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 2
계곡에 마음을 띄우다
점심 무렵이었다.
햇살은 산등성이를 넘어 계곡까지 따뜻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맑은 물은 햇빛을 받아 수정처럼 반짝였고, 크고 작은 바위 사이를 흐르며 청아한 소리를 들려주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혀 잔잔한 속삭임을 만들었고,
이름 모를 들꽃들은 계곡 가장자리에 소박한 미소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점심 식사를 마친 소진은 혼자 계곡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이곳은 그녀가 마음이 복잡할 때마다 찾는 작은 쉼터였다.
큰 바위 위에 앉은 그녀는 한동안 말없이 흐르는 물을 바라보았다.
세상 모든 소리가 멀어진 듯,
계곡은 오직 물소리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소진은 발밑에 떨어져 있던 작은 조약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바닥 안에서 한참을 굴리던 돌을 물가로 살며시 던졌다.
'톡.'
맑은 물 위로 둥근 물결이 하나 생기더니,
또 하나,
그리고 또 하나.
동그란 파문은 점점 넓어지다가 이내 계곡물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소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지영이었다.
그는 말없이 소진 옆에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했다.
잠시 후 지영이 부드럽게 물었다.
"무슨 생각해?"
소진은 물결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가끔은..."
"마음도 계곡물에 띄워 보내야 할 것 같아."
"무슨 마음?"
소진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흰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지난날의 아픔도."
"그리움도."
"후회도."
"다 흘려보내고 싶어."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는 긴 세월을 살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담담함이 담겨 있었다.
"살다 보면."
"놓아야 하는 것들이 참 많더라."
"붙잡고 있을수록."
"내 마음만 무거워지고."
"흘려보내야 할 때가 있는 것 같아."
지영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답보다 들어 주는 것이 더 큰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잠시 후 지영도 발치에 떨어진 작은 나뭇잎 하나를 집어 들었다.
노랗게 물든 단풍잎이었다.
그는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참 바라보다가 계곡물 위에 살며시 띄웠다.
나뭇잎은 물살을 따라 천천히 흘러가기 시작했다.
돌에 부딪히면 잠시 멈췄다가,
다시 방향을 바꾸어 앞으로 나아갔다.
지영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물은 흘러가지만."
잠시 미소를 지은 그는 말을 이었다.
"마음은 가벼워질 거야."
소진은 물 위를 떠가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그럴까?"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물은."
"지나간 물을 붙잡지 않잖아."
"우리도."
"흘려보낼 줄 알아야."
"새로운 물을 맞이할 수 있어."
소진은 그의 말을 마음속으로 천천히 되새겼다.
계곡물은 쉼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십 년 전에도,
이십 년 전에도,
그리고 오늘도.
늘 같은 자리를 흐르지만,
한순간도 같은 물은 아니었다.
소진은 문득 자신의 삶도 그 물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사랑의 아픔도,
남편과의 이별도,
아이들을 키우며 흘렸던 눈물도,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헤어짐도.
모두 흘러가 버린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과거를 미워하지 않았다.
아픔도 삶의 일부였고,
그리움도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지영은 계곡물을 바라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소진."
"응?"
"당신은 예전보다 많이 편안해졌어."
"그래?"
"응."
"예전에는."
"슬픔을 안고 살았다면."
"지금은."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아는 사람 같아."
소진은 천천히 웃었다.
"당신 덕분이야."
"아니."
지영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스스로 걸어온 길이지."
그 말에 소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그의 손등을 살며시 잡아 주었다.
햇살이 두 사람의 손등 위로 따뜻하게 내려앉았다.
계곡물은 두 사람이 띄운 작은 돌의 파문과 단풍잎을 품은 채 산 아래를 향해 묵묵히 흘러가고 있었다.
소진은 주머니에서 작은 노트를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한 줄을 적었다.
'계곡은 지나간 물을 붙잡지 않는다. 그래서 언제나 맑다. 사람의 마음도 흘려보낼 줄 알 때 비로소 새로운 행복이 스며든다.'
노트를 덮은 그녀는 마지막으로 계곡을 바라보았다.
맑은 물은 여전히 노래하듯 흘러가고 있었다.
그 물소리는 마치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지나간 것은 흘려보내고, 오늘이라는 맑은 물을 살아가라."
소진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영과 나란히 산길을 걸어 카페로 돌아갔다.
두 사람의 발걸음은 계곡물처럼 조용했고,
마음은 조금 전보다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