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셋. 제 얘기를 실은 ‘월간중앙’ 2003년 11월호가 나온다는 10월 중순이 꼭 결혼 18년째입니다. 나는 대한민국 육군 장교의 아내입니다. 그래서 공군이나 해군쪽 군인 가족의 생활은 어떤가, 그것은 잘 모릅니다.
‘가족생활’을 하기에는 공군이 육군보다 좀 더 낫고 해군은 육군보다 좀 못하다는 얘기를 언젠가 남편들 술자리에서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제복을 입고 나라를 지키는, 맡은 일과 하는 일이 같다는 점에서 그쪽 분들도 어쨌든 육군 가족인 제가 지내온 나날들과 크게 차이는 나지 않을 것으로 짐작할 뿐입니다.
‘월간중앙’에서 “국군의 날을 전후해 장교의 아내, 장교의 가족들 생활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다”고 했을 때 두 가지 생각이 탁 들었습니다. 하나는 군인이 아닌, 군인 가족의 얘기까지 실어 준다니 고마웠습니다.
문민 우위의 시대가 됐다고 해서 오래 전부터 군인 얘기도 잘 다루지 않는 언론이, 그것도 군인 가족들까지 신경 쓴다는 점에서 그랬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왜 군인 가족을 ‘따로’ 다뤄야 하는지 뭔지 모를 반감 같은 것이 일었습니다.
군인 가족을 따로 보아야 할 만큼 일반 민간인 가족과 생활이 다르다는 것인지, 좌우지간 왠지 꺼림칙했습니다.
분명히 ‘명토박아 놓고’ 시작해야 할 것은 군인 가족의 생활이라고 해서 일반 민간인과 다를 것은 없다는 점입니다. 남편이(우리 사회에서는 여군과 결혼했다고 해서 군인 가족이라고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군인이라는 점만 빼면 민간인 가족과 같습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좀 더 나은 내일을 향해 가족이 힘을 합쳐 노력한다는 점, 그 과정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그런 점을 의식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군인과 군인 가족들이 안에서 보기에는 두 가지 정도는 다른 것 같습니다. 하나는 민간인 가족보다 상대적으로 좀 더 내핍과 검약을 (실제로 그렇게 하든 안 하든) 늘 의식하며 생활해야 한다는 점, 또 하나는 남편들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현재의 고생이나 어려운 여건보다 ‘우리 아빠는 나라를 지키는 명예로운 자리에 있다’는 생각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남편이나 남편 동료들을 보면 군인들 사이에서는 “명예와 자존심을 먹고산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것이 어떤 것인가를 실감하기는 쉽지 않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해서 제가 생각하기에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가장인 군인의 길이 정해져 있는만큼 대다수 군인 가족들의 생활도 거기서 거기인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제각기 사정과 여건은 다르겠지만 큰 줄기는 비슷할 것 같습니다. 아니, 제 경우는 행운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편이 그래도 운이 좋아(군인 가족이라면 이런 말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서울과 경기 지역에 여러 차례 보직을 받았던 덕분입니다. 이런저런 점들을 감안해 제 얘기를 들어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혼 전 한 달만 미리 살아 봤어도…”
1985년 제 나이 스물다섯일 때, 이제야 말하지만 저는 남편과 ‘밑지는’ 결혼을 했습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남들이 명문이라고 부르는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어찌어찌 사람의 연이 얽혀 중매가 들어왔고 그것을 인연으로 남편과 결혼하기까지 이르게 됐습니다.
군인이 어떤 직업인지, 아니 군인 가족의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다면 솔직히 한 사람의 여자로서 결혼을 그렇게 쉽게 결정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사회 생활 3년쯤 될 때였는데, 남자들 위주의 직장생활에 지쳐 있었고 그런 터에 군인이다, 군생활이다 하는 생소한 것에 대한 막연한 신기함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던 남편의 모습은, 부대 안에서야 어떤지 알 길이 없었지만 멋있었습니다.
좀 별나다 싶게 아이를 셋 두었습니다. 딸 둘을 낳고 끝내려고 했는데 아들을 갖고 싶었습니다. 전통적인 남아선호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군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니 젊은 사병들을 숱하게 보게 됩니다.
남자는 군에서 씩씩합니다. 씩씩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군인이 아닙니다. 그런 사병들을 많이 보다 보니 저렇게 늠름하고 씩씩한 아들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도 같은 심정이었던가 봅니다. 고맙게도 마침 아들을 낳았습니다. 맏이와 막내가 7년 터울이 나는 것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터울이 나지 않고 셋을 함께 키우려고 했으면 정말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남편은 올해로 21년째 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대령 진급을 바라보는 고참 중령입니다. 남편 얘기를 하려니 당장 허탈한 웃음과 함께 ‘기다림’이라는 말부터 떠오릅니다. 소개받아 연애할 때, 그러니까 지금까지 남편과의 관계는 일방적으로 내가 ‘기다리는’시간들을 너무 많이 들였습니다.
소대장 시절 연애할 때부터 약속 장소에서 서너 시간씩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었습니다. 결혼하고 나서도 작전이다, 야근이다, 당직이다, 비상이다 해서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 들어오는 날과 비슷해서 노상 기다리기 일쑤였습니다.
최전방 휴전선에서 철책근무 때는 한 달에 한 번 들어오도록 돼 있었습니다. 무슨 ‘상황’이라도 발생하면 그마저 건너뛰었습니다.
나의 주특기는 ‘기다리기’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18년이지만 함께 붙어 있던 시간만 계산하면 한 6~7년 될까요? 차라리 그래서 아직까지도 남편이 집에 들어오면 반가운 손님(?) 같은지도 모르겠습니다.
결혼 짬밥(?)이 오랜 저 같은 경우야 이제 남편과 떨어져 있거나 오늘 저녁 당장 안 들어와도 그만이지만, 인적이 드문 오지에서 결혼 초기 젊은 신부가 생활하는 일은 도시에서의 삶과 달리 생각보다 무섭고 외롭고 쉽지 않습니다.
싫든 좋든 남편의 인사 명령에 따라 군인 가족은 근무지로 이사해야 합니다. 우리 가족처럼 서울과 수도권에서 절반 정도를 살 수 있는 것도 잘 풀린 편이라고들 합니다.
많은 군인 가족이 서울이나 수도권을 벗어나 오지에서 더 많이 생활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까요. 좌우지간 이사에는 이골이 났습니다. 그 동안 집을 옮긴 횟수가 15차례나 됩니다.
영관 장교의 아내쯤 되면 평균 1년에 한 번, 혹은 아무리 인사가 운 좋게 잘 됐다고 해도 2년에 한 번 꼴로 이사하게 돼 있습니다. 특히 우리 가족처럼 아빠와 떨어져 있기 싫어하면 곧이곧대로 아빠의 임지(任地)를 따라 집을 옮겨야 합니다.
집과 관련해서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일도 다 있습니다. 월세든 전세든 일단 당장 집을 구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으니까요. 보직 발령을 받으면 부대에 딸린 관사에 입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결혼하고 처음, 남편이 광주보병학교에서 교육받을 때 월세로 6개월을 살았던 것이 내 돈을 내고 거처를 얻었던 유일한 기억입니다. 물론 관사에 들어갈 때 보증금 비슷한 성격의 입주금을 내기는 합니다. 입주금은 대개 평당 10만원대입니다. 서울이 좀 더 비싸서 15만원대쯤? 경기도가 그것보다 좀 싸고 다른 지방은 더 쌉니다.
가령 지금 살고 있는 계룡대 신도안아파트 단지의 경우는 20평짜리를 200만원 가량 주고 들어왔으니까요. 이사 얘기가 나온 김에 좀 지루하더라도 (저는 감회가 새롭습니다만) 제가 이사다녔던 곳을 한번 되짚어 보겠습니다.
광주에서 첫 살림을 폈다가 두번째로 옮긴 곳은 전방에서 한 단계 후방인 강원도 철원 지역이었습니다. 일반인에게는 이름도 생소한 근화면 육단리. 그곳에서 남편이 최전방 철책근무에 들어가면서 마현리라는 곳으로 다시 이사했습니다.
문화시설은 한 마디로 전무(全無)했습니다. 점방(店房)이라고 불리는, 몇 동 되지 않는 관사 외곽의 손바닥만한 구멍가게가 문화며 유통 시설(?)의 전부였으니까요. 남편은 근무 특성상 한 달에 한 번 귀가했습니다. 외부와는 완전히 단절된 신혼 생활이었습니다. 거기서 첫 딸을 얻었습니다.
15평쯤 되는 관사는 1950년대인가 60년대에 지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 사람이 살아갈 만한 곳이니 그럭저럭 살면 그만이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갓 결혼한 새댁에게 그곳은 무섭고 외롭고 심심했습니다. 딸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생활이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추위였습니다. 군대에서는 두 계절만 있다고들 합니다. 그것도 두 달 여름, 열 달 겨울이라고 합니다. 6월에서 8월까지는 어떻게 견디겠는데 나머지는 한 마디로 얼어붙습니다.
민간인들도 군복만 입혀 놓으면 갑자기 춥고 배고파진다고들 농담하지 않습니까. 추위는 군대에, 군인에게, 군인 가족에, 가장 먼저 찾아오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관사가 낡다 보니 연탄 보일러가 있으나마나한 형편이 됩니다. 외풍이 심하고 바람이 새 들어와 출입문이든 창문이든 문이란 문에는 죄다, 읍내에 가서 비닐을 몇 마(碼, yard = 91.44cm)씩 끊어다 덧씌웠습니다. 보일러가 신통치 않은 판에 더운 물로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것은 참 쉽지 않습니다.
남편은 더 열악한 막사에서 생활하는 사병들을 생각하라며 참으라고 하지만 추위는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무엇보다 갓난아기를 자주 목욕시켜야 하는데 그 일을 한 번 하는 것이 집안 경조사에 버금가는 큰 행사가 됩니다.
특히 남편이 귀가한 날 저녁에는 반드시 아기 목욕을 시키는데 아기가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부부가 총 비상에 돌입해야 했습니다. 물론 다른 집들도 사정은 똑같았습니다.
연탄가스에 중독된 사연
마현리에서 잊을 수 없는 일로 연탄가스에 중독됐던 것이 있습니다. 지금이야 담담하게 말하지만…. 그때는 참 뭔지 모르게 막연히 세상이 야속했습니다. 인근 부대에서 탈영병 사건이 일어났을 때였습니다. 탈영 소식이 알려지면서 관사 일대는 삼엄한 경계가 펼쳐졌습니다. 총을 든 군인들이 여기저기 보초를 서고 순찰을 돌고 했습니다.
일단 탈영병이 관사쪽으로 잠입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입니다. 일대에서 주택가라고는 관사가 유일했으니까요. 일일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관사에는 여자와 아이들밖에 없을 것이었습니다. 남편들은 ‘자동으로’ 비상이 걸리고 영내(營內) 대기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오후부터 관사에는 경계병들을 빼고는 사람 그림자가 거의 끊어졌습니다. 그때는 무서웠습니다. 저녁 6시 전에 저녁을 먹고 딸과 함께 7시가 채 안 돼 누웠습니다. 문이란 문은 다 꼭꼭 닫아 걸어둔 상태였습니다.
뒤척거리며 한참 있다 한밤중에야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새벽녘쯤일까요. 딸아이가 끙끙 앓는 소리를 냈습니다. 왜 그러나 하고 눈을 뜨려고 하는데 머릿속이 어질어질하고 토할 것 같았습니다. 일어서려는데 몸도 휑하니 어지러웠습니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연탄가스 중독이구나.’
반사적으로 아이를 안아 보니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습니다. 아이도 연탄가스에 중독된 것이었습니다. 일어나서 창문만 잠깐 열었다 다시 얼른 닫아 걸기를 몇 번, 밖으로 나갈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탈영병이 잡혔다는 얘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밖으로 뛰어나가 병원으로 가려고 해도 읍내까지 갈 교통편이 마땅찮았습니다. 아이를 어르고 물을 수건에 축여 쓸어대면서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그렇게 서너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침 7시 무렵 날이 밝아서야 아이를 안고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겨우 읍내로 가는 아침 버스를 타고 병원에 도착해 응급실로 직행했습니다.
아이를 병상에 눕히고 나서 갑자기…. 그때 남편과의 18년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울었습니다. 담대하고 태평한 성격으로 소문났던 제 눈에서 저절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무슨 신세를 한탄한 것도, 불평불만이 쌓인 것도, 힘들어서도 아니었습니다. 전화도 없던 시절, 남편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그렇게 혼자, 그것도 뒤늦게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간 사실이 막 겹쳐지면서, 지치면서 뭔가 억울하고 안타까웠던 모양입니다.
며칠 뒤 집에 들어온 남편에게는 눈물을 보이지도 않았고 바가지도 긁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고만 태연히 말했습니다. 군인의 아내가 그런 정도의 일로 야전에서 뛰는 남편에게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고 저는 믿어 왔습니다.
거기서 고생한 보답일까요? 저는, 아니 물론 남편의 운에 따른 것이겠지만, 어쨌든 고맙게도 후방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서울 한복판으로 말입니다. 남편이 청와대 근처 부대로 인사 발령을 받은 덕분이었습니다.
경찰관들과 함께 사용하는 관사가 정릉쪽에 있었습니다. 15평. 그러나 앞서 철원에서의 생활에 비하면 그야말로 이곳은 한참 ‘상류’였습니다. 정말 살 맛 났습니다. 그것도 그 안에서 4년이나 있었습니다.
물론 직급에 따라 집을 옮겨야 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세 차례 이사하기는 했지만 별로 힘들지 않았습니다.
“군인의 아내는 남편에게 부담 줘서는 안 된다”
img2R서울에서도 숲이 뒤에 있는 아파트여서 환경이 그만이었습니다. 길 하나만 건너면 바로 병원도 있고 약국도 있었습니다. 서울이니 문화시설이야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정릉에서 살면서 놀랍고도 고마운 사실을 한 가지 깨달았습니다. 아이들이었습니다. 정릉에서 둘째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두 딸이 아빠의 직업적 특성이나 놓인 처지를 본능적으로 이해했던 것일까요?
첫딸은 오지에 있을 때 예의 연탄가스 사고 말고는 그 추운 곳에서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아 참 크게 엄마 아빠를 도와주었습니다. 예방접종도 모두 읍내 보건소에서 했습니다.
근처에 병원도 드물고 차도 잘 다니지 않는 최전방에서 한밤중에 아이가 아프면 참 난감하거든요. 그런데 둘째딸은 집 앞에 병원이다 약국이다 다 있는 것을 일찌감치 알았는지 태어나서 2∼3년 동안 줄곧 잔병치레로 날을 보냈습니다.
예방접종도 둘째는 전부 병원에 가서 보건소보다 몇 배씩 비싼 돈을 내고 했는데도 말입니다. 돌이켜봐도 저로서는 참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정릉에서의 생활이 끝나고 다시 우리는 경남 진해로 집을 옮겨야 했습니다. 남편이 육군대학에서 교육받을 때입니다. 관사는 부대 안에 있는 낡은 아파트형 건물이었습니다. 일제시대때 지었다고 하는데 처음 건물이 세워졌을 때는 근동에서 구경하러 올 정도로 새로운 스타일의 주택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해 보고 (내색은 안 했지만)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우선 평수로 7평이었습니다. 공간을 어떻게 나눴는지 거기서 큰방, 작은방이라고 방이 2개 있었습니다. 현관 문을 열면 사람 둘이 누울 만한 쪽마루가 있고, 방이 2개, 화장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화장실은 이웃집쪽으로도 문이 나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두 집에 하나꼴로 설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쪽 집에서 화장실을 쓸 때는 다른 한 집에서는 쓸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지금과 같은 수세식이 아닌 재래식 화장실이었습니다.
1960년대가 아닌 91년인가 92년인가 그랬습니다. 서울에서 생활할 때 적게나마 마련했던 알량한 짐들마저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여덟 자짜리 장농도 반만 똑 잘라 넉 자짜리만 들였습니다. 그것과 냉장고를 붙여 놓으니 쪽마루(그것을 거실이라고 부르기는 했습니다만)가 꽉 찼습니다. 그것이 살림살이 중 제일 큰 것이었습니다. 나머지 짐들은 포장한 채 경기도 원당의 친정집에 되는 대로 쌓아 두고 내려갔습니다.
두 딸이 여섯 살, 네 살로 아직 어렸기 때문에 큰방에서 엄마 아빠와 함께, 그러니까 네 식구가 같이 누워 잠을 잤습니다. 몸집들이 크지 않아서 넷이 어떻게 누울 수는 있었지만 방의 길이가 짧았습니다. 누우면 문턱 바깥으로 발이 나가는 바람에 남편은 늘 구부리고 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부대 안에 있는만큼, 까짓것 여름에는 문을 다 열고 살아도 무방하다고들 하지만 겨울에는 추위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월급의 40%가 난방비로 들어간다고 하면 곧이곧대로 들을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이란 어디까지 간사한 존재인지, 서울 정릉을 떠나올 때는 4년도 짧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진해에서의 6개월은 6년보다 더 긴 것 같았습니다. 다른 동에 가 보면 남편보다 높은 계급의 가족은 9평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9평짜리를 보면 상대적으로 궁궐 같았습니다. 서울에 살 때는 15평도 좁게 느껴졌었는데 말입니다.
‘몸으로 때워야’ 하는 관사 생활
유선전화를 하면서 수화기를 들고 온 집안을 다 왔다갔다 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정말 좁고 춥고, 후줄근했습니다. 화장실을 쓰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 집이든 이웃집이든 다들 생활 주기가 비슷한 까닭에 특히 아침시간대는 화장실 ‘러시아워’였습니다. 그래서 용변은 대부분 아이들을 데리고 부대 밖으로 나가 가까이에 있는 은행에서 해결했습니다. 큰아이가 일곱 살이 되어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학교에 가서 용변을 봐야 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거기서 나오기 한 달 전에는 화장실을 재래식에서 수세식으로 바꾼다고 온 집안을 헤쳐놓으면서 공사가 벌어졌습니다. 어떻게 마지막 한 달이 지나갔는지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을 만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 관사는 나중에 얘기를 듣자니 1990년대 중반인가 철거했다고 합니다.
그곳을 거쳐온 여러 장교들이 “우리가 이런 곳에서도 살았다는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한 채라도 남겨 놓자”는 의견을 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군에서는 단 한 채도 남겨 놓지 않고 모두 철거했다고 합니다. 그 곳에서의 생활은 제게는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육대(陸大)를 떠나 경기도 일산의 모 사단 관사로, 평수로 치면 7평에서 다시 15평으로 이사했습니다. 부대 맞은편, 경기도 고양시 풍동에 관사가 있었습니다. 아들을 여기서 낳았습니다. 아이를 낳고 곧 겨울이 닥쳤습니다.
이 곳의 관사 역시 오래 돼 보일러가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마저 혹한기가 되자 터져 버렸습니다. 군대 농담처럼 우리도 ‘몸으로 때워야’ 했습니다. 전기장판을 펴 놓고 그 위에 담요를 깔고 지냈습니다. 밤에는 다섯 식구가 한데 엉겨 자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못 하게 됐습니다.
추위 때문에 전기 공급이 중단되고 누전 사고도 생기고 하는 바람에 전기장판을 쓸 수 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온 가족이 그 곳에서 가까운 친정집으로 몰려 들어갔습니다.
추위 때문에 그렇게 친정으로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군인 가족은 부득이하게 친정이든 시댁든 친지 집으로 찾아들어가 신세를 져야 하는 일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들어갈 관사가 정해져도 앞서 살던 가족의 사정으로 아직 집을 비우지 못했을 때, 또는 이런저런 이유로 이사 시기가 어긋나 두세 달씩 이른바 ‘공중에 떠야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 이사를 15번 다니는 사이사이 친정에서 잠시 신세를 져야 했던 일이 네 차례쯤 있었습니다. 그런데 추워서 친정에 들어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이 때는 고맙게도 한 달 만에 친정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사단에서 구 관사 인근에 새로 아파트 1개동을 지어 분양(?)한 덕분이었습니다. 평수도 18평으로 넓어진 데다 모든 시설이 새것이었기 때문에 그 전 집들에 비하면 한 마디로 호텔이었습니다.
거기서 2년을 생활한 뒤 남편이 중령으로 진급하고 경남 곤양으로 갔습니다. 곤양 관사도 그런 대로 살 만했습니다. 18평이었고 33개월간 있었습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다들 잘 아시겠지만 이사를 한번씩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것도 곤양으로 갈 때까지 포장이사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포장이사가 일반화되고 그것이 차라리 싸고 편리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때까지는 오로지 저 혼자 이사해야 했습니다.
항상 남편이 출근한 다음 짐을 싸는 것도, 이사를 주도하는 것도 제가 했습니다. 남편의 동료나 사병들이 이사를 도와줄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이사 비용은 똑같이 들면서 사실 제가 힘이 더 듭니다. 일일이 밥을 다 해 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딱 한 번 남편에게 “힘들어 혼자 이사를 못 하겠으니 당신이 좀 하라”고 투정을 부린 적이 있습니다. 웬일로 선뜻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사하고 짐을 풀어 보니 가재도구며 집기들이 온통 깨지고 상하고 말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이 되는 대로 박스에 짐들을 주워담기만 해 놓은 바람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그게 모종의 작전(?)이 아니었는가 싶기도 한데, 어쨌든 그 이후 이사에 관한 한 남편에게 다시 말을 꺼내는 일이 없게 됐습니다.
아이들 전학 절차에 ‘도사’가 되다
이후 태릉의 육사아파트에서 두 차례 이사를 했고, 다시 일산의 예전 살던 사단 관사로 되돌아 갔고, 거기서 지금의 육군본부 계룡대로 왔습니다.
계룡대에 들어오기 전에도 집이 비워지지 않아 일단 빈 집으로 들어갔다가 한 차례 더 옮겨 지금 자리로 들어온 것까지 해서 모두 15번입니다. 우리는 중뿔나게 다섯 식구지만 평균 네 식구 정도니 20평 정도면 그런 대로 살 만합니다. 다만 세탁기 놓을 곳이 마땅찮습니다.
수도꼭지가 화장실에만 있기 때문에 세탁기를 사용하려면 호스 연결을 위해 화장실 문을 노상 열어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이 어린 다른 집은 그냥 화장실 문을 열어 놓고 가족들이 볼 일을 보고 하는 모양입니다.
우리 집은 아이들이 중·고교생들이어서 난리를 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화장실 문 아래쪽을 우유 집어넣는 구멍 만하게 뚫어 놓고는 그리로 호스를 잡아빼 마루에 놓아 둔 세탁기를 사용합니다. 이 곳을 떠날 때 그 문을 잘라낸 것에 대해서는 돈을 좀 물어야 한다고 합니다.
결혼한 여자가 자기 집을 갖지 못하고, 자기 집을 꾸미지 못하고 철철이 옮겨다녀야 한다는 것은 참 힘도 들지만 뭔가 허전하고 안타까운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국가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하는 군인의 아내로서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도 저는 나은 편입니다. 부모를 모시고 사는 가족도 여럿 보았습니다.
그런 경우 방은 부모와 아이들이 제각기 차지하게 되고 부부는 거실에서 잠을 자고 생활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를 모시지 않더라도 일반적으로 아이들 남매가 중·고교생이 되면 방을 하나씩 주게 되는데 그럴 때도 부부는 거실에서 생활해야 합니다. 아마 그것이 일반적인 중간장교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좁은 집에서 칼잠을 자고 아껴 써가면서 추위와 싸우고 하는 것들은 군인 가족으로서 당연하고 또 얼마든지 그런 속에서도 생활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의 교육 문제쪽으로 눈을 돌리면 참 말씀드리기도 민망합니다.
공부도 문제지만 정서적 측면에서도 아이들에게는 미안할 뿐입니다. 길게 말할 것 없이 저의 경우 세 아이가 전학다닌 횟수를 다 합치면 공교롭게도 지금까지 이사다닌 횟수와 똑같습니다.
맏이가 초등학교 3차례, 중학교 2차례, 고교 2차례 전학했습니다. 둘째는 초등학교 3차례, 중학교 2차례 학교를 옮겼고 이제 초등학교 5학년생인 막내도 벌써 3차례나 전학했습니다.
이제 얼마 후에는 남편이 새로운 보직 발령을 받기 때문에 녀석은 초등학교 단계에서만 곧 네번째 전학을 해야 합니다. 초등학교 전학은 학교와 학교간 통보만 하면 되지만 중·고교는 교육청에까지 걸치는 이런저런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합니다. 남편을 잘 만난 덕(?)에 저는 초·중·고 전학 절차에 관한 한 ‘도사’가 됐습니다.
남편의 변경 시기가 되고 이내 전학해야 한다고 하면 그때부터 사나흘 동안 아이들의 눈은 노상 빨갛게 퉁퉁 부어 있습니다. 학교에 정을 붙이고 친구들이 생겼다 싶은데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고 어른이고 낯선 곳으로 자꾸 옮겨다니는 일이 좋을 리 없을 것입니다. 육사아파트를 떠나기 며칠 전 그때 초등학생이던 둘째 딸아이가 하루는 평소보다 늦게 귀가했습니다.
어디를 갔다 왔느냐고 물었더니 학교 주변, 태릉 일대 복덕방을 헤매고 다니면서 전셋값을 죽 적어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전학가기 싫으니 그 곳 어디 전세라도 얻어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가슴이 미어졌지만 도리가 없었습니다. 막내 녀석은 “나는 겨울방학 끝날 때마다 전학하기 때문에 방학숙제 걱정이 없어서 좋다”고 합니다.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전학가게 되면 같은 학군에서도 비교적 좋은 학교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점도 있습니다. 남편의 새로운 근무지로 아이들을 전학시키려고 보면 해당 지역 학생들에 대한 배정이 모두 끝나 있기 십상입니다.
전학가야 하는 아이들 입장에서는 그 곳에서 그래도 좀 더 나은 학교로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제1학교보다 제2학교로 편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뭔가 불이익을 받는 것 같은, 서운함이 듭니다. 아이들과 관련해 공연히 죄스러운 일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아빠의 진급이나 누락 후유증도 큽니다.
슬프니 고프니 해도 제복을 입은 사람과 그 가족은 때가 되어 진급하면 그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군에서 때가 되어 진급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대령까지는 사람의 노력 반, 운세 반이고 별을 다는 것은 오로지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영관급 시절부터 진급은 쉽지 않습니다. 소령에서 중령, 중령에서 대령 되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진급자는 찔끔 소수이고 누락자는 늘 다수입니다.
그런데 그 진급과 누락이 어른들만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진급과 누락자 명단이 나오면 그 소문이 관사 일대는 물론 학교에서도 확 돕니다. 학교에서 친하던 아이들 중 누구 아빠는 진급하고 누구 아빠는 떨어지고 하는 얘기가 재빨리 퍼집니다. 그것만큼 사람 사이에 서먹서먹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급한 사람이나 가족은 웃을 수만도 없고 오히려 누락된, 친한 사람들 때문에 더 침울한 표정을 지어야 합니다.
아빠의 진급여부에 따라 아이들도 서먹해져
어쨌든 이제 우리 집은 얼마 후면 다시 이사해야 하고 아이들은 전학해야 합니다. 남편이 후방에 죽 있었던만큼 이제 전방부대로, 오지로 다시 나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상황이 초급장교 시절과는 사뭇 달라져 있습니다.
당장 이제 우리 부부가 중년인데 집 한 칸 없이, 하염없이 떠돌아 다닐 수만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위로 두 아이가 이제 대학 입시 준비에 치중해야 하기 때문에 또 전학가고 할 심리적, 실제적 여유가 없어졌습니다. 남편 혼자 임지로 떠나고 제가 주말에 찾아가든가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최근 들어 정착하지 않고 또 관사를 찾아 들어가는 일은 못 하겠다고, 남편과 다투는 편입니다.
진작 집을 좀 마련해 놓지 그랬느냐고 남들이 물으면 할 말이 없습니다. 물론 군인 가족 중에서도 영관급 시절 이미 집을 마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반 민간인들처럼 발빠르게 움직여 분양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경우 억척스럽게 월급을 모아, 그것도 대부분 전세를 끼고 집을 사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네 식구가 생활하고 아이들 교육시켜가면서 목돈을 모으려면 무척 오래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전세를 끼고 집을 사 놓는다고 해도 전세금 내줄 돈을 마련하기가 어려워 언제 사 놓은 내 집으로 들어갈지 요원한 처지가 적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집을 마련해 두면 마음이나마 든든하고 또 나중에 어떻게든 정착할 수 있다는 희망은 가질 수 있으니 한결 낫겠지요.
맞벌이라도 하면 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군인 가족 가운데 맞벌이는 제가 과문해서인지 잘 보지 못했습니다.
나름대로 이유를 생각해 보는데 아마 남편의 주거가 일정하지 않은(?) 터에 부인이 고정된 한 지역에서 직장을 갖기가 쉽지 않겠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일 것 같습니다. 또 예나 지금이나 군에는 좀 보수적인 분위기가 있습니다.
명예를 중시하는 조직이어서 그런지 부인들이 택할 수 있는,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고 품위 있게 가질 수 있는 직업도 몇 가지 되지 않습니다. 이래저래 맞벌이가 적은 것 같습니다.
어쨌든 착실히 모아 가면 (사실 군인 가족들은 대다수가 검약과 저축이 몸에 배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남편의 위치쯤 되는 시기에 전세 얻을 돈을 준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요새 남편에게 주장하는 ‘정착’도 전세를 얻겠다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친정에서 가까운 일산 쪽으로 좀 더 값이 싼 곳을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어휴, 저나 애들이나 이제 정말 이사다, 전학이다 하는 것은 좀 싫증이 나기도 했습니다.
“군인은 특수한 집단 아니다”
어차피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세상살이가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군인이라고 해서 저렇게 죽는 소리를, 장타령을 할 이유가 있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혹은 거꾸로 군인 가족이기 때문에 좋은 점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전국 방방곡곡 가서 산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좀 더 넓은 세상, 다양한 지역을 실컷 구경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가족에게 특히 아이들에게는 소중한 경험이자 공부가 된다는 점에서는 그만입니다.
또 가족들도 가장을 따라 절반은 군생활을 하게 되는 셈이어서 군생활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되고, 또 남편의 생활에 많은 부분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부대 행사다, 공동 작업이다, 지역 행사다 해서 참여할 일들이 꽤 됩니다.
남편들이 가족과 시간을 같이하는 일이 적기 때문에 다른 직업을 가진 분들보다 심적으로 좀 더 가족들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일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죠.
해마다 국방예산을 놓고 언론에 이런저런 말들이 나옵니다. 제가 기자분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했던 것은 우리 군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밝히고, 이렇게 힘들게 꾹꾹 참고 살고 있으니 뭘 더 내놓으라, 집을 달라, 떡을 달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사실 육사를 나와 소신 있게 택한 군인의 길, 그런 군인 가족으로서 좁고 춥고 부족하고 불편한 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맞춰 가급적 즐겁게, 군인의 가족답게 힘차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지루하게 얘기를 늘어놓은 것은 우리 군인 가족들이 갖고 있는 한 가지, 딱 한 가지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군인은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군인과 군대는 민간인과 선이 그어진, 무슨 별다른 조직이나 특수한 집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제복을 입고 나라를 지키는 일선에 나와 있다는 것을 빼면, 군인도 엄연한 직업이고 군인 가족도 일반 민간인 가족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남편이 그렇듯 우리 군인 가족들도 명예와 보람을, 군인이라는 직업이 갖는 가치를 ‘삶의 질’보다 앞서 생각한다는 점이 다를 것입니다.
1990년 이후 문민은 무조건 우위에 있고 군은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가 생겨났다는 것을 우리 군인 가족은 피부로 느껴 왔습니다.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대다수 중간과 아랫계급의 군인과 그 가족은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며 성실하게 살고 있습니다. 나는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릅니다.
다만 세상 사람들이 ‘군인과 군인 가족이 어려움 속에서도 그야말로 군인답게, 군인 가족답게 생활하고 있구나’ 하는 시선을 가져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 당당하고 멋있는 군인에게 반해 결혼한 저까지야 아니라도 군인과 군인 가족이 명예심을 갖고, 긍지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보고 격려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익명이라지만 제가 이렇게 주절주절 긴 얘기를 늘어놓은 것을 나중에 남편이 알면 화를 낼 것이 틀림없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