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 37)
대구교구, 상인성당,민들레반( 조준호 도미니코)
성서백주간을 마치면서 지난 120여 주간 묵상 후 바친 자유기도를 읽어 보았다. 자유기도에는 “믿음의 부족”, “실천할 수 있는 용기”라는 단어가 가장 많았다. 이는 성서백주간을 시작할 때와 마치는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실천할 용기를 청하는 것은 실천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믿음이란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이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나의 성서백주간을 정리해 본다.
지난 2년 6개월은 올바른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내 믿음의 깊이를 확인해 보는 시간이었으며 어떻게 하면 올바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지 그 답을 찾는 시간이었다. 올바른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의 모습은 내게 좋은 일이 있을 때에만 가끔 기뻐하고 감사한다. 내게 좋은 일이라는 것도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일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일들이다. 신앙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이 나를 보고 저 사람은 그리스도 신자라서 훌륭하다고 칭찬을 할까? 이 물음에 당당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는 것이 내 믿음의 현주소이다.
왜 나는 항상 기쁘지 않고 모든 일에 감사하지 못하는가? 이러한 경지는 신앙인이 지향하는 삶의 목표일뿐이지 결국 달성하지 못하는 것인가? 죄를 짓고 괴로워하고 성사를 보는 것을 반복하면서 기쁨을 모르고 사는 것이 나의 신앙생활인가? 나는 정말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는가? 지난 2년 반 동안 이러한 질문을 여러 번 내 자신에게 해 보았다.
요한 묵시록에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묵시 3, 20) 라는 말씀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만나기 위해 항상 문을 두드리고 계시지만 내가 문을 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래 전에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 부끄럽지만 이것이 내 믿음의 수준이다.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고 계실 때, 내가 문을 연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이것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이다. 내가 성서백주간을 통하여 얻은 답은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 37) 이다.
아는 것보다 실천이 더 어렵다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더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성서 백주간을 공부하는 동안 성경 안에서 내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은 주로 실천에 관한 것이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 21), “혀와 말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1요한 3, 18),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다.” (루카 8, 21) 이처럼 성경 안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실천을 명령하시는 구절이 많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곧 하느님께 응답하는 것이고 문을 두드리는 하느님께 응답하여 문을 여는 것이다. 곧 실천이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다.
성서백주간이 내 신앙의 문제점을 해결하여 내 삶을 변화시켰다고 할 수 없다. 문제를 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천이라는 더 큰 과제를 안겨 주었다. 이 숙제를 하기 위해 또 다시 주님께 힘을 달라고 청하지 않으려 한다. 지난 시간 나는 항상 주님께 청하는 기도만 하고 들어주시기를 기다리기만 하였다.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시는 것만으로도 내게 큰 은혜를 주고 계신다. 문을 여는 것은 주님께서 하실 일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나 혼자 힘으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고자 다짐해 본다.
마지막으로 성서 백주간을 끝까지 함께한 형제자매님께 감사드린다. 성서 백주간을 처음 시작할 때에는 10여 명이었으나 약 절반이 중도에 포기하였다. 이처럼 끝까지 마친다는 것이 힘든 과정이었고, 나에게도 어려운 시기가 있었는데 이 모임에 초대해 주고 이끌어 주신 형제자매님이 계셨기에 긴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