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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월급날
1절
결혼 이후 18년 동안 나는 한 직장에 다녔다. 보너스 말고 월급봉투만 220회 받은 셈이다. 월급날은 매월 21일.
나는 월급봉투를 먼저 개봉해 본적이 없다. 봉투 겉면의 명세서도 훑어보지 않았다. 안 호주머니에 꽉 넣고 대문을 열어주는 아내의 손에 쥐어주었다.
아내는 "애썼다" 그 한마디뿐, 그녀도 내가 보는 앞에서 봉투를 열어보지도 명세서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옷장 문을 열고 맨 위 서랍에 봉투를 간수했다.
나는 박봉의 월급쟁이.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날 아내가 말했다.
월급쟁이가 지켜야할 철칙으로 첫째 어떤 경우에도 "가불"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부모님이나 형제를 부양해야할 책임이 양가 모두에 없는 처지이니
수입에 넘는 지출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금기라는 것이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니 쌀 두말과 연탄 100장을 어머니가 들여놓으셨다.
직장생활 5년차의 총각이었던 나는 5년 동안 꼬박꼬박 어머니에게 월급봉투를 드렸었다.
그런데 고작 쌀 두 말과 연탄 100장이라니! 섭섭해지려는 내게 아내가 말했다.
"집 장만해주신 것은 생각 안 해요?"
아내는 자기 계획을 말했다. 우선 가불을 금하자는 것과 거기에 덧붙여 적어도 월급 석 달 치는 헐지 않겠다는 것이다.
월급쟁이가 월급 석 달만 밀려 놓으면 그 것으로 종자돈 삼는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손가락을 빨고 사나?" 퉁명스러운 나의 말에
"왜 손가락을 빨아 요?" 쌀이 두말이나 있는데, 그리고 장독대에 가보니
친정에서 간장에, 된장, 고추장, 그리고 장아찌 같은 것이 다 구색 맞추어 놓여 있던 대요?신혼여행에서 남긴 돈도 있구요"
내가 살림을 난 동네는 종로구 충신동. 나의 본가는 동숭동이다. 걸어서 15분 거리다.
"퇴근은 무조건 동숭동으로 하세요. 나는 미리 가서 저녁준비를 돕고 있을 거니까요"
아내가 말했다. 맏아들 결혼시켜 분가한 후니 부모님이 무척 서운하실 거라는 것이다.
거기다 식구가 일곱 명이다. 나이 많은 도우미 아주머니로서는 규모가 큰살림이다. 저녁마다 딴 살림난 새며느리하고 밥을 같이 드시는 일이 효도라는 것이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날이 4월5일. 월급날인 4월21일까지는 보름이 남았다.
보름동안 나는 매번 부모님댁으로 퇴근했고, 아내는 집으로 오면서 아침 반찬 담아오는 것을 빼놓지 않아서 거짓말 같게도 한 푼도 쓰지 않고 새 달을 맞이했다.
이제 4월 21일 받은 월급봉투 열지 않고 5월 21일까지 살아가야할 숙제가 남겨졌다.
2절
나의 어머니는 1907년생이시다, 지금으로부터 111년 전. 남존여비시대에
고등교육을 받으신 분이다. 영광군수를 40년 하신 원님의 다섯째 따님이셨다
아버지는 약관 28세에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젊은 학자였는데
부친을 일찍 여의고 형님 슬하에 계셨다..
이 두 분이 연이 닿아 결혼을 하셨는데, 어머니는 지참금으로 가져오신 돈으로
충신동 43번지의 72평 대지를 사셨다. 그 터에 초가집 7채가 있었고,
어머니는 거기서 나오는 집세로 일곱 자녀의 교육비와 살림을 꾸리셨다. 어머니는 여장부셨다.
"당신네 아홉 식구중에서 어머니 인물이 으뜸이네~" 결혼 초에 아내가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장남인 내가 서른 살이 되자, 어머니는 구석에 있는 집 한 채만 남겨 놓고 모두 헐으셨다. 땅을 반으로 가르고 22평짜리 붉은 벽돌집을 지셨다. 나머지 터에는 둘째 몫의 집을 지으려는 계산이었다.
내가 혼인하여 충신동 집으로 들어갔을 때, 하나 남은 판자 집에 국민학교 다니는 딸이 있었다. 어느 날 아내의 관심이 그 아이에게 꽂혔다.
" 너, 몇 학년이니 ? " 아내가 물었고 "6학년이에요" 아이가 대답했다.
"중학교에 가겠구나?, 과외공부는 안하니?"
"하고는 싶지만... 못해요." 형편이 안 되어 못한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면 이렇게 하면 어떨까? 니가 친구들을 모아오면 너는 거저 배우는 것...." 아내가 꼬시었다.
"정말요!!?"
다섯 아이가 모였다. 우리 집 방하나가 과외 방이 된 것이다.
시작한지 일주일이 못되어 아이들이 13명으로 늘었다..
아내는 더 이상 나를 본가로 퇴근하게 하지 않아도 되었고. 5월 21일 월급날까지 4월 봉투를 뜯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당초 아내의 계획 "석달 월급 저축하기"는 소기의 목적을 향해 순항하는 듯 했다..그러나 아내의 과외선생 노릇은 두 달로 끝이 났다. 아기를 갖게 된 것이다. 장모님의 입덧은 유별났다고 한다. 일제시대는 낙태를 중벌로 다스렸다는데 산모의 건강이 사경에 이르러 4개월의 아기를 의사의 권유로 유산시켰을 정도였다.
모전여전. 나는 겁이 났고,
아내가 주도적으로 발의하고 시행한 "월급봉투 석 달 뜯지 않는" 그 일을
온전히 내가 담당하겠다고, 물마저 토하고 토하는 아내에게 약속했다.
3절
신혼의 아내가 진지한 얼굴로 "의논 좀 합시다요. 우리가 살아갈 일..."했을 때
나는 사실 겁이 났다. 나는 우수한 두뇌를 가진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맞선을 보고 두 달 만에 약혼하고 두 달 후에 결혼했으니, 겉으로 보이는 조건이 전부. 나를 알 턱이 없는 아내였다.
"미국으로 떠납시다. 거기 대학에서 새롭게 공부를 해서 학위를 받고 교수에 도전해 봅시다" 라든지 "선진국의 앞서 나가는 회사에 취직하여, 여기서 배우지 못하는 발전된 기술을 익혀 독보적인 건축가가 됩시다" 든지 내 능력 이상의 것을 아내가 제안할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작 "가불하지 맙시다. 석 달 치의 월급은 밀려 놓고 삽시다" 였으니
나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 어찌 흔쾌히 동의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내가 제일 잘하는 것. 특기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 "안 쓰고 아끼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언제부터 "안 쓰고 안 버리는 "것이 내 습성이 되었을까? 아마도 유년시절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린시절 무척도 산만하고, 수선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집중적인 꾸지람을 듣고 자랐다.
다섯살 때 동생이 둘이었고. 일곱살 때 동생이 셋이었다. 집안이 소요스러워도, 형제들끼리 싸움이 벌어져도 아버지는 "큰녀석이..."꾸중은 내게 떨어졌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늘 감쌌다. 나는 어머니의 마음에 들고 싶었다.
어머니는 참으로 알뜰하신 분이다. 버리는 것이 없으셨다.
손님들이 우리 형제들에게 :눈깔사탕 사먹으렴..."하면서 일전씩 주면 동생들은 달려나가 사탕을 사먹었다. 나만 그것을 꼬박꼬박 모아두었다. "우리 큰아들, 착하기도 하구나" 어머니는 신통해 하고 칭찬하시었다. 나는 그 칭찬이 좋았다.
석 달간 월급봉투 헐지 않고 지내자고 작정하고, 첫 달은 신혼여행에서 남겨진 돈과 본가에서 먹는 것을 해결하면서 목적을 달성했고, 둘째 달은 아내가 과외선생을 하여 소기의 뜻을 이뤘다. 바야흐로 석 달 째의 책임이 내게 주어졌다.
나의 직장은 은행이었다. 당시에는 은행의 보수가 다른 직장보다 높은 편이었다. 은행이라면 금융이 주 업무이고 상경대출신이 주요 부서를 관장한다. 기술직은 곁가지에 불과하다. 간단하게 말하면 건물의 수리공이 이에 해당된다고 할까?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부서이다.
내가 다니던 직장은 전국에서 지점이 제일 많은 규모이고, 반관반민(半官半民)의 국영기업체였다. 때는 1962년. 아직도 전후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본점은 물론, 각 지점의 복구가 산적해 있었다. 기술실의 기술자들은 현장까지 급파되는 일이 많았다.
나는 오지의 출장을 자청했다. 별도의 출장비가 책정된다. 오지가 아닌 대도시 출장도 좌석표 대신 입석으로 서서가며 그 차액을 아내에게 주었다. 월급봉투를 뜯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에 힘든 지도 몰랐다.
그 당시에는 6시면 퇴근이다. 연장근무일 때는 야근 수당이 나온다.
야근이 없는 날은 선배나 후배의 사무실에 들린다. 일거리가 있기 마련이다. 귀찮아서 미뤄 놓은 일들이다. 그 일은 내 몫이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나의 귀가 시간은 "뚜"하고 울리는 통금 싸이렌 소리와 함께였다.
나는 3개월의 월급봉투가 아니라 그보다 몇 배의 월급봉투를 열지 않고 생활할 수 있도록 아내와의 약속을 지켰다.
4절
일 년에 4번, 설날, 추석날, 부모님 생신 날. 이렇게 네 번밖에 친정에도 가지 않을 정도로 집에 묶여 있는 여자. 예쁜 치장으로 살림을 가꾸지 못하고, 생활필수품 이외에는 모두 낭비라고 생각하는 남편과 사는 여인.
외식이라고는 일 년에 한번 할까 말까이고, 타의든 자의든 극장 구경은 한 번도 하지 않는 여자. 문화생활이라고는 전무.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 기르는 일이 전부인 여자.
고등학교 동창도, 대학교 친구와도 만나지 않고 오로지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시어머니가 유일한 동무인 여자.
이런 여자를 행복한 여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시절, 월급봉투 뜯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길에 전념하느라고 아버지 부재(不在), 남편 부재(不在)의 건강(?)하지 못한 가정의 주부인 아내가 그리 불행한 여인이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아내는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여인이었다.
아내를 행복하게 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었다. 아들과 책이다.
아내가 9살이었을 때, 열살 위의 언니가 세상을 떠났고 , 12살 때 16살의 바로 위 언니가 또 떠났다. 두 딸을 연거푸 잃은 젊은 엄마는 시력을 잃고, 치아가 몽땅 빠지는 극심한 비통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소녀는 그런 어머니의 망극을 지켜보며 자식이란 절대로 죽어서는 안되는 존재라는 것을 가슴에 새겼다.
이런 트라우마와 함께 성장하여 결혼을 하고 그 자신 엄마가 되었으니 아내의 "엄마의 길"은 바로 구도의 길이었다. 아이들을 먹이고, 돌보는 일이 "신앙" 이 되었다. 본인만 모를 뿐, 누구의 눈에도 지나쳐 보였다.
친정에 네 번 밖에 가지 않는 일이나, 영화 관람을 하지 않는 일이나, 친구들을 만나지 않는 일이나 그 모두가 아이들 곁을 떠나지 못하는 자기자신에게 있었다. 자식을 향한 일종의 불안증이다.
이 불안이 엄마로서의 역기능이었다면 그 역기능을 능가하는 순기능을 아내는 모성에 접목했다. 그 순기능의 큰 명제는 "행복한 엄마 밑에 행복한 자식 있다" 로 귀결된다. 아내에게는 자식이란 "살아 있어 주는" 것으로 그 소임과 책임을 다하는 존재였다.
아내는 자식에 대한 부모로서의 "욕심의 눈"을 제일 먼저 던져 버렸다.
자식에게서 욕심의 눈을 버리면 모든 자식은 사랑스러운 법이다.
아내는 자식들이 똑똑하고 잘난 이이로 성장하기보다. 행복할줄 아는 어른이 되기를 바랬다. 그래서 아내는 자신부터 정말 행복한 엄마가 되기로 작정했다. 아내가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들은" 좋다" "기쁘다" "괜찮어" "미안해 " "사랑해" "행복해"였다.
아이들과 지내는 아내의 나날은 행복이 양산 되었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집안은 활기찼다. 아내는 행복했다.
나는 누구도 행복하게 해줄 재간이 없는 사람이다. 나 자신이 행복할 줄을 모른다. 나의 눌변은 내 열등감의 근본이었고, 사회성의 부족은 내성적인 성격으로 형성되었다. 나는 열두 번 죽었다가 깨어나도 아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남편이다.
아이들이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는 모습을 옆에서 보면서 나는 아이들이 너무 고마웠고, 이 행복한 모자(母子)에게 월급봉투를 저축하게 하는 소임만이 내 몫이라고 생각했다.
또 하나 아내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소설이다.
아내는 열 살 때부터 소설을 읽어대던 조숙한 소녀였다. 눈을 버리면서까지 소설을 파고 들었다.
결혼 이후, 나는 직장 도서실의 장서 (소설) 목록을 파악하고
퇴근 길에 잊지 않고 소설을 빌려왔다. 대망 20권이 새로 출간 되었을 때인데
아내가 20일 동안에 300페이지 책 스무 권을 완파하는 것이 아닌가. 소설 삼매경에 빠진 아내의 행복한 모습은 내가 어떤 재주로도, 값으로도, 그녀에게 줄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나는 책이 고마웠다.
비록 아버지 부재. 남편부재의 우리 가정이었지만
비록 살림살이는 초라하고 문화와는 거리가 먼 우리생활이었지만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강북의 낙산 밑. 22평 비좁은 집에서 살았던 우리들의 충신동 시절 23년은
행복했다고,,,
아니다. 월급봉투 헐지 않고 저축했던 돈으로 아내가 맨 먼저 한 일이 둘째아드님의 몫으로 남겨둔 36평의 대지를 어머니에게서 사들인 것이다. 담을 헐고 72평의 넓은 마당을 아이들에게 만들어 주었고, 아이들이 강아지처럼 엉켜 뒹굴며 뛰놀던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5절
1980년에 나는 드디어 월급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직장에 다닌지 19년째 되는 해이다. 금융기관이란 상경대출신의 터전이다. 기술직은 주류에 들지 못하는 마이너 신세다. 승진의 연조가 차도 직제상 올라갈 수 있는 자리가 없다. 비죤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바닥에서 승부를 걸려고 다시 상과대학으로 학사 편입하는 공대출신들도 있었다. 나는 원래 인문 사회쪽으로는 전혀 소양이 없는 사람이라 그나마 기술자로 살아야했다.
당시는 정년이 56세. 나는 작더라도 내 사무실을 열기로 했다.
마침 선배 한분이 강북구 수유동에서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계셨는데
사정이 있어서 문을 닫으려고 하니 인수할 의향이 있냐는 타진이 들어왔다.
이 말을 들은 아내도 어차피 몇 년 후에 직장을 나올 형편이라면 한살이라도 적을 때 일을 시작해 보자고 동의를 했다. 퇴직금으로 사무실을 오픈했다. 상호만 바꿨다. 그 분이 놓고 가는 집기들을 고대로 썼다.
내 운영방침은 최소의 경비지출이다.
아무리 작아도 사업이고, 사업을 하려면 투자를 해야하는데, 나는 수입을 단념할 지언정 투자를 하지 않았다. 그냥 배워서 익힌 기술. 그리고 정직, 성실, 친절등 금전 지출이 아닌 것으로 승부를 걸었다.
나는 태생이 사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크게 바라지도 않았다. 사무실 임대료, 직원들 월급을 제하고 내 몫으로는 퇴직 직전의 월급 두 달 치로 족하다는 것이 수입의 청사진이었다.
수유리는 지방에서 서울로 유입된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변두리이고, 땅 값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그들은 열심히 일을 하여 근근이 돈을 모으면 주거 안정을 먼저 시도한다. 뿌리를 내리기 위함이다.
대부분 오래되고 낡은 집을 사서 헐거나 작은 평수의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싶어한다. 대지 30평 미만이 많다. 집의 구조는 될 수록 방을 많이 빼는 것이다. 세를 놓아 건축비를 충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무실을 열고 보니 우리 사무실을 찾아오는 고객들의 사정이 이러했다.
나는 아무리 작은 평수의 대지를 들고 오는 의뢰인이라도 털끝만큼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 것은 그들의 전 재산이고, 너무도 소중한 것이고,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절대로 건물이 나올 수 없는 땅도 있다. 진입로도 없는 비탈길 옆이기도 했다.
나는 의뢰가 들어오면 수십 번 현장을 찾아간다. 어떻게 하면 이분들에게 흡족한 집을 지어드릴까? 뽑아낼 수 있는 최대의 평수를 고민하고, 외양에 치중하지 않고 값에 비해 견고한 자재를 설계에 넣었다. 나는 설계를 의탁 받고 설계비를 받는 사무소 측이면서 완전히 고객 편이 되어 고민하고 고민했다.
떄로는 강북구가 아닌 종로나 중구에서 의뢰인이 찾아오기도 했다. 잘생긴 대지에 높고 큰 건물을 올리려는 사람들이다. 나의 학벌과 몇가지 라이센스를 보고 내가 꽤 유능한 설계사인줄 알고 찾아오는 것이다.
나는 그럴 때마다 정중히 사절했다. 내 능력이나 우리 사무실의 규모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기술자를 더 고용해야 되고, 장비도 더 갖추어야 하고, 누군가와 합동으로 해야 되고,....얼마의 수입은 되겠지만 수입만큼의 지출도 있기 마련이다. 직원들은 큰 사무소에 연결하여 소개비를 챙겨도 되는 것을 내가 너무 고지식하다고 한심해 하였다. 그러나 '내 힘에 맞는 작은 일을, 작게' 가 내 나름의 운영철학이었다.
사무실을 개설한 이래, 내 몫은 처음 목표한대로 언제나 두 달 치 이상이 되었다. 하지만 수입과 상관없이 우리 집의 살림살이는 직장 다닐 때의 "한달 월급"을 넘기지 않는 똑 같은 수준이었다. 아내가 아끼지 않는 것은 오로지 식비. 그리고 자식에게 들어가는 돈 뿐이었다.
1984년 8월. 우리는 23년의 충신동 시절을 마무리하고 강남구민이 되었다.
가장부재 (家長不在) 의 23년의 가정생활이, 문화와 예술 없이 오직 생존만 있었던 23년이 선물한, 대지는 두 배, 건물은 네 배 크기의 집이었다.
얻은 걸까? 잃은 걸까? 얻은 것이 분명한데 나는 왜 잃은 것만 같을까?
이사 온 날. 정원에 서서 이 "얻음" 을 위해 23년 동안 우리가 잃었을 것만 같은 "잃음"을 생각하느라 내 시선은 허공을 헤매었다.
6절
설계사무소를 개설한지 20년이 되는 해이다.
나는 시작할 때부터 내 수입을 "월급두달치" 로 정했고, 아무리 돈이 될 것 같은 것도 내 돈이 먼저 들어가는 것은 피했고, 사무실 규모를 키우지 않았고, 무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상 유지를 하며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1998년에 접어들면서 체감 경기가 싸늘해 지더니 그 이듬해는 속속 임시휴업 신청을 하는 사무소가 생기기 시작했다. 대개는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대출을 받은 소장들이었다. 급리가 하루가 다르게 올라갔고, 일감은 끊어졌다. 높은 봉급으로 영입한 기술자들의 임금 또한 감당하기 어려웠다. 소위 IMF로 불리는 금융위기가 소규모 건축시장까지 덮친 것이다.
지출이 수입보다 많아보기는 처음이었다. 위기감이 느껴졌다.
처음부터 사업을 하기에 가당치 않은 나는 역시 소극적인 방법으로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직원들을 보내는 일이다. 대신 아내가 출근을 했다. 내가 밖에서 일을 찾는 동안 사무실을 지키고 전화도 받았다.
두세 가지 주방용 가전제품을 가져와 사무실에서 둘이 밥을 지어 먹었다.
아내가 이런 글을 써서 자기 모교홈피에 올린 것도 그 즈음이다.
둘이 있는 풍경
나는 요즘 사무실에 나가고 있습니다. 칠순이 넘은 소장인 남편과, 그의 아내인 내가 유일한 직원인 조그만 규모의 사무실입니다.
IMF이후 가장 타격을 받은 업종이지만 젊은 사람들은 조금씩 불황의 늪에서 벗어나는데, 이곳 소장에게는 역부족입니다.
문을 닫는 것만이 적자를 면하는 최선의 방법이 됩니다. 그러나 그 말은 차마 못하고 있습니다. 일이 있건 없건 정시에 출근하고, 정시에 퇴근하는 사람에게 그 말은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대신 그에게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일생을 통해 가장 초라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남편에게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일은 내게 있는 시간을 모두 그에게 주는 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침이면 전철을 타고 같이 출근하고 사무실에서 같이 밥을 지어 먹으며 청소도 하고 전화도 받습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참 못된 아내입니다. 결혼한 이래 사십년을 아이들의 엄마로서만 살았습니다. 아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어미로서만 존재했던 아내. 그런 아내를 무던히 참아준 남편입니다.
사무실에서 그는 상사이고 나는 그가 고용한 직원이 됩니다. 나는 유능한 비서가 되어 때맞추어 알맞는 차를 끓입니다. 이런 일들에서 나는 못된 아내였던 빚이 조금씩 갚아지는 듯한 기쁨을 누립니다. 그러면 그의 초라한 이 무력의 시간들이 고마워집니다.
오늘은 토요일. 일이 없는 사무실에서도 토요일은 망중한의 여유가 있습니다.
커피를 진하게 끓여마시며 라디오에서 들려주는 음악 감상을 합니다.
화창한 날뿐만 아니라 구름낀 날도 제법 지낼만하다고 생각하면서
외근(?)을 하고 돌아올 소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결혼한 이래 사십 여년을 한 달도 거르지 않고 나는 아내에게 월급봉투를 주었었다.
직장에 다녔을 때와 마찬가지로 21일은 사업이란 것을 하면서도 생활비를 건네는 날이 되었다.
21일. 적으면 미안해서, 많으면 당당하게, 가장(家長)의 체면이 섰던 날.
이제 이런 날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은 예감에 서글펐다.
"그래. 사무실을 접자. 임대료에 잡비라도 줄이자. 세금 고지서도 날아오지 않을게 아닌가 내 나이 77세. 놓을 때도 되었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무거운 바위덩어리 하나가 등에서 뚝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돌이 떨어져 나간 그 자리가 가벼운 것이 아니라 허전하여 비틀 거렸다. 그 짐은 나를 힘들게 한 것이 아니라 나를 버팅겨준 중심축이었던 것인가.
7절
1962년 1월 말경이라고 기억된다. 그 떄 영화 "벤허"가 수입되었다.
와이드 스크린에 장장 3시간이 넘는 상영시간으로 개봉전부터 화제였다.,
나는 어렵게 표를 구입하고, 맞선 후 몇 번 만났던 신부감과 함께 (내 기억이 맞다면) 국도극장에 갔다. 일부 상영이 끝나면 휴식 시간이 있었다. 나는 매점에 가서 음료수와 케잌을 샀다. 그녀 앞에 내 놓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나의 난처함을 알아차린 여자가 말을 했다. "먹으려고 산거면 같이 먹어요"
그날 여자는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암만해도 안 되겠어요. 너무 말이 빈약해서 답답해요." 그러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 하셨다고 한다.
"남자란 말이다. 말을 못하는 것은 장점일 수도 있다. 남자란 말이다. 자고로 "발"로 뛰고 "손"을 놀려서 가족을 끌고 갈 "놈"이라야 한다. 말이 아니다. 머리도 아니다."
빙장님의 말씀대로 나는 40여년을 발로 뛰면서 현장을 누비고 살았다. 연필을 쥐고 도면을 그렸다. 내 발엔 굳은살이 박키고, 티눈이 떨어질 새가 없었다. 나는 모두가 거들떠보지 않는 ,기피하는 것들을 찾아서 맡았음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소위 3D 직종 종사자라 해도 좋다. 관절이 상하고 벌목이 휘었다. 그러나 나는 괴롭지 않았다.
이렇게 지내던 내가 할일 없이 집에 들어 앉았으니 감옥이 따로 없었다.
나에게는 친구가 없다. 취미도 없다. 평생을 술 담배를 몰랐고, 한 푼을 생명처럼 아꼈으니 타인과의 교류가 전무했다. 나는 사람을 사귀는 방법도 "쉬는 방법"도 몰랐다. "놀줄"도 몰랐다. 놀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내는 아이들이 모두 분가해 나가자 세상을 만나듯 밖으로 나갔다.
칠십 넘어 배우기 시작한 우리춤에 매료되어 남편의 무료함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나는 먹고 자고... 자고 먹고...
건강검진에서 당뇨가 발견되고, 커피 잔을 든 손이 후들거리며 떨려서 차를 쏟고..
밥수저가 흔들리고... 의욕을 상실한 채 박제된 인간이 되어 갔다.
이렇게 이삼년이 흘러 내 나이 79세 되던 어느 날. 한 사람의 방문객을 맞이하게 된다.
설계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을 때 8년 가까이 한솥밥을 먹은 K라는 직원이다.
일급 건축사 시험에 번번이 낙방을 하여 이급으로서 일을 하고 있었지만 우직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소장님, 저와 함께 지방에 사무실을 냅시다" K가 간곡하게 권유했다. 그의 성이 김씨이다. K는 본래 경기도 A시 사람이다. 거기서 나고 자랐고, 그 곳 소재 공고 출신이고, 지금도 거기 살고 있다.
"제가 사무실을 얻었어요. 공짜나 다름없어요. 일거리도 많아요. 일도 제가 해요"
"그럼 나는 무얼 하나?"
"소장님 명의의 소장님 사무실이지요"
나이 먹은 건축사들은 흔히 자기의 면허를 빌려주고 그 명의 값을 받곤 한다.
이것은 절대로 법이 금하는 일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불법을 한 적이 없는, 간이 콩알만 한 사람이다. 당연히 거절했다.
"아니 아니, 명의를 빌려주시는게 아니라 소장님이 직접 출근하시는 거에요"
처음에는 K의 동문들, 지인들이 일감을 가져왔고 나는 설계 계획만 잡고 나머지는 모두 그가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하던 식, 연필로 도면을 그리고 그 것을 청사진으로 뽑아서 구청에 허가를 내는 시대가 아니라 모든 일을 컴퓨터로 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컴맹인 나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어느 달은 내 몫으로 봉급자 시절의 "월급 한달치"가. 또 어느 달은 반달치가 되었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라, 먼 곳 까지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일, 들락날락하는 내방객들이 주는 활기. K의 호방한 웃음소리가 집에서 무료하게 시들어가는 것보다는 백배나 낫다는 생각에 즐겁게 출퇴근을 하였다. 운영은 대부분 K가 맡아했기 때문에 소일삼아 다닌다는 가벼운 마음이라 편했다.
나에게는 병이라면 병일 수 있는, 고질적인 증상이 하나 있다. 서해부 탈장이다.
1991년 장(腸)이 고환으로 빠져 나왔다. 바로 수술을 했다.
퇴원하고 3일후인가 현장 하나에서 문제가 생겼다. 나는 밤중에 달려갔고 여기저기 뛰어 다녔다. 3층까지 이어지는 나무 사다리를 한달음에 오르고 내렸다. 배에서 "뚝" 소리가 났다. 이후 걸핏하면 창자가 내려와 아프고 불편했다. 탈장밴드를 착용하고 살았다.
A시 사무실까지는 거의 2시간이 걸린다. 지하철 역에서 내려 20분을 걸어야 한다. 여든 살이 넘으니 탈장이 되는 회수가 빈번해 졌다. 그래서 매일 출근하던 사무실을 이틀에 한번, 또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로 소홀해 졌다. 그런데 어쩌다가 출근을 하면 사무실에서 뭔가 다른 분위기가 느껴지고 이상한 낌새가 감지되었다.
A공고는 선후배간의 의리가 끈끈하기로 유명한 학교이다.
우리 사무실은 이들의 동문회장이 되어 버렸고, 각기 가져오는 정보로 활기차 보였지만 어수선했고 스멀스멀 어떤 야합, 어떤 꼼수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들이다.
이익을 쫓아 무리수를 두는 것. 용케 법규를 피하는 잔꽤를 도모하는 것, 먼저 저질러 놓고 보는 것등이.... 이런 것을 멀리 했기 때문에 나는 이 십 여년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영업 정지를 한 번도 받지 않은 사람이다. K를 불러 다그치니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다.
내가 아무리 검토를 해봐도 건축허가가 나올 수 없는 땅이었다.
그 땅에 공장과 사무실, 숙소를 한 타운으로 묶어 건축하는 큰 프로젝트였다. 나는 해본 적도 없는 규모다. k의 선배 하나가 주선해 왔고. 쓸모없다고 단념하고 있는 땅 주인으로부터 거액의 착수금을 받은 뒤였다.
받은 돈으로 관공서 담당자를 찾아다니며 허가를 받기 위한 로비를 했고, 경험 있는 설계자를 초청하여 설계를 시작했고, 눈가리고 아웅식의 소방도로도 내며, 허가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시점이었다. 내 성격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 절대로 허락안 할 것을 알기에 허가가 나오면 그 때 이야기하려고 쉬쉬하며 일을 진행시켰던 것이다.
앗차 싶었다. 그런 경로로 큰 손해를 본 사례를 여럿 보아왔기 때문이다.
"염려 마세요. 소장님. 시청에 건축과도 토목과도 전기과도, 수도과도 실무자들이 다 저희 동문입니다. 허가는 꼭 받아내겠습니다." 자신있게 말했지만 허가를 내는데 실패했다. 받은 돈은 거의 다 썼다.
땅 주인은 지불한 돈을 돌려달라고 성화를 댔다.
다급해진 k는 다른 건(件)을 수주 받아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를 썼다.
이번에는 건축 허가를 받았는데, 건축주가 마음을 바꿔 착공을 미루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돈을 받아서 먼저 것을 해결하려던 계획은 무산되고, 두번째 件의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
k가 고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도 잘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동문들의 말에 허욕이 발동했을 뿐이다. 일이 성사 되지 않을 경우 받은 돈은 환불해 주겠다는 계약서를 쓴 모양이다.
설계를 의뢰했던 쪽이 소송을 걸었다. 상대는 나였다. 대표로 되어 있는 나를 상대로 소장이 발부되었다. 나는 모르는 일이고, 내가 직접 한 것이 아니었어도 그 걸로 피해갈 수가 없었다. k는 제 탓이라고 백방으로 돈을 구하러 다니는 눈치였지만, 제집 한칸이 없는 사람이다.
우리집은 압류되었고, 나는 85년 살아오면서 한번도 겪어보지 않은 재판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 법원을 드나들었다. k가 성심껏 대응해 주었고, 아내의 글. 법리적인 측면으로가 아니라 감성적 논리로 적어나간 탄원서가 참고가 되었는지 당초의 소송액수에서는 많이 탕감되어 합의를 봤지만, 그것은 오로지 내가 변상해야할 큰 금액이었다.
6개월이 걸리는 그 기간에 나는 허물어지고 피폐되었다.
나는 돌다리도 두드려가며 걸은 사람이다. 내 힘에 부치는 욕심을 가져보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의 경험 또한 적었다. 사람에게 있어, 성공의 경험보다 실패의 경험이 소중하다는 말을, 이 정도 실패에 무너지는 나를 보며 깨달았다.
이 번 일은 나를 큰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나는 당뇨에 파킨슨, 전립선 비대, 퇴행성 관절염, 탈장에 고통 받고 있는 85세의 심신이 쇠약할대로 쇠약해진 노인인 것이다.
재판이 끝난 날. 나는 끝내 주저앉고 말았다.
8절
동면(冬眠)을 앞둔 숫곰 한마리가 먹이를 찾아 마을로 내려왔다.
초소 레이다에 잡혀 포획 위기에 몰린 곰이 전력을 다해 산으로 뛰어 간다.
돌진하는 길에 방해가 되는 나무들을 머리로 받는다. 몇 나무는 쓰러지고 몇 나무는 멀쩡했다. 쓰러진 나무들을 살펴보니 구멍이 나있고 속이 비었다. 고목들이었다.
힘센 숫곰의 돌진하는 충격이 나무가 쓰러진 첫번쨰 이유이지만
속이 텅 비어 그 힘을 방어하지 못한 나무에게 원인도 있는 것이다.
내가 쓰러진 것도 여기에 해당된다.
소중한 가족이 생명을 잃은 것도 아니다. 전 재산이 없어진 것도 아니다.
나로서는 억울하고 큰돈이긴 했지만 넘어져서 건강을 해칠 것 까지는 없는 일이었다. 엄밀히 말해 나는 외부의 충격 때문이 아니라 방어할 능력을 상실한, 이미 벌레에게 속을 다 파 먹힌, 쓰러질 수밖에 없는 고목이었던 것이다. 심신(心身) 모두...
고관절에 금이 살짝 갔을 뿐, 뼈는 오히려 건재했다. 많이 걸은 덕을 본 것이다. 문제는 온몸, 머리, 마음의 세포들이 일시에 마음대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흐름이 막히고, 기(氣)의 통로가 폐쇄되고...내 몸은 굳어져서 스스로는 움직일 수가 없었고, 배뇨 배변이 되지 않아서 쌍둥이를 임신한 만삭의 산모의 배 같이 되었다.
아산병원 입원 일 개월 동안 아내가 간병인이 되어 내 병구완을 했다.
그 일개월동안 건장한 조무사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서 소아과 산부인과만 뺀 전 진료실 (내과 외과 정신과 신경과 비뇨기과 항문 대장과)에서 CT. X선. 초음파. MRI 검사의 처방을 내렸고 내 몸을 가로 세로 샅샅이 영상이 훑고 지나갔다. 병명도 나왔고 적합한 약도 찾았다. 그러나 대소변을 내보내는 기능은 조금도 진척이 되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자 주치의가 아내를 불렀다.
"저희 병원에서는 이제 할일을 다했습니다. 투약은 저희 처방을 따르시고 치료와 요양은 요양병원에서 하십시오" 라고 말을 하며 두세 곳의 병원을 소개해 주었다. 보름에 한 번씩 환자 상태를 보고하고 약을 받아 가야 했기에 아산병원에서 가까운 요양병원으로 옮겨 갔다.
요양병원에서는 6인실에 들어갔다. 비뇨기과가 따로 없어서 내과 병동이다.
간병인 4명이 두 사람씩 조를 이루어 밤낮으로 배정되어 있었고, 간병비는 필수로 입원비에 포함되었다. 내가 받는 치료는 배변, 배뇨의 기능 회복이다. 방광과 장, 항문을 집중적으로 치료 받았다. 그리고 한달에 두 번 아산병원 외래로 가서 주치의를 만났고 약을 처방 받았다.
아내는 요양병원으로 일주일에 다섯 번을 찾아왔다. 내 회복이 마치 간병인의 손에 달린 듯 그들을 섬겼(?)다. 아내는 마치 데이트를 하러나온 젊은 여인 같은 차림을 했다. 번번이 산뜻하고 번번이 화사했다. 내 아내가 맞나? 아내에게 저런 모습이 있었나? 나는 낯설기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본 아내는, 내게 익숙한 아내는, 헐렁한 옷에 앞치마를 입은 풀어진 모습이다. 아침에 그 모습을 보며 출근했고, 퇴근 하고서는 잠옷을 입은 그녀만 보며 세월이 갔다. 어쩌다가 가족행사 때는 언제나 한복 차림이었고, 사무실에 같이 나올 때는 전문 직업여성처럼 검은 정장을 입었다.
아내가 병실로 들어서면 꽃무더기 하나가 걸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아내의 말소리가 그토록 청아하고 돌돌돌 시냇물에 차돌 굴러 가는 소리 같은 것도 처음 알았다. 아내가 와서 자근자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으면 옆 침상의 환자도, 맞은편의 환자도 간병인들도 귀를 기울이며 이야기에 빠져 들었다. 아내에게 그런 재주가 있었다.
50여 년 간을 함께 산 남편이란 사람이 이렇게 제 아내를 모르다니.!!
그 정도로 무심하고, 시간을 같이 하지 않았고,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니고 무엇이랴. 공기를 마시며 숨을 쉬어도 공기를 모르듯, 그저 그렇게 그 자리에 서있는 붙박이 장롱이듯 그렇게 당연하고 당연한 사람으로만 알았던 것이다.
얼마나 동부인의 외출이 없었으면... 얼마나 하숙생처럼 아침에 나가 오밤중에 돌아왔으면...이제부터라도 다르게 살아보리라 마음 먹어보지만,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老병객이니 후회하고 새롭게 결심한들 모두 허사인 것이 서글프고 서글펐다.
요양병원 입원 3개월로 접어든 어느날. 아내는 돌연 집으로의 퇴원을 선언했다. 아내는 간호사들이 하는 소변 관리를 찬찬히 관찰했다. 소변 줄은 25일 이상 달지 않는다. 소변 줄 대신 8시간 간격으로 호수 줄을 요로 (尿路)로 넣어 소변을 뺀다, 이것을 멜라토닝이라고 부른다.
아내는 멜라토닝하는 방법을 배우고 의사와 간호사들 앞에서 시연을 해 보였다. 환자가 요의를 느끼면 소변 통으로 받아내고 방광 안에 잔뇨가 얼마나 남았는지 반듯이 멜라토닝을 한다. 명심해야할 것은 철저한 소독으로 감염을 예방하는 것이다.
이것을 집으로 와서 스스로 하겠다는 것이다. 나도 자식들도, 의사까지
여든 살의 아내가 하기에는 힘든 일이라고 만류했지만 아내는 서둘러 나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내 발바닥에 허물이 벗겨지고, 아침마다 하얀 베개에 머리칼이 부서져서 눈처럼 쏟아지는 것을 목격한 후였다.
퇴원한지 오늘로 만 18개월이 된다.
나는 지금 바깥 외출만 혼자 못할 뿐 모든 것이 양호하다. 그리고 평화롭고 행복하다. 집으로 온지 3개월이 지나자 화장실 출입을 스스로 하며 실수 없이 배설을 하였고 발바닥은 매끈해 졌고. 돌아온 날부터 단 한 오락의 머리칼이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출입을 하지 않고 집에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정말 뇌가 노화되서인지
나는 매번 날짜와 요일을 헷갈려한다. 맨날 딴 소리다. 그래서 아내는 큰 글씨의 日歷을 구해다가 식탁의 내 자리 맞은 편에 걸어 놓고 그날 날짜의 큰 글씨를 보게 한다.
"오늘 며칠이지요?" 아내가 물으면 나는 얼른 일력을 쳐다보며 그날 날짜를 말한다. 그러면 아내는 '맞아요 100점. 당신은 천재라니까..." 하며 웃는다.
어느 날 일력 보니 21일이다. 21의 숫자가 크게 보인다. 21
나는 어쩐지 익숙하다. 아, 21일 생각난다. 나의 월급날이었다.
"여보. 월급을 탔던 시절이 좋았어. 지금은 한푼도 벌지 못하고,,, 참 한심한 병객이구나"
월급? 한심한 병객? 이 말을 듣자 아내가 총맞은 사람처럼 소리친다
"당신이 왜 돈을 못 벌어. 당신이 매달 200만원 벌고 있잖아요?"
"200만원이라니 무슨 소리야?" 누구 놀리는 거냐고 나는 기분이 나빠진다.
"요양병원 입원비가 200만원이었잖아요? 당신이 병원에 있지 않고 이렇게 나아서 집에 있으니 200만원을 매달 버는 거에요. 정말이에요" 하더니 얼른 방으로 들어가 봉투 하나를 들고 온다.
" 당신이 이번 달에 벌어드린 당신의 월급봉투!!"
이렇게 아내와 나는 일력에 21자가 쓰인 날이면 월급날 행사를 한다.
오늘은 21일 . 월급날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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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형부의 입장에서 본 가정의 역사와 경제 운영의 모습이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겠어요.
미처 몰랐던 이야기도 있어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복사하는 과정에 따라붙은 태그들을 삭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내가 해보니 잘 안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