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과(僧科) / 민순의의 조선의 스님들
국가 공권력 의한 승과(僧科) 시험으로 선교 통합 이뤄
흥천사와 흥덕사 도회소에서 승과(僧科) 시험 시행 주된 기능 맡아
선종은 전등·염송, 교종은 화엄경·십지론으로 3년마다 실시
명종 대 봉은사·봉선사로…도첩 취득한 공인승만 지원 가능
세종 6년(1424) 조정에서는 기존의 불교 종단 중
조계종·천태종·총남종을 합쳐서 선종으로,
화엄종·자은종·중신종·시흥종을 합쳐서 교종으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
동시에 서울에 있는 흥천사와 흥덕사를 각각 선종과 교종의 도회소(都會所)로 삼아
교단의 업무[僧中之事]를 처리하게 하였다.(‘세종실록’ 24권)
이는 일찍이 태종 6년(1406) 조계종과 총지종, 천태종과
소자종과 법사종(또는 천태소자종과 천태법사종),
화엄종과 도문종, 중도종과 신인종을 합하고,
여기에 자은종, 남산종, 시흥종은 단일하게 남겨 두어 전체 12종(또는 11종)을
7개 종단으로 통합했던 시책의 연장이었다.(‘태종실록’ 11권)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종단(종파)이란 불교의 교리에 대한 해석이나 주요 가치 또는
특정 신앙과 수행의 방식을 공유하는 스님(및 신도)들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공동체이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공동체를 공권력이 강제로 통합할 수가 있는 것인가.
국가의 종단 통합 시책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도회소’라는 조직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도회소란 본디 특정 목적에 따라 사람이나 물건을 모으기 위해
전국 각 도에 설치하는 임시 기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특히 지방 유생의 교육과 과거시험을 위한 기구로서
도회소를 운영하는 방안에 대한 논의가 오랫동안 이루어졌었다.
이로 보건대 흥천사와 흥덕사의 도회소 또한
승과의 시행이 주된 기능이 되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국가 공권력에 의한 선교 양종으로의 종단 통합이
곧 승과의 시험을 선종과 교종의 두 과목으로 양분하여 시행하게 함으로써 가능했으며,
어쩌면 승과의 단위 주체 설정이야말로
종단의 통합과 정리의 주요한 목적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태종 11년(1411)의 기록에
“처음에 (불교의) 각 종단에 선(選: 선발시험)을 두었다[初各宗有選]”는
내용이 나오는데(‘태종실록’ 21권),
이는 이미 종단별로 승과가 시행되고 있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태종 14년(1414)에는 “근년에 (불교의) 각 종파에서 초선(抄選)을 할 때…
많으면 70~80명에 이르고 적으면 40~50명에 내려가지 않는다”라는 언급이 있어,
당시 7개로 정리되어 있던 불교 종단에서 적게는 총 280여 명,
많게는 총 560여 명에 달하는 수의 승려가 초선 단계에서 선발되었음을 알려 준다.
이날 태종은 이 초선 입격자들에게 3년마다 한 번씩 치러지는
시년(試年)의 선시(選試)에서 시험 보게 하고,
그 중 1/3에 해당하는 인원을 최종 합격시키기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형식이 유지되었다면 세종 6년 선교 양종으로 종단통합이 시행된 이후에는
선종과 교종에서 각각 초선 때 40~80명,
시년 선시에서는 그 1/3인 13~27명 정도의 합격자가 배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승과에 대한 이러한 규정은 시간을 두고 정비되어
마침내 ‘경국대전’에 다음과 같이 등재된다.
‘선종과 교종의 양종은 3년마다 선시(選試)를 실시한다.
선종은 ‘전등’과 ‘염송’을, 교종은 ‘화엄경’과 ‘십지론’을 (시험친다).
각각 30명씩 뽑는다.’ (‘경국대전’ 예전 도승(度僧) 조)
세종 대 이후의 논의 과정에서
시년 선시의 최종 합격자를 양종 각각 30명씩으로 고정하고,
승과의 시험과목에 대해서도 공식적인 규정을 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선종의 시험과목인 ‘전등’과 ‘염송’은 각각 중국 송나라의 도원(道原)이 지은
‘경덕전등록’과 고려의 혜심(慧諶)이 지은 ‘선문염송’을 가리킨다.
전자는 과거 7불과 석가모니 이래 인도와 중국에 선법(禪法)을 전한
스님 1700여 명에 대한 인물열전이고,
후자는 선불교의 화두 1125칙에 염과 찬송을 붙인 공안집이다.
이 두 책은 전법심인(傳法心印)과 화두라는
선불교의 특징을 대변하는 저술이라 할 수 있으며,
당시 행정당국의 선종에 대한 이해가 높은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교종의 시험과목으로 선정된 ‘화엄경’과 ‘십지론’은
조선시대의 교종이 조선 초 두 차례의 종단통합을 거치며
점차 화엄종을 위주로 재편되어 갔음을 짐작케 한다.
승과시험을 주관한 곳은
양종의 도회소로 지정된 흥천사와 흥덕사였지만, 주최측은 예조였다.
성현(成俔, 1439~1504)은 ‘용재총화’에
승과시험의 구체적인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전에는 내시별감(內侍別監)이 명을 받들고 갔고, 지금은 예조 낭청(郞廳)이 간다.
그 종(宗)의 판사(判事) 장무(掌務)와 전법(傳法) 3명과
증의(證義) 10명이 함께 앉아 시취(試取)한다.’ (성현, ‘용재총화’ 9권.)
이호예병형공 육조의 낭청은 정5~6품의 품계에 해당하는 실무직 관리이다.
인용문에서 예조의 낭청이 갔던 ‘곳’이 바로 흥천사와 흥덕사일 것이다.
양종도회소인 이 두 사찰에서 시험 자체를 진행하는 이들은
판사 장무, 전법, 증의 등의 스님이었지만,
낭청은 승과의 주무 행정기관인 예조의 실무자로서 행사를 감독하기 위하여 파견되었다.
흥천사와 흥덕사의 양종도회소는
중종 11년(1516) 승과제도가 중단되었을 때 함께 사라진다.(‘중종실록’ 27권,)
그러나 명종 대에 승과를 복립하면서 광주의 봉은사(현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소재)와
양주의 봉선사(현 경기도 남양주시 소재)를
각각 선종과 교종의 본산으로 삼아 승과의 업무를 계승하게 하였다.(‘명종실록’ 10권)
승과에는 누가 지원할 수 있었을까.
두말할 것도 없이 나라에서 승려의 신분을 공인받은 스님들이었다.
이전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공인승이 되는 데에는 원칙적으로 도첩의 취득이 기본 요건이 되었다.
그렇다면 국가에서는 왜 도첩의 제도로 공인승을 선별하고
승과를 시행하여 엘리트 승려를 양성하였을까.
승과 시험의 단위 주체인 종단의 통합은 또 어떤 이유로 행하였던 것일까.
여러 번에 나누어 이에 대한 이야기를 차차 풀어보도록 하겠다.
2022년 3월 30일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