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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범 - 부산출신으로 1989년 '디오니서스' 라는 록그룹을 결성, 첫 앨범을 발표함으로써 자신의 연주를 세상에 공개한다. 당시 발표된 첫 번째 앨범은 조악한 사운드와 연출상 오류, 열악한 상황(이 앨범에서 사용된 기타는 4~5만원 정도의 국산제품이었다고 한다)으로 그의 출중한 연주가 제대로 평가받기 위한 결과물로는 부족한 것이었다. 총 10곡이 수록된 그의 첫 번째 앨범은 사실 곡 자체의 완성도를 볼 때도 그렇게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테마창작의 허술함과 편곡의 단조로움, 속주의 남발 등 여러가지 약점을 노출한 이 앨범은 그의 진정한 자질을 보여주기에는 모자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Violent V'와 'Legend of darkness' 등의 곡에서 들을 수 있는 강력한 속주는 당시까지 국내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귀한 연주로서 그가 이미 기타의 기술적인 부분에 한해서는 실로 엄청난 경지에 올라 있었던 사실을 확인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듬해 나온 디오니서스 두 번째 앨범 [Excalibur]는 그의 음악적 성장과 보다 진일보한 기타연주를 담고 있는, 음악 자체를 볼 때도 질적으로 매우 우수한 준작들을 포함하고 있는 국내 록 음악계의 명반이다. 비록 '잉베이 말름스틴'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긴 하지만 2번 곡 'Charnel Castle'에서 들려준 무반주 속주 부분에서의 가공할 스피드는 당시 활약하던 '크리스 임펠리테리' 나 '그렉 하우'등의 외국연주자들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드라마틱한 구성을 보여주는 동명 타이틀곡이나 그의 타이트한 리프가 예리하게 조여드는 6번 곡 'Lessons Of 'Poeni' War' 등의 넘버들은 '콘' 스타일의 하드코어적 헤비함을 능가하는 중후함을 들려 주기도 했다.
93년 발매된 그의 솔로앨범 [DOUBLE TENSION]은 진정한 의미에서 국내 록 기타계의 중요한 거점이다. 동명타이틀곡을 포함한 총 8곡의 연주곡을 수록하고 있는 이 앨범에서 배재범은 속주기타연주에서 만큼은 완전히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폴 길버트(ex-미스터 빅)'를 능가하는 피킹 솜씨를 과시했고, 유려한 핑거링으로 정통적인 록기타 주법을 완전히 정리했다. 이 앨범은 배재범 자신이 '퓨전'이란 목표를 설정했지만 장르를 떠나 그가 전개한 기타연주는 기본적인 기타연주법(왼손 핑거링과 오른손 피킹에 의한)의 한계를 명확히 확인한 가치가 크다. 한마디로 이 이상 테크닉적으로 더 발전하기란 물리적, 인간의 신체구조상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상당한 텐션을 느끼게 하는 코드 진행이 돋보이는 1번 곡 'DOUBLE TENSION'에서 그는 무려 64마디를 6연음연주로 일관하는 방식을 통해 거의 음들을 쏟아내는 듯한 이미지를 연출했다. 스피드도 스피드이지만 정교한 템포감으로 연음 연주의 의미를 한층 살린 이 곡에서의 현란함은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5번 곡 'RIO NIGHT'에서 들려주는 스피드를 동반한 부드러운 레가토 프레이즈는 미국의 레가토 플레이의 대가 '앨런 홀스워스'를 인용한 것으로 그의 왼손 핑거링이 얼마나 건실한 연습을 바탕으로 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3번 곡 'PRESENT'는 당시 앨범 발매 후 FM방송(이승연이 진행하던)에서 시그널로 사용되기도 한 어쿠스틱 소품이다.
'PERFECT GAMES'는 이 앨범에서 가장 빛나는 트랙이다. 간결하며 시원스런 테마 멜로디는 이 앨범에서 그가 음악 내적으로도 대단한 성장을 이룬 것을 입증했는데 이 곡의 멜로디는 '밥 제임스'의 팝적인 감각과 '알 디 메올라'의 테크닉이 절충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테마연주 후 동일한 코드상에서 행한 이 곡의 애들립은 전세계 어느 기타리스트의 앨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진귀한 프레이즈를 선보인다. 미들템포의 곡에서 연주되는 8연음은 우리가 쇼팽의 피아노곡에서 느꼈던 강렬한 카타르시르를 제공한다. 기술적인 면만 보자면 그의 이 연주는 김세황(노바소닉)의 카피성 짙은 플레이나 이현석의 동어반복을 능가하는 것들이었다.
불행히 93년 이 앨범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 이상 앨범을 발표하지 않는다(이 앨범은 오천장 한정 발매됨). 이 앨범의 기타연주는 ESP 기타와 ROLAND GP-16만으로 행해진 것들이다. 간소한 장비로 깔끔한 톤 감각과 자신만의 독특한 프레이즈를 배출했던 배재범에게 국내 록 기타사의 한 페이지를 할애해야 할 것이다.
배재범은 출중한 기타실력에 걸맞게 대외적으로 매우 오만한 태도를 보였는데,한 음악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능가하는 기타리스트는 세상에 없으며, 스윕피킹(Sweep Picking)이라는 기타 테크닉을 진정 이해하고 제대로 표현하는 연주자는 '잉베이 말름스틴'과 자신만이 전세계에서 유일하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이현석 - 국내에서도 김태원과 김도균, 배재범을 비롯한 많이 이들이 잉베이식 속주를 시도했지만 그네들의 세련된 음감과는 애초 비교불가였고, 녹음기술의 한계가 있었다. 기타리스트의 색깔보다는 누가 멜로디컬하게 ‘빨리 치나’의 장에 불과했다.
8년이라는 가위눌림을 지나 90년대 초반 이현석이라는 생소한 뮤지션이 등장한다. 그의 연주는 잉베이 맘스틴을 연상시켰고, 「Sky High」는 「Far Beyond The Sun」에 비견되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이현석의 연주는 빠르고 어려운 주법을 사용했지만 정교했고 대중적이었다. 이현석은 바로크 메탈이라는 특정 장르에서 벗어나 모방에 머물지 않고 김태원의 증언처럼 “한국적인 스타일에 맞춘 음악을 지향”했다. 이는 그가 꾸준히 부클릿에 감사의 대상으로 삼는 김수철과 송골매의 명기를 봐도 알 수 있다.
『1집』에서 이현석은 「Sky High」 단 한곡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곧이어 발표된 『2집』 수록곡들은 각종 프로그램의 배경음악으로 쓰였고, 「학창 시절」은 〈가요톱텐〉에 등장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현석의 『2집』은 어느 한 곳 나무랄 데 없는 앨범이었고 당당히 성공을 이끌어 낸다.
1, 2집의 성과에 자신감을 얻어 발표한 『3집』은 1시간 가까운 러닝타임에, 14곡을 수록하지만 이게 과도했다. 좋은 멜로디는 여전했고, 공격적인 리메이크 「세상만사」가 앨범을 요약하지만 기존과 같은 패턴이었고 식상했다.
이현석은 3년 후, 절치부심 끝에 98년 비극의 상흔(어머님의 귀천)을 담은 『4집』을 발표한다. 『4집』은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2집』에 버금갔지만 IMF와 인디의 득세로 인해 대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특히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묻히기에는 아까운 곡이었다.
이현석은 3, 4집의 실패(?)를 성찰하고 자신의 음악에 변화를 준다. 99년 이현석 프로젝트를 결성, 그간 약점으로 지목되었던 보컬 자리에 김성은을 영입하고, 밴드체제로 팀을 재정비한다. 메시지는 대중성보다는 사회비판을 담았다. 이게 의외의 장면이다.
성공 관행보다는 오히려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한다. 그의 자존심과 음악에 대한 열정을 볼 수 있는 좋은 대목이다. 그는 실패하더라도 비켜가려 하지 않았다. 아이러니를 담은 「스타가 되기까지」는 너무도 훌륭했다.
21세기 들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속주나 잉베이 맘스틴을 언급하지 않았고, 이현석은 잊혀져 갔다. 재능 있던 뮤지션의 몰락은 현실에서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이현석이 더없이 그리웠던 건 음악에 대한 자세 때문이었다. 그는 현란한 기능보다는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지향했고, 과장하기 보다는 정직한 소리를 담으려 노력했다. 그에게 기타는 자신의 말이었고 존재 증명 이유였을 뿐이다.
2005년 드디어 이현석은 “Come Back"한다. 돌아온 이현석은 깊어졌고, 자신 신념에 가득 찼다. 이현석 프로젝트에서 보였던 사회 인식은 더욱 날을 세웠고 날카로워졌다.
「위험한 댄스」, 「안녕히 가세요」, 「일등」, 「서울로」, 「욕망은 달린다」에서 이현석은 대한민국 곳곳의 부조리를 파헤쳤고, 그간 그를 기다려온 팬들에게 변함없는 이현석식 연주곡 「Asian Power」와 「위풍당당 행진곡」을 헌사 한다.
세월은 이현석에서 좌절보다는 음악의 확신을 강화했고, 성공에 대한 조급증보다는 연륜을 선사했다. 그의 5집 『Myself』는 변함없는 스스로의 약속이었다.
신대철은 한국에서 기타리스트가 솔로로 활동하는 어려움이 얼마나 힘든지 토로한 적이 있었다. 기껏해야 연주인으로 앨범 한 장 낼 수 있는 풍토에서 이현석은 10년 이상을 견디어냈고, 6장의 적지 않은 앨범을 발표했다.
이현석의 일관된 고백은 장인의 모습처럼 장엄하다. 그는 「My Self」를 연주하며 "언제나 기타리스트로 평생을 다할" 다짐을 한다. 비록 현실은 비루하지만 이현석이 펼치던 정면승부는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하는지 본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다.
신대철
이름: 신대철
직업: 가수, 작곡가, 기타리스트, 서울종합예술대학교 실용음악과 학부장/교수
소속그룹: 시나위
가족: 아버지 신중현, 동생 신석철, 신윤철
데뷔: 1985년 1집 앨범 [헤비 메탈 시나위]
경력: 임재범, 서태지 1집, 이승철, 박광현, 이현우, 김종서, 박상민, 손성훈, 김장훈, 이상우, 이소라, 이은미, 크라잉 넛 등 80여명의 가수,
뮤지션 음반 작편곡, 작사, 연주 및 프로듀싱,
영화 '나에게오라', '북경반점' 등 음악감동
EBS 다큐멘터리 '시베리아 호랑이','역사복원시리즈 두만강에서 흑룡강까지' 음악감동
신대철 1집, 자유 1집, D.O.A 도시락특공대 2집 참여 등
한국록의 대부이자, 우리나라의 제프백이라 불리우는 기타리스트, 신중현의 아들이자,
그 또한 시나위라는 우리나라 최고의 밴드에 기타리스트이기도 한 신중현씨.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딱 맞는 기타리스트 신대철씨는 시나위의 기타리스트로 우리나라 가요계에 데뷔한 그는, 이후 수많은 뮤지션들의 기타 세션이자 음반 프로듀서, 음악감독으로서 많은 활약을 해왔는데요.
1980년대는 가슴에 응어리진 무언가를 토해내듯 시원하고 소란스러웠던 헤비메탈이 주도하던 시기였습니다.
'무당' '시그마' '이수만과 365일' 이라는 하드록밴드가 나왔고, '시나위'라는 우리나라 대표 헤비메탈 밴드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밴드]하면 홍대가 떠오르지만, (클럽해도 홍대가 떠올라서 슬퍼지기도 합니다만....)
80년대에는 서울 종로의 파고다 극장이 반드시 언급해야 할 공간이었다고 합니다.
그곳을 주름잡았던 밴드들 중심에는 바로 시나위가 있었는데요.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록의 대부 신중현의 아들 신대철이 지금도 이끌고 있는 시나위는 백두산, 부활, 카리스마 등과 함께 헤비메탈 전성시대를 진두에서 견인한 록밴드입니다.
시나위 1집 재킷을 보면 'heavy metal'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헤비메탈을 정식으로 표기한 최초의 음반이기도 하고, 본격적인 헤비메탈 전성시대를 불러온 선구적 앨범이라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총 8곡이 수록된 이 음반은 열악한 제작환경에서 녹음되어 녹음상태는 좋지 않지만, 보석같은 명곡들이 즐비합니다.
리드보컬 임재범이 감기에 걸린 상태에서 3일만에 녹음을 끝냈따지만 지금도 대중적 사랑을 받는 록 발라드 '그대 앞에 난 촛불이어라'와
6분이 넘는 대곡 '잃어버린 환상' 임재범의 샤우팅이 압권인 '남사당패',
그리고 한국헤비메탈의 기념비적인 트랙 '크게 라디오를 켜고'는 진정 한국 헤비메탈 역사에 기록될 명곡들입니다.
시나위를 거쳐간 멤버들의 면면도 화려하기 그지 없습니다.
리더인 기타리스트 신대철을 비롯해, 임재범(보컬), 김종서(보컬), 서태지 (베이스) 김바다 (보컬) 모두 시나위 패밀리였습니다.
가히 전설적이라 불릴만 하죠 ^^
이렇듯 많은 멤버들의 교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한국rock을 대표하고 가장 오래된 팀으로 아직도 그 명성을 이어갈 수 있는건,
신대철이라는 기타리스트가 중심에 우뚝 서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 앨범에서 신대철은 헤비메탈이 지닌 거칠고 파워풀한 기타 사운드를 선보입니다.
초기 기타플레이는 양손탭핑과 아밍중법이 가미된 테크닉적인 속주 기타플레이가 많았다고 하구요.
하지만, 1집 잃어버린 환상이나 연주곡 1월에서는 특유의 블루지한 플레이도 들을 수 있습니다.
3집과 4집에서는 테크니컬한 속주 플레이가 주를 이루고요, 5집부터는 음악적 성향이 얼터너티브와 사이키델릭이 혼합된 사운드로 바뀌면서
기타도 펜더스트라토캐스터와 텔레캐스터를 사용하고, 펜타토닉에 기반을 둔 정통적이고 지미 핸드릭스를 연상시키는 사이키델리적인 연주를 들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서울종합예술학교의 실용음악 기타 교육자로서, 후배들을 양성하고 계신데요 ^^
대학 강단에서는 과연 어떠한 기타 강의를 들려주실지 무척 기대가 됩니다.
김도균 - '아시아나'의 리드 키타 출신으로 우리 가락을 록에 접목하는 음악실험을 계속하고 있는 국악록 기타리스트 김도균. 한국 헤비 메탈의 전성기를 주도했던 그는 1988년 첫독집 'CENTER OF THE UNIVERSE' 로 '국악 록'이라는 외로운 음악 여정에 첫 발을 디뎠다.
작년 11월 한대수, 이우창과 함께 <삼총사> 앨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발표한 '김도균 그룹'의 첫 앨범 <정중동>은 한국 록의 세계화를 꿈꾸는 그의 오랜 탐구가 이제 본 궤도에 들어섰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또 한국적 가락으로 '월드뮤직'을 꿈꾸는 한국대중음악의 뉴에이지 리더로 거듭났음을 증명해 보였다.
김도균은 대구에서 음악과는 거리가 먼 섬유사업가 김정태씨와 전정임씨의 1남 2녀중 막내로 1964년 5월 11일 태어났다. 부잣집 외아들로 부족함 없이 자란 그는 동네 친구들과 총싸움을 즐기고 장난감을 좋아했던 평범한 아이였다. 그러면서도 밤 하늘의 별을 보며 우주에 대한 동경을 품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의문을 가지고 고민했던 조숙한 아이였다. 당시 그의 꿈은 천체물리학자.
대구 남도초등학교 3학년때 대구교대부속 초등학교로 전학한 날 미술시간을 그는 잊지 못한다. 그림을 그리면서 묘한 예술적 흥분을 느꼈던 것. 1년 뒤 처음으로 불어본 리코더는 더욱 신기했다. 그는 곧 학교 대표로 경북도내 초등학교 리코더 경연대회에 나가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후 학교 리코더 합주단과 함께 대구·대전 MBS TV 녹화등 연주 여행도 다녔다. 5학년 때 합주부에서 북을 치는 김도균을 본 천기석 음악선생님은 "10년만에 한번 볼까말까한 연주"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음악에 대해 더욱 강렬한 매력을 느낀 것은 당연했다.
뿐만 아니라 서울 리틀엔젤스 미술 경연대회 등 크고 작은 미술대회에서 수 차례 수상을 했을 만큼 미술 재능도 대단했다. 그는 "나는 음악을 하면서 머릿속으로 늘 그림을 그린다. 렘브란트의 강열함과 세잔드 같은 인상파 화가들의 역동성들을 보며 강력한 인상을 받았다"며 "초등학교 때 이미 해볼 것은 다 해본 기분"이라고 회고한다.
대구 경복중에 입학해 교복을 입자 군대 같은 답답함이 가슴을 죄어왔다. 1학년때 사촌형님의 일렉트릭 기타는 일종의 탈출구였다. 처름 기타를 처 본 느낌은 그저 그랬다. 하지만 우연히 경북대의 록 그룹 지하 연습실에 놀러 가 딥 퍼플의 강력한 기타소리를 듣는 순간 망치에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 때 전기 기타를 사고 초등학교 동창인 드럼 김대벽과 베이스를 치는 중학교 친구와 함께 3인조 '중성자'란 팀을 결성했다. 드럼 김대벽의 집 지하실은 늘 연습을 했던 아지트.
김도균은 창작도 시작했다. '중성자'는 대구 수창초등학교 강당을 빌려 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창작곡 '동녘에 밝은 태양', '천상천하 유아독존'과 이글스의 '호텔 켈리포니아' 등을 연주했다.
제법 이름이 나자 대학생들의 호텔 고고 파티에도 초청받아 가발을 쓰고 나가 연주를 했다. 당시 김도균의 가슴을 불태운 것은 키스, 딥 퍼플, CCR, 피터 프램프턴, 레드 제플린 등 비트 강한 록 계열의 음악들. 하지만 대구 영진고에 진학한 후 반사회적 내용으로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불러온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을 접하자 "학교가 문제가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의논도 없이 자퇴를 해버렸다. 학교에 간다며 집을 나와 혼자 '앞산'에 올라가 교과서가 아닌 기타로 자신의 인생을 그리기 시작했다.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80년 초 대구의 한 클럽에서 연주생활을 하며 전문 음악의 길로 들어섰다. 몇 개월 후 "큰 물에서 놀자"는 생각에 무작적 상경. 낙원상가에서 무명음악인들과 만나 전국의 클럽을 도는 떠돌이 세션활동을 하다 4인조 록 그룹 '수레바퀴'를 결성했다.
당시는 디스코 열풍 시대, 모든 클럽은 댄스 클럽이었다. 하지만 84년쯤 이태원에 신중현이 관여하던 국내 유일의 연주 전문 클럽 '라이브'가 생겨났다. 반가운 마음에 찾아가 밴 헤일런의 라이트 핸드 주법을 선보였다.
이 연주를 본 손님들이 열광하자 클럽 사장이 전속 출연을 제의했다. '들국화'와 '괴짜들'이 당시 함께 활동한 그룹들, 김도균은 수레바퀴의 멤버 중 보컬을 빼고 베이스 김영진 드럼 유상원과 3인조 록 그룹 '솔로몬'을 결성해 무대에 섰다.
그는 막 한국에 상륙한 헤비 메탈과 블루스 음악에 경도되며 즉흥 연주에 빠지고, 게리 무어의 음악을 밤새워 카피했다. 6개월이 지나자 심신에 무리가 왔다. 이때 클럽에 찾아온 선배가수 유현상과 서라벌레코드 사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새로운 그룹을 결성하기로 했다. 85년 보컬 유현상, 베이스 김주현, 드럼 한춘근과 함께 4인조 그룹 '유현상과 백두산'을 만들어 기꺼이 리드 기타를 맡았다.
86년에 발표된 백두산 1집은 평범한 트로트 풍 가요 곡에 김도균의 양손 햄머링 기타 연주가 범벅된 황당한 음반이었다.
하지만 대중의 반응은 컸다. KBS '쇼 특집' MBC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그리고 KBS '영11'에 고정 출연할 정도로 방송을 탔다. 헤비 메탈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감지한 유현상은 록커로 거듭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백두산은 시나위와 더불어 한국 헤비 메탈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백두산 2집에서 들려준 김도균의 기타 연주는 그를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떠오르게했다. 당시 여학생들로부터 인기가 높았던 그는 "연습실에는 여학생들이 매일같이 진을 쳤고 팬 클럽도 생겼다"고 웃는다. 백두산은 헤비 메탈 그롭으로 처음으로 1987년 KBS 10대 가수상 그룹 부문 후보에오르는 이변을 연출하며 관심을 끌었다.
2집이 일본에서 발매되자 일본의 헤비 메탈 전문잡지 'BURN'은 "한국에 초강력 헤비 메탈 밴드가 출연했다"고 흥분한 리뷰를 실었다.
집의 성공에 고무된 맴버들과는 달리 김도균은헤비 메탈 사운드가 사물놀이로 연상될 만큼 록에 빠져들고 있었다. 록의 본질을 탐구하고 싶었던 그는 멤버들과 음악적 충돌을 빚기 시작했다. 결국 백두산은 해체의 순서를 밟았다.
김도균은 록인코리아 기획 음반과 첫 솔로 연주음반 'CENTER OF THE UNIVERSE-1988년'을 발표하며 한국적 록 사운드에 몰입했다. '아리랑'을 가야금 주법으로 표현하는 등 음악적 끼가 넘쳤던 그의 솔로 음반은 록 마니아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폭넓은 대중이 수용하기에는 시기장조였다. 국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지라 실험적인 시도 이상의 음악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
그는 88년 12월 원대한 꿈을 품고 헤비 메탈의 본고장 영국 런던으로 건너 갔다. 현지에서 드러머 미크를 만난 후 임재범을 불러 한국말 '사랑'을 영문으로 표기한 4인조 록 르굽 'SARANG'을 결성했다. 웨일즈의 카디브 대학에서 가진 첫 공연. 백두산, 외인부대 때의 레퍼토리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영국에서는 평범한 사운드였기 때문이다.
'스완지'에서 두번째 공연을 시도했다. 첫 공연과는달리 개량 한복을 입고 '아리랑'등 국악 록을 들려주었다. 관객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순간 그는 한국적 가락을 접목한 록이야말로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월드 뮤직임을 절감했다.
9개월 후 일본그룹으로는 유일하게 빌보드 챠트에 올랐던 해비 메탈 그룹 'LOUDNESS'의 내한공연이 스페셜 게스트로 참가하기 위해 귀국했다. 이들과 함께 월드 투어를 꿈꿨지만 사업상 문제로 무산되자 스스로 '세계시장 진출'이라는 야망을 품었다.
보컬 임재범, 카리스마의 베이시스트 김영진, 솔로몬 출신의 드러머 유상원과 함께 결성한 4인조 록 그룹 '아시아나'는 그런 취지로 결성된 한국 헤비 메탈의 드림팀이었다. 아시아나의 유일한 앨범 'OUT ON THE STREET-1990'는 "국내 최초로 영국에서 녹음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녹음을 마치고 귀국한 뒤 일주일만에 팀이 깨져 버렸다. 김도균은 "한국의 현실과 타협을 했어야 했는데 너무 국제적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시아나는 내 음악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좌절의 시간으로 영국에서 공부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 기분이었다"고 털어놓는다.
92년 백두산 스타일로 되돌아가 3일조 백두산 2기를 결성했지만 이미 서태지와 아이들. 변진섭 등 랩과 발라드 가수들의 세상이었다. 그을 불운은 계속되었다. 이번엔 대마초 사건이 발목을 잡았다. 이때가 92년 가을. 40일간의 수인생활에서 영국이라는 화려한 세상을 보며 흔들렸던 마음을 접고 종교에 몰두했다.
하지만 활동금지 후 94년 발표한 '파워 투게더' 앨범과 평범한 2집 역시 록의 관점에서는 씻을 수 없는 오점이었다. 재기에 쫓긴 강박관념이 빚어낸 실패작이었다. 거듭된 좌절 끝에 95년 MBC TV '샘이 깊은 물'에 고정출연을 하게 되었다. 이때 국악과 양악의 접목을 다시 꾀하며 국악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96년 미국여행은 다시 창작의 물꼬를 트게 했다. 기독교방송에서 기획한 '빛으로 모두 함께'라는 옴니버스 복음 음반에 참여하며 CCM 음악활동에 전념했다. 또 한대수의 음반 녹음에 세션으로 참여하며 97년 후쿠오카 공연에도 참가했다.
2기 백두산의 해체 이후 홀로 음악작업에 전념해 오던 그는 무당의 리더였던 선배 최우섭의 권유로 99년 베이시스트 배찬우, 드러머 박동식과 함께 3인조 국악 록 그룹 '김도균 그룹'을 결성했다. 이들은 대외적인 활동보다는 국악이론 탐구에 몰두하면서 2001년 한대수 공연을 시작으로 국악 록에 대한 가능성을 모색했다.
2002년 11월엔 한대수, 이우창과 함께 <삼총사> 프로젝트로 마련된 김도균 그룹의 첫 앨범 <정중동>에서 그는 한결 정제되고 농익은 국악 록 가락을 선보였다. 앨범 발표를 기념하는 세종문화회관의 <삼총사> 공연에서도 그는 관객의 열띤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는 "정중동 음반은 정규 음반이 아니고 이제까지 답습한 것의 습작일뿐"이라며 "한국적 록 가락에 대한 음악탐험은 이제 시작" 이라고 말한다.
그는 최근 부활,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 김태원과 함께 국내에서는 드문 기타 프로젝트 음반 을 발표했다. "예전의 음악으로 회귀하는 것이냐"는우려에 대해 "침체된 한국 록의 부활을 위해 의리를 지켰을 뿐"이라고 단언한다.
감상후 댓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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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정말 배리굿~대철이보다는 ..아버지 신중현님이 훨~리듬감있는 작곡을 했지않나?..
김도균..굿이죠..울나라에서는...마지막 스틸러빙유 개리무어 추모때인가?. 오~올만에 들어보네요. 씬리지의 필 리놋의
감수성에는 못미치죠.ㅎㅎ 좋은 음악 많이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