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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0:1~4(203) 기억되는 아름다운 선행 2021. 10. 24.
클라이브 웨어링(Clive Wearing )은 영국의 촉망받는 음악가였습니다. 그런데 1985년, 헤르페스(herpes) 뇌염에 걸립니다. 일반적으로 피부 포진을 일으키는 헤르페스는 완치가 되지 않을 뿐 심각한 질병은 아닙니다. 그런데 뇌에 감염될 경우에는 신경계에 큰 손상을 일으키면서 매우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게 됩니다.
클라이브는 뇌염에 걸려 2주간을 의식불명 상태에 있다가 다시 의식을 찾고 깨어납니다. 그런데 깨어나고 나서가 더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뇌에 후유증이 생겨 장,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맙니다. 자익 저장을 시키는 뇌의 기능이 완전히 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오직 7초 정도의 시간 안에서 일어난 것만 기억하고, 그 시간도 넘어가면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가 기억하는 단 두 가지가 있습니다. 1)음악입니다. 그는 여전히 피아노를 칠 수 있습니다. 곡이 끝나면 자신이 무엇을 연주했는지 잊어버리지만, 연주할 때의 그는 예전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은 기억은 하지 못하여도 손에 익은 본능으로 연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아내, 데보라입니다. 클라이브는 아내와 결혼식 한 것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자신이 아내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물을 따르러 주방에 갔다 오기만 해도, 몇 년 만에 만나는 것처럼 반가워하며 ‘사랑 한다’고 고백합니다.
진짜로 일어난 일이 아니고 거짓말 같다고 생각하시지요? 그런데 모든 것이 사실입니다. 영국의 BBC 방송국에서도 이것을 보도하였고, 대한민국의 KBS 2TV ‘스펀지’라는 방송에서도 이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클라이브는 항상 아내에 대한 사랑이 기억을 본능적으로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비록 7초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사랑의 표현이지만, 사랑하는 남편에게 항상 사랑스러운 존재로 기억되고 각인된다는 것은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방송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누군가에게 내가 아름답고 소중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특히 나에게 가까운 사람에게 내가 소중한 존재로 기억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소중하고 귀한 존재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출석하는데도 가장 불행한 사람은, 예수님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모른다고 할 때입니다.
교회에 출석도 하고, 본인이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였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나를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예수님이 내가 행한 여러 행동들을 기억하지 못할까요? 이것이 실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이 사실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 7:22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는 놀라운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불신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알고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두고 ‘전혀 알지 못한다’는 말씀을 합니다.
23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정말로 충격적인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도무지 알지 못하니(I never knew you)’, ‘나는 너를 절대로 알지 못한다’는 매우 강한 부정의 말입니다. 내가 너를 절대 알지 못하니 너는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면, ‘내 앞에서 사라지라’는 말입니다. 요즘 아이들 말로 하면 ‘내 눈 앞에서 꺼져라’는 무정한 말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내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기억되느냐?’ 이것도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내가 필요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소중한 사람으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절대 놓쳐서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느냐?’ 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소중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하나님이 나를 올바른 믿음을 가지며 신앙생활을 하는 자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0장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 중심으로 전파되던 복음이 본격적으로 이방인에게 전달되는 대전환을 이룬 사건이 기록되었습니다.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는 이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 바로 로마사람 백부장 고넬료가 있습니다.
가이샤라는 지중해 연안 도시로 로마 총독의 주둔지입니다. 그리고 당시 천명에 달하는 로마군대가 주둔하였는데, 그중에 고넬료는 100명의 군사를 지휘하는 백부장이었습니다. 고넬료와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게 됨으로 가정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가이사랴에 세워진 이 고넬료 가정교회는 ‘신약 역사상 이방인 최초의 교회’로 세워진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기록이 세워지게 된 것일까요> 바로 그 중심에는 고넬료가 있습니다.
특히 4절에서 하나님은 고넬료의 의로운 행동을 두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고넬료가 행하였던 기도와 선한 구제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기억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의 ‘기억하신바’라는 단어를 유심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단순하게 고넬료가 행하였던 기도와 구제를 기억하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원어(므네모쉬논)인데, 이 뜻은 ‘기념이 되는 제물’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자가 드리는 제물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의로운 믿음을 가진 성도가 하나님에게 헌신하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제물을 드리는 모습과도 같은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의 선한 모습을 잊지 않고 기억하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의 믿음과 선한 행동을 모두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말은 잊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은혜와 사랑을 다시 베풀어 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다시금 은혜를 내려 주실 수 있는 믿음의 선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고넬료의 어떠한 믿음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었을까요?
1.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인정을 받았습니다.
2절,“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여기의 ‘경외’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성경에 매우 많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경외(敬畏)’의 사전적 의미는 “공경하면서도 두려워함”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도 경외(God-fearing)이라 표현합니다.
고넬료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왜 올바른 믿음으로 인정받는 것인가요?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이 단순한 행동 하나가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서 하나님만이 만유의 주재라는 사실도 드러내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모습입니다. 그들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우습게 대하고 조롱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에 출석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분들 중에서 ‘하나님을 우습게 알고 두려워하지 않는 분’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를 양산합니다.
고넬료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진 것은 외식적이거나 가식적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마음과 행동 모두에서 신실하게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매사에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경건’은 다른 사람이 보는 데서 조심하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함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머물 때에는 경건한 모습이나 교회를 벗어나면 경건함이 사라지는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일치된 행동을 합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퇴임 한 이후에도 가장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분 중에 으뜸이 바로 지미 카터 대통령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땅콩 농장 카터 집사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분입니다. 카터대통령에 대해 얽혀 있는 수많은 일화가 있지만 그 중에 한가지입니다.
1979,6,30일 미국의 카터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첫 공식 방문을 합니다. 카터 대통령이 한국에 방문한 시간 중에 주일이 있어서 여의도 침례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광고 시간에 담임목사님이 카터 대통령을 성도들에게 소개합니다. “우리 교회에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미국 남부 침례교회 카터 집사 부부입니다. 인사하시겠습니다.”
카터 대통령이 나와 인사를 합니다. “진심으로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미국 대통령으로 소개하지 않고 남부침례교회 집사로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통령직은 국민이 투표해서 세운 직분이지만, 집사 직분은 하나님이 주신 직책이므로 제게 더욱 귀합니다.”
카터 대통령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바쁜 스케줄을 뒤로 하고 교회를 찾아와 예배드리는 모습도 감동이었지만, 대통령직도 중요하지만 집사의 직분은 더 귀하게 여긴다는 그의 말이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은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하여’라는 원칙을 따라서 믿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은 늘 변함없이 올바르게 드러나야만 인정을 받습니다.
2. 기도와 구제의 모든 모습을 하나님이 기억합니다.
4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2절에 보면, 고넬료가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은 두 가지 모습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 두 가지 모습은 1)기도, 2)구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기도에 대한 부분을 살펴 보도록 합시다. 하나님은 고넬료의 선한 행동을 칭찬하면서 먼저 ‘기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설교나, 기도에 대한 강조는 해도 해도 지나침이 없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고넬료가 하나님에게 기도함으로 인정을 받은 것처럼, 성도 역시 기도함으로 하나님에게 인정함을 받아야 합니다. 특히 고넬료가 하나님에게 드린 기도의 원어(데오메네스)의 의미를 살펴보면,‘간청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고넬료가 그냥 하나님에게 ‘요청하였다’라는 말을 사용해도 될 터인데, 왜 굳이 ‘간청하다’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그만큼 고넬료는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에 몰입하였고,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를 매우 지극정성으로 드렸다는 말입니다.
‘간청(懇請)’이 무슨 뜻이에요? 그 뜻은 ‘간절히 청하다’는 말입니다. 어떨 때에 간절히 청하는 모습일까요? 매우 중대한 일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 간절히 청합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에 사람들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간절히 청합니다. 간절히 청하는 간청에는 대충대충, 적당히 애둘러 넘어가는 모습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도들 역시 하나님에게 간정히 간청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는 기도가 될 수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는 기도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덕민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드리는 모든 기도가 하나님에게 간청하여 드리는 기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칭찬을 듣고 응답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시인이자 작가이며 예술가로서 오늘날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1883~1931 )은‘인간 예수’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갔던 구레네 시몬에게 ‘너는 가서 다시 십자가를 지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사람들이 질문합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 구레네 시몬은 ‘나는 얼마든지 십자가를 다시 지겠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놀란 사람들이 ‘어찌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또 다시 질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더니, 구레네 시몬은 ‘십자가를 지고 힘든 고통을 못 이겨 쓰러지려는 순간, 뒤에 계신 예수께서 오른손으로 나의 어깨를 만져주셨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의 손이 닿는 순간부터 십자가가 더 이상 무겁지도 고통스럽지도 않게 느껴졌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구레네 시몬은 자신의 어깨위에 올려져 있는 하나님의 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쉽게 지고 가도록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하는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위로와 은혜입니다. 내가 힘들어하고 어려워질 때에 하나님에게 간청의 기도만 하면, 내 어깨 위에 올려져 있는 하나님의 손이 나를 위로하여 주시고 은혜로 이끌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고넬료는 예수님의 복음을 알기 전에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긍휼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믿음의 삶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방 로마 사람이지만, 하나님에게 기도할 줄을 알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고넬료가 칭찬받은 두 번째는 ‘구제’입니다. 구제(救濟)는 ‘재해를 입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 준다’는 말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베푸는 것이 구제요, 동정할 값어치 조차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이 구제입니다. 그래서 ‘구제(엘레에모쉬나스’의 원 뜻이‘자비, 동정심, 긍휼’이라는 뜻입니다.
불쌍한 자에게 사랑을 베푸는 구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나 구제는 마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부분이 뒤따라야 하는 부분이기에 더욱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만으로 사랑할 수 있지만, 온전한 구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꼭 물질적인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구제를 위해서 성도는 노력해야만 합니다. 내 돈을 쓰고, 내 시간을 사용해서라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연약한 자들을 보살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하고 기억하시는 바가 됩니다. 고넬료의 모습에서 기도와 구제의 모습을 하나님이 잊지 않고 기억하였다는 말을 가슴에 새기도록 합시다.
탈무드 이야기입입니다. 두 사람의 유대인이 함께 길을 가다가 구걸하는 소경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한 사람이 돈을 주면서 동행하는 사람에게 “불쌍한 소경이니 줄 수 있는 만큼 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이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립니다. 돈이 아까워 자신의 돈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아 구제를 거절한 것입니다.
두 사람은 조금 더 가다가 산마루턱에 앉아서 잠시 쉬는 중, 낯선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 사람은 두 사람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 봅니다. 이에 두 사람은 “이웃 도시로 장사하기 위하여 같이 가는 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때 낯선 사람이 조금 전에 구제를 하지 않았고 인색하였던 그 사람을 꼭 찍어서 “당신은 장사하러 이웃 도시에 갈 수 없다. 왜냐하면 이웃 도시에 돈 벌러 가는 당신의 계획은 취소되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난데없이 등장한 사람이 자신더러 돈을 버는 장사계획이 다 취소되었다고 말하자, 그 사람은 반발하면서 ‘도대체 당신이 누구길래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라고 따져 묻습니다.
그러자 그 낯선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보낸 천사로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혼을 불러오라고 명령하셨소’구제하지 않은 사람이 벌벌 떨면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만, 천사는 물러서지 않고 그 사람의 영혼을 바로 데려가 버립니다.
천사가 데려간 그 사람은 평상시에도 구제에 매우 인색한 사람이었고, 이 사람이 그 날 만난 소경이 하나님이 허락한 마지막 구원의 자비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결국 인색함으로 모든 것을 다 날려 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고 계신 하나님입니다. 나의 선행과 나의 기도를 기억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더 노력하는 10월이 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