의 반응(굶으면 먹고자 하고 것 및 눈이 色을 구별하는 것)인 ‘욕망’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없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태어나면서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욕망은 기다리지 않고도 얻을 수 있고, 자연(天)에서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욕망’은 제일 아래 단계의 것으로, 경험 중에서 직접적으로 파악하여 얻어지는 ‘性’이다. 따라서 ‘욕망’은 ‘정’이 ‘성’과의 관계처럼 ‘성’과 떨어질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갖는데, 즉 ‘욕망’은 ‘정’의 지향인 동시에 ‘성’의 내용이자 그것의 구체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性․情․欲 세 개의 명사는 본질상 실제로 서로 관통하는 一體이며, 그 내용상 실질적 차이를 가지지 않는다고 하겠다.
2) ‘욕망’과 ‘악’의 문제
앞에서 보듯이 ‘생의 소이연’이자 ‘자연스런 경향’인 ‘성’ 그 자체만으로는 ‘성악’의 본의를 파악할 수 없다. 또한 ‘성의 바탕’인 ‘정’에서도 ‘性惡’의 실질적 근거를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 자체도 인간이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자연 정서이기 때문에 그것은 ‘성’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도덕적 가치 취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정’에서 ‘성악’의 ‘악’을 규정해 버린다면 우리는 현실적으로 ‘위’의 교정과 규정을 받아서 아름다워질 수 있는 근거를 원천적으로 봉쇄 당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성정’은 ‘악’과 어떠한 필연적 관계도 가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욕망’은 ‘성악’의 ‘악’과 관계가 있는가? 다시 말해 ‘성악’의 ‘악’은 ‘情性’이 외부 사물과 감응했을 때에 일어나는 ‘욕망’에서 이해될 수 있는가?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생리 기능으로써의 ‘욕망’은 실지로 ‘악’과 필연적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욕망’은 ‘성정’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갖추어진 것으로, 안에서 발현되지 않을 때에 ‘성’이 되고, 표현되어 나온 것을 ‘욕망’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욕망’을 추구하는 일은 매우 자연스런 경향이라는 점에서, 만약 인간에게 ‘욕망을 추구하는 일’이 없다면 그것은 결국 사회의 혼란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순자는 ‘욕망’에 대한 긍정적 입장을 표명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모두에는 욕망이 있는데, 욕망한 것을 얻지 못하면 구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욕망은 얻어진다고 하여, 그것을 구하는 것은 情으로 반드시 면할 수 없다.……비록 문지기라고 하더라도 욕망은 제거할 수 없고 본성으로 갖추어진 것이다. 천자라고 하더라도 욕망은 다 이룰 수가 없다.
하지만 문제는 순자에서 ‘욕망’ 자체가 자연적 생리 현상, 즉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을 그 자신이 논의하고자 하는 ‘욕망’의 구성 조건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구성 조건은 무엇인가? 문제의 관건은, 바로 ‘욕망’은 “진실로 안에 없으면 반드시 바깥에서 구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그의 관점에서 그러한 만족을 모르고 끊임없이 계속 추구해 나아가려고만 하는 ‘욕망’을 따라가는 것은 많은 문제를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옳지 않다. 그리하여 순자는 ‘욕망’의 끊임없는 추구가 가져오는 위험한 결과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사람의 성정을 따르면 반드시 쟁탈하게 된다”, “추구하는 데에 제한과 절도가 없으면 서로 다투게 된다. 다투면 사회는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워지면 사회는 막다른 데로 치닫게 된다”가 그것이다. 이렇듯이 ‘욕망’의 끊임없는 추구가 결과적으로 사람과 사람간의 다툼, 집단과 집단간의 투쟁,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 등을 불러와서 인간 질서의 파괴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욕망의 추구’는 무한한 반면에 그것에 만족을 줄 수 있는 현실적 근거는 유한하기 때문이다. 바로 ‘욕망’은 비록 우리에게 없을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의 끊임없는 추구를 쫒아 갈 수 없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성악’의 ‘악’은 엄밀한 의미에서 사람이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자연스런 ‘성’이나 그것의 바탕인 ‘정’에서 파악할 수 없고, 또한 정이 외부 사물과 감응할 때에 일어나는 ‘욕망’에서도 파악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현실적으로 발동된 ‘욕망의 추구’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추구’ 자체가 악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앞에서 보듯이 단지 ‘욕망’에 만족을 중줄 수 있는 현실적 근거의 부족 때문에 ‘욕망’의 끊임없는 추구에 적절한 제한을 두지 않는다면 악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순자에서 ‘욕망의 추구’는 어느 일정한 한도 내에서만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그 ‘일정한 한도 내에서’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뒤에서 보겠지만 ‘마음의 사려 판단’이다. 따라서 ‘욕망의 추구’는 오직 ‘마음의 사려 판단’의 제한에 근거하여 ‘선’으로 나아갈 수 있고, ‘악’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다고 하겠다.
4. ‘욕망’의 규제와 보장
1) ‘마음’의 사려 판단
앞에서 보듯이 순자가 논의의 대상으로 삼은 ‘욕망’은 ‘마음’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래서 만약 그것에 ‘마음’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욕망의 추구‘는 결과적으로 사회 질서의 혼란을 불러 일으켜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이제 이러한 점을 상기하면서, 논자는 ‘마음’이 어떻게 무한한 ‘욕망’의 추구를 제한해 나가는가를 살펴 보고자 한다.
그러면 순자에서 ‘마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본래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는 ‘性’과 같은 의미이다. 즉 ‘귀’․‘눈’․‘입’․‘코’․‘형체’․‘心’ 등은 모두 ‘天官’을 가리키는데, 여기서 ‘마음’이 ‘천관’이라는 것은 그것이 사람의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다섯 개의 감각 기관 중의 하나이고, 또한 “자연스런 경향”(天之就)인 동시에 “生의 소이연”(生之所以然)인 ‘性’과 같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마음’은 태어나면서 항상 “될 수 있는 데까지 안일한 것을 욕망하고”, “이로움을 좋아하는” 속성을 가진다. 따라서 순자에 ‘마음’은 먼저 그 속에 어떤 의의나 가치도 가지고 있지 않는 ‘性’과 같은 자연 본성의 의미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러한 ‘마음’이 ‘욕망의 끊임없는 추구’를 제지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서 순자는 ‘마음’ 그 자체 내에 ‘지각 작용(知)’이 있음을 강조한다. 즉 “知가 사람에게 있는 것은 知””이고, 또한 “무릇 인식하려 하는 것은 사람의 性이고”, 사람은 “태어나면서 知가 있고……心에는 태어나면서 知가 있다”는 것이다. 즉 이 ‘知’는 위에서 말하는 “生의 所以然”의 ‘性’과 마찬가지로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봉능적 知’를 의미하는 동시에 어느 사람이든지 태어나면서 항상 가지고 있는 ‘마음’의 지각 작용을 의미한다. ‘마음’은 바로 이러한 지각 작용을 통하여 외부 사물의 자극에 대한 사려 판단을 진행해 나간다. 다시 말해 외부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보통 ‘耳’․‘目’․‘口’․‘鼻’․‘形’과 같은 감각 기관에서 비롯되지만, 그것은 외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감각 기관에서 그치지 않고, 사유 기관인 ‘마음’에 의하여 판별되고 실증되어 명석화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판별과 실증을 통과한 인식’은 다름 아닌 ‘徵知’이다.
心에는 徵知가 있다. 徵知하면 귀에 의거하여 소리를 아는 것이 가능하고 눈에 의거하여 형체를 아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徵知는 반드시 天觀이 새로 감득한 것을 그전에 감득 했던 것과 같은 類와 대조해 맞춰 보는 조작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五官이 감각 표상을 분별 기록하고서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心이 그것에 응하고서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함이 없으면, 사람들은 누구나 그를 알지 못하는 자라고 할 것이다.
즉 ‘徵知’는 여러 감각 기관의 판별과 실증을 통한 인식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마음’은 반드시 감각 기관을 통해서 얻은 재료를 바탕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지식을 성취해 나간다. 즉 “지각이 합하는 것이 있는 것을 지식(智)이다”가 그것이다. 이와 같이 지식의 획득은 우리의 사려 작용이 인식 대상을 정확하게 인식하였을 때에 가능하다. 이런 속에서 진행되는 ‘욕망의 추구’는 결코 우리의 생리 욕망에 근거하여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사려 판단이 진행 될 때에 그 ‘추구’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은 사려 판단, 즉 감각 기관의 활동을 제어하는 기관이고, 그 ‘추구’는 사려 판단을 경과한 후의 ‘욕망의 추구’라는 점에서, 그것은 분명히 생리 욕망 자체의 범위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 (욕망의) 추구는 가능한 바에 따르고 그것은 마음에서 받은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받은 한가지 욕망은 마음으로부터 받은 많은 사려에 의해 제어된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욕망의 추구’에 제한을 가하는 ‘마음의 사려 판단’은 믿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분명히 순자에서 ‘마음’의 사려 판단은 善으로 향할 수도 있고, 惡으로 향할 수도 있는 가치 중립적 성격을 가진다. 다시 말해 ‘마음’은 그 자체 내에 사려․판단․조절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선과 악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욕망이 지나치는 데도 행동이 거기까지 미치지 않는 것은 마음이 그것을 제지한 것이다. 그런 마음이 옳다고 하는 바가 이치에 합하면 욕심이 비록 많다 하더라도 어찌 올바른 정치에 해가 될 것인가? 욕망은 미치지 않는 데도 행동이 그 이상이 되는 것은 마음이 그것을 시킨 것이다. 마음이 옳다고 하는 바가 이치에 어긋나면 욕망이 비록 적다 하더라도 어찌 사회의 혼란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중요한 말은 “욕망이 지나치는 데도 행동이 거기까지 미치지 않는 것은 마음이 그것을 제지한 것이다.……욕망은 미치지 않는 데도 행동이 그 이상이 되는 것은 마음이 그것을 시킨 것이다”이다. 즉 이는 마음이 그것을 제지하면 욕심이 비록 많다고 하더라도 다스림에 해가 되지 않으며, 마음이 그것을 시키면 욕심이 비록 적다고 하더라도 난리를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치’와 ‘난’, 즉 ‘선’과 ‘악’이 발생되는 실질적 근거는 바로 ‘욕망’에 있지 않고 마음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정치의 치와 난은 마음이 옳다고 시인하는 바에 달여 있는 것이고, 인정의 하고자 하는 바에는 관계가 없다. 그것을 마음에서 구하지 아니하고 욕망에서 구한다면 비록 ‘나는 진실을 얻고 있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가 그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욕망의 추구’는 ‘마음’의 사려 판단을 통해서 ‘선’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다. 이것은 ‘마음’의 사려 판단을 통해서 ‘위’를 ‘위’답게 만들 수 있는 근본 동기가 ‘욕망’의 추구에 부여 되었다는 말과도 같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의 사려 판단이 정확하다면 그 ‘욕망의 추구’는 바로 선으로 나아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악’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의 사려 판단은 선일 수 있고, 악일 수 있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분명히 선과 악을 분별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결정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마음’의 사려 판단을 정확히 하여 그러한 오류를 없앨 수 있는가? 이제 순자의 ‘욕망’에 대한 분석은 바로 “마음이 옳다고 하는 바가 이치에 합하면,……마음이 옳다고 하는 바가 이치에 어긋나면……”에로 모아진다. 이것에 근거하면 순자에서 ‘선’과 ‘악’이란 인간의 ‘욕망’이 많고 적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의 사려 판단이 이치에 합하느냐(中理), 아니면 이치에 합하지 않느냐(失理)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치를 떠나서 안으로 제멋대로 사려 판단하면 화복의 의탁하는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자에서 ‘善’이란 사람에 내재한 ‘선’이 아니라 ‘마음’이 ‘道’에 근거하여 ‘욕망의 추구’를 절제하고 이끈 결과라는 점에서 본다면 ‘마음의 도에 대한 인식’은 그의 ‘욕망’의 관점을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관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2) ‘마음’의 ‘道’에 대한 인식
앞에서 보듯이, ‘욕망의 추구’에 대한 실질적 제한은 ‘마음’이 ‘고금을 통한 올바른 표준’인 ‘道’를 표준으로 삼을 때에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도’는 ‘마음’의 작용에 근거할 때에만 인식이 가능한데, 만약 ‘마음’의 사려 판단이 ‘도’를 제대로 인식해 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판단의 오류로 결국 ‘욕망의 추구’에 대하여 올바른 제한을 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순자는 “마음은 도를 알지 않을 수가 없다. 마음이 도를 모르면 도를 옳다고 하지 않고 도 아닌 것을 옳다고 한다.……마음이 도를 안 연후에 도를 옳다고 하고, 도를 옳다고 한 연후에 도를 지킴으로써 도 아닌 것을 금할 수 있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에 근거하면 우리가 비록 욕망에 완전히 만족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도’에 대한 인식 속에서만 우리는 아주 가까운 상태로까지 ‘욕망’의 만족에 도달할 수 있으며, ‘욕망’ 자체는 비록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욕망의 추구’는 어느 정도 절제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욕망의 추구’를 이끄는 원칙은 ‘도리에 합하는 욕망’에 대해서는 구함이 적다고 하더라도 가까운 상태로까지 만족에 도달할 수 있으며, ‘도리에 어긋나는 욕망’에 대해서는 적당하게 절제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그가 의지 상에서 ‘욕망’을 억제하는 ‘節求’와 심리 요소를 채용하여 이익에 이끌리는 ‘욕망’을 완충하는 ‘道欲’의 구체적 요구이다.
욕망은 다 이룰 수는 없어도 그것을 이루는 데에 가까운 상태로는 할 수 있고 욕망을 비록 다 없앨 수는 없어도 그 추구를 절제할 수는 있다.……도리란 것은 적극적으로는 욕망을 완수하는 데에 가깝도록 하고 소극적으로는 추구하는 것을 절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순자는 ‘마음’이 ‘이치에 합하는 것’을 ‘욕망을 추구’하는 행위의 표준으로 삼았는데, 이런 ‘이치에 합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도로 욕망의 만족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럼 ‘마음’은 그 일정한 범위, 즉 ‘이치에 합하는 것’(中理)이 어떻게 가능한가? 다시 말해 ‘도’를 주재하는 마음은 어떻게 ‘도에 합치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는가? 여기서 ‘마음’은 ‘道’에 대한 인식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공부를 단행해 나간다. 그것은 바로 ‘虛’․‘壹’․‘靜’의 공부이다.
사람은 어떻게 道를 아는가? 그것은 ‘마음’이다. ‘마음’은 어떻게 (道를) 아는가? 그것은 ‘虛’․‘壹’․‘靜’이다. ‘마음’은 일찍이 藏하지 않을 수 없으나 이른바 虛가 있다. ‘마음’은 일찍이 가득 차지 않을 수 없으나 이른바 ‘一’이 있다. ‘마음’은 일찍이 動하지 않을 수 없으나 이른바 靜이 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인식 능력을 가지고 있고 인식 능력은 기억을 하게 된다. 기억이란 藏이다. 그러나 이른바 虛가 있다. 이미 간직한 것을 가지고 장차 받아들일 것을 방해하지 않는 것을 虛라고 한다. 마음은 태어나면서 인식 능력이 있고, 인식 능력은 구별을 하게 된다. 구별이란 많은 것을 동시에 두루 아는 것이고, 동시에 두루 아는 것은 兩이다. 그러나 이른바 一이 있다. 이 하나로 저 하나를 해치지 않는 것을 壹이라고 한다. 마음이 잠자면 꿈을 꾸고, 한가하면 방종하고 心을 쓰면 여러 가지 일을 모의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은 항상 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靜이 있다. 몽상이나 복잡 빈번한 생각으로써 인식 능력을 흐리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靜이라고 한다.
여기서 ‘藏’․‘兩’․‘動’은 ‘마음’이 감각 기관의 영향을 받아서 일어난 작용이라면 ‘虛’․‘壹’․‘靜’은 그것의 영향으로 일어난 작용을 잘 조절하고 규정하는 ‘마음’의 인식 작용이다. 이 두개의 작용은 비록 감각 기관의 영향력 내에 있느냐에 따라서 차이를 가지지만, 태어나면서 쌓이게 되는 ‘장’․‘양’․‘동’의 지식과 ‘허’․‘일’․‘정’의 공부를 통한 지식은 동일선상에서 서로 대립하거나 배척하는 관계가 아니라 위아래 두개의 상이한 층 사이에서 서로에 작용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허’․‘일’․‘정’은 ‘장’․‘양’․‘동’이 발동하지 않으면 그 의의를 드러낼 수 없는 ‘후천적인 경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道’의 인식은 그러한 ‘허’․‘일’․‘정’의 공부를 통해서 ‘장’․‘양’․‘동’을 잘 조절할 때에 가능하다. 즉 ‘마음’을 ‘虛’하게 하면 ‘마음’은 외부 사물을 받아들여 끊임없이 전체적인 인식 작용을 하고, ‘마음’을 ‘壹’하게 하면 ‘마음’은 그 전일성으로 그 앞에 드러나는 여러 가지 사물을 모두 알게 되고, 또한 ‘마음’은 그것을 관통하여 지식을 조리 있게 하고 이것과 저것으로 하여금 서로 방해하지 않게 할 수 있으며, 또한 ‘마음’이 ‘靜’하면 외부 사물에 이끌리지 않고 이치를 분명히 알 수 있으며, 그것의 정미함까지도 관찰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지식’의 획득이나 ‘道’의 체득은 ‘마음’의 ‘허’․‘일’․‘정’의 공부를 통해서 가능하다.
즉 ‘마음’은 ‘虛’․‘壹’․‘靜’의 공부를 통하여 五官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과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天君’의 능력을 통해서 ‘욕망’을 다스려 나간다. 즉 ‘天君의 마음’이 자신을 다스리고 그 이외의 것을 다스리는 內外合一의 統類를 이루기 위해서는 ‘道’라는 객관적․외재적 표준에 근거해야 한다. 이러할 때에 ‘마음’은 참다운 인식을 하게 된다. 따라서 ‘마음’은 반드시 ‘허’․‘일’․‘정’의 공부를 거친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을 바르게 하고, 더 나아가서 ‘마음’ 자체와 그것 이외의 것을 다스리는 ‘天君’의 직분을 보다 더 올바르게 발휘하여 하나의 淸明한 ‘天君’이 되는 것이다.
아직 道를 얻지 못하여 道를 구하는 자에게는 虛壹靜을 (그에게) 가르쳐 주라.(謂之) 그것을 실천하려면(作之) 장차 道를 따르는 자가 虛해야 (道에) 들어갈 수 있고, 道를 실천하는 자가 壹해야 (이치를) 다할 수 있고, 道를 생각하는 자가 靜해야 분명하게 관찰할 수 있다. 道를 인식하여 분명하게 통찰할 수 있고, 道를 인식하여 힘써 실천할 수 있어야 비로소 (진정으로) 道를 체득할 수 있다. (이런) 虛壹靜을 大淸明이라고 한다. (여기서) 만물은 형상을 드러내어 보이지 않는 것이 없고, 보이면 논설하지 못할 것이 없고, 논설하면 그 마땅함을 얻지 않음이 없다. 방안에 앉아서 사해의 안에 있는 사물을 볼 수 있고, 오늘에 앉아서 아주 오래된 사물을 들을 수 있고, 만물을 통관하여 그 도리를 알 수 있고, 治亂의 자취를 더듬어 그것의 제도를 통달하고, 天地를 경영하고 만물을 다스리며, 大理를 制裁하고 우주를 포괄한다.
이러한 ‘大淸明한 마음’은 ‘虛’․‘壹’․‘靜’의 공부를 통과하여 도달된 최고 경계를 의미한다. 여기서 ‘마음’은 ‘도’에 근거하여 ‘천군’의 능력을 확보하고, 오관의 본능뿐만 아니라 ‘욕망의 추구’에서 생기는 폐단까지도 말끔하게 다스릴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다.
결국 순자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의 추구’에 대해서 주관상 ‘마음의 사려 판단’의 제한을 두고, 다시 객관상 ‘禮’의 제한을 가하여, ‘욕망’은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어느 정도 만족을 줄 때에만 모든 분란을 막을 수 있음을 강조했다. 여기서 ‘예’는 사회의 발전이 일정한 한계를 지님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생활 수요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일정한 제도로써 상이한 집단 사이의 물질적 이익 관계에 대한 조절과 깊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예’는 사람들이 이익을 추구하는 활동을 조절하고 제한하는 수단이자 사회 집단의 물질적 이익을 조절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즉 “예의를 제정해서 분별이 있도록 하여, 사람의 욕망을 기르고 또 사람의 요구를 만족시킨다”가 그것이다.
5. 맺음 말
이상으로 보듯이, 순자는 우리가 ‘욕망’의 완전한 만족을 얻을 수 없지만 ‘마음의 사려 판단’이라는 일정한 조건하에서만 그것의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입장에서,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자연 본성의 ‘욕망’ 자체와 ‘마음’의 사려 판단을 통하여 결정된 ‘욕망의 추구’를 구분했다. 더 나아가 그는 그러한 마음의 사려 판단이 “옳다고 여기면 받아들이고 그르다고 여기면 사양하는”, 즉 선’과 ‘악’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도’라는 외재적 근거를 인식하는 속에서만 ‘선’과 ‘악’을 구별하여 ‘선’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바로 이러한 객관적 표준인 ‘도’, 즉 ‘예’에 근거하여, ‘욕망’은 일정하게 나아가 충분한 만족에 도달할 수 있고, 모든 ‘물’은 그 욕망에 만족하는 작용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순자는 ‘욕망’과 그것에 만족을 주는 ‘물’의 동일한 발전을 강조한다. 즉 “(욕망에 만족을 주는 수단인) 物과 욕망 사이의 관계는 이미 욕망으로 하여금 物에 제한을 가할 필요가 없고, 또한 그 物로 하여금 완전히 욕망에 굽히게 할 필요가 없다. 이 양자는 반드시 서로 기다려서 증진이 있다”가 그것이다. 따라서 순자가 제출한 ‘욕망’의 분석은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일정량의 물질적 이익을 도모하는 데에 하나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순자가 제출한 ‘욕망’의 분석이 사람들의 물질적 이익과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그 당시의 현실적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즉 그것은 그가 현실의 참혹한 상황에서 위정자들의 지나친 물질적 욕망의 추구로 인한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고, 그러한 현실적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가에 집중되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그 당시에 백성들이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무리들에 의해 하나의 도구 내지 수단으로 전락하는 속에서, 백성들의 현실적 ‘삶’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로 귀결된다. 이 때문에 그의 ‘욕망론’은 단순히 임금의 입지를 더욱 강화하거나 그 역량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에 대한 백성들의 입지를 더욱 강력하게 부각시켜 백성들의 정치․경제적 안정을 도모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순자는 ‘욕망’의 분석 그 이면에 ‘백성의 현실적 삶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라는 과제를 두고서, 그 이전 시대에 다르게 ‘욕망’에 대한 객관적․현실적 접근을 시도해 나갔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