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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라혼은 어떠한 존재든 그 특유의 기운을 구별할 수 있었다. 이 능력으로 라혼은 상대의 기분을 짐작하거나 지금 하고 있는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확신을 가지고 하는 말인지, 어떤 의도를 품고 하는 말인지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매우 까다롭고 귀찮은 작업이지만 이공간 에텔 스페이스의 영향을 받는 공간에서 원하는 존재를 찾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이 기(氣)인 우주에서 어떤 특정한 기를 찾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했지만 대략 상대가 어디쯤 위치해 있다는 것을 알면 의외로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어디에 있다 하더라도 전환(傳環)같이 [디텍트Detect : 탐지] 주문이 걸려 있는 물건을 가진 경우에는 라혼의 손바닥 위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라혼은 모석과 잔폭광마를 단번에 찾아낼 수 없었다. 바로 알 수 없는 힘이 모석과 잔폭광마의 기운을 감지하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체인지 셀프Change Self : 변신] 주문으로 몸을 작게 만들어 두려움에 움츠러든 드워프 장로를 따라 모석과 잔폭광마가 있다는 ‘치료하는 흙’이 있는 끝없는 지하로 내려갔다. [체인지 셀프Change Self] 1서클은 간단한 변신 마법으로 몸을 크든 작든 한 자 정도의 작은 범위 이내에 자신의 모습―옷과 장비 포함―을 변하도록 해준다. 살찌든 마르든, 인간이건 유사 인간이건 아니면 다른 인간 형태의 직립 생물이건. 단, 술자는 한 특정한 개인을 복제할 수 없다. 변화시킨 몸이 갖는 능력이나 행동 방식까지 부여해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드워프들이 생활하는 지하 동굴에서 활동하기 편하게 하기 위해 드워프들의 키에 맞춰 몸집을 줄이는 데에는 더없이 좋은, 알맞은 주문이었다.
“위대한 분이시여, 이곳입니다.”
“….”
드워프 장로가 안내한 곳은 작은 방으로,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검은 흙에 파묻힌 채 얼굴만 내놓은 모석과 잔폭광마가 잠들어 있었다. 라혼은 그들에게 가만히 다가가 이마에 손을 얹고 내공을 주입하는 방법으로 진찰을 했다. 다행히 내상은 없었고 개미들에게 뜯긴 피부만이 문제일 뿐이었다. 그러나 드워프 장로가 장담하기를, 따뜻하다 못해 뜨겁기까지 한 ‘치료하는 흙’을 사흘 정도 덮고 있으면 완치가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라혼은 그 검은 흙의 정체가 매우 궁금했다. 그러나 조급하게 굴 이유는 없었다. 일단 본래 목적인 모석과 잔폭광마의 신변을 확인한 라혼은 봉수성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좋아! 사흘 후 다시 오겠다.”
―확!
두려운 존재가 빛과 함께 푹 꺼지며 사라지자, 그제야 한숨을 내쉬는 드워프 장로는 서둘러 장로 회의를 소집했다.
“이, 이것이 어찌 된 일이오? 란드에게 전반적인 이야기는 대략 들었지만 드래곤이라니?”
“아무래도 유희 중인 드래곤인 것 같소.”
“하지만 칸 대륙에 사는 드래곤은 신룡 굉(宏)과 우(于), 앙(殃), 조(祚), 신(伸) 다섯뿐인데 그중 누구인 것 같소?”
“아니, 그전에 서룡들과 달리 신성(神性)을 가진 동룡들이 유희를 한다는 것은….”
“아니요. 그 드래곤은 말 그대로 드래곤인 것 같소. 용(龍)이 아닐 것이오.”
용(龍)과 드래곤(Dragon), 둘은 같은 것이지만 또한 다른 존재들이었다. 최소한 드워프들이 생각할 때는 그랬다. 드래곤은 드워프들을 노예나 아니면 그보다 못한 존재로 생각한다. 그러나 칸 대륙으로 온 후 용(龍)은 드워프들을 한 종족으로 생각했다. 용(龍) 자체가 신성(神性)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에게 숭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황룡대산(黃龍大山) 너머에서 온 드래곤이란 말이오?”
“아마도 그런 것 같소!”
이 드워프들의 선조는 황룡대산(黃龍大山) 그러니까 지슈인드 고원에서 살던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드래곤들의 개체가 늘고 황룡대산 전체가 드래곤들의 서식지가 되자 더 이상 그곳에서 살지 못하고 이곳까지 밀려 내려온 것이었다. 아니, 지슈인드 고원이 포화 상태에 이르자 갓 성룡(成龍)이 된 그린 드래곤이 드워프 마을을 통째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그린 드래곤은 이곳에 둥지를 튼 지 꼭 100년 만에 한 영웅에 의해 사냥당하고 귀매지림(鬼魅之林)은 그린 드래곤이 잡아 풀어놓은 트롤과 오우거 그리고 드워프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린 드래곤을 사냥한 존재가 바로 사람의 형상을 한 신룡 굉(宏)이었다. 드워프들은 굉(宏)을 통해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신성(神性)을 가지게 된 다섯 용(龍)은 칸 대륙에 살면서 자신에게 신성(神性)을 부여한 존재들을 지킨다고 했는데 그것은 사람을 재앙으로부터 지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인간에겐 재앙(災殃) 그 자체인 드래곤은 다섯 신룡(神龍) 때문에 이 칸 대륙에서 살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드래곤이 ‘치료하는 흙’에 아주 큰 관심을 보였소.”
“저런….”
“크흠….”
“이럴 줄 알았다면 그 인간들 개미집이 되게 놔두었을 것을….”
‘치료하는 흙’은 드워프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
뜻밖의 수확을 얻은 라혼은 해가 지고 완전히 어두워진 봉수태수부에 나타났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시간을 많이 낼 것인가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봉수성은 장악했고, 백호영들로 하여금 남례성의 각 거점의 병력을 흡수하게 해서 적당히 무력 시위를 하며 본군을 기다리면…. 본군이 이곳에 도착하려면 두세 달 정도 걸릴 테니까….’
지금 라혼에게는 남례성의 반란 문제가 어찌 되든 상관없이 도깨비 숲에 사는 드워프들의 기술과 지식을 배우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 잘하면 그동안 기회가 없어 배우지 못했던 선술(仙術)이나 법술(法術)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때 난데없는 비명 소리가 라혼의 사색을(?) 방해했다.
―크악!
―엄살 피우지 마!
비명 소리와 서슬 퍼런 고함 소리가 울리는 곳은 다름 아닌 봉수태수부의 드넓은 연무장이었다. 입추의 여지가 없이 연무장을 꽉 채운 군사들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연무장 바닥을 기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것인가?”
“헉! 주군!”
연무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단(壇) 위에서 백호영식(?) 지휘권 확보 작업을 총지휘하던 고우는 바로 뒤에서 울려오는 주군의 목소리에 크게 놀랐다. 그러나 곧 신색을 회복하고 나름대로 보고했다.
“흐음, 그럼 계속 수고하게…. 그리고 모석과 잔폭광마는 무사하니까 백호영들에게도 그렇게 전하게. 그러나 외부에는 알리지 말도록. 앞으로 사흘간 인수한 병사들의 교육(?)에 힘쓰고 다음은 모석을 납치한 놈들을 잡는 작업을 시작할 거다.”
“그렇습니까? 모 정령이 무사한 겁니까?”
“그렇다.”
고우는 주군의 확언과 자신들이 임의로 벌인 일에 대한 치하를 듣자 사기가 충천했다.
“주군, 태수부 정청에서 봉수성의 관리들이 아직 모여 있습니다.”
“그런가?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하지….”
교육(?)에 열중하던 백호영들은 주군인 라혼의 모습을 멀리서나마 보고 사기가 충천하여 봉수성의 군사들을 더욱 몰아붙였다. 신이 난 백호영들 덕분에 병사들은 더욱 달달 볶여 그날 까무러쳐 죽은 자만 수명은 족히 되었다.
“나는 인정할 수 없소이다. 어찌 되었든 아무 이유도 없이 조정이 직접 임명한 관리의 목을 친 것은 대죄요.”
“허어~! 그래도 그는 조정에서 남례성과 남상의 군사들을 부릴 권리를 가진 하남천원군의 장수요. 이 일은 군부(軍府)의 일이니 우리가 왈가왈부할 사항이 못 된단 말이오.”
“그러나 이곳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자가 통치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은 반대요. 군부의 일과 백성을 다스리는 일은 구별되어야 하오.”
“그러니 그를 인정하느니 마느니 하는 이야기는 필요 없어요.”
―끼이익~!
―….
교육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연무장을 벗어나 관리들이 아직까지 격론을 벌이고 있는 태수부 정청에 라혼이 들어선 순간, 사위는 삽시간에 조용해지고 모든 눈동자가 라혼에게 집중했다.
“하남천원군 참장 라혼이오.”
―웅성웅성웅성웅성….
“여는(나는) 봉수성 이랑(吏瑯) 단방(亶芳)이오.”
라혼이 스스로 신분을 밝히며 나서자 쥐 죽은 듯 조용하던 장내의 관인(官人)들이 웅성대기 시작했고, 이랑의 관직을 가진 단방이란 자가 앞으로 나서자 다시 조용해졌다.
“내 장군께 묻겠는데, 어찌하여 조정에서 직접 임명한 위병대장 홍대보를 참한 것이오!”
이랑 단방이 라혼에게 던진 어두절미(語頭絶微)하고 단도직입(單刀直入)적인 물음은 장내를 싸늘하게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단 반나절도 안 된 시간에 봉수성의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아직도 멀지 않은 곳에서 1만 군사가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단번에 최대 실권자에게 잘잘못을 따져 물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병가에서 군령을 어긴 자를 참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본인은 조정의 명(命)에 따라 하남의 모든 지역에 군수품과 병력을 요구할 수 있고, 남례성과 남상의 모든 군병은 본인의 명에 따르게 되어 있소. 그러나 반적 홍대보는 나의 명을 거역했을 뿐만 아니라 불측을 도모했소.”
분명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익히 잘 아는 홍대보의 성정상 내놓으란다고 순순히 내놓을 인물이 아니었고, 그것을 빌미로 목을 베었다면 이치상으론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를 굳이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잖소이까?”
“그것은 군부의 일이니 따로 해명하지 않겠소!”
“호랑(戶瑯) 안혁승(案奕承)이오. 그럼 어찌하여 태수님을 영어하고 우리를 이곳에 모아 겁박하는 것입니까?”
라혼은 빤한 것을 가지고 말싸움하는 것이 짜증났다.
“본인의 공(公)과 과(課)는 원주 조정에서 판단할 일이오. 나는 남례성과 남상의 반란을 해결하기 위해 온 하남천원군의 장수요. 여러분은 그저 여러분의 일을 하면 되는 것이오. 내 사사로이 여러분을 모이라 한 것은 사과드리오. 하지만 분명히 밝혀두건대, 반란이 끝나기 전까지 봉수성은 조정에서 반란을 토벌하라는 명을 받은 하남천원군에 속하여 움직인다는 것이오.”
“그런….”
“고로! 여러분 또한 군문의 법에 따르게 될 것이오.”
봉수성 관리들은 아주 노골적인 협박에 분기탱천하며 따지려 했다. 그러나 영혼을 옥죄는 공포감에 식은땀을 흘리며 하남천원군의 장수가 정청을 벗어날 때까지 숨쉬기도 힘들었다. 라혼이 그들의 시끄러운 입을 막기 위해 피어(fear)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아직까지 교육(?)이 한창인 백호영을 두고 해노 인치와 장상을 통해 각기 흩어져 따로 운영되는 수군들에게 하남천원군 참장 라혼의 이름으로 봉수성에 집결하라는 격문(檄文)을 띄우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사흘 후 봉수성 군사들의 모든 교육이 끝나고 일사불란한 조직 체계를 갖춘 백호영의 무력 시위 겸 남례성의 병권을 확보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물론 멀리 떨어진 곳과 교통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발 없는 말(言)이 천 리 간다는 말이 있다. 봉수성 주변의 병권을 확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내 이노무 개잡놈을! 잡히기만 하면 아작을 내주리라!”
“….”
사흘간 인사불성이 되어 있던 잔폭광마 육삼이 깨어나며 내지른 외침은 처절하기까지 했다. 라혼은 약속한 바대로 사흘 후 드워프 마을에 가서 아직 깨어나지 않은 모석과 잔폭광마를 봉수태수부로 데려왔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나 드워프들은 자신의 존재를 밝히길 굉장히 꺼려했다.
“깨어났으면 놈들을 잡으러 가자!”
“대장!”
잔폭광마는 대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누워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살기를 번들거리며 병가(兵架)에 세워져 있던 귀두대도(鬼頭大刀)를 집어들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기세로 재촉했다.
“어서 갑시다! 내 이놈들을 잘근잘근 씹어서 한 500년 먹어버릴라니까!”
―퍽~!
모석이 보기에도 위태위태하던 잔폭광마의 발작은 라혼의 발차기를 불러오고 말았다.
“이런, 니기미~!”
가슴을 맞고 쓰러진 잔폭광마는 흉성이 폭발하여 떨어뜨린 귀두대도를 집어들고 휘둘러왔다.
―퍽! 퍼버버버버버버버버버…. 빡!
그리고 잔폭광마는 진정한 백호영이 되었다.
***
“소야!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으음.”
검은 피부에 크고 둥근, 인상적인 눈동자를 가진 사내는 예상치 못했던 결과에 무거운 침음성을 내뱉었다.
“그것을 빌미로 봉수성을 완전히 장악하다니….”
“소야(小爺).”
“일단 봉수성을 장악하는 일은 일단 여기서 접는다. 그러나 사태 추이를 좀더 살피는 일은 게을리 하지 마라!”
“옛! 우르하족에게 이 일에 대해서는 함구하도록 전하겠습니다.”
“음!”
봉수성의 8할 인구를 차지하는 진토인들의 관리들에 대한 원성이 높아 묘하게 거슬리는 위장 홍대보를 견제하기 위해 벌인, 조정에서 직접 보낸 군관을 납치함으로써 혼란을 유도하려던 계략은 일단 성공했다. 바로 견제하려는 대상이 너무도 어이없게 목이 잘렸기 때문이었다. 중년의 깡마른 강퍅한 인상의 사내가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이며 다음 사항을 보고했다.
“소야. 그보다 우르하들이 말하길, 귀림(鬼林)에 누군가 침입한 흔적이 있다 합니다.”
“뭐야? 자세히 말해봐라!”
“홍칩의(訌蟄蟻)가 있는 곳에 조정 군관들의 뼈가 보이지 않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누군가 침입한 듯 흉성이 폭발한 홍칩의(訌蟄蟻)들이 개미가 싫어하는 기름을 바른 우르하들을 무작정 공격했답니다.”
홍칩의(訌蟄蟻)는 말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 개미들을 말했다.
“그럼 누군가 그들을 구해갔다는 건가?”
“그럴 가능성을 배제하진 않고 있습니다만, 홍칩의(訌蟄蟻)가 가장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곳까지 들어와 그들을 구할 존재는 없습니다. 아마도 귀매(鬼魅)일 겁니다.”
“아무튼 뜻하지 않게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사라진데다 이제는 거칠 게 없는 이상 좀더 적극적으로 차레족을 흔들어야 한다.”
“소야! 홍대보의 목이 달았났지만 그 수족들은 계속 활동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차레족을 건드는 일은 시간을 좀더 가지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군.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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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일어난 지 이레가 지났다. 라혼은 자신의 행사에 반감을 품고 직무를 태만히 하는 관리 몇몇을 임의로 파직시키고 새로운 인재를 그 자리에 메우는 데 시간을 허비했다. 남상의 반란으로 뱃길이 끊기면서 항만 업무 중심으로 돌아가던 봉수태수부에는 비교적 한가한 인력이 많았다. 그런 그들을 중심으로 불복종하려는 기운이 감지되자 이미 마음이 귀림의 드워프 마을에 가 있는 라혼은 그들 몇몇을 태형(笞刑)으로 다스렸다. 태생이 그런지 몰라도 백호영에는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패면서 상처가 거의 남지 않는 수법이 많이 발달해 있어 우악스런 무인들의 매운 손속을 문관들은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군자의 기개를 보이는 한다 하는 인사 몇몇이 라혼 참장에게 그것을 따져 물었지만 관리가 일을 태만히 하면 태형으로 다스리라는 관규(官規)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삼아 피어(fear)를 남발하며 그들에게 설득 반, 협박 반 섞인 해명을 했다. 그것으로 라혼은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봉수성 관부를 완벽하게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현 상태는 모든 일이 라혼을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즉, 당분간 아니 최소한 두어 달 동안 라혼이 계속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것은 라혼이 바라는 바가 전혀 아니었다.
“주군, 세출 결산입니다.”
라혼은 모원이 한 아름 안고 들어오는 서류들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앞에 놓인 서류를 집어들었다.
“모원, 이것은 작년 세출이잖은가?”
“아! 그거요. 태수의 결재가 필요한 서류인데 아직 결재를 받지 못했다고, 이번 기회에 처리해서 마무리짓는 것이 좋겠다면서 떠넘긴 겁니다.”
라혼은 잠도 자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그동안 밀린 서류 작업을 했다. 그동안 봉수 태수 돈석이 일을 게을리 하는 바람에 밀린 일들이 엄청난 서류 처리 능력을 자랑하는 라혼에게 모조리 집중되었다. 한심한 것은 그동안 최고 책임자가 일을 소홀히 하는 틈을 틈타 여기저기 봉수태수부의 눈먼 황금이 여기저기 누수된 것이 많았다는 점이다. 물론 서류를 꾸민다고 꾸몄지만 멀게는 3년 전까지의 모든 서류를 한번에 훑은 라혼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호오, 이것 봐라! 공금을 횡령한 내용이 담긴 서류를 보란 듯이 올려보내? 그리고 이것은 녹봉를 올려달라는 서류잖아?’
라혼이 임의로 봉수성을 장악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봉수성의 관인들은 없었다. 그런 그가 일을 처리함에 있어 잘못된 것이 있으면 그 죄는 더 한층 무거웠다. 그런 그에게 일을 태만히 한다고 임의로 파직당하고 또 몰매 맞는 것을 가만히 참고 넘길 그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그가 바라는 대로 열심히(?) 일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바로 라혼의 무시무시한(?) 서류 처리 능력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라혼을 골탕 먹이기 위해 생각해낸, 쉴 새 없이 일감을 밀어붙이는 그것으로 인해 오히려 그동안 공금을 횡령하던 자들이 줄줄이 걸려들어 경미할 때는 라혼에게 코가 꿰이고 중할 때는 아예 파직(罷職)과 함께 모든 재산을 봉수태수부에 몰수당해야 했다. 그렇게 라혼은 누군가의 잔머리 때문에 봉수태수부에 마련된 집무실에서 근 보름간 서류에 파묻혀 지내야 했다. 그리고 오히려 봉수태수부의 관리들을 역으로 혹사시킨 일들이 마무리될 때쯤, 자신들을 납치한 자들의 정체를 쫓던 모석 일행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주군, 알아냈습니다.”
라혼은 장상과 모석 그리고 완전한 백호영이 된(?) 잔폭광마가 집무실로 들어서자 마지막 서류에 수결을 해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섰다.
“뭘 알아냈는지는 나중에 듣고, 일단 이 일부터 마무리하지. 따라오게.”
“….”
라혼은 집무실 근처에 항상 있는 모원까지 불러 함께 봉수태수부를 나서더니 그리 멀지 않은 태수 관저로 천천히 걸었다. 라혼이 태수 돈석의 관저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라혼을 반기는 자는 다름 아닌 이곳에서 태수의 신병을 확보하고 지키는 원복이었다.
“주군, 이곳엔 어인 일이십니까?”
“돈 태수는?”
“특별한 사항은 없고 항상 그 자리에 있습니다.”
―주군의 말씀대로 그의 주변에 내력이 심상치 않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하는 말과 전혀 다른 내용의 보고가 전음입밀(傳音入密) 수법을 통해 라혼의 귓가에 걸렸다. 라혼은 원복의 전음(傳音)으로 세세한 보고를 들으면서 주위에서 은밀한 움직임을 보이는 존재들을 감지했지만 일단 무시하고 봉수 태수 돈석이 머물고 있는 후원으로 들어섰다. 태수 돈석은 침상인지 의자인지 모를 등나무 가구에 육중한 몸을 얹은 채 근육질의 하인에게 부채질을 받으며 라혼을 맞이했다.
“홍홍, 어서 오시오. 라혼 참장!”
“돈 태수, 그대가 태수부의 일을 맡아주었으면 하오.”
“…!”
돈석은 겉으로는 말없이 웃고 있었지만 이 괴물 같은 놈이 인사도 없이 바로 본론을 꺼내자, 내심 크게 당황했다. 그리고 그가 요구한 내용에 또 한 번 놀랐다.
‘뭐야? 기껏 봉수성의 통치권을 완전히 장악하고는 한 달도 못 되어 나보고 태수부를 맡아달라고?’
라혼은 그가 아무런 표정을 짓고 있지 않지만 내심 무척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본인은 그대가 다시 봉수성을 맡았으면 하오. 나는 봉수성을 통치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오.”
“….”
라혼의 재촉에 봉수 태수 돈석은 잠시 침묵하더니 조용히 말을 꺼냈다.
“장군, 나와 독대를 해주시오!”
“알겠소.”
태수의 독대 요청을 라혼이 수락하자 라혼을 따라 들어왔던 모석 등이 말없이 물러섰고, 돈석에게 부채질하던 하인들이 창(窓)의 발을 내려 외부에서 안을 볼 수 없게 차단한 다음 역시 자리를 벗어났다.
“홍홍, 내 장군에게 물을 것이 있소. 장군의 내자라 소문난 천하제일미 천상천화가 수인이란 것이 사실이오?”
“사실이오.”
라혼은 돈석이 보기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땀을 흘리며 묻는 첫 질문이 설화에 대한 것이어서 순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겉보기에 눈웃음을 지은 채 ‘홍홍’거리며 가볍게 묻는 것처럼 보였지만, 라혼이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그것이 그저 흰소리로 질문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홍홍, 그럼 천상천화가 묘(猫)가라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려!”
“겨우 그 때문에 독대를 청한 것이오?”
넌지시 넘겨짚은 질문에 그가 부정하지 않자 돈석이 가는눈을 번뜩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홍홍홍, 그것은 아주 중요할 수도,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홍홍홍….”
“….”
뭐가 그렇게 좋은지 한참을 웃던 돈석이 다시 물었다.
“홍홍, 장군은 백수회를 아시오?”
“모르오!”
“홍홍, 그럼 좀전까지 장군과 함께 있던 장상이란 자가 백수회의 일원이란 것을 모르시겠구려!”
눈가에 웃음을 머금고 여기까지 말한 돈석은 상대의 기색을 살폈으나 별반 놀라는 눈치나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 돈석은 그런 반응에 유의하며 말을 이었다.
“홍홍, 백수회는 수인가(獸人家)들 중 십이진가에 벗어난 세력이 하나로 뭉친 회(會)요. 그리고 장상이란 자의 조부 장모는 그 백수회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소. 홍홍!”
“장상이 나에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접근했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그것을 알리고자 독대를 청하지는 않았을 테니 속 시원히 털어놔보시오. 나는 말을 질질 끄는 것을 좋아하지 않소.”
“홍홍,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리다. 장상의 조부가 천하 각처에 있는 백수회의 수뇌부들에게 친서를 보냈소. 거기에 바로 장군과 장군의 아내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는데, 나는 그 친서의 내용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오. 홍홍!”
라혼은 그의 말 속에서 십이진가의 일원인 돈석 자신이 백수회에서 그리 낮은 위치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돈석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나와의 합작을 제안하는 바이오.”
“좋소! 그 제안을 받아들이오. 그러니 일단 봉수부(峰水府)의 태수로서 일부터 하시오.”
“아니…?”
너무도 간단하게 즉답을 얻은 돈석은 되레 그의 진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나의 대답을 얻었으니 이제 그쪽의 속내를 털어놔보시오. 도대체 뭘 합작하자는 것인지?”
라혼에게는 지금 봉수 태수가 꾸미는 꿍꿍이보다 귀림(鬼林)의 드워프들에게 가서 그들의 지식을 얻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수백 년 후 있을 ‘대변혁의 시기’가 되면 지금 칸 대륙의 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대변혁의 시기’란 신(神), 마(魔), 그리고 중간계(中間界)의 삼계(三界)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마계(魔界)의 존재와 신계(神界)의 존재가 중간계로 쏟아지는 시기였다. 그렇게 되면 중간계에서 그 존재들과 그나마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드래곤족뿐이었다. 그리고 인간들 중에서 극소수 신선(神仙)의 반열에 든 존재들뿐이었다. 그러니 ‘대변혁의 시기’를 대비하며 기다리는 라혼의 입장에선 고작 칸 대륙의 패권(覇權)을 두고 쟁패(爭覇)하는, 아니 그저 다투는 수준에 있는 사바세계의 세(勢) 싸움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홍홍홍, 역시 성정이 호호탕탕(浩浩蕩蕩)한 것을 보니 장군은 영웅이 틀림없구려. 이런 장군이 나와 같은 길을 가기로 하였으니, 자그마한 선물의 의미로 장군의 수하를 납치했던 자들이 누구인지 가르쳐주겠소. 장군의 수하를 납치한 자들은 남례 일족의 사주를 받은 우르하족이오.”
“남례성 반란의 원흉이 남례 일족이란 말이오?”
“홍홍홍, 반은 맞고 반은 틀렸소. 남례성의 반란은 그 주체가 명확하지 않소. 그래서 내가 보기에 진토인들이 봉기하자 남례 일족도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그저 부화뇌동했을 뿐이오. 그 증거로 그들은 스스로 반란의 주체임을 주장하지 않소이다. 홍홍홍, 그리고 백수회 쪽에서도 수를 쓴 것이 있고….”
라혼은 봉수 태수 돈석의 고백 아닌 고백에 쓴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온 조정의 장수인 라혼이 그 반란의 당사자와 합작을 논의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말끝을 흐리며 라혼의 눈치를 살피는 돈석이었다.
“아직 본론을 꺼내지도 않은 듯한데, 벌써부터 자신의 약점을 내보이다니 상당히 재미있는 화술법이군!”
“!”
“이제 당신을 지금 이 자리에서 포박하여 원주로 압송해도 문제가 없겠군. 그럼 이제 본론을 말해보시오.”
자신이 똑똑하다고 믿는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자기가 예상했던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을 경우, 동요가 심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그는 화를 내거나 또는 어이없는 실수를 하는데 상대가 아래라고 느껴질 경우는 화를 내는 것이고, 상대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일 때는 종종 어이없는 실수를 한다. 지금 봉수 태수 돈석의 경우는 후자라 하겠다. 좀처럼 내심을 표현하지 않던 안색이 혼란스런 내심을 반영한 듯 항상 여유롭게 웃던 미소가 그치고 이내 굳은 표정을 지은 봉수 태수 돈석이 무거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봉수부에 귀매림(鬼魅林)이란 곳이 있는데, 그곳에 토지신이 살고 있소.”
“….”
“….”
“그것은 나도 알고 있소. 그래서 뭐 어쨌다는 것이오?”
“!?”
봉수 태수 돈석은 상대가 또다시 예상이 빗나간 반응을 보이자 두 손 두 발 모두 들고 말았다. 남례 일족이 노리는 것도, 그의 손에 참수된 홍대보가 노리는 것도 다름 아닌 ‘도깨비 숲’의 토지신들이었다. 작금의 상황은 다름 아닌 난세(亂世) 그것도 근 400년 만의 전란(戰亂)의 시대였다. 전란의 시대인 만큼 가장 잘 팔리고 또 그 물건을 취급하는 것 자체가 힘이 되는 무기(武器), 또 그중에서도 철기(鐵器)는 향후 대륙의 패권(覇權)을 좌우할 물건이었다. 그런 점에서 단지 손길이 닿는 것만으로도 신병이기(神兵異器)를 만들어내는 토지신의 존재는 천하를 두고 패권을 다투는 모든 세력이 운명을 걸고 얻으려는 귀한 존재였다. 단 한 명의 토지신에게 도움을 얻어낼 수 있어도 철방(鐵幇)의 규모를 단숨에 키울 수 있었다. 그리고 가끔 신병이기를 얻어 그것을 미끼로 강호의 고수를 포섭할 수 있을 것이다. 봉수 태수 돈석의 장황한 설명을 들은 라혼은 헛웃음이 나왔다. 토지신이라 불리는 드워프들이 자신의 동업 제안을 하자 돌연 태도를 바꾼 이유를 그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돈 태수, 당신의 말은 잘 들었소. 그러나 귀림의 토지신들은 이미 날 돕기로 되어 있소. 하지만 백수회가 나와 함께한다면 언제든 환영이오. 그리고 당신에게는 반역에 대한 혐의가 있으니 앞으로 자중하는 모습을 보이길 바라오.”
“끄응!”
라혼은 봉수 태수 돈석과의 독대를 끝낸 뒤 장상의 보고를 받았다. 장상이 알아낸 바로도 그 일은 우르하 부족과 관련돼 있음을 또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장상은 남례 일족에 대한 사항을 알지 못하는 것을 보고 최소한 봉수성에서 봉수 태수 돈석의 눈과 귀가 얼마나 밝은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출정한다. 백호영은 물론 그간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이끌고 우르하 부족 마을을 치겠다! 준비하라!”
“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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