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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표와 울음, 이미지의 존재 방식
— 강인한 『입술』, 장인수 『온순한 뿔』[서평]
박성필
간절히 시를 배우고 싶었던 청년 마리오, 누군가 그에게 “이 세상에 뮤즈가 있느냐?”고 물었다면 그는 주저하지 않고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댔으리라! 파블로 네루다의 삶을 모티프로 한 영화 〈일 포스티노〉는 수많은 문청(文靑)들이 시를 쓰게 된 계기를 세속적인 차원 그대로 보여준다. 어촌에서 태어났지만 그곳의 삶을 견디지 못한 채 방황하던 청년이 위대한 시인을 만나게 된 배경에는 바로 베아트리체, 그녀가 있다. 물론 이 영화를 다시금 떠올려보는 까닭이 그런 사랑 이야기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일 포스티노〉의 서사에 담겨 있는 다양한 ‘감각’의 관계들 때문이다. 네루다를 만난 마리오, 그는 시를 쓰게 되었던가?
최근 미학의 범주에서 감각론이 차지하는 위상을 상기해보자. 자연미보다 예술미가 우위에 서게 된 이후 미학은 그 영역을 크게 확장시키고 있는데, 그 변천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흥미로운 사실은 ‘시각’과 ‘청각’ 사이에서 위계질서의 전복이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시각이 절대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최근 들어 많은 예술 장르에서 촉각이나 후각 등 여타의 감각을 부각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그 자체로 탈근대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는데, 시의 경우는 시각과 청각 사이의 관계에 대해 다양한 방식의 질문을 토해내고 있다.
시인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어쩌면 감각들에 거의 무기력한 존재일지도 모르는데, 그런 점에서 이 질문들은 미(美)의 구축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방식의 물음이다. 여기, 그 질문에 동참하고 있는 시편들이 있다. 바로 강인한의 시집『입술』과 장인수의 시집『온순한 뿔』이다. 이들 두 시집은 공히 ‘이미지’의 문제를 그 중심에 놓고, 청각과 시각 중 어떤 감각을 우위에 놓느냐 하는 점에서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1. 이미지에 대한 두 개의 물음
강인한과 장인수의 경우는 결코 예외가 아니었겠지만 많은 우리의 시인들이 한 편 한 편의 시를 써내려가면서 감각의 우위 문제를 놓고 크게 고민하는, 또 고민해야 하는 까닭은 크게 두 가지이다. 우선, 어떠한 시대이든 시는 진실을 반영하는 미적 척도가 되어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즉, 시는 당대의 진실과 거리를 좁혀가면서 그 미적 성취를 높여야 하는 사명을 유지해왔던 것이다. 또 (전통적인 시 창작도 크게 다르진 않았지만) 영미 모더니즘 수용 이래, 특히 ‘이미지즘’을 시 창작의 불문율처럼 여겨왔다는 점에서 의식 있는 많은 시인들은 거기로부터의 해방을 꿈꿔왔다는 점을 그 두 번째 이유로 들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 중심에는 어김없이 ‘이미지’ 개념이 놓여있는데, 강인한과 장인수는 이에 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바다가 저만치 물러나자
썰물이 뱉어놓은 모래밭에 악보가 드러났다
당신의 입술은 동그랗게 모음을 발음하다가
그만 악보 받침대에 갇혀 나를 바라본다
오, 달콤한 붉은 입술은 적포도주를 담은 글라스
아니 두 장의 장미 꽃잎 같다
하지만 오래 전 당신은 이 해변을 떠났다
저만치 과거로부터 떠밀려온 트렁크에는
자물쇠가 채워졌고 두근거리며
들키고 싶은 당신의 사랑이 들어 있을 것이었다
두려운 비밀을 향해 걸어가는 내 발자국마다
한 장 두 장 물 젖은 악보가 따라오고
입 벌린 소라고둥이 트렁크 위에 앉아 소리친다
이제 곧 태풍이 불어온다고 내 마음 속
잠자는 태풍이
검은 수평선을 끌어낼 것이라고
그리운 당신의 기억을
이 해변에 떠도는 세이렌의 노래로 남겨두고서는
나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다
돌아갈 곳이 없다.
—강인한, 「바다의 악보」전문
하지만 타이탄의 허공은
소리 전달 매체가 없단다
고함을 질러도 전달이 되지 않는다
빗소리 없는 타이탄의 비
중력이 약해서
허공을 둥둥 떠다니며 내리는 빗방울
지구의 빗소리가 그립다
—장인수, 「타이탄」부분
시에 다가가는 길에도 여러 갈래가 있겠지만, 두 시인이 새로운 담론을 이야기한다는 전제 아래 시를 ‘메타’의 방법론으로 읽어보자. 이는 결코 위 두 편의 시가 조직해내고 있는 짜임이 결코 성글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이들 시편을 하나의 메타시로 볼 때 비로소 이 시인들이 던지고 있는 물음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강인한의 「바다의 악보」를 살펴보자. 한 초현실주의 작가의 사진작품에 부친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그리운 당신의 기억”을 간직할 방법에 대해 묻고 있다. 그는 “세이렌의 노래로 남겨”둘 수 없다고 말하는데, 그 과정에서 ‘기억’과 ‘노래’의 문제를 대극에 위치시킨다. 물론 이 시편의 부제에 포함된 사진작가 벤 구센스의 작품명 「Sweet songs of the sea」가 이미지의 자격으로 그 중심에 있다. 다시 말하자면, 강인한은 두 말할 나위 없는 ‘회화’적 기법에 바탕을 한 사진에서 ‘회상의 이미지’와 ‘소리라는 또 다른 이미지’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와 달리, 장인수는 이미지 존재론을 경유하지 않은 채, 곧장 ‘청각’의 문제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지구의 빗소리가 그림”이라는 이 시편에서 시인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가를 해명하기 위한 열쇠는, 시의 제목이기도 한 ‘타이탄’이 쥐고 있다. 아마도 그리스의 거인족을 일컬을 그 ‘타이탄’은 분명 감각의 전달 과정에 있어 매질의 역할을 강조했던 플라톤의 감각론을 염두에 두고 호명된 것이리라. 이미지 개념을 회화적 차원이 아닌 들뢰즈가 말하는 “나타나는 것들의 집합(ensemble)"이라고 할 수 있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두 시인이 이미지에 대해 묻는 두 개의 질문 방식을 마주할 수 있다. 이미지에 대해, 강인한이 ‘소리의 이미지’ 그 존재에 대해 묻는 것에 반해, 장인수는 ‘이미지의 소리’라는 새로운 존재의 가능성을 묻는다.
2. 해변에서 떠오른 음표들—강인한, 『입술』
다시 영화 〈일 포스티노〉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마리오는 시를 쓰게 되었던가?’라는 질문을 남겨둔 채 떠나오지 않았던가. 그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기억하겠지만 그는 결국 시를 쓰지 못했다. 그렇지만 한때나마 문학적 스승이었던 네루다에게 아름다운 시편보다 빛나는 선물을 남겼다. 바로 네루다로부터 배운 시의 감각을 토대로 아름다운 ‘소리’를 녹음한 녹음기를 그에게 남긴 것이다. 이 선물은 비로소 깨달은 시의 진정한 감각에 대한 보고서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저항시인 네루다에게 남겨진 최초이자 마지막의 충고였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그 이전의 마리오가 가졌던 감각의 인식들이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바다를 ‘바라보는’ 수준이었다면, 앞서 살펴보았던 「바다의 악보」와 그 인식의 정도가 유사하다는 점이다.
조바심치면 무엇하느냐고
지난겨울 싹둑싹둑 가지를 잘린 나무들은
눈을 틔우고 잎을 피워서 파닥파닥
할 말이 많은 것이다 할 말이 많아서
파닥거린다 춤을 춘다
—「바람이 센 날의 풍경」부분
위에 인용한 시편은 강인한의 ‘소리’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잘 보여준다. 바람이 부는 날의 풍경을 읊고 있는 이 시에서 시적 화자가 바라보는 풍경이라곤 “싹둑싹둑 가지를 잘린”, 또는 “파닥파닥” 잎을 피우는 나무 그 이상이 아니다. 아마도 그조차도 듣지 못했을 이 ‘싹둑싹둑’이나 ‘파닥파닥’이란 의성어들은 이 시에서도 이미지에 가려진 채 생명이 다한 언어로 등장할 따름이다. 즉 이러한 언어들은 연신 바위를 타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작성된 ‘악보 속 음표’와 같아서, 파도는 소리가 아닌 하나의 형상으로 준재할 뿐이다.
해변에서 떠오른 그 음표들은 특정한 조건들을 충족시킬 때만이 유사한 소리를 다시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러한 ‘악보 속 음표’는 실제 바닷가의 파도소리와는 다른 가상의 소리를 전제하며 성립될 수밖에 없다. 이는 여전히 재현의 문제와 관계됨을 뜻하는 것인데, 그렇지만 이러한 방식의 이미지들을 꼭 낮은 방식의 것이라 평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거기엔 어떤 소외감 혹은 뿌리 깊은 절망 등이 담기기 마련인데, 강인한은 주로 ‘회상’을 통하여 이를 드러낸다.
소리가 열차를 끌고 간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이 밤을 끌고 간다
칸칸이 불을 밝히고
지하에서 지상으로
지상에서 지하로
소리에 끌려 구불구불 미끄러지는 열차
나는 얌전한 소리의 입자처럼 앉아서
창밖을 내다본다
강을 지나는지 소리가 더욱 거세어지고
푸른 밤하늘 위에
열차의 내부가 환하게 떠 있다
멀리 가로등이 흘러가는 야경 위에
곁에 앉은 젊은 여인의 얼굴이 겹쳐진다
소리가 문득 사라진다
옛날에 잊어버린
젖은 이름 하나가 비누방울처럼
밤하늘에 켜졌다가 사라진다.
—「밤의 메트로」전문
이 시에는 강인한의 시에서 소리가 사라지는 ‘과정’을 비교적 소상하게 보여주고 있어 눈여겨볼 만하다. 지금, 시적 화자는 어둠이 내려앉은 도심 속 지하철에 몸을 싣고 있다. 그 메트로는 ‘푸른 밤하늘’과 ‘야경’ 속으로 달려간다. 아마도 밤이 깊은 탓에 승객도 뜸했을 그 곳에 몸을 싣고 있는 화자는 야경 속 멀리 보이는 가로등 위에서 새로운, 그러나 오래된 기억을 마주한다. 지하철 창 위에 ‘곁에 앉은 젊은 여인’의 형상이 겹쳐진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옆 좌석의 여인이 아니다. 어쩌면 그의 베아트리체일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의 기억은 현재의 시공간으로부터 점차 거리를 두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소리가 문득 사라진다”. 이 소리의 사라짐은, ‘메트로’로 표상되는 도시, 그리고 ‘젊은 여인’과 상반되는 표상으로서의 중년 남성 등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밤이 깊은 도심을 지나며 문득 문득 떠오르는 생의 허무한 정경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3. 풍경과 나누는 수화(手話)—장인수, 『온순한 뿔』
강인한이 ‘회상의 이미지’와 ‘소리라는 또 다른 이미지’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과 달리, 장인수는 곧장 청각의 문제에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이른바 ‘이미지 존재론’이라 통칭되는 기존의 이미지를 경유하지 않은 채. 그런데 한 가지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실은 그가 청각의 문제에 던지는 질문들은 청각 그 자체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점이며, 숱한 찬사를 받아온 김광균의 저 유명한 시구 “푸른 종소리”(「外人村」)와도 다른 방식이라는 점이다.
즉, 장인수는 ‘이미지의 소리’, 아니 차라리 ‘소리 이미지’라 불러야 할 상당히 독특한 이미지관을 구축하고 있다. 그가 구축하고자 하는 새로운 이미지는 서시(序詩) 격인 「울음 곳간」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딱따구리는 애벌레를 만나기 위해
나무를 쪼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녀석은 순전히 숲의 가장 안쪽 심장부인
나무의 자궁에 울음 곳간을 만드는 것이다
나이테라는 시간의 둥근 지층에
울음 곳간을 만드는 것이다
지난여름 천둥 번개가
계곡에 쏟아 부었던 구름의 울음
심지어 양지에 모여 참새처럼 오글거리던 어린 명아주까지
이 산 저 산 침묵을 물어다가 저장하기 위해
울음 곳간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 집에도 딱따구리가 살고 있다
따다다다다다 따발총을 쏘는 아내의 수다도
입 닥치라는 아내의 수다도
사실은 제 몸에 울음 곳간이 있기 때문이다
—「울음 곳간」전문
‘울음 곳간’이라니! 곳간의 울음이 아닌, 울음 곳간이라니. 장인수 시의 백미를 꼽으러면, 바로 소리에게 집을 지어주는 그의 따뜻하지만 치밀한 배려를 들겠다. 그 배려란 슬픔이라는 정조를 극복해야 할 정조로 치부하기보다는 그것을 오히려 감싸 안으려는 노력인데, 그것은 시의 각 연과 행에 그 감수성을 담고 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의 시가 슬픔의 정조를 머금고 있는 방식은 그 정조 자체의 인정을 넘어서, 그것을 새롭게 구축하고자 하는 이미지의 중심에 놓는 방식이다. 물론 그 이미지의 방식에 가장 큰 공헌의 주체는 ‘소리’이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나무의 자궁’을 들여다보고 있다. 누구나 한 해 한 해를 보내며 갖게 되는 이유 없는 삶의 비애가 투영되었을 그 ‘나이테’를 바라보며, 그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울음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분명 제 울음의 소리이며, ‘구름의 울음’이며 ‘어린 명아주’의 울음이기도 하다.
한편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시적 노력에서 ‘소리’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잇지만, 실제 장인수의 시편에는 소리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시어들이 결코 많이 드러나지 않는다. 『온순한 뿔』에 실린 시편 곳곳에는 ‘울음’과 같은 간접적 시어나 ‘두두두두두’와 같은 의성어가 적잖이 드러나고 있지만, 그의 시편들에 드러나는 소리 관련 시어들은 상당히 의식적으로 절제된 것임을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그러한 절제를 거쳐 장인수는 소리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 소리 이미지의 대표적인 예는 하나의 집으로 구축된 ‘울음 곳간’이다. 그런데 장인수의 시에 대한 주목이 전혀 헛되지 않은 것은 다양한 감각을 시 내부로 끌어들이려는 전복의 움직임 때문이다.
네 명의 중년 부부가
멍게를 썰어 소주를 마신다
술을 마시면 혀 놀림도 빨라지는 법인데
그들의 혀는 전혀 말을 못하고
대신 열린 수문처럼 빨라지는 손짓언어
수십 마리 나비 떼가 펄럭이듯
불빛을 향한 날벌레의 춤인 듯
—「수화」부분
그 감각들은 다소 폭이 넓다. 우선 내밀한 신체 ‘혀’가 꽤 많은 시편에 등장한다는 점을 본다면, 그간 하위의 것으로 치부되었던 촉각까지도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장인수에 의한 새로운 감각의 추구 그 중심에는 소리 이미지가 존재한다. 「수화」 역시 그러한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 이 시편은 그러한 소리 이미지의 가능성을 한 극단까지 모색한 시편이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네 명의 중년 부부’가 술을 마시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그 광경이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그 중심에는 ‘혀 놀림’과 ‘말’, 그리고 ‘손짓언어’가 존재한다. 즉, 이 시는 소리 이미지의 가능성을 단순히 특정한 소리나 의성어를 통해 구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언어 소통의 근간을 이루는 ‘말’에서 출발하여 소리를 잃은 언어인 ‘손짓언어’(手話)로까지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새로운 감각의 모색은 재현의 기능을 넘어선 자리에 있는 소리 그 자체와 그것마저 넘어서고자 하는 초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최근 미학의 화두는 역시 감각의 영역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에 있는 듯하다. 현대시도 역시 그러한 영향 아래에서, 다양한 감각 간 위계질서의 전복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강인한의 『입술』과 장인수의 『온순한 뿔』은 ‘이미지’의 문제를 그 중심에 놓고, 청각과 시각 등 두 감각의 우위에 대한 치열한 탐구를 보여준다. 이러한 탐구는 시의 추상성을 구체화하는 노력, 혹은 구체성을 추상화하려는 노력과 맞물려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감각의 탐구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과제를 넘어서는 무엇이라면, 우리는 언젠가 이미지즘의 종언을 선언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종언의 고함은 새로운 시적 패러다임의 구축이 온전히 끝난 뒤에야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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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필 / 충북 청주 출생. 서울시립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중.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 중.
——《시와 경계》2009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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