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 17:16~34
제목 명칭은 어느 신학자의 것을 인용. 어디서든 시장이든, 광장이든 복음이 들리도록 하자는 의미임. 바울이 아테네에 갔음. 라파엘로의 16세기 그림을 보면, 기원전 인물로부터 당시의 인물을 모두 망라해서 그렸음.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도 포함. 플라톤은 하늘, 관념에 대해 관심이 있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에 관심이 많았음. 아테네학당임. 헬라문화의 산실. 디모데와 실라는 남겨두고 아테네에 먼저 도망 온 바울. 혼자서 여기저기 둘러봄. 그러면서 감탄이 아니라 격분(16절). 아테네는 많은 신, 우상을 거론하였기 때문에. 왜 격분했을까? 목사님 대학원 때 장승을 세워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누군가 도끼로 무너뜨림. 학교에서 이슈가 되었음. 어떤 때는 대웅전의 불상을 훔치고 소변을 본 사건도 있음. 바울의 격분은 어떤 것이었을까? 위의 사례들과 같은 싸구려 적대감은 아니었을 것임. 위의 사례는 복음이 아님.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 대상은 거기에도 있음. 자기의 신념이나 종교적 열광으로 그렇게 행동하지만 결코 옳지 않음. 우상이 가득한 곳에서 '너희는 나를 무어라 생각하는가?'라고 물으신 예수님은 적개심을 유발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을 나타내기를 시작하기 위해서였음. 바울에게서 우상은 격분할 필요도, 가치도 없는 존재. 고전 8:4, '우상은 아무 곳도 아니며'. 아무 것도 아닌 우상의 음식을 먹는 것은 어떤 문제도 되지 않음.(물론 믿음이 약한 자를 위해 절제하나..) 그들은 격분의 대상이 아니라 긍휼의 대상. 고전 5:10,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그렇게 하면 세상을 벗어나야 하는 것이 아니냐?'
격분의 이유는, 우상에 뒤덮혀 실종된 하나님의 진리, 복음. 자유와 기쁨. 그 현실에 격분한 것임. 한낱 바울의 격분이 무슨 의미? 이러한 접근은 세속적 관점으로 보기 때문. 신자의 조건은 승자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전하려 하는가에 달려 있음. 어차피 우리의 능력으로 하는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전하는 방식은 우상을 때려 부수는 것이 아님. 그것은 폭력과 혐오이지 않는가? 그것은 오히려 복음을 부인하는 일. 오히려 시장, 회당에서 그 상황에 적응하면서 '변론'하는 것임. 변론은 논쟁이 아니라, '대화'임. 의견을 주고 받는 것임. 다양한 사람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상대하는 데 익숙한 바울. 할례 받은 자나 받지 않은 자나.... 거기에 맞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함.
(17~20절) 에피쿠르스 철학은 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멀리 있어서 인생의 역사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생각. 그러므로 세상은 우연으로 가득참. 세상 즐거움을 취하는 것을 추구. 그렇다고 지저분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님. 스토아 철학은 신이 너무 신이 세상에 가깝게 깃들어 있음. 모든 것에. 로고스라는 것으로 이미 우리 안에 신의 질서가 존재한다. 용기/중요/정의를 따라서 살 수밖에. 서로 너무 다른 정반대의 의견. 너무 다른 두 관점과 대응해야 하는 바울. '말쟁이'라고 바울을 말하는. 여기저기서 쪼아먹는 존재. 성숙되지도 않은 견해로. '구원(남자), 부활(여자)'라고 칭하면서 여러 신을 전한다고 규정. 어떤 이는 대법원까지 끌고 가서 대중 앞에서 말하고 판단받게 만듬. 이렇게 다채롭고 열정적인 반응을 보인 이유는, 아테네는 첨단 지식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 22절(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21세기로 생각하면 런던, 파리, 뉴욕 같은 곳? 이 의미는 새로운 곳에서는 기회가 있다. 그러나 반대로 곧 폐기처분될 가능성. 신도시가 기득권자가 없으나 장기 정착자가 없어서 쌓이는 게 없는 속성이 있듯이. 아테네가 그랬음.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의 진실을 전하는데 집중. 유, 불리를 따지지 않고. 하나님은 항상 역사하고 계시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행동. 그것이 씨앗이 되어 믿음을 또 자라게 한다는 생각. 이미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변화시키고 있음. 천 사람의 변화도 한 사람의 변화부터 시작됨. 우리는 너무 결과주의에 길들여져 있는 문제점. 성경은 결과주의 역사가 아님. 결과적으로 '승리'하실 것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몫.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과정에 집중하는 것. 따라서 반대 관점으로 말하자면,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혼잡하게 말해서 결과가 좋았다면 그것은 '저주'임. 이단과 같은... 거기서 나온 사람도 아직도 지금의 복음을 의심하는 영적 허탈감.
어떤 이들은 아테네의 선교 결과가 몇 명의 회심자에 지나지 않아 실패라고 여기지만 그것은 결과주의적 관점이니 부적절. 내가 복음을 전해도 상대방에 따라 내 힘으로 변화시키지 못할 경우가 많음. 그러니 내가 했다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됨. 상대방에 맞는 말. '말을 왜 그딴 식으로 해!' 당위성과 관계 없이, 말하는 태도에 영향을 받는 사실. 그러므로 복음을 어떤 태도로 말하는가도 매우 중요. "예수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의 삶의 방식대로 복음을 전하심." 신학자, '광장의 복음.' 광장, 시장의 언어가 필요함. 듣는 사람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사람에 따라, 폐쇄적 불가지론(신이 뭐가 있어), 개방적 불가지론(신이 있다면 언젠가). 리차드 홉킨스 '만들어진 신' 엄청난 무신론자. 성공회의 수장과 대담을 하고 나서 그에게 복음뿐만 아니라 태도 등에 감동하여 불가지론자(모른다)로 변화하는 역사.
(사진 1, 광장의 복음 예시, 소망하는 것은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얻을 수 없는 방식으로 살고 있음을 지적, 십자가의 길을 제시)
몇 주 전에 구도자(교회 안 다니는 seekers)를 동탄 채플에 모시고 옴. 대화 중에, 그 분이 먼저 대전제, '모든 신이 똑같다.' 특정한 신을 섬기라고 강요하지 말라. 불편함도 싫다. 대답'얼마든지 자유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특정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을 믿겠다는 "내"생각을 믿으려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내 생각을 믿을 수 있으신가요?' 폐쇄적 불가지론은 아무 것도 신뢰할 수 없다는 자기 확신만을 확신하는 모순임. 개방적 불가지론은 자기 확신도 신뢰할 수 없다는 측면에는 가능성이 더 많은.
어떤 이는, '나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여호수와서와 같은 잔혹성 등. 팀켈러, '당신이 알고 있는 기독교는 어떤 것으로 여겨집니까?' '.......(긴 설명)' 대답, '그런 하나님이라면, 저도 못 믿겠네요. 제가 알고 있는 기독교는 이런 건데요...' 여기서의 핵심 기질, 여유. 여유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으로부터 온다. 지금 믿지 않는 그 상대도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믿음 때문에 여유가 생긴다. 박승미 집사님의 명절 복음 전파 주저함에 대한 나눔 사례 등.
22절, '아덴 사람들은 참으로 종교심이 많군요.' 칭찬과 더불어 종교심(두려움, 귀신 등의 어의적 의미가 담긴)을 의미. 히 2:14~15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종교심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임. 여러 종교적 말을 하지만, 결국에는 '사랑합니다.'로 변모되는 그 변화.
23절, 하나님, 그 신의 진실.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바울의 논지는, 여기 있는 화려한 신전들... 그런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당신들이 찾아야 할 신은 여기에 없군요. 여러분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코스모스, 그것을 주장하시는 그 분을 말하겠습니다. 그 분은 건물이 필요할까요? 음식이 필요할까요? 그 분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불어넣어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인생들의 세상을 이렇게 정교하게 지으심으로 우리가 더둠어 찾아가 그분을 알게 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하나님은 육체에 국한되지 않으므로 이러한 신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제까지는 모호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명확히 드러내셨으니 이것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응이 미지근했음. 그렇다고 실패인가? 결코 그렇지 않음. 하나님이 일하심. 육체를 신성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관념 중에, 예수의 육체의 부활을 말해서 거북했다. 단지 몇 사람만 변화가 있었겠지만,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니 그 한 명이 변화의 시발점이 될 것임. 세상은 결과주의 깡패, 거기에 길들여진 우리들. 아테네의 사역이 그 기준으로는 실망스러움. 예수님은 살아계신 때, 교회의 부흥을 본 적이 없음. 나중에 열매를 맺음. 진짜 복음을 살고자 했던 메신저를 보이기만 하면 됨. 오늘의 맡겨진 씨앗을 충실히 뿌리면 됨. 언젠가는 하나님 안에서 복된 열매를 경험하게 될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