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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여행기(궁남지, 정림사지, 낙화암, 고란사, 부소산성)
2018. 7. 7.(토)
백제 고도 부여를 찾습니다.
어디부터 갈까? 연꽃 축제가 열린다는 궁남지부터,
축제장 입구부터 좁은 길에 차들은 잔뜩 주차되어 있고...
흔쾌히 동행이 되어 주기로 한 동서가
어렵게 주차를 하고 궁남지에 들어섭니다.
부여 궁남지에서 열리는 서동연꽃축제는
7. 6.(금) ~ 7. 15.(일)까지로
오늘이 2일 차입니다.
연꽃축제가 열리는 궁남지의 역사는
삼국사기 백제 무왕조에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즉 “무왕 35년(634) 3월에 궁남에
연못을 파서 물을 20여 리나 끌어들였다.
네 언덕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
또 같은 왕 “39년(638) 봄 3월에는 왕과 왕비가
큰 연못에 배를 띄웠다.”고 합니다.
지금은 ‘백제 오천결사대 출정상’이
창검을 겨누고 있는...
현재의 궁남지 모습은 1965년부터 1967년까지
3년간에 걸쳐 내부를 준설하고,
가장자리의 언덕은 흙을 쌓은 후,
수양버드나무를 심은 결과랍니다.
현존한 궁남지는 13,000여 평이며,
주변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토사를 매립하여 경작지로 이용한 것이며
정비 이전의 궁남지는 수만 평이 넘는 늪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연못에는 백연
홍연이 따로 따로...
궁남지에서는 '홍연 백연 부동석'인가 봅니다,
나무다리 건너 궁남지 한가운데 포용정,
진분홍연꽃잎을 둘러 축제분위기가 살아 납니다.
터널엔 호박과 박이 주렁 주렁~~
궁남지를 나와 정림사지로,
자동차 시트는 엉덩이가 데일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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칡냉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정림사지로 들어서니
양쪽 연못에서 색색의 잉어들이
벙긋 벙긋 입 벌려 인사해줍니다.
정림사지(定林寺址) 5층 석탑(국보 제9호)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당(唐) 나라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한 사실을 기리기 위해
탑신(塔身) 4면에 기공문(紀功文)을 새겨 놓아
'평제탑'(平濟塔)으로 불리기도 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의 미술사적 의의는
이 석탑이 미륵사지 석탑과 더불어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탑이라는 점이다.
또한 목조탑의 구조를 지녔지만 돌로 표현된 탑으로
목조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석탑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석탑의 주변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가람배치의 전모가 밝혀졌고,
일찍이 석탑 주변에서 “太平八年戊辰定林寺(태평8년무진정림사)”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 초기에는
정림사라고 불렀던 것이 확실히 밝혀져,
그 뒤 이 석탑의 명칭을 정림사지오층석탑이라 부르게 되었다.
태평 8년은 1028년(현종 19)으로 사찰을 크게 중수하였던 해로 생각된다.
-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
석탑 기공문에 당의 소정방
자신의 공적까지 새겨 넣다니...
당시 백제의 어렵고 혼란스러운 수난사가
지금까지 생생이 전해져 옵니다.
5층 석탑과 남북으로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옛 강당지에 세워진 절집(?) 안으로...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08호)
전체 높이가 5.62m에 이른다.
이 불상은 정림사지 경내 팔각 대좌 위에 안치되어 있으며
국보 제9호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마주보고 있다.
현재 불상의 위치는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이며,
현지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고려시대에
절을 중창할 때 만든 불상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이 있던 강당자리 인근에서
‘大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대평8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라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정림사라는 절의 이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에서 -
가만히 보면 석불 얼굴과 몸통 부분을
각각 다른 바위를 사용해서 만든 것 같고
얼굴은 처음 모습 그의 그대로 소탈한 모습이지만
몸퉁 부문은 어디가 떨어져 나가긴 했는데
어디쯤이 떨어져 나간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묘하지만 자연스러운 모습...
5층 석탑은 6세기 중엽에 세워져
백제와 정림사의 부침을 다 지켜보았을 것이고
석조여래좌상은 1028년(고려 현종 19년)에
정림사를 중수하면서 세웠을 것이라하니
언제인지, 무슨 사유로인지 모르지만
이 정림사지에서 두 석탑과 석불은
400여년의 세월 차이를 뛰어 넘어
우리의 천년 세월을 함께 지켜봐 온 셈입니다.
그런 백제역사유적지구 정림사지는 세계유산입니다.
정림사지 오른쪽 정림사지박물관으로 갑니다.
연못도 있고
정림사를 재현하고 있습니다.
상자벽속으로 '무량사'가 그대로 옮겨 온 듯...
소원지, 무슨 소원 적었냐고요?
제발, 세월 좀 잡아 매달라고....
영상실에서 다시 한번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만날 수 있습니다.
『 정제미, 조형미, 비례미를 지닌
백제 석탑의 완성작
국보 제9호
儉 而 不 陋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華 而 不 侈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
[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
박물관에서 나와 부소산성 뱡향으로...
먼저, 구드래선착장에서 고란사 선착장까지
황포돛단배(편도 5,000원)를 탑니다.
이런 황포 돛대를 달고 바람 맞으며
백마강을 유유히 흐를 줄 알았는데
실제는 모터로 가는 배인 모양입니다.
30명 미만일 때는 저 조그만 유람선을 띄운다고...
주말이라 목선 몇대가 고란사 선착장까지
왕복 운행을 하고 있습니다.
흐르는 백마강에서 낙화암을 올려다 보면서
선장님의 삼천 궁녀 이야기를...
『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에 종소리가 들리어 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 꿈이 그립구나...』
백마강 노래 한소절이 끝날 무렴,
낙화암이 바로 저기 보입니다.
바위 절벽 가운데 보이는 붉은 글씨 落 花 巖
조선시대 대학자 우암 송시열 선생이 썼다는데...
백제 멸망의 한을 상징하는 낙화암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660년 백제 왕성을 함락하자
궁녀 등 수천명이 대피했다가 스스로 백마강으로 뛰어내려
목숨을 끊은 부소산 서쪽 절벽인데
<삼국유사>에는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라는
뜻의 ‘타사암(墮死巖)’으로 기록돼있다고 합니다.
낙화암에서 떨어진 궁녀는 정말 삼천명이었을까요?
어느 퀴즈 문제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의자왕과 삼천 궁녀한 이야기가
처음 등장한 것은 뜻밖에도 조선 시대랍니다.
삼국 시대가 끝나고 천 년이 지난 조선 중기에
선비들의 시에 등장했지요, 그 과정을 추적해 볼까요?
조선의 한 선비가 낙화암 근처를 지나게 되었는데
선비는 그 곳에서 우연히 '삼천 궁녀'라는
말이 나오는 시를 읊었다고...
그 시를 들은 사람들은 낙화암에서
삼천 명의 궁녀가 떨어졌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그 뒤 여러 선비가 시를 지을 때
'삼천 궁녀'라는 말을 즐겨 썼답니다.
그러면서 낙화암 전설은 점점 더 널리 퍼져 나갔답니다.
그렇다면 삼천 궁녀가 실제가 아니라는 증거가 있을까요?
물론이지요. 그것은 첫째, 백제가 멸망할 당시
수도인 사비성의 인구는 5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그 중 궁녀가 삼천 명이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요,
둘째, 현재 남아 있는 백제 왕궁의 터를 살펴보면
삼천 궁녀가 살기에는 턱없이 좁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삼천 궁녀가 낙화암에서
떨어졌다는 건 사실이 아니랍니다.
하지만 삼천은 아니더라도 백제 멸망을
분개하며 절개를 지켜려 저 백마강에 뛰어내린
사람들도 분명 여럿이 있었겠지요?
목선은 고란사 선착장에 닿았습니다.
입장료(2,000원)를 내고 부소산으로...
먼저 고란사(皋蘭寺)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창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라는 설이 전하며,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중창하여 고란사라 하였다.
그 뒤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하기 때문에 고란사라 불리게 되었다.
1028년(현종 19)에 중창하였고,
1629년(인조 7)과 1797년(정조 21) 각각 중수하였으며,
1900년은산면에 있던 숭각사(崇角寺)를 옮겨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31년에 지은 것을 1959년 보수,
단장한 정면 7칸, 측면 5칸의 법당과 종각인 영종각 뿐이다.
절의 뒤뜰 커다란 바위틈에는 고란초가 촘촘히 돋아나 있고,
왕이 마셨다는 고란수의 고란샘터가 있고,
주위에는 낙화암·조룡대(釣龍臺)·사비성(泗沘城) 등이 있다.
절 일원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
-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에서 -
고란사 뒤 고란정,
고란정에는 이런 전설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지요,
『 한 할아버지가 나무하러 산에 갔다 샘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 때 산신령이 나타나
'이 샘물을 마시면 한 모금에 일 년씩 젊어질 것이다'고...
그래서 좋아라 하면서 샘물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집에서 기다리던 할머니는 해 질 녘이 되었는데도
할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되어
할아버지 찾아 온산을 이리저리 헤메고 있는데
어디서 애기 우는 소리에 가 봤더니,
샘물 앞에 애기가 울고 있더라는...』
고란정 샘물 드시려 줄 서신 여러분,
제발 열모금 이상은 드시지 마시길요
고란사 선착장을 뒤로하고
부소산 계단길을 줄지어 오릅니다.
낙화암 위 백화정(百亭정)
백제 멸망 당시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지은 정자이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의 시인인 소동파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부소산성 북쪽 백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 구조는 육각형 평면을 가진 육모지붕으로 꾸몄다.
마루 바닥 주변에는 간단한 난간을 설치하였고,
천장에는 여러가지 연꽃무늬를 그려 놓았다.
-위키백과에서 -
백화정에서 걸어내려가 난간에 서니
눈앞엔 누런 황톳물 백마강이 흐릅니다.
여기가 그 삼천 궁녀 낙화암,
가파른 수직 바위절벽인 줄만 알았는데...
백화정을 뒤로하고 부소산 오르는 길 소나무 연리지,
서로에게 얼마나 애틋했으면 저렇게...
사자루
조선 순조 24년(1824)에 군수 심노승이 임천군 군사리에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 임천의 관아 정문이었던 배산루를
1919년에 이곳으로 옮겨 짓고는 사자루라 이름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으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오른편 북쪽 칸에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었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건물 앞면에는 조선 후기 의친왕 이강이 쓴
'사자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사방이 트여있는 높은 곳에 있어
부여의 주변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좋은 누각이다.
건물을 옮겨 세우기 위해 땅을 고를 때 '정지원'이라는
이름을 새긴 백제시대 금동석가여래입상이
발견되어 주목 받는 곳이기도 하다.
- 위키백과에서 -
길 옆에는 또 다른 고란약수 이야기...
궁녀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궁녀사(宮女祠)
걷기 좋은 사비길도 걷습니다.
부소산성 퇴뫼식 산성길도...
영일루(迎日樓)
충남 문화재자료 제101호. 조선시대 홍산현(鴻山縣) 관아 입구에 있던 것을
1964년 옛 영일대(迎日臺)가 있던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사비도성(泗沘都城)의 비원이던 부소산 동쪽 산정에는
임금이 매일 올라가서 동편 멀리 계룡산 위로 떠오르는 해를 맞이 하며
국태민안을 기원하던 영일대가 있었으며,
서쪽 산정에는 임금이 달맞이를 즐기던
송월대(送月臺, 일명 迎月臺)가 있었다고 한다.
영일루에 오르면 동쪽으로 정동리 일대의
광활한 평야와 청산성이 한눈에 굽어보인다.
- 한국민속백과대사전에서 -
군창지(軍倉址)
이른바 내관(內官) 가운데는 곡물사무를 맡은 곡내부(穀內部)와
창고사무를 맡은 내경부 · 외경부 따위가 있었는데,
대규모 국창(國倉)으로서의 구실을 한 것이 백제 말기의 수도
인 부여에 있던 사비성의 동쪽 정상부에 있었다.
이 곳은 영월대(迎月臺)라 하여 넓고 평평한 광장인데,
민족항일기에 이곳에서 길이 약 70m, 넓이 약 7m,
땅속 깊이 47㎝ 정도의 창고유적이 발굴되었으며,
타다 만 쌀·보리·콩 등의 찌꺼기가 많이 나왔다.
그리하여 이를 백제군창이라 이름붙인 것인데,
이는 660년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사비성이 공격을 받고 망할 때에 모두 불에 타버린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지금도 이 군창지 일대를 파보면 불에 탄 쌀·보리·콩 등이 많이 나오고 있어
사비성이 함락될 때의 비극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한편, 이들 불에 탄 군량들은 백제시대 것이 아니고
조선시대 것이라는 설도 있다.
-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서 -
반월루(半月樓)
반월루에 올라 부여 읍내와
반월형으로 읍내를 감싸고 도는
백마강을 바라 봐도 좋습니다.
반월루 현판에는 이제 고인이 된
김종필 전 총리의 이름이...
이렇게 부소산성을 한바퀴 돌았습니다.
부소산성 매표소를 내려오니 너른 잔디 광장,
궁금해서 돌러보니 '서복사지'랍니다.
출토된 연화문와당이나 기타 유물들을 통해 볼 때,
백제 후기의 왕실이나 귀족층의 원당격인 사원으로 추정되는데
백제 멸망과 함께 불타 없으진 것으로 보인다는...
그저 우두커니 바라만 봅니다.
700년 백제 마지막 서울에 남은 것이라고는
오층 석탑과 깨어져 나간 석불
그리고 이 절터의 휑함이 전부란 말인가요?
아, 세월의 무상함이여...
2018. 7. 9
갈바람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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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동래 최만철ㆍ여영선참석
옙, 신청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