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집총간> 敬齋先生文集卷之一> 詩> 河演1376년(우왕 2년) ~ 1453년(단종 1년)
謫天安郡。登鄕校新樓偶吟。戊申(1428. 世宗10)
聖主右文治道明。使君興學好經營。乞言養老唐貞觀。稽古臨雍漢永平。形勢盤紆龍虎動。淵源炳煥璧圭淸。諸生克敬修精一。豐芑菁莪道自亨。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0
이 시는 '謫天安郡 登鄕校新樓偶吟'이라는 제목의 한시로, 천안군에 유배되어 향교의 새 건물에 올라가 우연히 읊은 시입니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번역:
성군께서는 문치(文治)를 중시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도가 밝고,
사또께서는 학교를 일으키고 경영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당나라 정관 연간(貞觀)의 노인들을 잘 돌보는 정책에 대해 말을 청하고,
한나라 영평 연간(永平)의 고대의 학문을 본받으려 하십니다.
지세는 굽이쳐 용과 호랑이가 움직이는 것 같고,
학문의 근원이 빛나서 옥과 같은 맑음을 드러냅니다.
학생들은 모두 경건하게 학문을 닦고 정진하여,
풍부한 곡식과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듯 학문의 길이 저절로 널리 퍼지기를 바랍니다.
이 시는 당시 지방 관리가 교육을 중시하고 학교를 잘 운영하고 있음을 찬양하며, 학문이 발전하기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연 (河演)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 · 신희(新稀). 하즙(河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하윤원(河允源)이고, 아버지는 부윤 하자종(河自宗)이며, 어머니는 정우(鄭寓)의 딸이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1396년(태조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봉상시녹사를 거쳐, 직예문춘추관수찬관(直藝文春秋館修撰官)이 되고, 이어 집의 · 동부대언 등을 역임하였다. 이 때 태종은 그가 간관(諫官)으로서 의연한 자세로 일을 말하는 것을 보고 손을 잡고 치하했다 한다.
세종이 즉위하자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조심스럽게 처사하여 신임을 받아 예조참판 ·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423년(세종 5)에는 대사헌으로서 조계종(曹溪宗) 등 불교 7종파를 선(禪) · 교(敎) 양종(兩宗), 36본산으로 통합하고, 혁파된 사원의 토지와 노비는 국가로 환수하고자 하여 채택받았다.
1425년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고 예조참판을 거쳐,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한때 천안에 유배(1427)되었다. 그러나 곧 유배에서 풀려 형조 · 병조의 참판을 거쳐 1431년에 대제학이 되고, 그 뒤 대사헌 · 형조판서 · 좌참찬 등 고위관직을 역임하였다.
1437년 의정부에 들어가서는 판이조사로서 이조의 일을 맡아 공세법(貢稅法: 연분9등, 전분6등)을 마련했으며, 1442년에는 각품의 행수법(行守法)을 제정하였다. 1445년에 좌찬성이 되어 70세로서 궤장(几杖)을 받았다. 이어 우의정 · 좌의정을 거쳐, 1449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영의정으로 있던 1451년(문종 1)에 문종이 대자암(大慈庵)을 중수하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고 치사(致仕)하였다. 의정부에 들어간 지 20여 년 간 문안에 사알(私謁)을 들이지 않았고 법을 잘 지켜 승평수문(昇平守文)의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1454년에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숙종 때 진주의 종천서원(宗川書院), 합천의 신천서원(新川書院)에 제향되었다. 편서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진양연고(晉陽聯藁)』가 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세종실록 38권, 세종 9년 12월 6일 기미 1427년 ]
진응사 이사검을 요동에서 멈추게 한 죄로 평안 감사 하연을 충청도 천안군에 정배하다
평안 감사 하연을 충청도 천안군에 定配하였다. 진응사 이사검이 길을 떠난 후에 또 해청을 잡았으므로 한꺼번에 바치려고 사검에게 길을 늦추어서 기다리라고 전지하였으나, 사검은 이미 압록강을 건넌 후였다. 하연이 이를 아뢰지도 아니하고 마음대로 역말을 띄워 사검을 좇아서 요동에 가서 멈추게 하였기 때문에 죄를 받게 된 것이다.
○配平安道監司河演于忠淸道 天安郡。 初, 進鷹使李思儉旣行, 又捕得海靑, 欲一時進獻, 傳旨于思儉, 徐行以待之, 思儉已越江, 演不啓達, 擅發驛騎, 追止思儉于遼東, 故坐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