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문: 베트남 중부로부터 남부까지 이어지는 서부 고원지대는 커피, 차, 꽃, 과일 등의 경제작물 및 고급 목재를 비롯한 풍부한 임산물을 생산하는데다가 기후까지도 온화한 이상적인 거주 환경을 갖고 있는 곳이다. 남한의 약 반정도 되는 이 광활하고 풍요로운 지대의 주인은 원래 약 30여 개에 이르는 소수민족들이었다. 평지의 베트남인들에게 19세기까지도 이곳은 ‘야만인들의 땅’이었으며 자신들의 영역 너머의 접근할 수 없는 땅이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가 들어와서도 고원지대는 베트남인들의 땅과는 별개의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19세기말부터 프랑스의 기술과 자본을 따라 베트남인들은 이곳으로 올라가기 시작했으며 20세기에 들어서 이곳 역시 자신들의 땅임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 곧 베트남인들은 서부 고원지대가 자신들의 영역 일부임을 선언했고 적극적인 동화정책을 추진했다. 소수민족들은 저항했으나 남북전쟁의 와중에서 그들의 주장은 무시되었다. 1975년 이후 하나의 베트남이 건설되고 통일 정권 하에서 이 지역에 대한 베트남화는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소수민족들은 무력 투쟁을 전개하였지만 베트남인들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의해 진압되었다. 베트남화에 대해 소수민족들은 아직도 다양한 형태로 저항하고 있다. 2001년 초에 있었던 소요 사태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베트남인들의 이 땅에 대한 집착은 너무도 큰데다 베트남인의 인구 유입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중이어서 원주민들의 자기 땅 회복은 무망해 보인다. 오랜 역사 속에서 풍부하게 축적한 타민족들에 대한 침략 및 동화 경험을 바탕으로 베트남인들은 현재도 서부 고원지대를 집요하게 베트남화 하고 있다. 이 작업은 결국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 단지 그 과정에서 앞으로 베트남인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많이 남아 있지만 말이다.
머리말
베트남의 역사를 얘기할 때 특징 적인 면모 중의 하나로 자주 언급되는 것은 남 띠엔 (nam tien 南進) 즉 남쪽으로의 팽창이다. 홍하 델타를 중심으로 하여 시작된 베트남의 역사 시대는 11세기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현 중부 지역 그러니까 좁고 길며 해안선과 연해 있는 땅으로 내려가기 시작했고 16세기 경부터는 다시 메콩이 만들어 낸 광활한 델타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19세기까지 현 베트남의 ‘남보 (Nam Bo 南部)를 형성했다. 이렇게 해서 통상 베트남은 19세기에 이르러 중국과의 국경인 북부 우의관 (友誼關, 또는 鎭南關)으로부터, 장산산맥을 끼고 해안선을 따라 길게 뻗어 있는 중부와 인도차이나 반도의 끝단인 까 마우 (Ca Mau)까지 포괄하는 현재의 영역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얘기된다.
그러나 사실 이런 주장은 ‘남진’의 파라다임에 사로잡힌 착각에 의존하는 바 크다. 만일 우리가 19세기의 지도를 엄밀히 그려본다면 19세기 베트남의 중부는 현재의 중부보다 훨씬, 약 반 정도밖에 안되게 가늘다. 남부로 진입하기 이전까지, 그리고 남부에 진입한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베트남인들이 차지한 영역은 해안선으로부터 펼쳐지는 평원지대에 불과했으며 그 평원에서 바라보이는 고원 지대는 베트남인들이 살 수 있는 땅이 아닌 '야만인‘들의 땅이었다. 이 야만인들은 베트남인들이 남진의 과정 속에서 중부와 남부 평지에서 만나던 ’土人‘ 즉 참파인이나 크메르인들을 제외한 여타 소수민족들로서 근대적 개념으로는 말레이 폴리네시아 또는 몬 크메르 등으로 분류되지만 과거 베트남인들에게 이들은 자신들의 영역 외부에 있는 야만인 (베트남 말로 ’모이 moi‘)들이었을 뿐이었다.
이 야만의 땅은 베트남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미지의 땅이며 자신들과는 전혀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지 않는 이방인들의 지역이었다. 지형적으로도 고원지대에 위치해 접근이 용이하지 않으며 평지의 고온다습한 기후에 익숙한 베트남인들에게는 사시사철 우리의 가을 날씨와 비슷한 이곳은 ‘추운’ 땅이기도 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이 지역이 고대부터 베트남인들과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운명공동체였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베트남을 식민지배한 바 있던 프랑스인들은 이 지역이 자신들이 개척하여 베트남 땅으로 흡수된 것이라고 가르쳐 왔고 베트남 사람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도 그렇게 믿어 왔다.
그러나 원래부터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또 생각이 다르다. 이 지역은 베트남과는 격리된 별개의 지역이며 과거 베트남에게는 ‘외국’이었듯이 언제까지나 외국 즉 베트남과는 별개의 독립된 국가 또는 지역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이며 이런 정서는 FLURO (Front Unifé de Lutte des Races Opprimées, 억압받는 민족들의 투쟁통일전선)의 결성으로 나타났고 현재까지도 산지인들의 독립 투쟁이 극히 미약한 상태나마 진행 중이다. 2001년 1월부터 있었던 이 지역 소수민족 집단들의 소요 상태도 심각한 상황을 불러일으켜 미국, 캄보디아까지 개입되는 국제 문제로 비화했으며 이 해에 있었던 전국대표자회의에서 실질적 국가 최고권력자인 총비서로 소수민족 출신 농 득 마인 (Nong Duc Manh)이 선출되는데 직간접의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들의 독립적 역사 내지 독립의 당위성 주장은 일견 타당성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면, 과거 베트남의 주변국에는 베트남인들이 수사 (水舍)와 화사 (火舍)라고 표기하던 나라들이 있었다. 이 국가들은 고원지대에 위치한 현 자 라이 (Gia Lai) 성을 중심으로 해 존재하던 국가들로서 15세기부터 베트남에 조공을 보냈다. 이들은 베트남 측에서 볼 때 자신들에게 조공을 바치고 왕으로 임명을 받는 주변국들 중의 일부였던 것이다. 19세기 조정이 편찬한 공식 사서에는 이들 조공국들에 대해서 「外國列傳」을 따로 두어 명기하고 있다. 지리적 원근과 외교 관계에 따라 이 「外國列傳」은 세 개로 나뉘어지는데, 「外國列傳」 제 1은 캄보디아, 제 2는 태국과 수사/화사, 제 3은 버어마, 라오스, 참파를 소개하고 있다. 베트남의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은 조공국이었지만, 다르게 표현한다면 이들은 19세기 초반까지도 독립국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캄보디아 등이 엄연히 독립국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볼 때 수사와 화사가 베트남의 영역으로 포함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지역은 베트남인들과의 격렬한 갈등도 없이 19세기까지 베트남과는 다른 지역으로 남아 있다가 슬그머니 베트남인들의 땅이 되어버린 데서 이곳 주민들의 ‘억울함’ 내지 ‘어이없음’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이 땅과 민족들은 언제 베트남의 일부가 되었을까? 여타의 동남아시아에서 그러했듯 19세기부터 시작된 서구인들의 영역 그려주기의 결과였던가? 하지만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베트남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적어도 15세기부터는 영토 내지는 국경의 개념이 존재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으며 그 안에서 자신들이 중심이 되는 역사를 발전시켜 왔다. 말하자면 베트남은 다른 동남아 지역에서 보이는 것처럼 한 중심 민족이 주변 민족들과 길항 작용에 있었다기 보다는 명백히 한 주류 민족이 자신들이 살고 있던 영역 바깥 쪽에 있는 다른 족속들의 영역으로 자신들의 지배 내지는 거주 영역을 확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평지에서 그들이 장구한 역사 속에서 남부로 내려가면서 타민족 지역 잠식을 잠식해 가던 모습과 거의 유사하다. 과연 베트남인들은 언제부터 무슨 동기로 이 야만의 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무슨 방식으로 이 지역을 자기네 땅으로 만들었던가?
1. 서부고원지대의 지리적 현황
16세기 이후 약 200여년 동안 베트남에는 북과 남에 두 개의 왕국이 존재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 서부 고원지대는 남부 베트남 왕국과 대략 동일한 위도 상의 고원 지대에 해당한다. 하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남부베트남의 광활한 평원지대이며 쌀 생산량이 높았던 꽝 남 (Quang Nam 廣南)과 남부로 인접한 꽝 아이 (Quang Ngai 廣義)로부터 시작되는 협소하고 길며, 척박한 중부 툭유의 평원과 평행으로 달린다. 그러니까 북으로는 넓은 꽝 남에 접하고 동쪽으로는 꽝 아이 성에 접한 형상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쪽으로 바다를 끼고 남쪽으로 인접해 있는 꽝 아이로부터 남부 비엔 호아까지의 좁고 긴 지역을 따라 서부 고원지대를 형성하며 비엔 호아를 지나면서 점차 낮아져서 메콩 델타와 접하게 된다. 서쪽으로는 라오스 및 캄보디아와 연결되는 이 지역은 북으로부터 꼰 뚬 (Kon Tum), 자 라이 (Gia Lai), 닥 락 (Dak Lak), 럼 동 (Lam Dong) 성 등을 포괄한다. 이들 성은 평야 지대의 각 성처럼 한자로 표기할 수 없는 토착 단어로 이루어진 이름을 갖고 있다. 이름에서도 전통 베트남 문화의 중요 요소인 한자의 영향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총 면적은 53,471평방km로서, 베트남 총 면적 (33만평방km)의 약 16%이며, 남한 (약9만 9천평방km)의 약 54%가 되는 크기이다. 남북 총 길이는 450km, 동서 폭은 약 150km이다 (Phan Van Be 1993: 11). 이렇게 광활한 지역에 약 3백만이 거주하고 있다. 평지에서 올라간 베트남족 (Kinh 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나 원주민들은 다양한 소수민족이었다. 대표적인 민족들만 우선 보자면, 가장 북쪽에 있는 꼰 뚬의 주요 거주민은 바나 (Ba Na), 쟈 라이는 쟈라이 (Gia Rai), 닥 락은 에데 (E De 또는 라데 Rade), 럼 동은 꺼호 (Co Ho)족들이다. 여기에 꼰 뚬과 꽝 아이 사이에 살고 있는 세당 (Sedang)이라든가 럼동 지역의 므농 (Mnong) 등을 포함한 6개의 다수 민족이 약 90만에 이른다 (Le Trung Hoa 2002). 그러나 실제는 이보다 훨씬 다양하다. 예를 들어 1989년의 조사에 의하면 럼동의 성도인 다랏에 살고 있는 민족은 베트남인인 낀 족과 중국인을 제외하고서도 15개 민족이나 되었다고 하는데서 (UBNDTPDL 1993: 238) 알 수 있듯이 다양한 민족들이 광범한 지역에 걸쳐서 섞여 거주하고 있다. 베트남이 54개의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라고 하는데 서부고원지대에는 약 30개의 민족이 살고 있다.
이들 소수 민족들은 몬 크메르 계통이거나 말레이계 주민들로서 이곳에 거주하기까지의 이동 경로에 대한 추측은 각 민족에 따라 또 특정 민족에 대해서도 다양하게 제기된다. 그 중에 가장 보편적인 것은 말레이 계통 민족들에 관련된 것으로서, 해안지대 평지에 살던 민족들이 베트남인들의 남진으로 말미암아 터전을 잃고 산으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이는 수사/화사에 대한 베트남 왕조 측의 기록에서도 생생하게 나타난다. 레 왕조의 성종이 1471년 참파를 공략해서 재기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버린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이 뒤 참파 지역, 그러니까 현 베트남 중부 평원지대는 베트남인들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많은 참파인들은 베트남인들에게 사로잡혀 북부 베트남으로 끌려가 베트남인들 사이에 살면서 베트남인화 되어 갔지만 그렇지 않은 참파인들은 각지로 망명했다. 배를 타고 말레이쪽으로 떠나거나, 캄보디아 쪽으로 달아나거나 아니면 바로 이 고원지대로 올라갔는데, 베트남 측에서는 이 수사/화사 국이 바로 참파인들의 후손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ꡔ大南正編列傳初集ꡕ, 32:33a).
이들이 살고 있는 지역은 비록 위도 상으로는 11도-15도 상에 위치하지만 워낙 고도가 높은 지역이라 동남아시아의 일반적인 기후와는 전혀 다르다. 예를 들어 해발 1,500m 상에 위치한 다 랏 같은 곳은 절기에 따라서 다소 쌀쌀하고 더운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보아 연중 우리의 온화한 가을 날씨 같다. 이곳에는 우람한 소나무도 있고 가을이면 빨갛게 익은 감도 볼 수 있는 곳이다. 벼농사도 물론 가능하고 그 외 감자, 옥수수 등 다양한 작물들이 전통적으로 재배되고 수량 또한 넉넉해서 예로부터 먹고사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갖고 있는 곳이다.
2. 평지인들과 고원지대인들의 전통적 관계
15세기 들어 베트남인들이 완전히 차지하기 이전까지 중부 평원 지역은 이곳에서 약 기원 후 1-2세기부터 왕국의 형태를 갖추고 역사 속에 등장한 참파인들의 땅이었다. 따라서 15세기 이전까지 산악지대인들이 상대하던 평지인들이란 참파인들이었다. 이 참파인들은 농경 보다는 해양 무역에 종사했던 관계로 참파인들 입장에서 산악지대란 자신들이 교역 물품을 공급하던 생산지요, 자신들이 사들여온, 또는 평지 또는 바다에서 생산한 물자들의 소비지이기도 했다. 즉 참파인들에게 고원지대인들은 거래의 대상이었던 이웃이었을 뿐이었다.
이런 형편은 베트남인들이 중부 평원지대를 차지하고서도 마찬가지였다. 15세기 동안 베트남인들은 참파인들이 비우고 떠난 평지에 베트남인들을 채워넣기 바빴을 뿐 산지인들에게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16세기에 들어서 베트남에 북쪽과 남쪽에 두 개의 독립된 정권이 들어서고 이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던 서부 고원지대는 남쪽의 응우옌 (Nguyen 阮) 씨가 지배하는 영역과 나란히 경계를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남부에 건립된 베트남 국가의 주된 관심사는 북부 정권과의 전쟁이거나 아니면 더욱 남부로의 개척 즉 메콩 델타로의 진출이었을 뿐이었다. 또 한가지 이들이 전쟁과 개척을 수행하기 위한 주요 재정 수입원으로서 관심을 가졌던 것은 해외 무역이었다. 이 활동은 16세기부터 동남아시아에 들어오기 시작한 서양인들의 도래라든가 일본 중국 등지와의 활발한 교류로 인해 호이 안 (Hoi An 會安)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했다. 이 때 주요 수출품목으로 이들 서부 산악지대에서 산출되는 물자들이 수집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대부분 교역에 의해 취득되던 것이었다. 일찍이 리 타나가 지적했다시피 평지에 살고 있던 베트남인들과 산지인들과의 관계는 평화로왔으며, 북부로부터의 위협에 직면해 있던 남부베트남인들이 서부 산지민족들에게 신경을 쓸 여유도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베트남인들은 이 새로운 땅에 국외자 또는 이방인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Li Tana 1998: 133).
서부 고원지대의 산지민들이 비로소 베트남인들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면서 베트남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데 참여하게 되는 것은 18세기 말 남부 베트남 지역에서 떠이 썬 반란 (1771-1802) 반란이 일어나면서 부터이다. 떠이 썬, 즉 西山은 빈 딘 성에서 서부 고원지대로 올라가는 곳에 위치한 곳이다. 한자 의미 그대로 서쪽 산악지대에 위치한 곳으로서 현재 자 라이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다. 이곳에서 반란을 일으킨 떠이 썬 삼형제는 평지와 산지의 교역을 중개하였고 산지인과 교유하였으며, 실제 떠이 썬 삼형제 중의 둘째 응우옌 반 르 (Nguyen Van Lu 阮文呂)는 이곳 산지민족 바나 족 여성과 결혼한 사람이기도 하다 (Phan Huu Dat, Lam Ba Nam 2001: 60-61). 이미 17세기 말까지 남부 메콩델타 지역까지의 남진을 끝낸 베트남인들은 18세기 동안 서부 고원지대로 올라가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며 이 과정에서 산지민과 베트남인의 접촉이 빈번해졌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토지 침탈이나 지방관의 자의적인 세금 징수 등이 문제가 되어 산지인들을 자극했고 이들의 불만이 조정에 대한 적대감으로 전환되게 하는 조작도 가능했을 것이다. 떠이 썬 반란은 일반적으로 농민반란으로 얘기되고 있으나 그 발생지나 초기 참여자 등을 고려할 때 그 반란의 명칭 그대로 서부 산악 지대민의 반란이라고도 말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서부 고원지대의 소수민족들은 평지의 정권을 전복시키는 일에까지 개입한 것이며, 평지의 베트남 정권으로 볼 때 이제 고원지대의 소수민족은 더 이상 미지의 땅에 살고 있는 야만인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제 평지의 베트남인들에게도 산지인들은 대단히 가까운 존재로 다가온 것이 바로 이 떠이 썬 반란이 가져 온 한 결과가 아니었던가 한다.
산지민들은 떠이 썬 삼형제 집단에만 참여했던 것은 아니었다. 떠이 썬과 대적하면서 남부 사이공을 근거지로 맞서던 응우옌 푹 아인 집단에도 다수의 서부고원 소수민족들이 참여하게 된다. 쩌우 반 띠엡 (Chau Van Tiep 朱文接) 같은 이는 푸 옌 (Phu Yen 富安)의 고원지대로 들어가 이곳의 산지인들을 모아 떠이 썬 군에게 저항하다가 훗날 이들을 이끌고 응우옌 푹 아인 군에 들어가는데 (ꡔ大南正編列傳初集ꡕ, 卷 6, 朱文接) 푸 옌의 고원지대란 현재 닥 락 지역이며 그가 동원한 민족은 닥락에 다수 거주하는 바나 족이 아니었는가 한다. 이 중에 비엔 호아의 한 소수민족 수장은 자신의 영향권 내에 있는 1,000여명의 산지인 전사들을 응우옌 푹 아인에게 보내 공을 세운 후 해당 지역의 자치를 인정받기도 했다 (ꡔ大南寔錄正編第二紀ꡕ, 64:27). 뿐만 아니라 서부 고원지대는 바야흐로 베트남인들에게 중요한 군사 기동 공간으로도 이용되어 응우옌 반 투이 (Nguyen Van Thuy 阮文瑞)는 군대를 이끌고 이곳 고원지대를 경유해 떠이 썬 군대의 배후를 치는 (ꡔ大南寔錄正編第一紀ꡕ, 16:10a), 방향은 정 반대이지만 마치 20세기 호찌민 통로를 통해 북부군이 남부군의 배후를 타격하는 기동을 연상하게 했다. 그리고 이런 기동은 큰 효과를 거두어서 응우옌 푹 아인 집단이 떠이 썬에 대해서 승리를 거두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했다. 20세기에 북부의 군대가 호찌민 통로를 이용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곳 서부 고원지대주민들의 지원을 필요한 만큼 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바야흐로 18세기말부터 서부 고원지대의 민심 획득이나 또는 통제권 장악은 정권의 획득과 관련된 사안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 지역이 베트남인들의 완전한 영역으로 인식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평지인 영역 바깥의 산지인이었을 뿐이었다.
3. 19세기 이후의 변화
1802년 통일 왕조가 수립된 이후에도 한동안 이런 관계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베트남에서는 중요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이 산지 지역을 자신들 영토의 일부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선 이 변화를 가능하게 했던 요소는 베트남 영토의 변화이다. 16세기 베트남인들의 지배 영역은 홍하 (Hong Ha 紅河) 델타와 중부 지대였다. 하지만 곧 두 개의 정권으로 분립되면서 각 정권의 영역에 대한 경험은 극히 제한되게 되었다. 북부 정권은 홍하델타와 북중부 지역, 그리고 남부 정권은 남중부 지역과 메콩 델타 지역인데 서부 고원지대는 이 남부 정권과 맞닿아 있었다. 말하자면, 북부 정권은 서부 고원지대 산지인에 대한 경험이 없었던 것이고, 남부 정권은 소수민족 영역을 베트남의 일부로 파악하는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1802년부터 남과 북이 뚫리고 확대된 남북의 영역을 동시에 지배하게 된 응우옌 왕조는 북부의 경험, 즉 산간 소수민족들을 왕국의 영역 내 인자로 간주하고 병합하는 방식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러한 관심을 더 증폭시켰던 것은 1835년에 있었던 캄보디아의 점령 및 내지화 작업이었다. 베트남 입장에서 본다면 서부 고원지대 넘어 캄보디아가 베트남의 내지가 되면서 베트남과 캄보디아 사이에 있는 서부 고원지대는 당연히 베트남 판도 내에 들어와 있는 것으로 인식된 것이다. 아울러 베트남은 라오스 동부 지대도 한동안 합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이에 끼인 꼰 뚬 지역이 베트남 내지로 인식된 것도 당연했다. 1830년대에 캄보디아를 포함하는 각 도서 산악지대까지 자세히 그린 지도 (明命版圖)에는 이들 서부 고원지대가 베트남의 내지로 들어와 있음이 확인된다.
여기에 한가지 더 추가한다면 1830년대 남부를 중심으로 행해졌던 대규모의 강력한 베트남화 정책이었다. 중국인, 크메르인, 참파인 등을 비롯한 각 소수 민족들을 이때부터 베트남화 시키는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조정 측은 평지의 소수민족 뿐만 아니라 산간지대의 소수민족들에 대한 동화정책도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시켰다. 조정 측은 이 지역에 베트남인 관리를 파견하고 베트남식 생활방식을 소개하고 베트남어를 가르치고 의복을 바꾸는 등의 베트남화 작업을 시작했고 평지의 베트남인들이 이들을 가르치고 지도한다는 명목으로 고원지대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울러 베트남인들의 조직적인 이주도 행해지기 시작해서 이들이 소수민족의 토지를 침탈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고 이에 대응한 소수민족의 반발도 사료 곳곳에 나타난다 (Choi 2003)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중반 유명한 남부 유학자 응우엔 통 (Nguyen Thong 阮通)이 직접 무리를 이끌고 현재 럼 동 지역으로 들어가 개간을 시도했던 사실은 유명하다. 그는 자신의 여정과 관찰을 자세한 기록으로 남겼고 이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하여 이 지역에 대한 개발을 제안하는데, 이미 럼 동 지역의 풍부한 발전 잠재력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Truong Phuc An et. al. 1993: 24-28). 중국으로부터의 독립 이후 천 여년 간 줄곧 남쪽으로 팽창하던 (南進) 베트남인은 19세기부터는 그들이 배후에 남기고 내려 온 고원지대로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지화 작업이 서부 고원지대 전반에 걸쳐서 행해졌던 것은 아니다. 19세기 초반에 이제 막 그런 정책이 실시되었다는 것이고, 평지 및 캄보디아의 베트남화에 분주했던 베트남 조정이 산간 지대까지 신경을 쓸 겨를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엔 호아 지역에 연해 있는 중부 고원지대의 가장 남쪽 끝 부분에서는 내지화 작업이 실시되었으나 중부는 아직 관심만 갖고 있던 수준이었다. 소수민족의 동화에 골몰했던 민 망 시대의 한 기록은 고원지대에 대한 베트남 조정의 인식 수준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황제는 1840년 어느 날, 후에의 궁전 오문에서 멀리 서쪽에 보이는 한 산을 가리키면서 그 산 이름을 주변의 신하들에게 물었다고 한다. 아마도 좋은 날씨 탓에 고원지대에 면한 한 산자락이 그의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헌데 눈에 보일 거리에 있는 그 산을 당시 왕도 몰랐고 주변의 신하들도 몰랐다는 것이며 확인 결과, 당시 이 산에 대해서 공식적인 이름조차 부여되지도 않았다는 얘기이다 (ꡔ大南寔錄正編第二紀ꡕ, 215:18a). 당시 ‘서쪽’에 대한 조정의 관심 내지는 지식이 얼마나 보잘 것 없었는가를 증거한다. 남진에 몰두하고 있던 베트남인들에게 서쪽은 내버려둔 땅이었을 뿐이다. 자 라이와 같은 곳은 여전히 전통의 조공지역, 다시 말하면 ‘외국’으로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19세기 초반의 정책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이제 바야흐로 베트남에서 이 지역을 베트남의 내지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위에 소개한 일화는 황제가 명령해 산지인들 사이에 위치해 있다는 이 산의 형세를 명확히 그려 바치라는 얘기로 이어지는데 (ibid.), 이는 그 산을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는 의도이기도 했다. 시간만 허용된다면 이 지역의 베트남화 작업은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시간을 허용하지 않은 존재가 바로 프랑스였다. 19세기 중반부터 베트남에 들어오기 시작한 프랑스는 기본적으로 베트남과 여타의 소수민족을 갈라놓는 정책을 취했으며 무자비한 베트남화 정책을 수십년간 경험하고 있던 비베트남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프랑스는 구원자나 다름없었다.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베트남인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던 소수민족들이 베트남인들을 견제하는 유용한 수단이었고, 이들에 대한 독립성 부여는 베트남 조정의 권위를 약화시키는데 결정적 요소였다. 또한 프랑스로서는 베트남 조정에 대해서 최소한의 고려도 하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지역이 필요했고 해당 지역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행사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프랑스는 의도적으로 서부 고원지대를 베트남과는 관련 없는 지역임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지역은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는 선교의 가능성이 무한한 곳이기도 했다. 평지의 베트남인들처럼 유교나 불교 등 기독교에 저항하는 논리를 제공하는 대종교가 없었기 때문에 선교가 용이했다는 것이다. 파리외방선교회의 기록 (Annales de L'association del la Propagation de la Foi)에 의하면, 선교사들은 이미 1830년대에 이미 산간지대 소수민족들에 대한 적극적인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듯 베트남과는 다른 지역으로 인식된 서부 고원지대에 대해 인도차이나 식민지 행정부는 이 지역민들을 베트남인으로부터 격리시키는 정책을 취했으며 많은 전문가 및 군대를 이 지역으로 파견해서 제반 조건을 조사하게 했다. 이 경우 오직 프랑스인만이 고원지대로 들어갈 수 있었다. 프랑스인들에겐 서부 고원지대가 얼마나 베트남과는 다른 별개의 지역이라는 인식이 깊었는가 하면 1888년 Mayrena라는 한 프랑스 인은 꼰 뚬 지역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Phan Van Be 1993: 34).
프랑스인들이 서부 고원지대를 베트남인들로부터 격리시키려고 노력했던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곳은 전통적으로 베트남의 영역이 아닌 ‘처녀지’라는 인식을 했기 때문이다. 때로 이 지역은 베트남이 아니라 오히려 라오스의 영역이라고 인정되는 경우도 있었다 (Phan Van Be 1993: 38). 두 번째로, 이곳은 베트남인의 영향이 없기 때문에 소수민족들에 대한 기독교 전교 가능성이 무한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이곳 고원지대가 베트남인들의 반불 투쟁 근거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대불항쟁 지도자로 유명한 쯔엉 딘 (Truong Dinh 張定)의 잔여 세력이 서부 고원지대로 올라간 사례는 유명하며, 앞서 얘기한 응우옌 통이 럼 동 지역을 개발하러 들어간 데는 투쟁의 근거지를 마련한다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물론 이런 여러 가지 이유를 아우르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서부 고원지대를 안남 조정의 눈치 봄 없이 배타적으로 개발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당시 베트남은 실질적으로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명목상으로 중부 지역은 안남보호국으로서 황제가 존속했고 서부 고원지대는 이 안남보호국의 판도와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로서는 고원지대 개발에 있어서 안남 조정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는 될 수 있는 한 이 지역이 베트남의 판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애써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이 아무리 베트남인들을 서부 고원지대로부터 격리하려고 노력해도 자신들이 이 지역을 경략하고 있는 한 베트남인들의 유입을 막을 방도는 없는 노릇이었다. 병영을 설치하고, 차, 커피 등을 재배하는 플렌테이션을 건설하며, 다랏과 같은 곳에는 자신들의 휴양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군인, 노무자들이 필수적으로 유입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다 랏은 한때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포괄하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수도로 삼을 것이 고려된 적도 있을 정도였다. 좋은 기후, 교통, 풍부한 자원 등이 고려되어 학교, 병원, 철도 등이 급속도로 들어서고 프랑스인들은 물론 베트남인 왕족이나 고급 관리 대지주 등이 이곳으로 몰려들면서 다 랏은 인도차이나에서 가장 선진적인 도시 구조를 가질 정도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인들의 이주가 뒤따랐던 것은 당연하다. 1908년만 해도 8-10가구 밖에 없었다던 베트남인 가정은 1930년대가 되면 북부, 중부, 남부에서 온 집단들별로 구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늘어났다 (Truong Phu An et. al. 1993: 40; 56).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 다이 (Bao Dai 保大)도 이 고원지대에 대한 집착이 대단해서 그는 수시로 다 랏에 머물고 주변 지대를 시찰하면서 이곳이 자신의 영역임을 대내외에 과시하고자 노력했다. 총을 들고 말을 탄 채로 소수 민족들을 몰이꾼으로 지휘하면서 호랑이나 곰 사냥을 나서곤 하던 그의 행동은 이곳이 자기 영역임을 과시하는 하나의 연행 (演行 performance)이기도 했다. 훗날 베트남의 마지막 황후가 되는 응우옌 티 란 (Nguyen Thi Lan)과의 공식적인 만남도 다랏에서 이루어졌다.
독립 이후 베트남이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서부 고원지대는 남부 정권과 맞닿게 되었다. 프랑스가 들어오기 이전까지는 황궁에서 보이는 산 이름조차 지어지지 않았을 정도로 내버려두어졌던 서부 고원지대는 이제 프랑스의 1세기에 걸친 경영 동안 베트남인들에게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적어도 후에 (Hue)에 있던 왕은 이제 자신의 조상이 이름조차 모르던 그 산 배후에 있는 거대한 고원지대를 자기의 땅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프랑스는 고원지대가 베트남과는 별개의 지역임을 강조했고 베트남 독립 이후에도 다 랏을 비롯한 서부 고원지대는 적어도 중립지대로 남겨두려고 노력했다. 1946년 5월 27일 프랑스 당국이 서부고원지대의 자치를 선언한 것은 바로 이런 태도의 구체적 표현이었다.
이러한 프랑스의 의도에 공식적으로 쐐기를 박고 베트남 측의 입장을 명백히 한 것이 1950년 11월 10일자 국가 수장 바오 다이의 칙령이었다. 이 날짜로 바오 다이는 서부 고원지대가 황조강토 (Hoang Trieu Cuong Tho 皇朝疆土)임을 선언했다. 이미 황위에서 퇴위하고 응우옌 왕조는 5년 전에 이미 종말을 고했던 관계로 일정 지역을 황조의 강역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는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황조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가 황제 지배체제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전 왕정 시대 즉 응우옌 왕조 (베트남인들로서는 皇朝) 시대 명백한 황제의 영토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더해서 당시 바오 다이로서는 왕정, 적어도 입헌왕정으로의 복귀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황조강토’라는 표현이 그다지 문제시되지 않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바오 다이가 수반이 된 베트남국 (State of Vietnam, 1950-1955)은 그 영역에 명목상이나마 북부 즉 베트남민주공화국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베트남국은 이전 응우옌 왕조의 영역을 그대로 이어받은 모양새였던 것이며 거기에 중부 고원지대도 들어갔던 것인데, 결국 중부 고원지대는 응우옌 왕조 시기부터 당연히 베트남의 영역 속에 포함된 것으로서 추후 기정 사실화 되어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베트남인들은 중부고원지대가 원래부터 베트남의 일부였다고 믿기 시작한다.
베트남인들이 대거 중부고원지대로 올라가게 된 것은 프랑스가 물러나고 나서였던 것은 당연하다. 1954년 북베트남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완전히 손을 땐 후 중부 고원지대에로의 베트남인 이주에 대한 통제가 사라진 후 베트남인들이 대거 고원지대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울러 종전 후 제네바 협정에 의해 남부로 내려온 일백 만에 가까운 북부인 (대부분 기독교도)들 중 많은 이들이 고원지대를 새로운 정착지로 선택했다. 다 랏에만 해도 15,000명의 북부 탈주자들이 새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Truong Phuc An et. al. 1993: 82). 이렇게 해서 베트남인들의 고원지대에로의 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이런 급격한 변화가 고원지대에서 소수민족들과 긴장 관계를 유발하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바오 다이가 ‘황조강토’라고 선언했다고 해서 중부 고원지대가 완전히 베트남 땅이 된 것은 아니었다. 아직은 베트남 측의 일방적인 선언이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프랑스 쪽에서 이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이 ‘황조강토’의 베트남화에 박차를 가한 것은 응오 딘 지엠 (Ngo Dinh Diem 吳廷琰) 정권에 의해 수행된 소수민족 정책이었다. 1955년 국민투표를 통해 바오 다이의 왕정 복고 기도를 좌절시키고 남부 베트남에 공화정 (베트남공화국 Republic of Vietnam)을 수립한 후 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적어도 소수민족 정책에 있어서는 응우옌 왕정 시대 민 망 황제의 소수민족 정책을 그대로 답습한 듯 보인다. 막 남부를 판도 내에 명실공히 편입한 민 망 황제가 남부 소수민족의 베트남화에 몰두했던 것처럼, 역시 최근 베트남의 영역으로 들어온 중부 고원지대에 대해서 응오 딘 지엠은 적극적인 베트남화 정책을 추구했다. 지엠 정권 축출 이후에 편찬된 자료들에서 이구동성으로 지적되는 지엠의 ‘잘못된 정책’의 개요는 고원지대 소수민족의 토지 소유권 부정, 고유 풍속 포기 종용, 고유 언어 교육 금지 등이다. 이런 정책은 남부베트남에서 광범위하게 시행되었는데, 사이공 및 메콩 주변에서는 크메르인, 참파인, 중국인들에 대한 동화가 강력하게 실시되었고 특히 중국인에 대해서는 교역 활동 분야에서 큰 제한이 가해졌다. 그들의 직업을 열 가지로 제한한 것도 이와 관련이 된다. 응오 딘 지엠 정권이 북부에서 탈주한 베트남인들을 대거 고원지대로 이주시킨 것은 이들 인력을 중부고원지대의 베트남화에 이용한 것이라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서 같은 시기 북부 정권은 소수민족 정책에 있어서는 남부보다 훨씬 융통성이 있었던 것 같다. 북부 지역은 베트남인들의 거주 중심지인 홍하 델타 이외에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는 북부 지역은 서북 고원지대와 북월 지역으로 나누어 자치구를 인정했고 소수민족과 베트남인이 공존하는 정책을 견지하였다. 이런 태도로 인해 그들은 소수민족들을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고, 남부 델타 지역에서도 남부정권에 비해 정책적 우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남부민족해방전선 (NLF)에 중국인, 크메르인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남부정권에 대한 이들의 불만 및 북부 정권의 소수민족 정책에 대한 호의를 웅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남부정권의 공격적인 동화정책에 불안해하던 중부고원지대의 소수민족들에게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북베트남정권은 하노이 근처에 ‘남부소수민족학교 (Southern Ethnic Minorities School)'를 설립하여 수백에서 많을 때는 수천에 이르는 수의 중부 산지인 젊은이들을 데려다 교육하고 그들에게 하노이의 공존 정책을 확인시켰다 (Hickey 1982: 14).
응오 딘 지엠의 소수민족 동화정책이 시작되고 나서 고원지대에서는 산지인들의 불만이 확산되기 시작하고 노골적이고 조직적인 저항으로 발전했다.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소수민족 해방운동과 관련된 한 단체는 응오 딘 지엠 체제가 출범한 이후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지엠은 베트남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자마자 데가 (Degar) [산지인들 스스로 자신들을 부르는 명칭]의 자치권을 완전히 제거하고 베트남 땅에 편입시켰다. 그는 부족 자치, 토지소유권을 빼앗았고 학교에서 우리들 언어 교육을 금지했으며, 우리 교과서를 불태웠고 맹수 등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데 필요한 무기를 몰수했다. 그는 강제로 기름진 우리 땅을 빼앗아 북부로부터 내려온 베트남 난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우리들은 황무지로 쫓아버렸다...” (MHRO)
이런 형편 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자라카 (BAJARAKA)였다. 프랑스 지배기를 거치면서 이미 산지인들 사이에서는 종족을 초월한 공통의 유대감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유력자들 간의 혼인이라든가 고등교육을 받은 자제들 간의 동창 관계 등을 통해서 강화되었다 (Hickey 1982: xvi-xvii). 베트남인들에 대한 저항운동 내지는 산지인들의 공통적인 자각은 바로 이 교육받은 산지인 지식인들에 의해서 주도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에 의해 구체적인 운동체가 나타난 것이다. 1957년 결성된 바자라카는 Bahnar, Jarai, Rade, Kaho 등 중부고원지대에 살고 있는 민족들 중 비교적 다수족 이름의 머리글자를 딴 합성어로서, 고원지대의 분리 및 독립 국가의 수립을 목적으로 하였다. 1958년 이들에 의해 대규모 시위가 있었지만 응오 딘 지엠 정권은 탱크를 앞세워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지도자들은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그러나 상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베트남인들은 계속 고원지대로 올라오고 있는데다가 고원지대의 정치적 상황은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1960년 남부에서 결성된 민족해방전선은 그 활동 범위를 고원지대로 확대하였고, 남부로 내려오는 북부군인들은 이 고원지대를 이동통로로 이용하게 되었다. 이들 공산 세력이 고원지대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이에 대한 남부베트남 정권의 통제 의도는 자연히 강화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와중에서 소수민족들은 지엠 측과 베트콩/북부군 양쪽의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소수민족들에 대한 진지한 고려는 거의 무시된 채 정책 구호는 단지 전쟁 승리의 수단으로만 인식되는 바람에 이들의 불만은 더욱 증폭되었다. 1963년 응오 딘 지엠이 살해된 이후 들어선 남부의 군사정권은 비록 소수민족들에 대해서 완화된 정책을 표방하였지만 (Chinh Sach Phat Trien Sac Toc 1967) 군사 정권 하 지방에서 소수민족들에 대한 유화정책이 내실 있게 행해지기는 애초에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미국이 개입하고 대공산 작전이 격화되면서 산지인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강화될 뿐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산지인들은 점 더 적극적인 선택을 하게 되며 1964년 FULRO가 결성되어 닥 락 성의 성도 부온 메 투옷 (Buon Me Thuot)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그런데 주목할 만 한 것은 풀로가 완전한 독립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산지인들은 이 시점에서 독립국의 수립 보다는 자치권 및 토지 반환과 소유권의 확보 그리고 고유 언어를 비롯한 전통의 유지 내지는 보호를 요구했다. 자신들의 대표를 의회에 보내게 해달라는 주장은 (MHRO) 베트남 내에서의 자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초대 의장 이 밤 에누오이 (Y Bham Enuoi)는 라데 민족 출신으로서 이 운동을 지도했다. 정부군의 진압작전이 시작되자 그는 캄보디아로 망명하였으나 휘하에는 약 5-6000 정도의 병사가 있었으며 이들 가족까지 포함하면 약 20000여명의 산지인들이 그의 통제하에 있었다.
그런데 베트남 내에서는 전쟁이 1968년으로 넘어가면서 중부고원지대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우세가 가시화되자 산지인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존재는 공산주의자 베트남인들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풀로 지도부의 항전 대상은 남부베트남 정권에서 북베트남 또는 민족해방전선이 되었다. 풀로 지도부는 1968년에 돌아와 남베트남 정부와 협상이 진행되고 그들은 공산주의자들과의 대결에서 협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물론 이를 위해 남부정권은 이미 1967년 풀로의 대표자들과 만나 산지인들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고 경작도구 공급 및 안정된 경제 발전을 위한 자치구 설립 등에 동의한 바 있다 (Thanh Tin 1983: 6).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산지인 포섭도 적극적이어서 많은 수의 풀로 구성원들은 공산주의자 편에 서게 되어 베트남인들 사이의 남북 대립은 산지인들 사이에서도 재현된 모양새가 되었다.
그러나 풀로 지도부는 공식적으로 남부베트남 정권, 나아가서는 미국과의 연계를 지지했기 때문에 북베트남 측에게 있어서 풀로는 "CIA의 하수인“이었을 뿐이었다. 실제로 풀로에 참여해서 군구사령관 및 후에는 부수상까지 역임한 까호 족 출신 Ya Duk에 의하면 1973년 미국과 접촉하여 무기 및 통신 장비 등을 보급 받고 정글로 들어갔다고 한다 (Thanh Tin 1983: 7). 또 다른 주장에 의하면 1975년 중부 지대가 북부군의 공세에 무너질 당시 사이공의 미국대사관은 풀로가 될 수 있으면 중부 고원지대를 장악하도록 권고하고 이를 위해서 필요한 무기 및 장비를 제공하겠다는 서신을 풀로 지도부에 보냈다고도 한다 (Dooley 2000: 253). 어쨌든 미국 측의 지원을 약속받았다고 생각한 약 2000여명의 산지인 병사들이 반공산주의 투쟁에 참여했으며 이는 1982년까지 계속되었다. 캄보디아로 건너간 일부 풀로 전사들이 1992년 발견되어 미국으로 보내지기도 했는데, 이를 놓고 풀로의 저항을 1992년까지로 잡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바자라카의 결성 때부터 따지자면 전 기간을 걸쳐 약 백만 정도의 산지인들이 사망하고 85%의 촌락이 파괴되었다는 주장 (MHRO)이 있다는 것도 기억할 만 하다. 이 칫수는 베트남인들에 대한 저항 과정에서의 희생이 아니라 베트남 전쟁 및 투쟁 그리고 베트남인들의 정착 과정에서 산지인들이 입은 피해이며 과장도 있을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수치 및 피해의식이 평지인에 대한 산지인들의 불만을 끊임없이 야기하는 재료인 것이다.
1955년 지엠 정권이 북부로부터 탈주한 베트남인들을 대거 고원지대로 이주시킨 것이 산지인들과의 충돌 요인이 되었다고 했는데, 그로부터 20년 후부터 북부인들의 대규모 이주는 다시 시작되었다. 즉 1975년 베트남이 통일 된 이후 북부인들의 산지로의 직접 이동이 폭발적으로 증대된 것이다. 히키 (Gerald Cannon Hickey)는 1975년의 상황을 “하노이 정권이 중부고원지대를 베트남화 (Vietnamize the highlands) 하고 있다”고까지 표현한 적이 있다 (Hickey 1982: xxi). 이는 현재까지도 어느 정도 유효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일반베트남인들의 자발적 의지이다. 북부 홍하델타 유역의 가난한 농민들은 새로운 땅을 찾아 이주했고 이들은 고원지대에서 차, 코피 등의 환금작물을 재배하면서 가난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새로운 땅에서의 개척생활이 비록 고되고 외로우며 또 위험한 일이기는 하지만 몇 년의 고생 뒤에는 거의 보장되어 있다시피 한 성공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고원지대에로 발을 향하게 한다. 통일 이후 서부 고원지대로 약 5백만-1천만 정도가 이주했다고 하니 (MHRO) 베트남 역사상 가장 짧은 시기 가장 많은 인구의 이동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동 및 그에 따르는 토지 획득은 당연히 산지인들로부터이다. 물론 산지인들에게는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명백히 보장되어 있다. 따라서 토지의 획득은 매매를 통한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니까 일부의 주장대로 베트남인들이 강제로 토지를 빼앗기고 오지로 쫓겨나 기근과 질병에 시달리며 죽어 간다든가 베트남 정권이 조직적으로 “인종청소 (ethnic cleansing)”를 한다, 산지인 기독교도들을 조직적으로 박해한다, 결국 산지인들은 멸종될 것이라든가의 주장들 (MHRO)은 과장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백인들은 아메리카 인디언들로부터 분명 땅을 구입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빼앗았다고 한다.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은 경제 개념이 다르고 사회 조건이 다른 집단 사이의 자유 거래는 애초부터 평등하지 않을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정부로서도, 산지인 소유 토지거래를 자유경쟁에 맡겨버린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산지인들에 대한 차별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어쨌든 산지인들의 토지는 급속도로 잠식되고 그들은 더 깊은 곳으로 자꾸 이동하거나 일용노동자로 전락하고 있다. 또는 베트남인 이주자들에게 둘러싸여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동화되는 과정을 밟기도 한다.
4. 최근의 소요 및 전망
2001년 초 산지에서는 닥 락을 중심으로 해서 소수민족들의 소요가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이의 진압을 위해 군인들까지 동원되어야 했다. 베트남 정부의 보도 통제 때문에 사건의 진상은 명확히 전해지지 않았지만 인터넷 사이트 등 여러 경로를 통해서 단편적으로 전해진 바에 의하면 사건의 발단은 산지인 교회에 대한 지방 정부의 과도한 통제였던 것 같다. 앞서도 소개한 바 있지만 프랑스 식민시대를 거쳐 산지인에 대한 기독교 선교가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카톨릭뿐만 아니라 신교도 많이 퍼져 있는 상태이다. 이 소요로 인해 수많은 산지인들이 체포 구금되고 산지인들의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베트남인 초등학교에는 독약까지 살포되는 끔찍한 반발도 있었다. 산지인들과 진압군 내지는 베트남인들 사이의 충돌이 격화되면서 내몰린 산지인들은 국경을 넘어 캄보디아까지 도망쳤고 급기야 미국이 개입하고 캄보디아 정부가 동의하면서 이들에게 난민 자격을 부여하고 캄보디아에 정착시켰다.
이해 미국에 있는 망명 산지인들에 의해서는 ‘산지인인권기구 (The Montagnard Human Rights Organization, MHRO)가 결성되었고 이들에 의해서 ’므로 독립 선언‘까지 발표되었다. 이 선언에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에 대해서 요구하는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물론 이 조직의 대표성을 인정하기는 힘들다. 단지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주장들을 통해서 중부고원지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 산지인들이 중부고원지대에 대한 합법적이고 당연한 소유자라는 사실과 1946년 5월 27일 프랑스가 부여한 이 지역의 자치권을 인정할 것. 2. 1948년 12월 10일 유엔 총회에서 선포한 인권선언에 의해 보장된 산지인들의 인권을 인 정할 것 3. 산지인들이 자유롭고 인간답게, 그리고 평등하게 살며 종족, 피부색, 언어, 종교 또는 정치적 표현 때문에 차별 받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인정할 것 4. 강제적인 산지인 동화 및 인종 학살 정책을 중단할 것 5. 자유로운 종교적 표현을 허용할 것 6. 산지인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마을에서 고유의 문화, 전통, 종족 법정 (法廷), 학교, 교 회, 의료시설 등을 유지하며 살게 할 것 7. 므로는 베트남 중부 고원지대 산지인들의 정치적 상황이나 복지와 관련된 모든 외교/국 제 관계에서 산지인들을 대표할 것이다.
제 1항에서 주장하고 있는 바는 매우 근본적인 문제이다. 베트남 역사가 시작된 이래 19세기까지 중부 고원지대가 베트남과 한 몸이었던 적이 없었다. 백여 년의 베트남 지배 기간 동안 프랑스도 이 부분을 명백히 했으며 서부 고원지대는 베트남 땅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떠났다. 그러나 프랑스의 결정이란 것이 전혀 구속력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베트남인 특히 북베트남 입장에서 프랑스의 중부고원지대 자치권 인정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불법적 점령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베트남 땅이 된 마당에 베트남 정부가 산지인들의 독립 요구를 들어줄 리 만무하다. 무엇보다도 이 지역에서는 이제 베트남인들이 압도적 다수가 되어 버렸다.
제 2항이나 3항에서 보이는 인권 문제 또는 차별 문제는 각자가 주관적인 잣대로 평가하는 것이어서 뭐라고 얘기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3장, 5장, 6장에서 중복되어 나타나는 종교의 문제에 있어서 베트남 당국의 정책은 산지인들의 불만을 야기하기에 충분하다. 물론 이 종교 문제는 산지인들뿐만 아니라 평지인들에게도 관련된 베트남에서는 가장 민감한 사안 중의 하나이다. 신교 구교를 막론하고 베트남 내 종교적 자유의 문제는 국내외에서 늘 논란거리가 되어 왔다. 특히 신교의 문제는 심각해서 현재도 베트남 내에서 신교 활동의 자유 특히 선교 활동은 큰 제약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평지베트남인들의 종교 활동에서 기독교도가 차지하는 비중과 비교할 때, 기독교도가 다수인 산지인들에게 정부의 종교 정책은 마치 산지인 다수에 대한 제한과 핍박으로 느껴질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특히나 신교 신봉자가 약 20만 정도 (1999년, Montagnardalliance) 되는 상황에서 산지인들에게 정부 측의 태도는 훨씬 큰 압박으로 와 닿을 것이라 생각된다.
산지인 학살의 문제는 아직도 확인이 요구되는 사항이다. 호주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산지인 인권 보호 단체의 주장에 의하면 학살, 납치, 자의적 체포, 구타, 고문, 강제 불임 시술 등도 자행된다고 한다 (Montagnardalliance). 그러나 이는 단편적인 정보에 근거한 것이므로 전적으로 신용할 바는 되지 못한다. 몇몇 관광 코스를 제외하고는 산지인에 대한 접근 조차도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서 베트남 정부가 발표하는 ‘평화로운 공존 상태’ 역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긴 힘들다. 물론 2001년 초에 있었던 산지의 소요사태라든가 일부 산지인들의 캄보디아 망명 사태 같은 것은 언론을 통해 베트남 내에도 보도되었으나 그 이유를 평지인과 산지인의 보편적인 갈등이 아닌 ‘소수 불순한 분자들’의 선동 탓으로 돌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산지인들의 현황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단지 소요 사태 이후 최근까지 달라진 정부의 태도는 쉽게 발견된다. 필자가 2003년 1월 내내 하노이에 체류하면서 관찰한 바에 의하면 예를 들어 국영 티브이에 산지 소수민족들에 대한 프로그램 방영이나 산지인들에 대한 언급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2003년 1월 말 몇 일 동안은 2001년 소요 과정에서 캄보디아로 도망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을 집중 보도하며 그들의 귀향을 반기는 모습도 방영이 되었다. 분명 정부는 갈등의 심각성에 대해서 인식을 한 듯 하며 산지인들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오랜 역사 동안 끊임 없이 타 민족들의 영역을 잠식하고 그들을 동화해 왔던 베트남인들은 설사 자신들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도 몸에 이미 배어 버린 그 ‘경향성’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가능성은 분명 있다. 그리고 그건 분명 타민족들의 피해의식을 자극한다. 이런 맥락에서 산지인들이 주장하는 전통의 파괴 및 동화는 베트남인들은 결코 아니라고 부인할지 몰라도 상당 부분 설득력 있어 보인다.
앞서도 토지 침탈의 문제에 대해서는 얘기했지만, 설사 선의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베트남인들의 동화는 매우 조직적이고 집요해 보인다. 2001년 초 필자는 다 랏을 방문해 그곳 주변 관광 코스 중의 하나로서 내외국인에게 공개되어 있는 한 소수민족 마을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닭 마을 (Chicken Village)라고 하는 이 마을은 입구에 자신들의 전설과 관련된 커다란 닭 상 (像)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마을을 구성하는 민족은 다 랏에서는 베트남인과 중국인을 제외한 민족들 중에 가장 인구가 많은 크메르 계통 카호 (Kaho) 족이다. 이 카호 족은 1950년대 소수민족 운동 조직인 바자라카 (BAJARAKA)의 마지막 글자를 구성하는 민족이다. 베트남인들은 이들을 '꺼 호 (Co Ho)'라고 부른다. 주민들은 농사와 관광상품 판매를 주 수입원으로 하는데 베트남인들에 의하면 “지극히 가난하고 자신들이 보호해야 할 사람들”이다.
원래 이들이 살던 곳은 더 높은 산지였다. 그런데 1975년 이후 정확히 어느 시점인지는 모르겠으나 산지인들의 소요사태가 일어났을 때 안전을 위해서 이곳으로 강제 이주시켰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자동차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에서 꺾여져서 산지 방향으로 나 있는 좁은 도로 상에 이 마을이 위치하는데 이 마을의 앞과 뒤는 모두 베트남인들 마을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베트남인들에게 둘러 쌓여 있는 셈이다. 19세기 응우옌 왕조 조정에서 남부 메콩 유역의 크메르인들을 베트남화 할 때 이들을 베트남인들과 같이 섞여 살게 하면서 ‘서로 보고 배우게’ 하여 동화시켜 나가는 바로 그 방법 (Choi 2003: 51)의 재현 같아 보인다. 물론 베트남인들은 이들을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들은 읽고 쓸 줄 모르기 때문에 (베트남말을) 베트남 정부는 학교를 세워주었고 친절히 교사들을 보내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베트남인들의 말에 의하면 소수민족들은 교육수준이 낮아서 이들 중에서 적당한 교사를 구하기란 힘들다는 것이다. 사실일 것이다. 특히 초등학교 교사란 언어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가르칠 과목이 많다. 그래서 베트남인 교사들이 파견된다. 이들은 먼저 카호 족의 말을 배운다고 한다. 일정의 의사소통이 가능한 연후에 교사로 부임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당연히 아이들이 학습해야 되는 언어는 베트남어이며, 베트남어로써 대부분의 교육이 이루어진다. 소수민족들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들의 말을 잃어가는 과정이다.
종교적인 동화도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진다. 이 마을의 관광 코스 중에는 전통 향 (香, 베트남향) 제작장이 있다. 관광객들 이곳으로 들어가면 이곳에서 향 만드는 방법을 시연하는 사람이 한 명 있다. 시연이 끝나면 관광객들에게 향을 팔기도 한다. 이 사람은 카호족이 아니라 베트남인인데, 승려 (여승)이다. 이 승려가 향을 만들고 판매하는 일을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해서 번 돈으로 가난한 이 마을 사람들을 돕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 승려는 마을에 세워진 절에 속해 있으며 이 절은 역시 마을 사람들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한 장소로서 베트남인이 세운 절이다. 즉 이 베트남인 승려는 소수민족들에게 베트남인들의 종교를 전달하는 첨병이며 절은 그 근거지이고 향 제작 작업이라든가 판매는 베트남 문화 침투를 위한 재정적 기반인 것이다.
한가지 덧붙인다면 이들 소수민족들이 관광상품화 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 랏에 가면 몇몇의 관광 안내 회사가 있는데 이들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베트남인들이며 (물론 중국인들도 많다) 이런 관광 사업과 관련되는 안내원, 식당, 자동차 운전 역시 베트남인들이 도맡아 하고 있다. 즉 외국인들 또는 타지방 베트남인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소수민족들을 구경시켜주는 사람들은 베트남인이며 구경거리가 되는 대상은 소수민족들이라는 것이다. 어느 나라고 관광사업이란 존재한다. 그리고 이 사업은 단지 고부가가치를 가질 뿐만 아니라 민족 동질감 형성에도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친다. 평지 베트남에서도 관광 산업이 크게 발전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산지인의 관광상품화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는 것은, 그들 대부분이 이런 산업에는 전혀 무관심하며 사업의 수익 역시 이들에게 전혀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서이다. 만약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 그것도 달러를 소유한 외국인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다녀가는데도 불구하고 여려 보이는 베트남인 여승이 향을 만들어 팔아서 이들의 가난을 구제한다는 것은 넌센스가 아닌가?
이곳을 찾는 많은 베트남인 관광객들에게 이들은 아직도 진정한 민족구성원 같아 보이지 않는다. 소수민족들의 공연을 감상하고, 그들의 민속의상을 빌어 입고는 깔깔거리며 기념사진을 찍는 베트남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소수민족들 및 그들의 문화전통이란 희귀한 볼거리 이상으로 인식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현실적 상황과 베트남인들의 노력이다. 일단, 서부고원지대의 산지인들이 독립을 획득하기란 대단히 힘들어 보인다. 동남아시아에서 20세기 동안 등장하고 발전해 온 국민국가들이 분열되거나, 시기를 제대로 잡지 못한 민족들이 새 국가를 만들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극히 예외적인 사례로 동티모르의 독립이 있었으나 그것은 동티모르의 경우였기에 가능했다. 마구 분열될 것 같던 인도네시아가 벌써 5년째 건재하는 것도 국민국가를 고착화시킨 20세기의 힘이다. 중부 고원지대의 형편 역시 마찬가지이라 생각된다. 다민족국가임을 천명하고 민족간의 협조 및 화해에 지극히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베트남의 노력도 만약 그 노력이 매우 진지하고 지속적인 것이라면 적어도 베트남인 입장에서는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베트남인들에게는 민족간의 화합을 이끈 역사적 경험 내지는 민족적 특질이 있다. 이런 경험과 장점을 기억한다면 베트남인들의 이번 고원지대로의 이동 및 산지 지역의 베트남화도 결국 성공으로 귀결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단지 그 과정에서 앞으로 베트남인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많이 남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