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영상 : https://youtu.be/WumqTbCoexM
제목 : 무엇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본문 : 살전 3:9-13
날짜 : 2024. 12. 1 주일오전예배
예전에 TV에서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그램을 본적이 있습니다. 내용은 아프리카 국립공원 내에서 지내고 있는 치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어느날 자매 관계인 치타 두 마리가 사냥을 하다가 다른 치타의 영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냥에 성공하였는데 갑자기 그 영역의 주인인 치타가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사냥에 성공한 치타 두 마리는 공격성을 보이며 그 치타에게 다가가며 싸움이 곧 시작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까이 다가간 두 마리의 치타는 갑자기 온순해지면 다가오는 치타에게 다가가 몸을 비비며 인사를 하더니 곧 사냥감을 놓고 자신들의 영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두 마리의 치타는 상대방 치타를 공격하려고 다가갔지만,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치타가 바로 자신들을 낳아주고 키워준 엄마였다는 것을 알아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마리의 치타는 자신들이 힘들게 사냥한 사냥감을 엄마한테 양보를 하고 자신들의 영역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보고 동물들 중에는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준 부모의 은혜를 알고 보답하는 동물들도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부모님에 대한 은혜를 알기 때문에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는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한량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신 주님께 우리는 무엇으로 보답을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모든 사도들보다 큰 은혜를 입은 사도 바울이 주님께 무엇으로 보답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중보기도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은 “주야로 심히 간구”했다고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에 가장 먼저 보답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주야로 기도하는 것, 즉 기도의 삶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타종교인들도 주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 무속인들 중에는 산에 있는 토굴이나 바위에서 수개월씩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 내용은 자신들을 위한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기도 내용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이것이 세상 종교나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을 위해서는 간절히 기도할 수 있지만, 남을 위해서는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인들 외에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중보기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나를 위한 기도 조차도 하지 않는데 어떻게 남을 위한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자신의 믿음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믿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점점 기도의 지경을 넓혀 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첫 번째 길입니다.
2. 사랑의 실천
요 13:34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15장 12절에 한 번 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말씀대로 순종하고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알고 이 말씀대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사랑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 또한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사실 서로 사랑하라는 이 말씀은 참으로 지키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나와 피를 나눈 가족들 간에도 다툼이 생기는데 하물며 핀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서로 사랑하라는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의 노력이나 열심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먼저 내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 그리고 주님께 받은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내 안에 타인을 향한 미움은 없을지라도 무관심하다면 이 또한 내 안에 주님의 사랑이 식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의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창세기 35:3에 보면 야곱의 결단이 나옵니다. 야곱은 가족들에게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라고 선포합니다.
바로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을 주님께로 돌이키고 예배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내 안에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면 비로소 남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아가페의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사랑을 회복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주님께 보답하는 것입니다.
3.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는 것
거룩이란 말은 “하나님께로 구분되어 속하는 것” 또는 “하나님께 쓰임 받도록 완전히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노력으로 죄를 이길 수 있을까요? 물론 우리의 의지로 어느 정도 죄를 짓지는 않고 절제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과 생각까지는 통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끊임없이 마음을 비우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잔과 같습니다. 세상 것으로 가득찬 잔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찬 잔에는 세상 것이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 것으로 가득찬 잔을 먼저 비워야 합니다. 그리고 비워진 잔에 주님의 은혜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은혜로 가득 채워진 상태가 바로 거룩한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은 늘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가득 채워진 은혜의 잔에서 은혜가 쏟아져 잔이 비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잔이 비워진 것 만큼 세상의 것이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거룩함에 흠이 생기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마음의 잔에서 은혜가 쏟아질 때마다 세상의 것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늘 주님의 은혜로 바로 바로 채워 넣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주님께 보답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도저히 갚을 길이 없는 크고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감사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낱 미물인 짐승들 중에는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께로 받은 은혜와 사랑을 망각한다면 짐승만도 못한 것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 늘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데살로니가 성도들로 인해 더욱 주님께 감사하며 그 은혜를 주님께 보답하고자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첫 번째로 중보기도를 통해 주님의 은혜에 보답했습니다. 두 번째는 주님께 받은 사랑을 실천함으로 주님의 은혜에 보답했습니다. 세 번째는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함으로 주님께 보답해 드렸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주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은혜를 보답해 드리는 믿음의 성도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