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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호루라기/이정순
영어방송 진행을 맡은 선생님이 봄방학에 맞춰 인애네 동네에 학원을 개강했다. "엄마, 나 그 학원 갈래요." 인애는 기대에 차서 말했다. 개강한 지 일주일쯤 됐을까? 처음 기대와는 다르게 여전히 선생님들은 공부에만 열을 올렸다. 그런 생각을 하니 학원가는 게 시들해 졌다. "인애야, 엄마 오늘 좀 늦을지 모르겠다. 지방 갈 일이 생겼어." "내 걱정하지 말고 엄마 운전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근데 인애야. 엄마가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인데…" 엄마가 하는 말은 뻔했다. 혼자 있을 때 문단속 잘하고, 숙제부터 해 놓고… 말하지 않아도 다 알기 때문에 엄마의 그 말에 괜히 발끈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아침부터 엄마와 인애는 괜히 티격태격했다. “그게 아니고… 넌 다 좋은데 사람을 너무 쉽게 잘 따라서 탈이야." "언제는 그런 내 성격이 좋다고 하더니, 그 말은 순 억지다." "그렇긴 하지만, 넌 좀 지나치니까 그렇지. 그 대신 이거 가지고 있어." 엄마가 손에 뭔가를 쥐어 주었다. 코끼리 호루라기였다. 인애는 무심하게 받아들고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날은 유난히 학원가기 싫었다. 숙제를 어설피 한 것도 마음에 걸렸지만, 아침에 엄마랑 기분이 상한 탓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억지로 갔다. 학원 빠지면 분명히 원장선생님은 엄마한테 전화 할 테니까. 영어공부를 마치고 현관입구에 나오니 학원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오늘은 왠지 학원차도 타기가 싫었다. 인애는 선생님 눈을 피해 얼른 버스 뒤로 빠져 나갔다. 집은 건널목을 건너야 했다. 신호등 앞에서 원장님을 만나고 말았다. 몇몇 사람들이 신호등 앞에 서있었다. "인애야, 학원 버스 안타고 왜 걸어가니 위험하게… 엄마도 지방 가고 안 계시잖니?" "네, 화장실 다녀오니 버스가 가버리고 없었어요. 어둡지 않아 걸어가도 돼요 " 인애는 거짓말을 했다. "그래? 혼자 갈 수 있겠니? 아니면 선생님이 바래다주고." 그때 신호등이 바뀌었다. "그럼 인애야, 조심해서 가!" 원장선생님은 손을 흔들며 인애가 다 건널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인애도 뒤돌아 손을 흔들었다. 원장선생님은 총총 걸음으로 가던 길을 갔다.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그날따라 골목길은 한적했다. "인애야, 학원차 안타고 왜 걸어가니?" 누군가 말을 건네서 뒤돌아보았다. 건널목을 함께 건넜던 아저씨인 것 같았다. "누구세요? 제 이름을 아세요?" "그럼, 너희 집 다음 집 사는 아저씨인 걸." 인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이들은 잘 모르지만 어른들은 반상회에서 만나니 잘 알지." 인애는 아저씨가 젊잖게 생겨 그리 경계하지 않았다 "너희 엄마 지방 강의 가셨니?" "어? 우리 엄마 지방 간 거 어떻게 아세요?" "이웃에 사니까 아는 거지. 너희 아빠랑은 가끔 요 앞에서 약주도 한잔씩 하는 사이거든." "아빠는 말씀 안 하시던데요?" "어른들은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아이들한테 안 하지." "하긴 그래요." 인애는 어느새 아저씨와 발걸음을 맞추며 걸었다. "아저씨, 사실 오늘 숙제를 잘 못해가서 학원에서 기분 잡쳤어요. 엄마도 집에 안 계시고…. 일부러 학원 차 안탔어요." "그랬구나? 너만 할 때는 괜히 반항하고 싶을 때가 있지." "하지만 혼자 가기 좀 무서웠어요. 아저씨를 만나 참 다행이에요.” "아저씨도 차를 수리 맡겨 걸어가는데 인애를 만나 함께 가서 참 좋구나." 인애네 집은 산 언덕을 깎아 지은 빌라라 길은 경사가 좀 졌다. "인애야, 걷기 힘들지? 아저씨 손잡아. 끌어 줄게." 인애는 긴장이 완전히 풀렸다. 인애는 아저씨 손을 잡고 끌리다 시피 걸어갔다. "요즈음 아이들 걸어 다니지 않아 이 정도 경사도 걷기 힘들어 하지." "네 맞아요. 생각보다 멀고 힘들어요." 인애가 힘들어하자 아저씨가 인애 겨드랑 밑에 손을 넣고 받쳐 주었다. 인애는 깜짝 놀라서 뒷걸음을 쳤다. "아, 미안, 실수야. 실수…" 아저씨가 씨익 웃으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아저씨 손을 뿌리치다 넘어질 뻔했다. 아저씨가 어깨를 붙잡았다. 인애는 너무나 놀라 소리를 질렀다. 어깨를 빼려고 비틀었다. 하지만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가만히 있지 못해?" 아저씨가 갑자기 화를 내며 말했다. 인애는 소리를 지르면 납치할까 봐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아저씨는 간혹 사람이 지나가면 인애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며 걸었다. 아저씨는 어깨동무를 했다. "아저씨, 이러지 마요. 제발 살려주세요." "얌전히 있어야 아저씨가 빨리 집에 보내주지." 아저씨는 능글맞게 웃었다. 인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인애는 더 겁이 났다. 그때야 엄마가 아침에 준 코끼리 호루라기가 생각났다. '그래, 왜 진작 생각을 못했지.' 하지만 인애는 아저씨 손아귀에서 손을 빼낼 수가 없었다. "아, 아저씨, 이, 이… 손 좀 놔 주세요. 팔목이 너무 아파요." 울면서 사정을 했다. "에고, 인애 예쁜 얼굴이 눈물 콧물 범벅이네." 하면서 아저씨가 휴지를 꺼내느라 잠시 손을 놓았다. 이때다 싶어 재빨리 도망을 쳤다. "야, 게 서지 못해?" 소리를 지르며 아저씨가 뒤따라 왔다. 죽을힘을 다해서 뛰었다. 인애는 호루라기를 꺼내려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호루라기가 손에 잡혔다. '아, 코끼리 호루라기!' 그 아저씨가 가까이 다가오자 인애는 호루라기를 입에 대고 힘껏 불었다. "삐이익! 삐이익!" 그 아저씨가 흠칫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오던 길로 되돌아 달아나며 말했다. "아무한테도 말하면 절대 안 되는 거 알지? 말하면 여기서 매일 기다릴 거니까 그렇게 알아!" 어디서 왔는지 몇 몇 사람들이 달려왔다. "애야! 왜 그러니?" "어떤 아저씨가 따라오는 것 같아 이 호루라기를 불었더니 저 아래로 도망갔어요." 인애는 그 나쁜 아저씨한테 당했다는 것을 사람들한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말하면 가만 안 둔다는 말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날 밤 엄마 아빠도 늦게 집에 왔다. 현관 번호 누르는 소리가 삐삐 삑! 나자 인애는 이불을 머리까지 쓰고 자는 척했다. 그 소리는 다른 날보다 유난히 크게 들렸다. 엄마는 방문을 열어 보고 도로 나갔다. 그날 밤 자다가 가위에 눌려 소리를 질렀다. 엄마 아빠가 놀라서 달려왔다. "인애야, 왜 그래? 나쁜 꿈을 꾸었니? 이마에 식은 땀 좀 봐." "우리 인애 크느라고 높은 데서 떨어지는 꿈을 꾸었구나?" 엄마와 아빠는 한마디씩 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몇 번 등을 토닥거려주고 나갔다. 그 후, 인애는 비밀이 들킬까 봐 입을 꼭 다물고 지냈다. 인애는 아저씨들만 보면 놀라서 도망을 갔다. 인애는 아빠 등에 업히는 걸 제일 좋아했었다. "인애야, 오랜만에 아빠가 업어줄까?" "아, 안 돼요. 인애 이제 아기 아니에요." 인애는 놀라서 아빠를 피해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웬일이니? 너 철드는 모양이다." 엄마는 아빠한테 업히지 않는 걸 철이 들었다고 했다. "하하! 아빠 서운하다. 다 컸다고 이제 아빠랑 놀지도 않을 거냐?" 오랜만에 아빠가 업어 준다는데 아빠를 피했다. 왜 아빠를 피하는지도 인애는 잘 몰랐다. 인애는 그 일이 있은 후 호루라기를 소중히 간직했다. "엄마, 이 호루라기가…" 정오 뉴스에서 인애네 동네를 배회하던 괴한이 붙잡혔다는 소식이 나왔다. "아이들에게 코끼리 호루라기 나눠주세요." 인애 마음에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굳건히 자리잡고 있었다. 인애는 코끼리 호루라기를 힘주어 움켜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