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쉔부른 궁전 내부 - 본 순서대로
① 대연회장
황제의 계단을 걸어오르니 큰 행사가 열리던 대연회장에 들어섰다. 정문에서 궁전 뒤 뜨락까지의 거리를 정 중앙에서 똑같이 나누는 등분의 방이다. 채광 때문에 창이 크고 1901년에는 전기가 들어와 백열등을 사용했다. 벽에는 촛대가 많은데 등불이 반사되도록 크리스탈 거울을 매달았고, 외국인을 영접하는 곳은 이곳은 늘 외국인에 대한 얼굴로 가꾸어 왔다.
천정에 화려한 그림들은 글이 없을 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으로, 구름에 앉은 듯한 신(神)의 모습 그림은 내가 신의 영역에 이르고 싶음을 표현한 것이다.
둥근 원형의 그림에는 하늘과 신, 인간과 지상, 그리고 신과 인간 중간 위치에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이 있다. 그 외 다양한 그림들로 대연회장은 그랜드 갤러리다.
② 소연회장
왕족의 가족 생일 잔치를 하던 곳으로 일명 '동양의 캐비넷' 이라 불리는 곳이다. 가운데는 사각으로 연회장이 있고 좌우 양쪽에는 원형과 타원형의 방이 있는데 '음모의 방' 이라 한다. 이곳 동그란 방에서 밀담을 나누다가 종을 치면 아래로 빠지도록 꾸며 놓았기에 그렇게 부른다.
들어가진 않았지만 은밀한 두 개의 원형 방에는 중국과 일본에서 가져왔다는 화려한 동양 왕조풍의 가구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참 아늑한, 오늘날의 궁전 카페다.
③ 마차 놀이방
전속 화가들이 노트해서 그린 대형 풍경화가 걸려 있다. 누가, 어디서, 어떤 모습이었는지 상세히 그림으로 기록한 것인데 엘리자베스 황후, 즉 마리아 테레지아의 어머니가 중앙에 큰 위치로 걸려 있고, 주위엔 말과 사냥을 묘사한 커다란 풍경화가 있다. 19세기에는 궁정에 있는 장군들의 식당으로 사용되었다.
④ 세레모니 홀
합스부르크 가의 높은 귀족들이 결혼식을 올렸던 방이다. 로마 제국에서 왕조시기를 거쳐 합스부르크 가 왕조 시기였던 976년부터 1246년까지, 우리나라의 고려왕조(918년부터 1392년) 같은 시대에, 합스부르크 왕조는 주변국과 정략 결혼을 해서 힘의 균형을 맞추었다. 94개 마차가 이끄는 축제의 그림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인 왕자와 이사벨라 공주의 결혼식 장면으로 얼마나 찬란한 잔치인지 보여주고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초상화와, 그 왕자 결혼식에 참석했던 예닐곱 살 적 모차르트의 아기사진도 있다. 모차르트 부모님과 함께 수많은 참석자들의 대열 속에 조맣게 모습이 보인다.
⑤ 블루 차이니즈 룸
1700년도의 중국 벽지로 장식한 방이다.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하니 놀라운 일이다. 벽지는 푸른 중국 취향의 색이 농후하고, 그림 내용은 쌀 농사 짓는 장면들이 대부분이다. 세계 유일의 중국 역사 보존 벽지로, 그때 이미 합스부르크 왕조는 중국과도 친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스트리아 역사의 마지막 왕조는 1276년부터 1918년까지의 바븐베르가 시대다. 우리나라의 조선왕조(1392년부터 1910년)와 유사하며 이때 비엔나가 형성되었다. 1916년 요제프가 사망했고 30대 초반의 카알 1세는 1918년 11월 11일에 이 방에서 마지막 황제로 왕권을 포기했다.
그리 크지 않은 방에 카알 1세의 흉상 동상이 들어앉은 소슬한 곳이다. 한마디로 비운의 방이다. 그후 오스트리아는 1918년 11월 12일에 오스트리아 공화국을 선포함으로 새로운 정치체제를 맞이하였으니 음과 양이 교차한 방이다.
⑥ 자개방
1740년부터 1780년까지 집정하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1765년에 남편이 갑자기 사망하자 15년간 과부황후로 지내면서 남편을 추모하던 방이다.
미망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주로 기거하던 방으로 나무 조각으로 만든 상과 옻칠 자개의 벽면이 화려하다. 황후의 동양적 취향이 엿보이기도 함에 정겹다.
⑦ 나폴레옹의 방
나폴레옹은 빈을 1805년과 1809년 두 차례 정복했는데 그때 사용했던 방이다. 당시 나폴레옹은 본부인 사망 후 유럽을 다 제압하고는 신성로마제국을 넘보고 있었다. 그러자 프란츠 1세 황제는 딸 루이즈를 나폴레옹에게 결혼이라는 명목으로 바쳤다.
그러나 나폴레옹 프란체스카가 낳은 아들 라이히슈타트 공작(나폴레옹 2세 ; 1811∼1832)은, 그의 아버지 나폴레옹이 실각하자 6세부터 21세까지 이 방에 갇혀 새와만 지내다 죽었다. 권력과 권력 사이에서 잘못 태어난 운명의 한 소년이 인생의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어둠의 그늘 속에서 시들어갔을 이 공간,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를 위해서라고는 병약하고 파리한 얼굴의 하얀 동상이 유리 상자 속에 보관되고 있다는 것, 차마 바라보기조차 눈물겹다.
⑧ 밀리엔 룸
쉽게 말하면 이곳 여러 개의 방 중에서 가장 돈을 많이 들여 지은 방이라서, 즉 수억원이 들었다 하여 '백만의 방' 이란 뜻으로 이름지어진 방이다. 공사비가 당시의 통화로 백만굴덴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곳 방들은 다 문화재에 들어간 방들이지만, 각각 사연도 많고 특색도 다양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감을 더해준다.
자단목, 즉 장미목으로 16세기∼17세기에 로코코 양식으로 꾸며졌는데 중후한 분위기가 감돌고 벽에 걸린 인도의 세밀화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보존된 것으로 역사를 재현하고 있다.
⑨ 고벨렝 싸롱
10년에 걸쳐 실로 짠 그림으로 꾸민 방이다. 벽면과 의자 등, 모두 사용된 천이 씨줄과 날줄을 엮어 짠 것들이라는데 믿기지 않는다. 그림으로 그렸어도 저렇게 정교하게 표현하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한땀 한땀 손으로 짜서 일구어낸 그림들이라 하니 그저 놀라움에 발이 정지된다. 그림 크기와 정교함에 유럽 왕실에서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⑩ 조피 대공비의 서재
1916년에 86세로 황제 프란츠 요셉이 사망했는데, 이 방은 그의 모친인 조피가 사용했던 방이다. 즉 부모님 서재다. '나는 공복이다' 라며 새벽 4시면 일어나 해질 때까지 움직여 일했다는 일화와 함께 아름다움이 서린 방이다. 코너에는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는데, 저 벽난로는 사실 방마다 있다고 한다. 특이한 사실은 벽난로에 지피는 불은 시녀가 뒤에서 보이지 않게 지피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옛날 사뿐사뿐 걸어다녔을, 보이지 않는 여인네의 걸음이 벽난로 사이로 기웃거리는 듯하다.
⑪ 레드 싸롱
나폴레옹의 장인인 프란체스카와 왕후의 도서관이다. 붉은 벽지로 장식되어 '붉은 방' 이라 부른다. 이 공간은 쉔브룬 궁전의 뒷정원이 잘 보이는 곳이다. 드넓은 뒷뜨락을 바라보며 학문을 닦았을 왕가의 흔적을 본다.
벽에는 합스부르크 역대 황제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⑫ 침실
침대가 중앙에 놓여 있고 좌측엔 마리아 황후가, 우측에 그의 남편인 프란츠 황제가 화사한 모습으로 있다. 일명 '애 잘 낳는 침대' 라는데 그들 사이에는 11명의 딸과 5명의 아들로 16명의 자녀를 낳았다. 어려서 사귄 남자와 결혼하여 그리 많이 낳았다 한다.
다리를 뻗고 자면 영혼이 빠져나간다 하여 침대가 아주 작다.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지붕이 달린 아담한 침대다. 이 방에서 1830년 프란츠 요제프도 태어났다.
방의 정면에는 마리아에게 소중한 여인 3명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우측에는 왕비의 언니, 가운데에는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황후, 다음에는 자녀들을 길러준 보모의 얼굴이다. 16명의 자녀를 길러준 보모는 사후에도 그 공로를 인정받아 왕가에 묻혔다고 한다. 참으로 인간적인 향기가 나는 방이다.
48세에 과부가 되어 홀로 15년간을 살다가 죽은 마리아 테레지아는 후일에 남편과 합장되었다.
이것으로 쉔브룬 궁전 내부의 방은 다 보았다. 더 많이 있지만, 우리가 본 방은 침실이 마지막 방이었다. 오스트리아는 모두 독일어로 쓴다. 궁전도 모두 독일어로 씌여졌다. 이 왕실에서 사용하던 유품은 옷과 그릇, 가구 등등을 따로이 구분하여 1918년부터 1938년까지 박물관으로 이동시켜 보관하고 있다.
1938년에 나치스가 침공하여 왕권이 무너진 1918년부터 1938년까지의 제1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합방선언한다. 나치 당원들이 밀입하여 밤새 오스트리아를 뒤엎고, 재판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처형했다. 1945년까지 히틀러가 지배하며 오스트리아에게 군수물자와 군인을 요구했다.
그 당시에 오스트리아는 2천년 철강 산업으로 철강 기술이 발달된 상태였다. 오늘날도 차량은 수입하지만, 자동차 부품과 굴삭기, 휘슬러 압력솥 등 철강산업은 세계적으로 크게 발달되어 있다.
군인 문제도 1750년대부터 마리아 테레지아가 육군사관학교를 세워 이미 군인을 길러냈다. 이런 크게 두 가지 연유로, 철강과 군인,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지배해왔다. 독일의 아우토반 고속도로를 건설하여 부흥해 갔지만, 오스트리아는 나라를 잃어 지명까지도 '오스토마크', 즉 동쪽 경계선이란 뜻으로 바뀌고 7개 마을로 행정개편되었다.
이미 80%의 도시가 파괴되었는데, 후일 2차 대전 후 연합군의 승리로 남은 것은 아이와 여자 노인 뿐이었다. 1945년부터 1955년까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연합군 4개국이 분할 소유하며 오스트리아를 신탁통치해 왔다.
1955년 10월 26일 연합군이 떠남으로 이 나라는 어떤 전쟁에도 휘말리지 않겠다고 영세중립국을 선언했다. 그리하여 오늘의 오스트리아는 외부적으로 보아도 평화가 드리워진 평온한 나라다. 빈의 거리를 오가는 시민들의 걸음에서도 여유로워 보이고, 거리 표정도 밝고 활기차다.
자주 눈에 띄는 것은 큰 개를 줄에 묶고 끌고 다니는 장면이다. 우리나라에서 보는 조그맣고 귀여운 개가 아니라 송아지만한, 얼핏 보면 사나운 야생동물 같이 소름이 돋는 무서운 개가 주인과 함께 거리를 활보한다. 나도 검은 개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오스트리아의 슬픈 역사와는 대조적인 아름다운 한 단면 앞에서 나도 미소를 지으며 사진 속에 담겨 있다.

쉔브른 궁전 앞에서.국제펜 문인들 단체 기념사진.앞줄 중앙의 빨간 티가 본인 김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