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 국권회복과 근대적 시형의 모색
하루가 일년 같고 일 년이 하루 같은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출처 <영랑시집》(2004) 첫 발표 <문학》(1934.4)
*여읜: '여의다'의 관형형. '죽어서 이별하게 된'.
김영랑 金永郎 (1903~1950)
전라남도 강진 출생. 본명은 김윤식(金允植)으로 영랑)은 아호이다. 휘문의숙(지금의 휘문고등학교)
재학 시절 1년 선배인 홍사용, 1년 후배인 정지용 등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 1920년 일본 유학 시절 박용철과 친교를 맺고 귀국 후에 그를 비롯한 몇몇과 《시문학》 동인을 결성하였다. 한국 순수시의 대표적 시인으로서 《시문학》(1930), 《문학》 (1934) 등의 문예잡지를 통해 시와 수필, 평문 등을 발표하였고, 《 영링시집》(1935)을 남겼다.
|경험 세계와 내면 서정
서정시는 시인의 서정이 시의 주제이자 내용이 되는 시의 한 갈래이다. 서정이라는 것은 본디 직관적인 느낌이나 수시로 변화하기 쉬운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막연하고 모호한 것을 시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에 빗대어 볼 만한 세상의 온갖 사상(事象)과 사물들의 이름을 가져다 쓰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같은 이름을 갖는 사물을 언급하고 있는 경우라도 뜻하고자 하는 바는 시마다 다를 수 있다. 어떤 시는 사물 그 자체를 보이는 반면, 다른 시는 사물에 반응한 시인의 서정을 노래할 수도 있으며, 또 다른 시는 사물에 빗댄 시인의 내면 서정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1930년대 초중반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던 김영랑의 시적 경향을 잘 보여 주는 대표작으로서, 앞서 언급한 서정시 중에서도 시인의 내면 서정을 주제로 삼은 작품이다. 이 작품의 소재로 쓰인 '모란'은 붉은잎의 꽃 또는 그 꽃을 피우는 관목으로, 부귀, 영화, 품위 등의 꽃말을 지닌다. 꽃말처럼 화려하고 품격 있게 생겨 사람들이 관상용으로 즐기는 식물이다. 시인의 생가가 있는 전라남도 강진에서는 5월이면 붉은 꽃을 피우는데 짧으면 2~3일, 길게는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지속된다고 한다. 그러니 어쩌면 시인이 실제로 이 꽃을 몹시 사랑하여 그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심정으로 이 시를 썼을 법도 하다.
그런데 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모란이 봄철 끝 무렵에 핀다는 것, 순식간에 피었다가 진다는 것, 화자에게 봄과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 등이 시에서 언급된 전부인데, 정작 이들은 화자의 심처음 부각하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모란에 대해 쓴 시라기보다 모란에 낸 그 무엇인가를 대하는 시인의 서정을 다룬 시라고 볼 만하다.
| '내 한 해'와 '삼백예순 날'
모란이 눈앞에 만개했다가 금세 사라져 버린 실물의 꽃이었든 아니었든 간에. 그것이 봄과 동격으로 여겨진다는 것은 이 작품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이다. 일반적인 꽃에 비해 짧은 시간 동안만 꽃을 피우는 모란의 특성을 고려하더라도, 모란이 피고 짐을 보는 화자의 심정은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리면 "봄을 여읜" 것이고, 그러면 "내 한 해는 다 가고 만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한 계절, 심지어 한 해의 무게에 달하는 모란이 지고 나면 화자는 '삼백예순 날'을 그저 섭섭해 운다고 말한다. 이 '삼백예순날'은 일 년을 단순화한 표현이다. 분명 모란이 핀 시간, 봄이었던 시기가 있었을 텐데 왜 화자는 '한 해'가 가고 '삼백예순 날'을 섭섭해 운다고 표현했을까? 이는 '모란'이 한순간에 피고 져 버렸다는 화자의 주관적인 심리적 사태를 뜻한다. 의도한 것인지는 몰라도 '내 한 해'라는 시어에는 시간에 대한 화자의 주관적 인식이 담겨 있는 듯하다.
화자가 "내 보람", 즉 모란이 "뻗쳐오르던" 시간을 물리적인 시간보다 훨씬 짧게 감각하는 것은 그만큼 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상실감과 간절함이 큰 까닭일 것이다. '마음'이라는 주관성에 의해 시간이 상대적으로 인식되는 현상은 시인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보고 싶고 기대하는 대상을 기다릴 때는 그 시간이 무척 더디게 오는 듯하고, 반대로 피하고 싶은 대상과 만나야 하는 시간은 너무 빨리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이렇듯 시간은 자신의 내면의 상태에 따라 그 흐름이 다르게 느껴지곤 한다.
| '모란', 그리고 초원의 빛
그렇다면 화자에게 '모란'이 어떤 존재이길래 이처럼 만남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재회의 때는 더디게 오는 것으로 표현했을까. '모란'이 품위 있는 자태를 지닌 곱고 아름다운 꽃임을 백번 인정하더라도, 어떤 사람의 인생이 오로지 그 꽃 하나에 매여 있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이제 '모란'을 화자가 간절히 바라는, 화자에게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어떤 대상을 대리하는 이름으로 삼아 보자. 시에서는 모란의 꽃 색깔, 꽃잎 모양, 향기 같은 것은 묘사하지 않으므로, 구체적인 모란의 상(像) 대신 간절한 무엇인가가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작품이 '모란'의 이러저러한 모습을 여러 감각적 심상을 사용하여 구체적으로 표현했다면 어땠을까? 이렇게 표현된 모란은 더 이상 화자의 마음속 무언가를 대신하고 있다고 여겨지기 어렵게 된다. 왜냐하면 청자는 화자가 경험했던 어떤 모란꽃을 찾으려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너'라는 대명사에 '키가 큰'과 같은 구체적인 특징을 부여하면 대상이 한정되어 버리는 것과 같다. 이 작품은 '모란'이라는 이름 외에 꽃의 어떠한 구체적인 형상도 보여 주지 않음으로써 화자 내면의 어떤 간절한 열망의 대상을 성공적으로 포착한다.
그럼 다시, 모란이 지고 일 년을 잃었다는 화자의 서정을 이해하기 위해 시인의 시적 경향을 살펴보자. 시인 김영랑은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나 존 키츠(John Keats) 등 영국의 낭만주의 시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계몽주의와 이성적 합리주의에 반대하며 개인의 감정이나 개성, 독창성 등을 강조하고 개인과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았던 낭만주의 정신에서는 세계의 모든 것이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는 것을 이상적인 상태로 보았다. 이른바 일원론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조화로운 하나로 있어야 할 것들이 서로 분리되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다음, 워즈워스의 시 <초원의 빛(Splendor in the Grass)>에서 낭만주의 시가 상실에 대처하는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한때는 그리도 찬란한 빛이었건만
이제는 속절없이 사라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오히려 강한 힘으로 남으리
존재의 영원함을
티없는 가슴으로 믿으리:
삶의 고통을 사색으로 어루만지고
죽음마저 꿰뚫는
명철한 믿음이라는 세월의 선물로
상실로 인해 이상적인 조화가 깨진 그때에는 "속절없이 사라진 /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것에 대한 슬픔 속에서도 “존재의 영원함", 곧 사라졌으나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초월적인 역설에 대한 믿음을 통해 그 슬픔을 이겨 내야 한다. 모란이 피었기로소니, 금세 지고 마는 슬픔보다는 모란을 잃은 슬픔을 한 해 내내 겪으면서도 모란이 다시 필 것을 한 해 내내 고대하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 최지현
참고문헌
김영랑(2004), 《영랑 시집》, 열린책들.
김학동 편저 (1993), 《김영랑: 김영랑 전집 · 평전 · 연구자료》, 문학세계사.
박호영(2009), 「김영랑 시의 낭만주의적 특성 연구」, 『한국문예비평연구』, 한국현대문예비평학회.
사회평론 교육 총서 19 『문학 교육을 위한 현대시작품론』
2024. 9. 18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