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가 주목한 경주 양동마을 600년을 보다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땅은 비밀스러운 말을 감추고 있는가. 일찍이 여러 물형(物形)에 비유하여 땅의 말을 해석하고 그 터전 위에 자신들의 이상을 실행에 옮긴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어언 60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들의 꿈은 기억의 흔적들로 남아 역사마을이 되었다.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된 양동마을은 전통가옥과 생태철학의 보고(寶庫)다. 안동 하회마을이 물 위에 뜬 연꽃이라면 경주 양동마을은 ‘물(勿)’자 형국을 하고 있다. 인간의 마을을 자연물의 형상이나 문자 모양으로 비유하는 사유체계에는 조화로운 삶에 대한 염원이 깃들어 있다.
“보름날 전후에 이 대청마루에 앉아서 용마루 위로 걸어가는 달의 발자국 소리를 들어보세요. 도시문명에 볼모로 잡힌 당신은 울고 말 겁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차마 돌아갈 수밖에 없어서….”
바람을 가둔 산골의 음성이 새벽잠을 깨웠다. 양동으로 가는 길은 공간이동이 아니다. 꽉꽉 막힌 문명의 도시 한복판에서 에어컨 바람을 맞다가 시간여행자가 되어 나선다. 안강~영천 간 28번 국도에서 형산강을 건너면 하늘이 빚어내고 땅이 감춰둔 이 땅 최고의 길지(吉地)가 있다. 넓은 들판 모퉁이에 꼭꼭 숨은 마을은 밖에서는 여간해서 보이지 않는다. 고귀한 것들은 언제나 그렇듯 자신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마을 앞에 들어서면 뭐가 뭔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기와와 초가집 몇 채가 전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몇 개의 포인트만 찍어서 이 마을의 600년 비밀을 캐려 든다면 가망 없는 문명인이다. 멀찍이서 전모를 다시 보고 속 깊은 탐색에 나서야 한다. 종을 엎어놓은 모양의 성주산에 오르면 한눈에 조망된다. 왼편 멀리 안강평야가 보이고 동해남부선 철로가 마을 오른쪽 안락천 앞에서 거의 직각으로 꺾여 놓였다. 때마침 열차가 들어오다 방간산 밖으로 사라진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 마을과 안산 사이로 철로가 놓여 터를 깨트릴 뻔했다. 마을이 발칵 뒤집혔고 기필코 막아냈다. ‘勿’자 형국의 마을 앞에 철로가 놓이면 ‘혈(血)’자가 되어 피를 흘리게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훗날 양동초등학교도 그래서 돌려 앉혔고 마을 앞 뾰족 첨탑 교회는 초등학교 쪽으로 옮겨서 낮게 지었다.
능선과 골골마다 차곡차곡 들어선 기와집들과 초가집들은 잘 영근 포도송이를 연상케 한다. 흡사 배가 앞으로 나아가는 모양 같기도 하다.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의 관가정(觀稼亭). 신동연 기자 | |
‘勿’자 획순으로 제1획 중간 등성이 흥(興)자 모양의 기와집이 향단(香壇)이고 끝자락이 관가정(觀稼亭)이다. 가장 긴 2획은 좌청룡이자 안산(案山)이 되는데 성주산과 방간산까지 이어져 마을 앞을 감았다. 제2획이 시작하는 곳에서 내려온 제3획 능선에는 여강이씨 대종가인 무첨당(無添堂)이 있다. 제4획에 서백당(書百堂)이 자리 잡았다. 양동마을의 중심이다.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1463~1529)과 문묘에 배향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은 손씨와 이씨, 두 가문이 자랑하는 인물들이다. 숙질(叔姪) 간인 두 사람은 서백당의 산실(産室:해산방)에서 태어났다. 마을의 중심자리인 서백당 안채 맨 오른쪽 방은 세 인물이 태어난다고 해서 삼현지지(三賢之地)로 불린다. 시집간 딸이 해산하기 위해 친정에 와도 절대 이 산실은 허락하지 않는다. 부정탈까봐 방문객에게도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 세 번째 인물을 기다려서다.
양동마을의 세계유산 가치는 크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마을 유형인 씨족마을 중에서 가장 오래 되었고, 터를 잘 잡아 기능과 경관 측면에서 정주환경이 완전하다. 이런 외형적 요소에 필적할 만한 정신적 유산과 가치는 무엇일까.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지만 정신적 유산과 가치는 결코 유네스코가 보존해주지 못한다. 마을회관에서 보존위원장과 이장을 만난 다음, 문화해설사 이지휴(61)씨의 안내로 골골을 누볐다. 10년 전 서울생활을 접고 귀향한 그의 다채로운 홍보활동은 매우 열정적이다. 걷고 또 걸어도 가파른 골목길은 얽히고설키고 새로운 가옥들이 숨었다가 나타난다. 작은 산속마을이지만 하루 만에는 절대로 다 답사할 수 없는 곳이 양동이다. 양동의 비밀은 어쩌면 이곳에 태를 묻은 이들도 끝내 다 캐내지 못할 것 같다.
얼마 전, 유서 깊은 향단에 돌아와 회재와 그의 아우 농재(聾齋) 이언괄의 각별한 형제애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출판을 준비 중인 이욱(52)씨는 할아버지들의 유훈을 조용히 실천하는 후손이다. 회재가 강계에 유배되자, 그의 아우 농재는 아픈 몸을 이끌고 험로로 형을 찾았다가 고향에 돌아온 직후 세상을 뜬다. 비통한 회재는 유배지에서 ‘세세토록 형제 되어 이생에서 못다 한 인연 내생에서 다시 맺어 이별 없이 살아보자’는 제문을 적어 보낸다. 퇴계와 율곡의 선하(先河)인 성리학자 회재의 인간적인 면모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마을은 외형적 보존이 아주 잘된 곳입니다. 정부 지원을 받아 하드웨어는 잘 지켜내고 있는 셈이지요.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존재 이유와 가치를 되찾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 마을이, 또 저 같은 종손이 국가와 사회에 무엇을 반대급부로 돌려줄 수 있는지 많이 고민해요. 단지 관광서비스 차원에서 그친다면 30년도 못 가서 빈 껍데기가 될 겁니다.”
좌해금서(左海琴書)라는 흥선대원군의 편액이 걸린 무첨당 제청(祭廳)마루에서 만난 한국국학연구원 이지락(43) 객원연구원은 신중하면서도 열린 사고로 손님을 맞았다. 회재의 17대손인 그는 선인들이 왜 매화를 예찬한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뜰 앞의 매화를 계속해서 지켜보다가 이른 봄날, 막 꽃망울을 터뜨리는 광경을 보고 고통과 생성의 비밀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종손은 세상사에 깊숙이 관여하지 않는 게 행동철학입니다. 종가 보존을 위해서지요. 종손 1대가 자신의 생각을 곧추 펼치면 3대가 고생합니다. 그래서 석묵(錫默) 고조부께서는 한·일 강제병합이 되자, 매일 아침 홧술로 소주 한 종발씩 들이켜다가 이듬해에 생을 마감했지요. 이런 시대를 살면서 취하지 않으면 무엇 하느냐고요. 독립운동을 하고 싶어도 못했던 겁니다.”
조선 전기 씨족마을의 전형, 양동마을은 신비한 지리적 여건과 다채롭고 짜임새 있는 전통가옥으로 세계인을 부른다. 중장비를 동원하여 땅의 원형을 지워버리고 세운 주택단지에서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잃어버린 이상향 같은 곳이다.
(공동취재: 류재백 교수·대구 한의대)
김종록 객원기자·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