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산리
■ 가래봉
거운리에서 문산리로 넘어가는 절운재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 옛날 천지 개벽 때 마을 전체가 물에 잠겼으나 이곳은 가래(추자) 열매만큼 남았으므로 '가래봉'이라 불렀다는 얘기가 전한다.
■ 물가 모퉁이
무내리(文川里)의 샘터 주위를 가리켜서 '물가모퉁이'라 한다. 지금의 송어장 부근의 마을이다.
■ 무내리(文川里, 물내리)
거운리로 넘어가는 절운재 밑에 있으며 문산리의 본 마을이다. 마을 한가운데서 솟아나는 샘물은 수량이 풍부하여 무내리의 간이 상수도와 송어 양식장에 이용된다. '무내리'라는 지명은 샘물이 항상 넘쳐흘러 내를 이루므로 '물내리→무내리'라고 한다. 그 후 한자식 표기로 문천리(文川里)가 되었다.
■ 감자골
무내리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에서 궁굴터골과 쑥밭재가 있는 접산을 넘고, 학전이의 빈터거리를 지나면 북면 마차리이다. 그 북쪽에 있는 옆길로 가면 평창군 미탄으로 갈 수 있다. 지형이 감자 구덩이처럼 움푹 파였으므로 '감자골'이라 한다.
■ 궁굴터골
문산리의 북서쪽인 감자골에서 북면 마차리의 학전이(빈터거리)로 가는 길이다. 지형이 가파르고 급경사가 진 곳으로 땔 나무를 해오던 사람들이 이곳에서 나뭇단을 밑으로 굴렸으므로 '궁굴터골'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미탄으로 가던 소장사가 쑥밭재에서 호랑이를 만나 도망을 치다가 이곳에서 궁굴었다 해서 생긴 지명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곳은 석회석 침식에 의한 돌리네 현상으로 땅 속이 궁굴었기(공간이 넓은 동굴) 때문에 '궁굴터'라고 하는 것 같다.
■ 노루목재
옻물터굼에서 구르머리재로 가기 직전에 있다. 지세가 느슨하며 우리말의 '노루목곶→노루곶→느르목→느린곶'이 되었으며 노루의 목처럼 길게 늘어져 있는 목쟁이므로 '노루목재'라 한다.
■ 용머리굴(龍頭屈)
무내리의 북쪽에 있다. 굴 앞에 있는 큰 바위가 용머리처럼 생겼으므로 용두암(龍頭岩)이라고 하며, 그 밑에 굴이 있으므로 '용머리굴'이라고 한다.
■ 고두리
문애리(문천리)의 동북쪽으로 마을 뒤에는 큰 너럭바위와 독진이 벼리가 있다. 예전에 싸리나무 발이나 돗자리를 엮을 때 날을 감아서 늘어뜨리는데 이용하는 고드래돌을 이곳에서 많이 구했으므로 '고드래'라는 지명이 생겼는데 그 후 '고두리'로 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지대가 높은 곳이므로 '고두리'라고 부른 것 같다. 예전에는 3가구가 있었으나 지금은 폐촌이 되었다.
■ 붉은 베리
감자골에서 재치재를 넘어 범우굴 우측에 있다. 역암(礫岩)과 붉은 이암(泥岩) 층으로 형성된 높은 병창이다. '병창이→벼리→베리'로 변형되었으며, 이암(泥岩)이 축적되어 붉게 보이므로 '붉은 베리'라고 한다.
■ 쇠목여울
독진이베리 앞에 있는 여울목이다. 문산리(文山里)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영월(寧越), 정선(旌善), 평창(平昌) 3개 군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예전에 평창 마하리와, 정선 덕천리에서 오는 소장사들은 나룻배에 소를 태울 수 없었으므로 문산 나루터 위쪽에 있는 물쌀이 빠르고 세찬 여울목을 이용하여 건너다녔다. 이곳은 소가 많이 건너다니던 여울목이므로 '쇠목여울'이라고 한다.
방우리(放牛里) 강가에 있는 넓고 평평한 들판으로 소장사들이 쇠목여울을 건너기 위해 이곳에서 소에게 풀을 뜯기며 쉬었다 가던 곳이다. 소가 풀을 뜯으며 쇠파리를 쫓을 때 목에 매단 방울 소리가 울렸던 곳 이라는 '방울이'가 후에 '방우리'로 변하였다. 일설에는 소가 떼를 지어서 풀을 뜯어먹도록 고삐를 들판에 풀어놓았으므로 '방우리(妨牛里)'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 굇들(괴도리)
무내리 남쪽의 둔전(屯田)밑에 있다. 상여처럼 생긴 행상 바위가 있으며 그 외에도 괴상하게 생긴 바위(怪岩)가 많았으므로 '괴돌이→괴도리→굇들→'이라는 지명이 만들어졌다.
■ 둔전(屯田)
거운리(巨雲里)외 경계인 마차와 굇들 사이에 있다. 예전부터 변경(邊境)지역에는 둔전병(屯田兵)을 주둔시켜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고 유사시에는 군(軍)의 의무를 지게 하였다. 그 당시 둔전병의 군량을 해결하기 위해 나라에서 지급한 둔전(屯田)이 있었던 곳을 '둔전'이라 하는데, 이곳의 둔전은 산비탈인 둔덕 위에 둔들밭이 있었으므로 '둔들박이→둔들밭→둔전'으로 변했다고 볼 수 있다.
■ 거산리(巨山里)
가정리, 금이, 길운, 어라연 일부를 포함한 지역이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만지(滿池)와 어라연(魚羅淵)은 거운리에 편입되고 그 외의 지역은 문천리(文川里)와 병합하여 문산리(文山里+巨山里)가 되었다.
■ 진탄(辰灘)
황새여울 밑에 있으며 미탄 마하리로 건너가는 강폭이 넓고 긴 여울목이다. '긴'은 '진'으로 변하고 탄(灘)은 여울을 의미하므로 '진탄'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
■ 황새여울
뉘룬(누운) 밑에 있는 여울이다. 이곳은 물이 얕고 물살이 센 여울목으로 정선에서 덕포로 오는 골뗏꾼들이 두려워하던 곳으로 황새, 두루미, 청둥오리 같은 철새들이 먹이를 찾아서 모여드는 곳이므로 '황새여울'이라고 한다. 예전에 이곳 뗏꾼들이 흥취를 돋구기 위해 부르던
황새여울 된꼬까리에 떼를 띄어 놓았네
만지산의 전산옥(全山玉)이야 술상 차려 놓게나
오늘 갈지 내일 갈지 뜬구름만 흘러도
팔당주막 들병장수야 술판 벌여 놓아라
라는 소박한 뱃노래 가락속에도 '황새여울'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또한 영월, 정선의 남한강 뱃길이 유명함은 '한강수 타령'의 가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정선 영월 지나서 단양 도담 감돌아 여주 이천 광나루
앞구정 흐르네 노을진 저녁 빛 한강에 배 띄우고
유유자적 즐기니 이도 멋진 흥취일세
노랫가락에 나오는 전산옥이라는 정선아라리를 잘 불렀던 실제의 인물로 만지나루터에서 뗏꾼들을 상대로 술장사를 했으나 1936년 병자력 가력때 주막집이 떠내려가자 북면 마차로 이사를 했다가 노년에는 덕포리의 큰딸 집에서 임종을 했다.
■ 가정리(가랍마을)
문산분교가 있는 금이에서 띠재 너머에 자리잡은 마을로 한때 15가구까지 있었으나 지금은 3가구가 살고 있다. 마을 앞에 있는 가랍말나루를 건너면 덕천리와 미탄면 마하리로 갈 수 있다. 영월군, 평창군, 정선군의 경계가 되는 강 건너에는 천연기념물 260호인 '백룡동굴'이 있다.
옛날 이 마을에 큰 가랍나무(떡갈나무)가 있어서 순수한 우리말로 '가랍마을'이라고 했으나 그 후 한자식(漢字式) 표기 방법인 '가정리(柯亭里)'로 지명이 변했다.
■ 말골
논들 동쪽에 있는 깊은 산골이다. 그 뒷산의 지형이 말형국(馬形局)이므로 '말골'이라 한다. 그러나 '말'이라는 땅이름이 붙는 곳은 '크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말골'이란 '큰골'이라는 뜻이다. 즉 '말무덤'은 '큰무덤', '말바위'는 '큰 바위', '말재'는 '큰 고개'라는 뜻이 된다.
■ 노루목
거운리 남쪽에 있다. 팔운(八雲)에서 개구리 바위를 지나 거운리의 어라연과 만지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어라연의 뒤쪽에서 뻗어내리는 산줄기가 노루목처럼 길게 늘어졌는데 그 목 부분에 고개가 있다.
노루목 앞에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어라연의 맑은 물 위에 삼봉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며, 그 건너편에는 '어라사(魚羅寺)'절터와 팔운약수가 있다.
어라사(후에 水雲庵으로 바뀜)가 있었던 절골에서 바라보는, 어라연의 옥순봉은 자비스러운 부처님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의 신비함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자료출처:「영월 땅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저자 엄흥용
출처 : 영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