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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2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사에 의한 해석적 의미
- 여자가 낳은 아들과 여자의 남은 자손들, 그리고 이들을 해하려는 용 -
요한계시록 12장 1-14절 / 1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2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 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4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5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6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7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10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11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12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13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지라 14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15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16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17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
1. 요한계시록 12장 2절에서의 여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요한계시록 12장 2절의 ‘여자’를 ‘마리아’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이스라엘’로 보는 신학자들도 있고, ‘교회’로 보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견해의 다른 주장으로 말미암아 ‘여자’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그래서 ‘여자’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요한계시록 12장의 해석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먼저, ‘여자’가 말해지고 있는 요한계시록 12:1-2을 보겠습니다.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태양>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세 가지 일곱 재앙에 대한 환상 중에서 두 번째 일곱 재앙에 해당하는 일곱 나팔 재앙의 마지막 일곱째 나팔이 불리고 나서 일곱 대접 재앙이 전개되는 사이에 12장에서 14장까지의 또 다른 환상이 주어지는데, 그 첫 번째가 여자가 낳은 아들과 용에 대한 것이다. 요한은 하늘에 나타난 큰 이적을 보았다. 여기서의 이적은 장차 일어날 일을 이해하거나 통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표지(pointer)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한글번역성경들은‘이적’외에도‘표적’,‘표징’,‘상징한 이상한 일’,‘신기한 광경’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본 이 광경은 한 여자가 해를 옷 입듯이 하고 있는 모습이어서 밝기가 해처럼 빛났으며, 달을 발로 딛고 서 있는데, 머리에는 열 두 개의 별이 달린 면류관을 쓰고 있었기에 전체적인 모습은 해와 달과 별의 빛의 영광에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아이를 배고 있는 중이었으며, 해산할 날이 임박하여 산통으로 몹시 고통스러워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요한이 본 하늘에 나타난 이적의 내용은 이것에서 시작하여 전개되는데, 이것은 상징성을 띤 것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나타내 주시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여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고 있는‘여자’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를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이야기가 말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 ‘여자’는 예수의 어머니‘마리아’라고 보는 견해가 있어 왔습니다. (2) 그리고 ‘여자’는 ‘이스라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3) 그리고 또 하나는 ‘여자’는 ‘교회’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여자’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고 있기에, ‘여자’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해석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1) 이중에서 ‘여자’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로 보는 주장에 있는 사람들은 고대 교부들과 중세 시대의 교회입니다. 이렇게 ‘여자’를 마리아라고 보았던 것은 현대의 카톨릭교회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받아들여지고 있긴 합니다만, 오늘날에서는 예전에 비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서 인정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즉, 카톨릭교회도 ‘여자’를 마리아라고 말하는 것에 고집하지 않습니다.
(2) 고대 교부들과 중세 시대의 교회에서 ‘여자’를 ‘마리아’라고 보아 왔었으나, 이러한 견해 이후에 신학자들 중에서는 ‘여자’를 이스라엘로 보는 견해가 있어왔습니다.
a) 먼저는 이스라엘로 보는 견해인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로 봅니다. 그런데 ‘여자’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로 보면서도 이를 내면적 이스라엘로서의 이스라엘이 아닌 표면적 이스라엘로서의 이스라엘, 그러니까 구약성경에서의 이스라엘, 즉 구약의 선민 이스라엘로 봅니다. 이러한 견해는 내면적 이스라엘인 참 이스라엘로 이루어지는 교회와는 무관한 이스라엘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b) 그런가 하면 ‘여자’를 이스라엘로 보되 그 이스라엘을 19장 7-8절, 21장 9-10절에 나오는 신부, 곧 하늘의 예루살렘과 동일시되는 이스라엘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3) 반면에 개혁교회에서의 신학자는 ‘여자’를 ‘교회’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처럼 여자를 교회라고 보는 것에는 ‘기독교의 교회’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공동체로서의 교회’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a) 이중에서 ‘여자’를 ‘기독교의 교회’로 보게 되면 무리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교회는 사도들이 섬기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의해서 세워지는데, 여기에는 이 복음에 따른 참된 교회도 있는가 하면 이 복음을 이용한 거짓된 교회도 함께 존재하는 까닭입니다. 교회의 역사에서는 이러한 두 종류의 교회가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 역사 속에서의 기독교의 교회 그 자체를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b) 그러므로 ‘여자’를 ‘기독교의 교회’로서가 아닌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로 봅니다. 이에 대해서도 ‘구약의 교회’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교회를 통해서 메시야이신 여자의 아들이 탄생하였다고 봅니다. 그런가 하면, 신구약을 총망라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공동체인 ‘신구약 모든 시대의 교회’로 보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교회로부터 태어났다고 보는 것이 가능한데, 구약의 백성과 신약의 백성은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아기를 낳은 여자를 단지 구약의 교회로만 보기 보다는 교회 전체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보는 것에서 입니다.
이 중에서 어느 것이 우리가 따를 수 있는 견해일런지요. 요한계시록에서의 이 ‘여자’가 누구인지는 이해하기 어렵고 그래서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요. 요한계시록이 누구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 누구에게 말해지고 있는가에 ‘여자’가 상징하고 있는 상징성에 대한 해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교회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으로 말미암아서 장차 교회에 하실 일을 예언적인 계시로 주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중심 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있는 곳 그 어디에서든지 항상 함께 하고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이때 이 교회는 말이죠.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 14:4-5) 라고 말씀되고 있는 자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인데,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과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은 동일한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신구약에서의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지칭하고 있는 ‘교회’라고 봅니다. 따라서 구약에서만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며 또한 신약에서의 하나님의 백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신구약 교회 전체로 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교회가 요한계시록 12장 2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여자’에 대해 가져온 견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여자로 상징되는 교회가 아이(아들,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낳았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해석의 어려움을 가지면서도, 이러한 견해에 대해 동의하며, 따라서 인정하여 이러한 견해를 갖습니다.
하지만 필자는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가 이해를 하는 관점에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만일에 ‘여자’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난 자’인 ’하나님의 백성‘이요 ’교회’라고 한다면, 요한계시록 12장에서 보게 되는 문맥의 흐름과 맞지가 않습니다. 더욱이 말이죠. 여자가 낳은 아들에 대한 이해를 개혁교회는 통상 ‘예수 그리스도’라는 견해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구약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낳았다고 할지라도 그 교회는 신구약 전체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인 하나님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낳았다는 이상한 논리를 주장하는 것이 되게 됩니다.1) 하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되고 있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하는 근원과 기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이 본 ‘여자’는 그 교회가 있게 하는 ‘아들’을 낳게 되는 것에서 등장하며(계 12:1-5), 이 여자에 의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의 증언을 가지고 있는 자들 -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신앙고백 하는 예수께 속한 자들 - 인 ‘여자의 남은 자손들’이 있게 됩니다(계 12:17). 그리고 이 ‘여자의 남은 자손들’은 용이 ‘여자’가 낳는 즉시 삼키려고 한 ‘여자’가 낳은 아들(계 12:4-5)에 의해서 존재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자’ - ‘여자가 낳은 아들’ - ‘여자의 남은 자손들’은 신구약을 망라한 총체적인 ‘교회’라는 유기적인 연결 고리를 띠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자’와 그 여자로부터 나오는 ‘아들’과 그 아들로 말미암은 ‘여자의 남은 자손들’의 관계성에 의한 넓은 의미에서는 신구약 전체적인 하나의 ‘교회’로 다루어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의 구속사에 의한 언약적 관점에서 다루게 되면, 여기서의 ‘여자’는 교회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오게 할, 그래서 ‘여자의 후손’을 품게 될 ‘여자’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것이 창세기 3장 15절인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에서 예언되고 있는 계시인 ‘여자의 후손’을 오게 하실 것으로 세워지는 ‘여자’에 의한 구원 약속이며, 그에 따라서 창세기 3장 20절에서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되는 ‘여자’입니다. 이렇게 생명 있는 자의 어미가 되는 여자는 그 여자의 후손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뱀의 후손과 원수가 되는 여자의 후손을 낳는 것에서 존재해 왔으니,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되는 여자의 일을 행하시는 배경과 실체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권능이 이 일을 행하여 오셨습니다. 해서, 하나님의 구속사에 의한 ‘언약의 씨(후사)’를 품게 되는 ‘여자’에 의해서 ‘아들’의 잉태가 있으며, 마침내 ‘여자’가 낳은 ‘아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께 속한 자임을 신앙고백 하는 ‘여자의 남은 자손들’이 있게 됩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창세기 3장 15절에서의 ‘여자의 후손’에 의한 구원 약속에서 보게 되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2. 요한계시록 12장의 해석에 의한 의미 파악
그러면 이제 요한계시록 12장 2에서의 ‘여자’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아는 것을 통해서 요한계시록 12장에서 해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은 장차 일어날 일을 상징하는 것에서 환상으로 주신 여자와 용의 등장을 통해서 하늘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먼저는 잉태한 여자가 해산이 임박하여 진통 중에 아들을 낳는 것이었으며, 다음으로는 붉은 용이 나타나 해산하려고 하는 여자 앞에 서서는 아기를 낳는 즉시 삼키려고 하나 마침내 여자가 아들을 낳았으며, 그 아기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이끌려 올라갔고, 여자는 광야로 도망쳐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한 처소에서 1260일 - 3년 반/42달 - 동안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말이죠.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되는 ‘여자’에 의해서 오게 되는 ‘여자의 후손(씨)’인 ‘아들’, 곧 그리스도의 출생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으로 있게 되는 여자가 낳은 아들을 삼키려는 사단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패배를 안게 되는 것을(4-5절), 하늘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모습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7-9절). 그래서 미가엘이 그의 사자(천사)들을 데리고 용과 그의 사자(부하)들과 맞서 싸웠으며, 마침내 용과 그의 사자들은 그 전쟁에서 이길 수가 없어 패배하였으므로 더 이상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찾을 수가 없었으므로 쫓겨나게 되었는데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큰 용, 곧 옛 붉은 뱀은 그 부하들과 함께 땅으로 내던져졌다는 것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용은 자기가 땅에 내던져진 것을 알고는 아들을 낳은 여자를 해하기 위하여 뒤쫓아 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여자를 광야로 도망치게 하여 미리 준비한 처소에서 1260일 동안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인데(6절) - 요한계시록 20장에서는 이 기간을 천년이 지날 때까지의 기간<천년왕국>으로 표현 한다 - 이로 말미암아서 여자는 그 준비된 처소에서 용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안전히 보호를 받을 것을 말씀합니다. 이는 여자가 낳은 아들을 삼키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그 아들에 의해서 패배하여 하늘에서 땅 - 무저갱/밑 닿는 데가 없는 끝도 없이 깊은 구렁텅이로 용<옛 뱀이이라고도 불리며, 마귀라고도 하는 사단>의 활동이 제한된 결박 상태를 나타냅니다. 사단은 만국을 미혹하는 일을 할 것이나, 천년이 지나기까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미리 정하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미혹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그에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왕 노릇을 함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사단은 단 한 사람도 미혹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 외에는 사단은 그 어떤 활동도 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에 한해서 사단은 활동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에 따라서 사단은 천년이 지날 때, 곧 천년이 끝날 때 갇혀 있던 감옥인 무저갱에서 잠시 풀려나는 하나님의 결박에서 잠시 풀려 나 만국을 미혹하여 마지막 전쟁을 일으켜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모든 자들과 함께 영원히 고통당하는 불못의 지옥에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 으로 쫓겨나 그곳에 갇혀 있는 동안에 그가 마지막으로 세상을 미혹하여 마지막 전쟁을 일으킬 것인데, 그 동안에 용은 여자를 박해하는 일에 있습니다. 이는 ‘모든 산 자의 어미’로 있게 하시는 ‘여자’로 말미암아 오는 ‘여자의 후손(씨)’인 ‘아들’을 삼키려고 한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해 나가는 것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께 속한 자’임을 분명히 고백하는 신앙에 있는 ‘여자의 남은 자손들’이 있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용은 여자를 공격하기 위하여 뒤쫓지만, 이러한 용의 시도 또한 반드시 실패로 돌아가는 것은 용이 여자의 뒤에서 강물처럼 물을 토해 내어 큰 홍수를 일으키듯이 하여 물로 여자를 삼켜버리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땅이 입을 벌려 용이 토해 낸 강물을 마시어 그 여자를 구해 내는 것을 보게 해 주시는 것에서 알려주십니다. 이렇게 여자는 용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생명이 안전히 보전됨에 의해 ‘여자’가 낳은 아들에 의해서 있게 되는 ‘여자의 남은 자손들’ -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자들/교회 - 이 있게 됩니다. 용은 여자를 향한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며 더 이상의 공격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알고는 대상을 바꿉니다. 그것은 ‘여자의 남은 자손들’을 공격 목표로 삼고 ‘여자’를 향했던 공격의 화살을 쏘는 것입니다 이에 여자의 남은 자손들과 싸우려고 떠나가 바다 해변에 섰습니다(13-17절). 하지만 여자가 낳은 아들과 그 아들을 낳은 여자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듯이 여자의 남은 자손들에 대한 공격 시도 또한 반드시 실패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들에게 있을 하나님의 보호와 살핌 속에서 그 안전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 13장에서의 용이 두 짐승에게 온 세상을 미혹할 권세를 주어 활동하게 하는데 따른 활약상으로 있는 짐승의 인 맞은 자들인 육백육십육(666)이며, 이들과는 달리 두 짐승을 따르지 않고 어린양을 따름에 있는 어린양의 인 맞은 자들인 십사만 사천(144,000)이 7장에 이어서 14장에서 다시 등장하여 시온산에 우뚝 서 계신 어린양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10-12절은 그에 대한 하늘의 찬송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가 나타났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여자의 아들에 이어 여자와 여자의 남은 자손들을 해하는 공격을 계속해서 가하는 용의 시도를 헛되게 하며 어린양의 인 맞은 자들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보살피실 것에 대한 보장을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음성으로서의 찬송을 통하여 알려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찬송을 9절에서 용이 그 사자들과 함께 땅으로 내던져지는 것을 말씀하고, 13절에서 용이 이처럼 자기가 땅에 내던져진 것을 알고는 아들을 낳은 여자를 뒤쫓아 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그 사이에서 있게 해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이죠. 10-12절을 9절과 13절 사이에 하나님께서 6절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교회 - 하나님의 백성 - 를 용의 공격 속에서도 그 생명을 안전히 지켜 보살피실 것에서 안전장치를 알게 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권능과 왕국<지배>과 그리스도 권세가 나타났으니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의 형제된 하나님의 백성을 참소<고소, 무고>하던 자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던져짐으로써 예수님의 형제 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주이신 예수님과 함께 사단을 이긴 자로 있기 때문에 이들은 어린양을 위해서 죽기까지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늘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자들, 곧 하나님의 백성들 - 교회 - 는 기뻐할 것이지만, 그러나 땅에 사는 자들은 화가 있을 것을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저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사단이 그들이 사는 그 땅에 내려갔기 때문에 그들은 사단과 더불어 다 영원한 불못에 내던져질 것이니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후손(씨)’으로 예언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 죽음, 부활, 승천으로 있게 된 것에서 설명되고 있는 사단과의 싸움에서 ‘이긴 자(승리자)’로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있게 되는 ‘여자의 남은 자손들’인 하나님의 백성 된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와 살피심이 얘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가 낳는 ‘아들’을 삼키려고 한 사단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서 여자가 낳은 ‘아들’로 말미암아 그의 형제 된 ‘여자의 남은 자손들’을 삼키려고 여자의 뒤를 쫓아갈 것이지만 이 시도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사단은 최후의 패배자로 끝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살피심에 의해서 ‘여자의 남은 자손들’은 사단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삼키려고 했듯이 또한 자기들을 삼키려는 시도를 하는 앞에서 당당하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임을 고백하는 신앙에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장차 될 일이 예언되고 있는데다가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상징성으로 말미암아서 그 이해가 쉽지 않은 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씀으로 보기가 쉽습니다만, 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서 우리에게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말이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서 알기 어려우며, 알 수 없는 말씀으로 주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들어서 하나님이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주시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읽는다는 것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전후 문장의 문맥에 따라서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살핌에 있어서 마땅히 우리가 기울이고 가져야 자세일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말씀인 요한계시록을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서 그 의미를 자세히 깨달아 알아 가실 수 있기를 주께 은혜를 구하는 마음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는 오늘 이 시대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로 섬겨나가는 믿음에 있고자 하는 우리에게 그 믿음에 있어야만 하는 당위성을 더욱 견고하게 갖게 해 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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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워졌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낳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교회가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낳았다는 견해에 교회가 있어오는 것은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롬 1:3) 라고 하신 말씀과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본체로서 존재론적으로는 다윗 이전에 존재하셨으나 역사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교회가 해산하는 것과 같은 고통으로 간절히 고대했던 그 메시야였다는 이해를 갖는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의 이해는 잘못된 것이다. 다윗 이전에 선재하신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것을 구약 교회가 그리스도를 낳았다는 논리의 이해로 가져나가는 것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는 것이 다윗의 육신을 잇는 혈통의 가문을 따라 오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다윗의 혈통에 이어지고 있는 다윗 왕국에 허락된 왕권을 가지고 오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다.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 곧 구약의 교회는 이렇게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해 간절히 고대하였으나, 결코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를 낳음에 있지 않다. 오히려 구약의 교회는 그들에게 약속하시고 있는 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존재하고 있다(창 3:15,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