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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무안 31코스 역방향
삼강공원-매곡마을-내분마을-사야마을-슬산마을-대사리마을 입구-신사마을-백림사-
백학산 자락길-백학마을-송전마을-감정마을-석산마을-원머리마을-수포마을회관
20221228
1.매곡마을의 삼강비와 민대들의 동학농민혁명 삼의사비
전남 무안군 해제면 양매리 삼강공원 앞에서 서해랑길 31코스를 역방향으로 탐방한다. 삼강공원은 매곡마을의 입향조 광산 김씨와 병자호란 때 순국한 매죽헌 김득남과 그 후손들의 충효열(忠孝烈), 그리고 이웃 외분마을의 입향조인 파평 윤씨와 그 후손들의 효열을 기리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음력 섣달 초엿새 새벽의 어둠은 짙었다. 이정표와 트랭글 지시를 따라 어둠의 해제반도를 북쪽으로 걸었다. 이 지역은 광산 김씨와 파평 윤씨의 세거지인 듯하다. 행정구역은 양매리와 덕산리로 구분되어 있지만, 매곡마을, 내분마을, 사야마을은 모두 광산 김씨의 집성촌인 듯 가문의 비석들이 즐비하다. 양매리 매곡마을, 덕산리 내분마을괴 사야마을을, 새벽의 깊은 침묵을 깨뜨리며 걸었다. 마을의 개들이 새벽 침입자를 향해 목놓아 짖어댄다. 이 소리는 탐방객의 존재를 알아주는 듯하여 반갑기도 하지만 주민들의 새벽잠을 깨우는 소리 같아 몹시 불편하다. 주민들이 잠자리에서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덕림고개를 넘어 사야마을을 통과하여 슬산마을로 가는 도중 어둠 속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 미지의 첫 길, 그것도 어둠 속의 길, 어둠 속 물상들을 분간하지 못하고 갈래길을 무심코 스쳐지나갈 뿐, 그러다 길을 잃는다. 되돌아서서 길을 찾아 슬산저수지를 거쳐 슬산마을로 들어갔다.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형국의 슬산마을에서 불빛에 반짝이는 들꽃 벽화가 겨울의 새벽 추위에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준다. 골목길에서 새벽을 알리는 닭소리들이 목청을 놓는다. 어둠 저편에서 비파소리가 울려오는 듯 이제 마음이 어둠의 불안에서 놓여나는 것을 느꼈다. 들꽃이 웃음 짓고 장닭이 목청을 높이는 슬산마을, 어둠의 장막을 걷어낸 그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뒷날을 기약하며 봉대로로 올라선다. 봉대로는 봉화대가 있는 봉대산을 감아도는 길, 그 길을 따라 잠시 걸으면 대사리마을 입구, 이곳에서 신사마을 방향의 대사길로 들어서 해안 방향으로 이어간다. 슬산마을에서 되찾은 안정감이 신사마을 가는 길의 어둠 속에서 사라졌다.
저 불빛 반짝이는 곳이 대사리 신사마을이 맞겠지? 31코스 종점 3.8km 지점의 이정목 뒤쪽에 불빛 반짝이는 마을이 신사마을일 것이라 가늠하며 언덕으로 오른다. 오른쪽 바다에 점등한 불빛 행렬은 칠산바다의 칠산대교 가로등일까? 확신할 수 없다. 밝은 대낮이라면 분간할 수 있겠지만, 미지의 첫 길, 어둠 속에서 오직 점등 행렬을 보고 위치를 확정할 수는 없다. 어둠 속의 길은 계속 이어지고 정확한 위치 분간을 못한 채 언덕을 넘어가는 길, 언덕에 함평 노씨 효행기적비들이 세워져 있다. 이곳이 함평 노씨 세거지임을 증거하는 비석이다. 잠시 뒤 백림사 앞에 이른다. 신사마을에서 백림사에 이르는 길은 무안군 해제반도 북쪽 끝에 이르는 길이며, 서해랑길은 해제반도 북쪽 끝의 곶(串)으로 나가지 않고, 백림사 앞에서 반도의 북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며 백학산 자락을 휘돌아나가는 것임을 지도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미지의 길은 밝음 속에도 어렵지만 어둠 속에서는 눈을 감고 가는 길 같다.
백림사를 거쳐 동백나무 가로수가 멋지게 줄지어선 백학산 자락길로 들어섰다. 동백꽃은 설해(雪害)를 입어 피어나다가 시들어 버렸다. 그 꽃송이들을 애처롭게 달고 새 꽃망울들이 새 날을 기다리고 있다. 동백가로수 나뭇잎은 헤드랜턴 불빛을 받아 더욱 푸르게 싱싱하다. 푸른 동백가로수 너머에서 새벽의 깊은 침묵을 깨뜨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둠 속에서 칠산바다의 파도소리가 들려온다. 어둠 속 파도소리는 모든 소리를 단절하고 천상에서 울려오는 평화의 소리처럼 들린다. 동백나무 가로수 아래 멈춰서서 그 소리를 음미한다. 감미롭다.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은결을 돋우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김영랑의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전문) 아침 햇빛이 아닌 헤드랜턴 불빛에 반짝이는 동백잎도 마음을 물들인다. 칠산바다의 파도소리는 동백가로수를 흔들며 동백잎에 반짝이는 푸른 강물 소리처럼 울려온다. 파도소리가 동백잎을 흔들고, 동백잎은 도란도란 사랑을 이야기하고, 마음에는 끝없는 강물이 흐른다. 길손은 환청한다. '아침 햇빛이 동백잎에 은결을 돋우는' 풍경에 도취한 영랑의 소리가 백학산 자락에 울려퍼진다.
이곳이 어디일까? 지도를 살피며 현 위치와 주변 지역을 가늠하며 백학산 자락길을 내려가면 하얀 건물 한 채가 외롭게 서 있는 곳에 이른다. 이 집은 민가일까, 펜션일까? 흰벽의 2층 건물은 칠산바다를 향해 서 있다. 이곳에서 다드락섬을 가늠하며 걸어가면 불빛 반짝이는 마을이 보이고 그 입구에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이정목에는 31코스 종점에서 7.5km 지점임을 밝히고 있다. 이정목 뒤쪽으로 보이는 마을이 백학마을일 것이다. 그 앞에서 다드락섬 나가는 길로 잠시 나가보니 이곳이 백학포구로 배들이 정착해 있다. 이정목 있는 곳으로 되돌아와 백학길을 따라가면 방조제와 양식장이 있는 곳을 통과해 나간다. 양식장 끝을 빠져나가면 길은 '돌마지길'로 들어섰다가 다시 '백학길'로 이어지는데 동이 트기 시작한다. 왼쪽으로 백학산이 실루엣을 보여준다. 긴 어둠의 터널을 통과하여 새 날의 새 아침을 맞이한다.
약 2시간 25분을 어둠 속에서 헤매다가 이제 밝음 속으로 나왔다. 봉대산 자락에 자리잡은 송전마을이 동트는 밝음 속에 나타났다. 아담한 송전마을은 북서쪽 칠산바다를 향하여 배산임수의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어둠의 불안에 깃들어 있다가 밝음으로 나와서인지 마을이 안정되어 보였다. 마을 입구의 마을회관을 거쳐 송전마을을 돌아서 언덕으로 올라 뒤돌아보았다. 백학산 자락의 외로운 작은 섬 다드락섬이 제 모습을 보여주고, 어둠 속에서 걸어왔던 백학길이 가늠된다. 다드락섬 입구에서 어둠 속 백학포구를 살펴보고 방조제와 양식장 옆을 걸어온 백학길이 확연히 가늠된다. 그러나 백림사에서 백학마을 입구에 이르는 길은 백학산 뒤에 숨어 보이지 않는다.
아침 7시 20분이 넘었지만 태양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새벽보다 해뜨는 아침이 더 춥다. 추위가 몰아쳐 몸이 떨리고 손이 시리다. 아침을 먹지 않아 속이 비어서인지 더 추운 것 같다. 언덕을 넘어 석룡리로 넘어갔다. 드넓은 양배추밭과 양파밭이 펼쳐져 있고, 석룡리 감정마을이 등걸산 자락을 둘러서 자리하고 있다. 감정마을 입구에 석룡저수지가 있고 서쪽에 드넓은 간척농지 '민대들'이 펼쳐져 있다. 어둠 속 물상들이 보이지 않아 밀폐된 공간을 허우적거린 길손의 눈에 활짝 열린 이 풍경은 답답했던 마음을 말끔하게 씻어준다. 겨울 아침의 기세 있는 추위를 무릅쓰고 양배추밭과 양파밭 사이의 농로를 따라 감정마을 입구에 이르니, 마을의 당산나무 석룡리 곰솔나무가 의젓한 자태로 길손을 맞이해 준다. 수령 350년의 곰솔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17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매년 2월 1일 당산제를 지낸다고 한다.
동학길을 따라 석룡리 석산(돌뫼)마을로 들어갔다. 왜 동학길일까? 의문은 쉽게 풀렸다. 돌뫼마을 찬가비가 세워져 있는 석산마을회관 옆에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삼의사비가 세워져 있다. 삼의사비가 바라보고 있는 간척농지 '민대들'은 동학농민군 훈련장이었으며, 해주 최씨 삼형제(장현, 서현, 기현)가 지도자가 되어 농민들을 민대들에서 훈련시켜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은 무안 동학농민전쟁사의 중요한 지역이라고 한다. 석산마을은 해주 최씨의 집성촌으로 해주 최씨 효행비 등 여러 비석들이 많이 세워져 있다.
석산마을에는 민대들을 바라보고 '꽃다운 향기의 우물 누각'이라는 의미의 방정각(芳井閣)이 세워져 있다. 석룡리의 감정마을도 '달콤한 우물'이라는 뜻의 甘井이다. 이곳에 우물이라는 지명이 왜 많이 쓰일까? 아마도 샘물의 중요성 때문일 것이다. 예전에 석룡리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거의 섬과 같은 위치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식수가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마을이 자리잡아야 할 곳은 사계절 끊이지 않고 공급될 수 있는 식수가 있는 곳이어야 한다. 석산마을이나 감정마을은 맛좋은 샘물이 있어서 방정(芳井)이나 감정(甘井)의 지명이 생겼을 것이다.
꽃처럼 향기로운 샘물 누각, 방정각(芳井閣) 안쪽 현판은'천객만래(千客萬來)'이다. 이 현판을 붙인 의미가 무엇일까? 오직 마을의 번창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단순한 의미일까? 아니면 간척농지 '민대들'의 의미를 상징하는 것으로,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한 동학군들의 훈련 모습과 천지개벽을 외친 그들의 이상을 생각해 보라는 뜻일까? 천객만래의 방정각에서 아침을 먹을 준비를 했다. 이때 바로 앞집의 할머니께서 나오셔서, "추운 날씨에 밖에서 밥을 먹다니, 이쪽 비닐하우스로 들어오라"고 비닐하우스로 안내하고서 참깻단을 나눠주셨다. 비닐하우스에서 참깻단을 깔고 앉아 아침을 먹었다. 할머니는 김치를 주시고 후식으로 커피까지 제공해 주셨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명패에 '무안군 해제면 동학길 88, 노부덕·최영길'이라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함평 노씨 할머니와 해주 최씨 아드님이 맞을까?
석산마을에서 31코스 시작지점까지는 2km 남짓 남았다. 서해랑길은 석산마을 언덕에서 왼쪽으로 꺾어 민대들을 빙 돌아나간다. 민대들 서쪽 해안은 방조제와 아시래염전이 펼쳐져 있고, 바다 맞은편은 신안군 지도읍 지역이다. 아시래염전과 민대들은 예전에 모두 바다였으며, 간척농지 동학길을 따라 석룡리에서 임수리로 넘어가면 낮은 구릉지가 있다. 이곳이 임수리 원머리지역으로 일제강점기 때 면 행정사무실과 목화 저장창고가 있었으며, 원머리포구는 해제면에서 재배한 목화와 물류를 실어나르던 중요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동학길이 봉대로와 재회하는 곳에서 서해랑길은 수포마을을 향하여 봉대로를 따라 이어간다. 길게 역방향으로 이어온 31코스의 시작지점이 가까이 있다. 31코스 역방향 탐방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송전마을에서부터 어둠의 긴 터널을 통과하여 밝음의 길 속에서 물상들과 지형들을 익힐 수 있었지만, 코스의 반 이상을 어둠 속에 걸어서 구체적 지리와 마을 지형을 살피지 못하였다. 이 어둠 속 길을 장님 코끼리 만지듯 허장성세를 떨었지만, 그럼에도 길손에게는 소중한 체험과 아름다운 추억이 이 길에 새겨져 있다. 슬산마을의 들꽃벽화와 장닭의 목청, 백학산 자락의 동백가로수와 파도소리, 백학마을의 외딴 이층집, 백학포구와 다드락섬, 감정마을의 곰솔나무와 석산마을의 삼의사비, 비닐하우스에서의 컵떡국 먹기 등 잊히지 않을 추억들이 이 길과 함께 있다. 어둠 속 이 길을 밝음 속에서 재회할 그날을 기다린다.
2.탐방 과정
전체 거리 : 14.26km
전체 소요 시간 : 4시간
전남 무안군 해제면 양매리 삼강(三綱)공원 앞에 서해랑길 무안 31·32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매사처사윤공유적비'와 '파평 윤씨효열비'가 분매동 표석 왼쪽에 있다.
해제면 양매리 분매동은 매곡마을과 외분마을을 함께 이르며, 이곳은 매곡마을과 외분마을의 경계 지역이다. 매곡마을은 병자호란 때 한양에서 강화도로 가는 길목인 부평에서 청나라 군사와 싸우다 전사한 매죽헌 김득남의 후예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고, 외분마을은 파평 윤씨 집성촌이라고 한다.
분매동의 처음 이름은 함평현 佛舞洞이고, 처음으로 마을에 입향한 사람은 광산 김씨 27세 김억창(1585~1646)이다. 그는 두문동 72현인 김약시의 후손으로 경기도 양평현에서 살다가 임진왜란 때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피난길에 풍랑을 만나 이곳에 표류되어 광산 김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 후에 병자호란 때 벌말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운 그의 아들 매죽헌 김득남(1601~1637)이 고결한 절개를 지키는 선비정신을 배우기 위하여 세한삼우의 매화나무를 많이 심어 마을에 매화향기가 그윽하므로 분매동이라 하였다. 이후 새터에 파평 윤씨 윤득열(1574~1642)이 들어오고, 뒷골에 윤형은(1647~1707)이 들어와 세거하면서 분매(매곡), 외분매, 내분매 3개의 마을로 나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매곡과 외분매 두 마을 이름에 梅자가 들어 있다 해서 兩梅里라 부르게 되었는데, 우데미 매곡마을은 봉대산의 맥을 이은 매봉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모충사·광산 김씨 충열문·칠효열각·삼강비 등이 있고, 아래데미 외분은 금성사, 효자각, 감동샘 등 유적과 유물이 산재해 있는 역사문화마을이다.
2013. 09 사단법인 매죽헌김득남기념사업회에서 부지를 제공하고, 마을의 유적·유물을 후학들의 인성교육 체험학습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노력한 끝에 창조적 마을 만들기 사업 대상지로 선정이 되므로, 매곡·외분 두 마을이 공동체를 이루어 삼강공원을 건립하고 매화나무를 심으니 다시 매화향기가 마을에 그윽하므로 2017. 04 마을공청회를 열어서 분매동의 옛 이름을 되찾고 여기에 그 유래를 새깁니다. 2017. 12 분매동 운영위원회
삼강공원은 분매동의 매곡마을과 외분마을의 경계에 조성되어 있다. 2017년에 삼강비 완공, '광산김씨충열문'과 '광산김씨칠효열각' 중건, 분매동의 유래비와 분매동 표석 건립, '파평윤씨효열비'와 '매사처사윤공유적비' 주변 정리 등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2017년에 조성한 삼강공원에 삼강공원 표석과 삼강비(부위자강, 군위신강, 부위부강)가 세워져 있다.
매곡마을은 충의공 매죽헌 김득남 장군의 나라 사랑 정신이 자손에 이어져, 아들 김방보, 5세손 김성흡, 6세손 김육정, 7세손 김재문과 김재철, 8세손 김종현 등 7명이 효자 정려를 받았고, 충의공의 6세 손부 양성 이씨와 9세 손부 진주 정씨가 열녀로 정려를 받은 '충절의 마을'로, 광산 김씨의 '충열문'과 7명의 효자와 열녀가 있는 '칠효열각'이 삼강공원에 세워져 있다.
느티나무 아래 뎈 오른쪽 기둥에 서해랑길 32코스 시작점 표지, 그 오른쪽에 서해랑길 무안 31·32코스 안내도와 이정목이 있다.
해제면 양매리 양매길을 따라 매곡마을 중심부 외곽을 돌아나간다.
"매곡마을은 양매1리에 속하는 마을로 광산 김씨의 동족 마을이다. 봉대산의 맥을 이은 매봉재를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속등과 안산을 좌우로 하여 아늑하게 자리를 잡았다. 예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길지로 와우형의 자리였다. 마을의 주산인 매봉재는 양매리의 1번지가 시작되는 곳으로 1번지는 모충사이다. 이 마을은 특이하게도 한 구역에 두 마을이 붙어있다. 보통 자연마을의 구분이 지형적 특성을 경계로 되어 있는데 반해, 이 마을은 한 지형 안에 문중이 사는 거주지에 따라 구분이 되고 있다. 즉 광산 김씨가 사는 지역과 파평 윤씨가 사는 지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우데미, 아래데미로 구분하면서 매곡과 외분(外盆)마을로 구분하는 것이다." - 무안문화원 지명유래
해제면 양매리 매곡마을에서 해제면 덕산리 내분(內盆)마을로 진입한다.
매곡내분길을 따라 내분(內盆)마을을 통과한다.
"내분은 산고지, 쥐머리와 함께 덕산2리에 속한 마을로 '內盆'이란 지명의 유래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으나 두 가지 의견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원래 내분을 포함한 일대의 지명이 분매동이었으나 나중에 위치에 따라 외분, 매곡, 내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외분마을의 유래에서 나온 것이다. 또 하나는 마을의 지형이 소쿠리 형으로 멀리서 보면 항아리 형이라 그 안에 위치하고 있다 해서 '內盆'이라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민들이 알고 있는 유래다. 마을유래지에는 "마을이 이루어질 때 양매리 뒤편에 자리한 마을이라 해서 '뒷몰'이라 불렀다."고 한다. 실지로 마을에서는 윗몰, 아랫몰, 뒷몰로 불려지기도 했다. 이후 '內盆梅'로 고쳐 부르다가 행정구역 개편 때 '內盆'으로 개칭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1789년의 호구총수와 1912년, 1917년의 자료에는 내분매동으로 나온다. 이후의 자료에는 내분으로 나온다." - 무안문화원 지명유래
내분마을 뒤 덕림고개를 넘어 사야(沙野)마을로 내려간다.
"사야는 덕산3리에 속하는 마을로 광산 김씨의 동족 마을이다. 원래 마을 이름이 샛들로 불렸다. 샛들은 슬산과 내분마을 사이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사잇들의 의미다. 샛들이 현재의 마을 이름인 사야로 변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부터로 보인다.
沙野의 지명 유래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사잇들의 음차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하나는 이 마을의 지형적인 이유로 모래가 많이 쌓인 데서 비롯된다. 마을에서 대양갯들이라고 부르는 저수지 밑의 들은 일제강점기 때 간척사업으로 이루어진 들이다. 간척사업 이전까지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유난히도 모래가 많이 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간척이 된 지금도 비가 조금 많이 오면 마을 앞 저수지에 모래가 가득 차 버린다. 해서 '모래가 쌓인 들'이라는 의미인 沙野로 마을 이름을 정한 것이다. 다른 해석도 있다. 덕산리 일대가 소(牛) 형국이다. 이 마을 입구는 뿔당골이며 앞에 있는 잔등은 소 등에 해당한다. 그리고 소꼬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손고지라 부르는 곳이다. 즉 소가 풀을 밟고 있는 형국에 마을이 있다고 해서 처음엔 莎夜라고 했다가 砂野로 그리고 현재의 沙野로 변했다고 한다. 1789년의 호구총수나 1912년 1917년의 자료에는 사야라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무안문화원 지명유래
조선 영조(1776년 이전) 때 광산 김씨 김수정이란 어르신의 부부가 옥녀봉 밑에 자리를 잡고 마을 이름을 샛뜰이라 부르며 살아 오시면서 그 후예들이 1620년경에 덕산리 2구 사야로 개칭하였고, 1992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덕산리 3리로 분리되었다. 그동안 본 마을은 광산 김씨 텃밭을 이루면서 박사 및 학사를 가장 많이 배출하여 사회에 활동 중이며 앞으로 태어날 후예들에게도 무궁무진한 영광이 그들에게 있을지어다. 2006년 8월 18일 사야마을 주민일동
왼쪽 길을 걸어와서 오른쪽 뒤 사야마을회관을 들러본 뒤 되돌아왔다.
사야길을 따라가다가 왼쪽으로 꺾어 슬산(瑟山)저수지 방향으로 내려간다.
이곳에서 왼쪽길로 들어가 슬산저수지로 내려간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슬산마을로 내려간다. 표석 뒤에 슬산마을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덕산1리 슬산마을이 이루어질 당시에는 길산(吉山)이라 하였으나 마을 앞산의 모양이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모양인데 거문고보다는 비파가 더 좋아 비파 '瑟'자와 뫼 '山'자를 따서 '슬산(瑟山)'이라 부른다.
이 마을의 최초 입향 성씨는 함평 이씨 이검손으로 세거지 경기도 평택에서 살다가 중종(1506~1544) 때 사화로 정국이 혼란스러워 함평으로 이거하였다가 다시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그후로 함평 노씨, 나주 정씨 등이 입향하였다.
안내도를 본 뒤에 봉대로로 나가 주변을 살핀 뒤 슬산마을로 내려간다.
단축하고자 하면 봉대로를 따라 앞의 불빛 반짝이는 신사 버스정류소 대사리마을 입구로 직진하면 된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슬산(瑟山)마을로 진입하여 통과한 뒤 봉대로로 나와 대사리마을 입구로 이어진다.
"해제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1.5km 지점에 위치한 덕산리는 쥐머리산(鼠頭山)을 주산으로 자리하고 있다. 슬산, 내분, 사야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이곳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슬산리, 덕림리, 내분리, 매곡동 일부를 병합하여 덕림과 슬산의 이름을 따서 덕산리라 했다. 슬산은 덕림과 함께 덕산1리에 속하는 마을로 안돔, 밖돔, 쇳돔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봉대산의 맥을 이은 옥녀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오른쪽에는 서당골이 있는 안개산이 있으며 마을 앞에는 거문고산(참등이라고도 부른다)이 있다. 거문고 산 옆에는 총각산이라고도 부르는 가장골이 있다. 옥녀봉 옆에 분산등이라는 지명이 있어 옥녀가 화장을 했던 곳이라 한다. 해서 마을 이름을 옥녀가 거문고를 탄다는 비파 '瑟'자와 뫼 '山'자를 따서 '슬산'이라 했다." - 무안문화원 지명유래
슬산마을을 통과하여 봉대로로 나가 조금 걸어나가면 대사리마을 입구 신사 버스정류소에 이른다.
봉대로 신사 버스정류소 옆에 '대사리(大士里)마을'과 '백림사' 표석이 세워져 있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대사길로 이어진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대사길을 따라 신사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大士里는 해제면소재지에서 봉대산 일주로를 따라 서북쪽으로 4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칠산 바다를 경계로 영광군 낙월면 염산면과 마주하고 있다. 白鶴山(126m)을 주산으로 하고 있는 이 지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치리와 신사리를 합쳐 대사리라 부른다. 신사와 백학 마을로 이루어졌으며 한아지와 영광군 각시섬 사이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살펴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함평현 해제 신사, 내동, 신리로 나온다. 1912년의 자료를 보면 무안군 해제면 대치동, 신사동으로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해제면 대사리 대치동, 신사동으로 나온다. 이어 1987년의 자료에는 대사리 신사, 백학 마을로 나온다." - 무안문화원 지명유래
불빛 반짝이는 곳이 신사마을이라 가늠한다.
"신사는 대사1리에 속한 마을로 함평 노씨 집성촌이다. 처음에는 남평 문씨가 살았다 하나 지금은 한 집도 없고 문씨 소유의 門中山 등 흔적만 남아 있다. 마을 왼쪽에 몰맷등 또는 말맷등이라 부르는 지명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함평 노씨가 들어 오기 전에 전염병이 돌았거나 변란이 있었지 않았는가 추정된다." - 무안문화원 지명유래
뒤쪽에 불빛 있는 곳이 신사마을이라 가늠한다.
신사마을 동쪽 언덕에서 칠산바다를 가늠하며 찍었다. 저 불빛 비치는 곳이 해제면 송석리 도리포항과 영광군 염산면 옥실리 향화도항을 이어주는 칠산대교일 것이라 가늠하지만 분명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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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마을 언덕을 넘어가는데 함평 노씨 효행기적비들이 세워져 있다. 신사마을이 함평 노씨의 집성촌임을 증거한다.
2016년 말에 지웅 스님에 의해 창건되어 힐링 사찰로 자리잡아 가고 있으며, 해수 관음보살상이 조성되어 있다고 한다.
백림사를 왼쪽으로 돌아나가면 백학산 임도 자락길이 나온다.
아로니아 재배 농장인 백학농장이 백학산 임도 자락길 입구에 있다.
백학산 임도 산자락길 시작지점부터 동백나무 가로수가 해안 언덕에 조성되어 있다.
동백나무 가로수 오른쪽 아래는 칠산바다이며 전남 영광군 소속의 섬들이 보일 것이라 가늠한다.
다드락섬 가는 길 해안에 민가인 듯, 펜션인 듯 아담한 집이 칠산바다를 향하여 서 있다.
앞쪽 불빛 비치는 곳은 해제면 대사리 백학마을일 것이라 추정한다. 이 마을은 해제의 8명당 중 백학귀소(白鶴歸巢)의 명당 터로 최초로 들어온 입향 성씨는 김해 김씨이며 인조(1623~1649) 때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이어 보성 선씨들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정목 앞쪽은 다드락섬 입구, 이정목 뒤쪽에 불빛 비치는 곳은 해제면 대사리 백학마을이라 가늠한다.
"해제의 외진 백학마을은 학이 잠자는 형국의 수학(睡鶴), 윗백이(우데미), 아랫백이(아래데미)로 이뤄졌으며 해제면 소재지에서 6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뒤에는 백학산이 병풍 구실을 하고 있어 마을 이름을 백학이라 했으며, 마을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칠산 앞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 마을이 협소하고 농토가 없어서인지 마을이 세 군데로 나뉘어져 있으면서 22세대가 살고 있는 소규모 마을이다. 행정구역명으로는 해제면 대사리 2구 백학마을이다." - 무안문화원 지명유래
다드락섬 가는 길 입구의 백학포구에 배들이 정착해 있다. 다드락섬은 보이지 않았다.
이정목 앞으로 되돌아와서 백학마을 앞 간척지 배수갑문이 있는 방조제 아래 농로를 따라간다.
방조제 아래 농로를 따라와서 서해랑길은 앞쪽 양식장 왼쪽 농로를 따라 직진하여, 대사리에서 학송리로 넘어간다.
"학송리(鶴松里)는 해제면소재지에서 봉대산 일주로를 따라 서북쪽으로 3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봉대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칠산 바다가 펼쳐져 있다. 본래 함평현 해제에서 목포부 해제면으로 바뀌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의 통폐합에 따라 학암동과 송전리를 병합하여 학송리라 해서 무안군 해제면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학암과 송전 두 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문헌을 통해 지명의 변화를 보면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함평현 해제 송전리가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해제면학암동, 송전리가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해제면 학송리 학암동, 송전동으로 나온다. 이어 1987년의 자료에는 해제면 학송리 학암, 송전이 나온다." - 무안문화원 지명유래
양식장을 지나서 돌마지길로 들어서 돌아나가면 왼쪽으로 백학산이 어둠 속에 실루엣으로 보이고, 양파밭이 펼쳐진 백학길이 이어지며 송전마을 초입에 들어선다. 서서히 동이 트며 날이 밝아지고 봉대산 자락에 자리한 송전마을이 보인다.
동이 터온다. 봉대산 자락에 자리한 송전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서해랑길은 봉대산 자락의 송전마을 앞을 오른쪽으로 돌아나간다.
"송전은 학송2리에 속한 마을로 울창한 소나무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실지로 이 마을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 성씨인 능성 구씨, 신안 주씨, 대구 서씨 중 대구 서씨의 족보를 보면 '松'자가 들어간 號가 많이 있다. 松田이란 마을 이름이 처음 나온 자료는 1789년의 호구총수인데 함평현 해제 송전으로 나온다. 이후 1912년의 자료엔 해제면 송전리, 1917년의 자료엔 해제면 학송리 송전 마을로 나온다. 자료를 보면 '松田'은 조선 시대 해안지역의 도서와 곶(串)을 대상으로 소나무 배양지를 선택하는데 그곳을 송전이라 했으며 관의 관리를 받았다'고 하나 이 마을이 그에 해당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마을은 소쿠리 형으로 봉대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왼쪽으로는 만들산과 촉길산을 오른쪽으로는 뒷잔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촉길산에는 서당골이라는 지명이 있는 등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예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을 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조리형인 송전에서 시루형인 외시래로 얹는다고 말한다. 남안골, 송전, 외시래 등 세 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무안문화원 지명유래
송전마을 앞길을 거쳐 오른쪽 언덕을 넘어 해제면 학송리에서 석룡리 방향으로 이어간다.
바다에 떠있는 작은 섬이 다드락섬인 듯하다. 그 앞쪽에 백학마을과 방조제가 있으며 백학산 왼쪽 자락을 거쳐 학송리로 넘어와 돌마지길, 백학길을 거쳐 오른쪽 송전길로 들어와 송전마을 앞으로 이어왔다.
왼쪽 중앙 농로를 따라 중앙의 쉼터 정자를 거쳐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지점에 있는 송전마을회관 앞을 거쳐 언덕으로 왔다.
송전마을 언덕을 넘어 학송리에서 석룡리로 넘어왔다. 서해랑길은 왼쪽 위 봉대로로 나갔다가 오른쪽으로 빙 돌아서 중앙에 보이는 석룡저수지 앞을 거쳐 감정마을 입구 석룡리곰솔나무로 이어진다.
"석룡리(石龍里)는 해제면 소재지에서 서북 방향으로 3km 떨어진 지점에 자리하고 있으며 봉대산을 주산으로 칠산바다를 마주하고 있다. 간척지의 일부에서 소금이 특산물로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간척지로 형성된 민대들은 동학농민혁명 때 동학군들이 훈련을 하였던 연병장으로 무안 동학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석산동, 용흥리, 신기동, 석령리, 연화동, 외남리를 합하였으며, 석산과 용흥의 이름을 따서 '석룡리'라 하였다. 해주 최씨의 석산, 담양 전씨의 용흥, 그리고 감정 등의 3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살펴보면 함평현 해제면에 외남리, 독길리, 내아사내리(內牙士乃里)가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해제면 용흥동 아사내리(牙士乃里), 石山동, 연화동, 석령리, 외남리 등으로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해제면 석룡리에 석산동, 용흥리, 신기동, 석령리, 연하동, 외남리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1987년에는 현재의 마을 이름만 나온다." - 무안문화원 지명유래
양파밭과 양배추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왼쪽 뒤 송전마을 언덕을 넘어 양파밭과 양배추밭 사이 농로를 따라 지방도 805호선 봉대로로 나왔다.
양배추밭과 양파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앞쪽의 등걸산 자락을 둘러서 감정(甘井)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서해랑길은 중앙의 농로를 따라가다가 왼쪽으로 돌아서 석룡리곰솔나무 앞으로 이어진다.
왼쪽에 석룡저수지와 그 뒤에 석룡리곰솔나무가 보인다.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빙 돌아서 석룡리곰솔 앞으로 이어진다.
양배추밭 사이 시멘트농로를 따라 석룡저수지 옆을 거쳐 석룡리곰솔나무 앞으로 진행한다.
오른쪽에 담양 전씨 삼강비와 효부 진주 강씨 기행비, 그 옆에 쉼터정자, 그 뒤에 감정마을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감정마을의 입향조는 담양 전씨 야은공이라고 한다.
곰솔은 흔히 해송으로 불린다. 한반도 중부 이남의 바닷가의 해풍의 영향이 미치는 지역에서 많이 발견된다. 이곳의 곰솔은 전설에 따르면 마을 주민 한 사람이 쟁기용으로 쓰기 위해 나무 가지를 베었다가 음부에 종기가 나서 3년간 고생하다 죽었다고 한다. 그 뒤에도 마을에서는 많은 전염병이 자주 돌았는데 주민들이 나무에 정성을 다하여 제를 모시자 마을이 편안해졌다고 한다. 이후에 이 나무는 神木으로 정해져 해마다 음력 2월 1일에 당산제를 지내오고 있다. 이 곰솔의 나이는 35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1m, 둘레가 31m이다.
무안에서 서방 칠십리 해제를 이어온 용맥이 어정거려오다가 봉대산이 우뚝서고 그 서쪽으로 뻗어난 등걸산은 산진수회하고 그 산의 기슭 아래 형성된 우리 동네 감정이라. 1488년 담양 전씨 야은공 후손이 이주세거하고 次姓은 파평 윤씨, 인동 장씨, 밀양 박씨, 장수 황씨, 김해 김씨 등이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삶의 터전에서 문화를 발전해 왔다. 1763년 원갑사에서 노승(老僧)님이 이곳을 지나다가 샘물 맛을 보고 마을 이름을 감정(甘井)이라 수머슴에게 청하니 이 말을 따랐다고 한다. 마을 입구 수령 삼백오십년 노송은 당산영감으로 도보호수로 받들고 있다. 이곳 명지에다 동민의 염원인 마을회관을 건립하고자 마을민들이 합모추진하고 특히 서삼석 무안군수임의 탁월한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아 감정마을회관을 건립하고 삼가 기념비를 세우노라.
2006년 9월 28일 수비(竪碑)
정면 중앙의 산 앞쪽에 자리한 송전마을을 거쳐 언덕을 넘어 석룡리 들녘을 가로질러 석룡리 곰솔나무 앞으로 이어왔다.
"감정은 석룡3리에 속한 마을로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나 1912년 1917년의 자료에도 나오지 않았던 마을이다. 감정이란 지명이 늦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정 마을에 속해 있는 외남리는 호구총수에서부터 나온다. 원래 감정 마을의 이름은 뒷산인 등걸산의 모습이 용꼬리를 닮았다 해서 용 끝에 (주민들은 요꽃때라고 한다)였다. 후에 한자로 고치면서 용미동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이 용미동이 감정으로 바뀐 것은 원갑사의 노승이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 앞에 있는 샘물을 마신 후 물맛이 좋다는 말에 마을 이름을 甘井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은 감정 용끝에 붉은고지(황토밭이라 해서 부르는 말. 예전에 초분골이었음), 외남리 등 네 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처음 전씨가 정착한 곳은 감정저수지 위에 자리잡은 텃골 또는 구렁목이라 부르는 외남리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 담양 전씨들만 100여호가 살았었는데 전염병이 돌면서 마을을 비우고 맞은편인 용 끝에로 옮겨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간척으로 민대들이 조성되자 지금의 감정 마을에 내려와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 무안문화원 지명유래
석산하우스 앞 동학길을 따라 석산마을회관으로 진행한다. 석산하우스 표석이 예쁘다.
"석산은 석룡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아시래, 석산골, 방정, 텃골, 연화동 등 5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마을 이름의 유래는 마을 입구뿐 아니라 마을의 뒷산에도 모두 돌로 이루어져 있어 돌뫼 즉 석산(石山)이라 했다. 처음에 아시래에서 조씨들에 의해 시작된 마을이 점차 석산동으로 옮겨와 큰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의 주산은 왕제산(포홈 또는 포소식)으로 왕이 제사를 지낸 산으로도 알고 있었다. 해제면에서는 꽤 높은 산인데 어찌된 일인지 무안군 지도에는 이 산 이름이 표기되어 있지 않아 왕을 칭하는 이름 때문에 일부러 빼지 않았는가 하고 주민들은 생각하고 있다. 또한 주민들은 왕제산 정상에 새벽에 올라가면 중국의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주변 고을의 어부들은 이 산을 신성시 했다. 칠산바다로 고기잡이 나가는 대부분의 어선들은 왕제산 아래에서 풍어와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기 때문이다. 이 산에는 솥건바위(솥을 걸 수 있는 바위)와 그 아래 마당 바위가 있다."
- 무안문화원 지명유래
바로 앞에 석산마을회관이 보인다.
마을회관 입구 왼쪽에 돌뫼동 찬가가 새겨진 '돌뫼동(石山洞)碑'가 세워져 있다.
황토빛 구릉/ 바다로 흐르다/ 왕제산 기슭에/ 잠룡처럼 누워/ 길게 처마를 맞댄/ 돌뫼(石山) 되었네.// 입향조 창녕 조씨 민대들 만들고/ 해주 최, 장수 황, 전주 이, 김해 김/ 동래 정, 밀양 박, 경주 배, 광산 노/ 손 모아 언(堰)둑 막으니/ 살찐 벌 아시레 염전/ 대대손손 자식 키웠네.// 수로 요충 임치진성/ 천년고찰 원갑사 가슴에 품고/문장은 비단 되며/ 덕행은 인물 된다는/ 해동공자 최충 가르침 따라/ 갑오년 동학 삼의사/ 부정과 외세에 피로 맞서니/ 역사의 작은 부침도/ 여기 돌뫼동에 있었네.// 이곳. 작은 벌/ 너와 내가 태를 묻고/ 형제자매 나고자라/석산동은/ 언젠가/ 우리 모두/ 돌아올 고향이라네./ 세세익흥창할 터전이라네.
비석의 앞면이 동학농민혁명 때 동학군들이 훈련을 하였던 연병장인 '민대들'을 향하고 있다. 바로 앞 세 개의 비석 중 중앙의 비석이 후손들에 의해 1973년에 세워진 해주 최씨 삼의사 실적비이다. 뒤쪽에서 살피고 앞쪽으로 간다.
삼의사비는 2020년 유족들의 노력과 무안군의 지원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삼의사비는 석산동의 주산 왕제산(王帝山)을 배경으로 하여 민대들을 향하고 있다. 이 석산마을은 해주 최씨들이 집성촌인 듯. 갑오농민전쟁 때 해주 최씨 장현, 선현, 기현 삼의사와 배상옥 장군이 동학군지도자가 되어 동학농민군을 '민대들'에서 훈련시켜 임치진의 해로를 통해 농민전쟁에 참여했다고 한다. 장현의 친동생이 선현, 장현의 사촌동생이 기현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아침을 먹으려고 준비하는데 앞집의 할머니께서 나오셔서, 날씨가 춥다고 집 옆 비닐하우스로 안내하였다. 비닐하우스에서 참깻단을 깔고 앉아 아침을 먹었다. 할머니는 김치와 커피까지 제공해 주셨다. 거듭 감사드린다.
꽃다운 향기의 샘 정자, 그 안에 '천객만래(千客萬來)' 현판이 붙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이곳에서 간척농지 '민대들'을 바라보며 농민전쟁에 참여한 동학군들의 훈련 모습과 천지개벽을 외친 그들의 이상을 생각해 보라는 뜻일까?
앞에 석산마을회관과 삼의사비가 있다. 민대들 너머 일출봉 뒤로 태양이 솟았다.
간척농지 민대들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서해랑길은 석산마을을 오른쪽으로 돌아나간다. 왼쪽 뒤에 솟은 산은 해제면 산길리 강산(糠山)이며 30코스에서 탐방한다. 정면 맨 뒤쪽은 신안군 지도읍 지역이다.
서해랑길은 석산마을 앞 동학길을 따라가다가 중앙 뒤 정자가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돌아나간다.
이곳에서 35분 동안 왼쪽 비닐하우스에서 아침을 먹었다. 나무 아래 방정각과 그 오른쪽 뒤에 삼의사비와 석산마을회관이 보인다. 맞은편 봉대산 자락에 석룡리 용흥마을이 보인다.
왼쪽 뒤 쉼터정자와 나무가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돌아나간다.
왼쪽 왕제산 자락에 자리한 석산마을을 왼쪽으로 돌아나와 쉼터정자 언덕에서 뒤돌아본다. 동학길을 따라와 석산마을회관과 삼의사비를 거쳐 중앙의 방정각 뒤 비닐하우스에서 아침을 먹었다. 앞의 들은 간척지 민대들이다. 맨 뒤에 백학산을 가늠한다.
정면 맞은편 봉대산 자락에 자리한 용흥마을, 왼쪽 왕제산 자락에 자리한 석산마을, 그 사이에 민대들이 펼쳐져 있다. 왼쪽 맨 뒤의 산봉은 백학산일 것이라 가늠한다.
"용흥은 석룡2리에 속한 마을로 용흥, 신기마을로 이루어졌다. 예전에는 采畊里(채경리, 챙골), 舂洞(용동, 방아골), 新基(새터) 들로 불렸다. 또한 천호 터라고도 불렸다. 천호 터는 집들이 천호가 들어설만한 곳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조선시대 수군 벼슬 중 만호 밑에 천호라는 벼슬이 있는데 그 벼슬아치가 살았다는 의미도 있다. 문헌으로 이 마을의 역사를 보면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이후 1912년엔 해제면 용흥동, 1917년엔 해제면 석룡리 용흥으로 나온다. 지금 부르고 있는 용흥은 용흥동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용동이라 부르다 용흥이라 부르는 것이다. 용흥이란 지명은 '용이 흥한다'는 유래를 갖고 있는데, 1968년도에 마을 앞에 저수지가 조성되면서 용이 물을 만나 비상할 수 있는 형국이라 주민들은 앞으로 마을이 번창하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 무안문화원 지명유래
민대들 맞은편 봉대산 자락에 석룡리 용흥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최고봉을 장군봉이라 이르는 것 같다.
해주 최씨 최충의 20세 송포 최영해(1655~1714)를 봉향하는 사당 '애송재(愛松齋)'비 뒷면이다.
해주 최씨 문헌공 해동공자 최충의 후손으로, 17세 字는 계만공(1532~1624) 예조정량, 18세 자는 유반공 훈련봉사, 19세 자는 대명공 이조판사의 子인 20세 영해공(1655~1714) 호는 송포 가선동추께서 조선 왕조 효종 때 강호의 뜻을 두고 이곳 왕제산 기슭에 터를 잡았고 孫이 번창하여 선친들의 뜻을 모아 선조의 은덕을 기르고자 후대를 생각하여 장군봉이 마주한 이곳에 조상의 혼이 깃들어 있는 애송재란 이름으로 갑자 1984년 여름부터 壇을 쌓고 을축 1985년 봄에 봉향하게 되었다. 애송재에 힘써 주신 모든 형제자매님들께 머리 숙여 그동안의 노고와 선조 섬김에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 자손만대 번영을 위하여 이 비를 여기에 건립함.
2006년 8월 해주 최씨 승지공파 25세 종국 후손 석산문중인 일동
동학길을 따라 석룡리에서 임수리로 넘어가 지방도 805호선 봉대로와 만난다. 오른쪽으로 염전이 펼쳐지고, 오른쪽 뒤의 산은 해제면 산길리 강산(糠山)으로 30코스 탐방길에서 통과한다.
동학길을 따라서 석룡리에서 임수리로 넘어간다. 앞쪽 구릉에 있는 마을이 해제면 임수리 원머리마을이다.
드넓은 간척농지가 펼쳐져 있다. 오른쪽에 아시래염전, 왼쪽 뒤는 해룡염전인 듯. 오른쪽 뒤는 신안군 지도읍이다.
동학길을 따라서 임수리로 넘어왔다. 이곳이 임수리 원머리인 듯. 왼쪽 비닐하우스는 약용식물을 재배하는 시설물인 듯.
지방도 805호선 봉대로의 석산마을 입구에 '동학의 땅 석룡1리' 석산마을 표석과 서해랑길 이정목이 설치되어 있다
왼쪽 동학길을 따라와서 봉대로와 만났다. 왼쪽 동학길을 따라가다가 해안으로 나가면 아시래염전에 이른다.
지방도 805호선 봉대로를 따라가다가 무안해성교회를 바라보며 왼쪽 수포길로 진입한다.
봉대로에서 봉대로와 헤어져 왼쪽 해제면 임수리 수포길로 진입한다. 서해랑길은 수포길을 빙 돌아서 봉대로로 다시 나온다.
"임수리(臨水里)는 해제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3km 가량 떨어진 지점에 있다. 임치마을 앞으로 근래에 조성된 태원간척지가 있으며 서해바다 건너 맞은편에는 신안군 지도읍이 있다. 또한 북쪽으로는 석룡리와 연결되는 곳에 동학군들이 훈련장으로 사용했던 민대들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임치 ,수포, 석포 등 3개의 마을로 이루어졌으나 현재는 임치와 수포, 두 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임수리라는 里名도 임치와 수포에서 한글자씩 따다 만든 것이다.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살펴보면 1789년의 호구총 수에는 함평현 해제면 임치리로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해제면 석포리, 임치동으로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 석포리, 수포동, 임치동으로 표기되었다. 1987년의 자료에 는 현재처럼 해제면 임수리 임치와 수포로 나온다."
-무안문화원 지명유래
봉대로를 따라오다가 수포길로 진입했다. 왼쪽 뒤에 보이는 산은 신안군 지도읍, 중앙 전봇대 맨 뒤쪽은 아시래염전이다. 앞 중앙에서 오른쪽에 있는 곳이 임수리 원머리 지역으로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왔으며 원머리포구가 있었다고 한다.
수포길 왼쪽 언덕에 밀양 박씨 세장산이 있다.
수포길을 따라가다가 봉대로로 나간다.
수포길에서 봉대로의 수포 버스정류소 앞으로 나와 앞쪽에 보이는 수포마을회관으로 향한다.
"수포는 임수2리에 속하는 마을로 물이 잘 나오는 포구라는 유래를 지니고 있다. 이 마을에 어느 성씨가 먼저 들어왔는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담양 전씨가 들어왔다고 하나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경주 정씨가 먼저 왔다고 한다. 이 마을은 수포와 석포, 원머리를 포함하고 있다. 돌캐(개)라고도 부르는 석포는 마을 앞에 포구가 있었는데 포구 주변에 돌과 바위가 많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돌이 모이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또한 백제시대 봉대산성을 축조하는 데 사용했던 돌과 석포의 돌이 재질이나 빛깔이 같아 당시 이곳에서 돌을 채취하여 성을 축조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마을 뒷산을 금광산이라 하는데 금을 캤던 산이다. 해제면에서는 광산개발이 활발하였는데 당시 제일 큰 광산업자가 이 마을에서 살았다. 한때는 마을 앞 농지에서도 土金을 채취하기도 했다. 칠산 바다를 향해 뻗어 나온 원머리는 민대들의 제방 첫머리에 해당된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마당바위가 있다. 마당바위는 주민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하였는데 당시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바위였다. 원머리는 일제강점기 때 면 행정을 보았던 사무실이 있었던 곳이고 특히 목화의 저장 창고가 있어 해제에서 재배되었던 목화를 목포로 반출하는 기지가 되기도 하였다. 임치포구가 여객을 실어 나르는 포구였다면 이곳은 물류를 실어 나르는 포구였다. 이러한 이유로 원머리는 일제강점기 때 해제에서 가장 큰 포구이기도 하였다." - 무안문화원 지명유래
수포경로당 오른쪽에 서해랑길 무안 30·31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거리 13.1km, 소요시간 4시간 30분, 난도 보통으로 적혀 있다. 경모재와 학산사는 코스에서 벗어나 있다.
수포길에서 봉대로로 나와 수포경로당 오른쪽 서해랑길 안내도 앞에서 서해랑길 31코스 역방향 탐방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