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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의 나훈아 최측근 인터뷰] ‘나훈아, 그 끝나지 않을 전설’ | ||||||
나훈아 최측근, 2011년에 반드시 컴백할 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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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1월, 자신을 둘러싼 괴소문 관련 기자회견 당시 외신들조차 “나훈아가 지퍼를 내리려 하자 대한민국이 숨죽였다.”라고 보도했을 만큼 한국스타의 현실, 그 명암의 딜레마를 극명하게 보여준 나훈아 기자회견.
한국기자회견 사상 또 하나의 명장면으로 기록될 이 회견 이후 나훈아에 대한 괴소문은 언론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기자들의 질문을 일체 받지 않았던 터라 그에 따른 또 다른 궁금증은 여전히 증폭되고 있다. 그동안 나훈아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이들의 공통된 시각은 ‘반드시 컴백한다.’이다. 특히 내년, 2011년을 ‘D-day'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최측근들을 통해 나훈아 관련 이야기들을 만나본다.
‘나훈아 보다 나훈아를 더 잘 아는’ 최측근 Y가 나훈아에게 거는 기대 그로부터 2년 동안 최측근들에게조차 일체 연락을 취하지 않고 있다고 전해지는 나훈아씨의 행적은 여전히 세간의 관심사다. 지내는 인물로 이 기사에서는 이니셜로 해달라고 직접 요구해왔다. 독자들께 양해를 구한다.) 평소 나훈아가 스스로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고 주위에 소개하는 인물로도 유명한 Y는 “기자회견 이후 언론 등의 추적이 가능한 모든 선로를 철저히 차단시키는 것이 지금까지 나훈아씨만의 철두철미한 생활방식”이라고 말한다.
기자회견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부쩍 높아지면서 이곳저곳에서 확인되지 않는 목격담이나 보도에도 그는 애써 의미를 두지 않는 듯 했다. 나훈아는 늘 스스로 판단해 스스로 대중들 앞에 서왔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내년 3, 4월 쯤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날 것”이라며 강한 기대감을 보였다.
또한 현재 근황에 대해 그는 ‘이 기회에 더 많은 작품을 만들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큰 공연을 끝내고 난 빈자리를 창작으로 대신하는 독특한 습관을 예로 들었다. 그러한 순간이 음감이나 시상이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때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모든 것을 비운 뒤에라야 창작에 몰두하는 독특한 인물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타고난 소리꾼 나훈아와 팬들 간의 오래된 약속 나훈아에 대해 주변에서는 ‘타고난 소리꾼’으로 평가하기에 주저함이 없다. 다음 인명사전 이목일 판화가, 서양화가 학력 : 서라벌예술대학 서양화 학사 서라벌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서양화가 이목일 화백(서라벌고13회,1970년졸업)은 ‘그 시절부터 이미 노래 하나는 끝내줬던 인물’로 기억한다. 정거장’을 불렀는데 함께 소풍 왔던 이웃 동덕여고생들까지 환호성을 질러 골짜기가 온통 함성으로 뒤덮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결국 이후 가수로 데뷔한 이 자랑스러운 홍기를 위해 친구들이 너도나도 엽서를 사서 방송국에 신청곡을 보내던 기억이 새롭습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나훈아의 초창기 히트곡들인 ‘임 그리워’, ‘낙엽이 가는 길’의 작곡가 심형섭씨. 그 는 나훈아의 데뷔를 직접 도와준 실질적인 인물이다. 그는 항간에 떠도는 나훈아의 데뷔시절의 일화들, 즉 ‘무명시절 상경해 오아시스레코드사 급사시절 우연히 한 가수가 펑크 낸 탓에 대신 노래를 취입, 일약 스타덤에 오른...’ 등의 ‘카더라 통신’은 전혀 사실무근이라 일축한다.
그에 따른 연예인들의 심적 고통이 매우 클 수밖에 없을 것임을 전제한 뒤 나훈아 데뷔시절에 대해 상세히 전한다. 작곡가로 독립하기 이전 한동훈 작곡사무실에서 지도교사로 있었던 심형섭씨는 당시 책가방을 들고 찾아온 지망생 나훈아를 생생히 기억한다. 처음 ‘목포의 눈물’ 등을 구성지게 부르는 예사롭지 않은 가창력을 간파했던 그는 이후 미아리에 사무실 겸 음악학원을 차린 뒤 나훈아, 작사가 박진하와 셋이 함께 형 집에서 기거하며 데뷔곡인 ‘내 사랑’과 ‘약속했던 길’을 만들어 나훈아에게 취입시켰다. ‘처음 마이크 앞에 섰음에도 주눅 들지 않고 단 한 번 만에 오케이 사인을 받아냈을 만큼 실력을 입증해보였다’고 증언한다. 나훈아는 가요계에서 ‘의리의 사나이’로 통한다. 특히 초창기시절을 함께 했던 작사, 작곡가들과는 매년 연말에 반드시 한 차례씩 초대, 술자리를 가져왔다. 꾸준히 지속되어온 이 연례행사 역시 기자회견 이후 중단되었다. 이들이 함께 모여 지난 2005년에 제작한 음반이 ‘벗’이다. 나훈아의 가장 최근 음반이기도 하다. 창립멤버이자 초대 회장을 맡았던 가수 도훈은 “나훈아씨는 매년 5월8일 어버이날을 기점으로 공연을 시작해 12월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모든 공연을 끝낸다.”며 그의 컴백이 내년 봄, 혹은 추석이었으면 좋겠다, 라는 바람을 털어놓는다. 전국 투어를 하겠노라고. 그래서 팬들과 가까이서 교감을 이루고 싶다고.” 그는 반드시 이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타고난 배짱, 치밀한 성격이 그렇듯 철저히 외부를 차단시킨 채 그만의 방식으로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비로소 대중들 앞에 나훈아답게 등장할 것’이라는 Y씨의 기대 속에는 오히려 팽팽한 긴장감마저 배어있었다. 나훈아의 활동기록 집필 작업은 벌써부터 설렌다. |
출처 : 뉴스메이커
심형래의 스타 그대는 프로그램에 나와 자기 입으로 1966년 6월21일 천리길과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취입했다고
얘기했다. 이때도 남진과의 라이벌 관계를 의식하여 그랬던지 20년 정도 지나다보니 헷갈렸던지 했던 모양입니다.
1966년도는 나훈아(최홍기)가 부산대동중학교3학년으로 야구선수 하던 시절입니다.
이 영상을 보고 나훈아 펜들은 철썩같이 믿고 위 노래 이전에도 발표된 노래가 있었다면서 찾아본다고 야단입니다.
나사모 나훈아 프로필도 이상합니다. 1950.2.11 출생. 1965년 형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서 서라벌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라고 되어 있는데 1965년도는 나훈아가 부산대동중학교2학년 야구선수하던 시절 입니다.
어찌하던 1966년도에 데뷔했다는 걸 끼워 맞추기 위한 프로필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나훈아가 대동중학교 시절 야구를 했는데 청소년야구대표팀 감독과 포철공고,서울고
야구팀 감독을 역임한 유태중(대동중18회,1967년 졸업)씨와 동기였다고 하며.
허구연 야구 해설위원(1951년생,경남중24회,1967년 졸업)이 'MBC FM4U 두시의
데이트, 박경림입니다'(2013.12.27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중학교 때 나훈아가
야구선수로 뛰었었다. 나는 부산 경남중학교, 나훈아는 부산 대동중학교에서 선수생활
을 했다.면서 장기자랑을 할때 노래를 정말 잘불렀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훈아는 부산대동중학교18회로 1964년3월 입학하여 1967년2월 졸업
했습니다. 서라벌고13회로 1967년3월 입학에 1970년2월 졸업입니다, 만약 부산에서 고등학교
다니다가 서라벌고로 갔다면 1967년 1학년 편입 입니다. 서라벌고 2힉년때 첫 취입했다니
1968년도가 데뷔년도 입니다.
출생년도는 1947년,1950년,1951년 등으로 나와 있으나 중,고교 입학과 졸업년도를 보면
1951년생이 맞습니다. 하지만 당시 운동선수들은 1~2년 재수하는 경우가 보통이었습니다.
심지어는 4~5년 재수하는 경우도 더물지만 있었습니다. 청소년 시절에 1~2년은 체력적으로
유리했으니까..그렇게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에는 학교 동기라도 3~4살 많은 친구가
간혹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이는 그럴수 있다고 하지만 학교 입학 졸업년도 그리고 데뷔년도는
바뀔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위와같이 나훈아 학력,데뷔년도의 미스테리를 풀어보게 됐습니다.
출생신고 늦게하여 호적이 늦게 올려졌을 경우도 아닐 것 같습니다.
유튜브 (https://youtu.be/JUnTaLN3cLM)에 보면 나훈아씨의 초등학교
동기분이 초량초등 졸업앨범상의 나훈아씨 얼굴도 공개하면서 학교다닐때
야구선수도 했고 동기들 중에서도 키가 작았다고 말씀하시던데 호적이
3~4년 늦게 올려졌다면 동기들 보다 키가 작았다는게 이상하지요. 중학교
3학년이나 고등학교1학년 나이인데 초등학교 6학년들 보다 키가 작을 수가
없지요. 실제로도 '51년생임을 확실하게 증명하여 주는 군요.
노래를 들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노래 만큼은 정말 잘 부릅니다.
조용필, 송창식과 함께 대한민국의 3대 가객중 한명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