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 작가의 첫 산문집 '올드걸의 시집'을 읽었습니다. 평소 은유 작가의 글을 무척 애정합니다. 그래서 작가의 책은 다 찾아 읽는 편인데, 그렇게 한 작가의 책을 계속 찾아 읽다보면 작가의 생각이나 글의 패턴 소재들이 읽힐 때가 있습니다. 이 얘기를 여기서도 하는구나, 저 얘기는 다른 곳에서도 했던 이야기인데.... 그런데 은유 작가의 글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생각과 상념의 끝이 어디일까 싶을 정도로 매번 새로움을 선물해 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르포 작가라는 특별함이 그런 이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 매번 작가의 글을 읽을 때마다 그 글의 깊이와 내용에 감탄을 금하지 못합니다.
"문학에 눈 뜨는 일은 회의에 눈뜨는 일이고, 회의에 눈뜨는 일은 존재에 눈뜨는 일이었다. 시를 읽는 동안 나 역시 생각에서 생각으로 돌아눕고 곱씹고 되씹고 뒤척이기를 반복했다. 흔한 기대처럼 시는 삶을 위로하지도 치유하지도 않는다. 백석 시인이 노래했듯이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할 뿐이다." p17-18
작가는 시에서 '삶의 치유 불가능성'을 깨닫고 시를 통해 '고통과 폐허의 자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법'을, '고통과의 연결고리를 간직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결혼도 이혼도 인연을 쓰는 한 방편일 뿐이다. 플라톤의 말대로 무엇이든 그 자체 단독으로 아름답거나 추하지는 않다. 그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실천의 미이고, 그것을 추하게 만드는 것은 실천의 비열함이다." p68
그러면서 작가는 정일근의 시를 인용합니다.
'이별은 언제나 예고 없이 온다는 것을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어 잊고 산다
어리석어 내 생을 담은 한 잔 물이
잠시 흔들렸을 뿐이다
단지 그뿐이다' - 정일근의 시 <그 후> 부분
"한 움큼의 부끄러움을 삼키며 나는 배웠다. 동정이든 차별이든 그 아래 깔린 근본 생각은 다르지 않다는 걸. 어떤 대상을 자기 삶의 반경에 없는 분리된 존재로 취급하는 것(고아들이 불쌍하다), 한 존재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특정한 면만을 부각시켜 인격화하는 것(장애인은 무능하다), 자신은 결코 되지 않을 이질적 대상으로 상대를 보는 것(공부를 안하면 노숙인 된다), 하나같이 타자화하는 말들이다." p169
글귀 하나하나, 그 안에 담긴 상념 하나하나 마음에 새기고 곱씹고 되씹고 되새김질 하고 싶습니다. 계절이 바뀌는 시기, 봄의 약동함을 느끼며 은유 작가의 이 책을 통해 삶의 투명함을 체험하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P.S 2016년 출판된 은유 작가의 '싸울수록 투명해진다'는 2015년 '올드걸의 시집'이 절판된 후, 다른 출판사를 통해 첫 산문집을 개정증보해서 낸 책입니다. 이후 2020년 서해문집을 통해 '올드걸의 시집' 원본이 출판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책이 중첩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