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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두바이 선교지를 돌아보고 무사히 돌아오게 됨을 감사드린다
. 세계적인 도시라서 그런지 외형적으로는 굉장히 화려한듯 보였으나 내면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나라라 생각하니 아픈 마음뿐이었다. 그래도 기독교에 대한 약간의 배려인지 아니면 세계적인 추세에 못이겨서인지 몰라도 교회를 일정 지역에서만 건축할 수 있도록 대지를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해 주고, 건축할 수 있는 비용도 융자를 통하여 쉽게 해 주고 있었다. 아무튼 가는 곳곳마다 이슬람 사원으로 도배를 해놓은듯 하였다. 한국 땅의 밤하늘은 십자가를 수놓은 듯하지만 두바이는 화려한 이슬람 사원으로 가득 채웠다. 무슬림은 매일 다섯 번씩 정해진 시간에 얼굴을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쪽으로 향하고 기도한다. 기도 시간을 알리는 음악소리와 함께 무슬림들이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장소가 어디가 되었든지 신발을 벗고 끓어 엎드려 기도하였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은 어느 곳에나 어김없이 무슬림 기도실이 큼직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심지어 공항에서도 무슬림의 기도는 멈추어지지 않았고, 항공기 출발 시간 기내에서도 출발전 기도를 알리는 음악소리가 들려왔다(이집트 항공). 두바이를 위시한 이슬람 국가가 다 복음이 들어가기까지 주님의 재림이 늦어지실터인데 바쁜 맘으로 기도하게 되고, 이슬람 국가에서 헌신 하는 선교사님들과 한인교회를 위하여 더 많은 기도와 선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돌아왔다. 무슬림은 세계적으로 15억에 다다른다. 아프리카 지역에만도 4억 2,900만, 나이지리아에도 무려 8천만이 이른다. 무슬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음성을 새롭게 들을 수 있었다.
한나라가 잘 되려면 세 가지 소리가 있어야 한다. 첫째, 책 읽는 소리, 둘째,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경제 발전 일하는 나라), 셋째, 아기 울음소리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 한 가지 추가한다면 기도의 울음소리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면 영적 전쟁은 점점 치열해지는데 성도들의 능력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실감하고 있다. 현재는 과거와 달리 기도 소리가 점점 줄어 들 뿐 아니라 더우기 울부짖는 기도 소리를 듣는 것이 싶지 않다. 개인적 신앙생활 뿐만아니라 교회적으로도 보면, 기도가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절감한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맨 먼저 성전을 청결케 하셨다. 매매하고 비둘기파는 자들의 상을 둘러 엎으시고 사람들을 내쫓으시면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하셨다. 교회가 교회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기도에 있는데 기도하지 않으면 사단의 소굴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기도의 불이 꺼져 버린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아이들을 위시한 온 교우들이 기도소리로 꽉꽉 채워야 하는데 만일 그리 하지 않으면 사단에 의해 강도의 소굴이 되어 버리고 만다. 기도 없는 성전 건축, 신앙 없는 교회 사업은 오히려 문제의 소용돌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모든 일의 우선순위가 기도에 있다. 일의 우선순위인 기도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본문 바로 전에 우리는 당시 총독이었던 빌라도를 만나 볼 수 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으니 때려서 놓겠노라고 했다. 무리가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달라”고 한다. 빌라도는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의 무죄를 내세워 풀어주고 했지만 그들의 소리가 빌라도를 이겨 결국 빌라도는 그들이 구하는 대로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십자가에 못박게 하였다.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한다. 그때 백성들과 여자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서 예수를 따라 가고 있었는데 여자들은 예수를 생각하여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그 때 예수님께서 여자들을 돌아다보시고 하신 말씀이 본문의 말씀이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 말씀을 통해 함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한다.
1.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본문에서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이다. 당시 예수님의 상황을 보면, 남 걱정할 처지가 전혀 아니셨다. 지금 주님의 상황은 겟네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가, 잡히시고 밤새 심문을 받으셨다. 그리고 처절한 모욕과 함께 채찍질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시면서 쓰러지고 또 쓰러지셔서 로마 병사 마져 힘든 예수님을 보고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대신 그의 십자가를 맡긴 상태였다. 하지만 주님은 울며 주님의 뒤를 따라오는 저희들과 저희들의 자녀를 생각하셨다. 앞으로 저들과 저들의 자녀에게 닥친 고난의 때를 바라보시며, 아픈 맘으로 저들을 권하시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도 틈새 없는 어려움들과 아픔들이 있다. 이럴 때 비록 내가 힘들고 어렵지만 먼저 주님을 생각할 줄 아는 믿음 그리고 남을 돌볼 수 있는 믿음이 나의 삶을 지배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 언제 어느 때보다도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나의 아픔보다 크게 볼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볼 때 죄인으로 보기 보다는 장차 구원받을 사람으로 보는 긍휼의 눈을 가질 수 있다면 그는 주님의 맘에 합한 사람일 것이다.
2. 나 자신을 위해 울 수 있어야 한다. 자녀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입각하면 자녀보다도 자신을 위해 먼저 기도해야 하는 필요성을 감지할 수 있다. 물론 자신과 자녀와의 기도를 비교해 본다면 부모로서 당연히 자녀가 우선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 자신이 바로 서는 것은 자녀를 바로 양육하는 소중한 자본이다. 나 자신이 바로 서 있지 못한다면 자녀에게 교사로서의 부모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녀들에게 노여움만 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위하여 울어야 할 기도 제목을 묵상해 본다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첫째, 자아의 죽음을 위한 기도 내가 죽지 못하여 내 가정과 내 교회와 내 나라를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나의 고집과 아집이 불만을 쏟아내고, 혈기라는 쓴 뿌리를 잘라내지 못하여 감사는 사라지고 오히려 흠만 잡고, 허물만 들추어내는 삶을 살게 된다.
모든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곳은 자아란 씨앗이 죽은 그 곳이다. 그런 면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출생지는 갈보리의 십자가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자아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한다. 영적인 성도가 되는 비결, 성숙한 신앙을 소유하는 방법은 ‘죽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 했다. 이 말씀은 바로 날마다 옛 성품을 새 성품으로 대신한다는 것이다. 자아가 살아 있는 성도들은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무시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며 견디지 못한다. 영적 생활에 가장 큰 걸림돌은 마귀가 아니라 ‘죽지 않은 채 살아 있는 자아’란 말이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옛사람을 죽이고, 죄의 몸을 멸하여 다시는 죄를 섬기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그 죽음을 내 안에 적용할 때 우리의 옛 성품은 죽고,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난다. 그리할 때 부활 신앙을 열매로 소유할 수 있다.
둘째, 영혼에 대한 기도와 변화에 대한 열망이 있어야 한다. 나의 영혼이 잘됨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한 비결이라고 하는 것과 나이에 걸맞는 변화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두고 기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의 충만을 갈망하고 성령의 충만한 가운데 주와 동행할 때 가능한 일이다.
드와이트 무디는 “하나님은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토록 명하신다. 만약 충만하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 특권의 맨 밑바닥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성도는 성령의 감동하심과 역사하심 속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롬 8:16). 이러한 자녀로서의 특권을 최대한으로 누리기 위해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을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대로 주의 이름을 온 천하에 전파하는 능력 있는 증거자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3. 너희 자녀를 위해 울어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는 자녀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가장 크고 존귀한 보물이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부모들은 자녀들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키워가야 하는 막중한 사명이 있다. 그러므로 자녀를 위한 기도가 절실하다. 방정환 선생님은 아이들을 ‘어린이’라고 불렀다. 이 말 속에는 ‘어리신 분’이라는 존경의 뜻이 담겨 있다.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는 공통된 고민이 있다. 다름 아닌 자녀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그것이다. 조기 교육에도 힘을 쏟으며 유학을 보내기도 한다. 교회 열심히 나가는 것보다 수학 점수, 영어 점수가 더 올라가는 것을 기뻐한다. 성경 말씀과 기도 하는 일에 교회에서 칭찬 받았다는 것보다 학교에서 상 받는 것을 최고로 생각한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
“어떻게 하면 내 자녀를 신앙적으로 잘 키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자녀가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믿음의 나무가 되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귀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바램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질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헌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자녀들을 위한 두 가지 수고를 아낌없이 해야 한다.
첫째,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부모는 자녀의 최초의 교사이며 마지막 순간까지 진짜 중요한 교사이다. 심지어 이생을 다하고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교사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교사로서 부모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늘 생각하며 기도해야 한다.
가정은 인간의 삶이 시작되고 이루어지는 최초의 학교이다. 한 가정의 뿌리요, 기둥인 부모는 자녀에게 인생의 첫걸음을 가르쳐주는 교사이기도 하다. 부모는 자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화목한 가정을 만들며, 자녀가 지닌 잠재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점수벌레보다 인간의 도리 가르치고, 신앙의 큰 도움을 주기 위하여 매일 같이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필요하다. 성도님의 기도 제목 가운데 감동적인 기도제목이 있어서 소개한다. ‘느헤미야와 같이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게 하소서. 가족 모두가 예배드리는 삶을 통해 마음의 성전이 온전히 세워지기를 원하며, 가정예배가 체질화 되도록 하소서.’하는 간절한 기도 제목이었다.
부모라면 누구나 아이의 모습에서 부모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란 적이 한두 번은 있을 것이다. 좋은 습관을 닮았다면 의기양양하겠지만, 나쁜 습관을 따라하는 아이를 보면 가슴이 철렁하다. “아니, 어떻게 저런 것까지 똑같이 따라하지?” 기가 막혀 의아해 하면서도 거울에 비춰지듯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아이에게서 볼 때 부모는 스스로 반성하게 된다. 부부는 닮는다. 부모와 자녀 역시 많이 닮는다. 그야말로 붕어빵이다.
집에서의 부모님들의 경건 생활이라든지, 부부간에 대화하는 모습이라든지, 부모가 자녀에게 대하는 태도라든지, 심지어 목회자에 대한 생각까지 다 닮게 되어 있다.
(잠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둘째, 자녀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모니카(Monica)의 기도는 방탕한 아들 어거스틴(Augustine)을 회심시켜 중세 최대의 성자로 만들었다. 모니카는 눈물로 기도한다. "나의 아들아, 나는 세상의 아무 것에 대해서도 기쁨을 느낄 수가 없다. 내게 한 가지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죽기 전에 네가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다." 30년에 걸친 눈물의 기도는 응답되어졌다. 어거스틴이 33세에 회심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왔다. 자식을 위하여 울며 기도하던 모니카의 기도는 세상에서 가장 큰 위력을 가진 기도가 되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모의 역할은 하나이다. "자녀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자녀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영혼구원에 힘을 쏟아야 한다. 자녀들이 하나님 만나는 일에 눈물로 권면해야 한다. 자녀의 영혼구원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늙고 병들었을 때 제자들로부터 한 가지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선생님,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메시지를 하나만 들려 주십시오.” 소크라테스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말 했다고 한다. “아테네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시민들을 향해 간절히 외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네. 사람들이여, 재물을 모으는 일에만 충실하지 말라. 그것을 물려받을 어린이들에게 좀더 많은 사랑과 정성을 쏟아라. 이것이 내 일생을 통해 얻은 가장 귀한 교훈이다.”
자녀를 위한 축복기도가 필요하다. 자녀를 위해 축복하면 놀라운 변화가 나타난다고 한다. 부모 자신이 변한다고 한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생기고, 자식에 대한 책임의식이 깊어지며, 자녀에 대한 사랑이 솟구치며, 개성을 찾아 바르게 교육하게 된다고 한다. 자녀가 변한다고 한다.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고, 부모를 존경하게 되며, 자존감과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남들도 부모가 축복하는 자녀를 새롭게 보고 인정하게 되고 귀하게 여긴다고 한다.
주님의 뼈저린 말씀을 기억하면서 소홀히 했던 기도의 기반을 다시금 잡고 자신과 자신의 자녀를 위한 울부짖는 기도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때를 맞이했다. 나도 자녀도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 맡겨 성령의 충만한 가운데 모든 일들을 감당할 때 생각지 못한 은혜가 임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은혜가 자신과 자녀들과 가정 위에 함께하길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