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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41) 2023. 9. 27
아히도벨의 모략
삼하 16:15-23
<무혈 입성하는 압살롬, 그러나>
다윗과 그를 쫓는 신하와 군사들이 급히 예루살렘 성읍을 떠나자, 예루살렘 성읍은 빈 공간이 되었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은 아무런 피를 흘리지 않고, 헤브론(15:9-13)에서 예루살렘으로 무혈입성(無血入城) 입성합니다.
15절 “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이르고 아히도벨도 그와 함께 이른지라.”
그런데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 이르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미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압살롬을 지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지난 5년간 압살롬이 성문 밖에서, 백성들의 마음을 훔친 결과입니다.
백성들은 압살롬이 퍼뜨린 가짜 뉴스에 속고, 압살롬의 친절과 훌륭한 외모에 넘어갔습니다.
1. 압살롬이 퍼뜨린 가짜 뉴스 - 압살롬은 일찍 일어나 성문 길가에서 서성이다가 왕에게 재판을 요청하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불러 어디 출신이냐고 물어본 뒤에 그 사람이 압살롬에게 대답하면 그 사람의 편을 들면서 다윗 왕은 그의 송사를 들을 사람을 세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정의로운 재판관이라고 선전하며 그의 편을 들어 주었습니다. 또, 거만하게 행동하지 않고,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매우 친근하고 편안하게 다가갔습니다(삼하 15장). 이런 행동을 한 번만 한 것이 아니라 왕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서 오는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하였고,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살롬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2. 압살롬의 타고난 외모 - 더군다나 압살롬에게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만한 아주 좋은 조건을 타고났습니다. 바로 그의 흠 잡을 데 없는 외모였습니다. 그의 아름다운 외모는 사람들에게서 호감을 얻기에 충분했습니다. 삼하14:25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이 두 가지 이유로, 성경은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훔쳤다”는 표현은 그가 백성들에게 이런 평가를 받는 것이 정당하지 못한 사기 행각의 결과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또 주목해서 봐야 할 대목은 아히도벨도 압살롬과 함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히도벨의 존재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면, 누구의 지지를 받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상황을 잘 모르던 백성들은 그랬을 것입니다. “아히도벨이 압살롬을 지지한대. 오늘 보니까 그가 압살롬과 함께 들어오던데”하고 말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그래? 그렇다면 압살롬이 확실히 왕이 되겠구먼, 우리도 압살롬의 편에 서야 하겠구먼” 하며 동조했을 것입니다.
아히도벨이 왕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대단하였습니다.
23절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
정말 최고의 칭찬입니다. 그의 말의 권위가 어떤 수준인지를 보여줍니다. 마치 하나님의 말씀과 같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이자 설교자인 제가 듣고 싶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최고의 모사인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은 압살롬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압살롬의 반역은 이미 성공한 듯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과연 하나님이 다윗을 저주하시고 압살롬을 축복하셨기 때문에 생긴 결과일까요?” 즉 “압살롬의 형통과 강성함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보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만일 압살롬의 형통과 강성함이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라면, 그의 그러한 상태는 계속해서 유지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압살롬의 형통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고,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중요한 영적 원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형통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을 징계하는 도구로 활용하실 때가 있습니다.
지금 압살롬의 반역이 성공하는 듯 보이지만, 이는 하나님이 압살롬을 축복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통해 다윗을 징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시려는 것입니다. 즉 압살롬은 하나님의 막대기 역할만 할 뿐 징계가 끝나면 그 막대기는 버려지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범죄한 당신의 백성을 징계하기 위하여 바벨론을 강성케 하셨다가 그 목적을 이루신 후에는 페르시아를 일으켜 악한 바벨론을 심판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악인의 형통이나 강성함은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가 아닙니다.
우리는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데도 우리에게는 어려움과 고난이 끊이지 않은 데 비해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아니 하나님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훨씬 잘되고 형통하는 것을 볼 때 신앙적 회의를 느끼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감정을 품기 쉽습니다.
옛날 하박국 선지자도 그러한 상황을 보면서 신앙적 회의를 품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악인의 형통함은 일시적이며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과 의인은 잠시 고난을 당하나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듣고는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시편과 잠언 기자도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시 37:1~2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2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시 92:7 “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
잠 24:1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농사를 지어보신 분들은 논에 가라지가 벼보다 더 잘 자라는 것을 봅니다. 밭에 채소보다 잡풀이 더 왕성한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 결말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곡식과 가라지 비유’(마13:2530) -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악인이 형통함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는 날 악인들의 형통함을 꺾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자들이 잠시 권모술수와 악한 책략을 통해 형통하는 것을 보더라도 낙심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후새의 합류>
압살롬이 예루살렘 성읍에 입성하였을 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아갑니다.
16절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갈 때에 그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 하니.”
'아렉 사람 후새'는 ‘다윗의 친구’이자 아히도벨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는 앞서 피난 가는 다윗 왕을 기다렸다가 만났으나, 다윗의 부탁을 받고 다시 압살롬에게 돌아왔습니다(삼하 15:34). 아히도벨의 모략을 알아내고, 그 모략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잠입한 것입니다.
후새는 압살롬을 지지하는 척하면서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를 외쳤습니다.
후새의 등장에 당황한 것은 압살롬입니다. 압살롬은 ‘후새’는 아버지의 친구로 알고 있었기에, 당연히 다윗과 동행했을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묻습니다.
17절 “압살롬이 후새에게 이르되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즉, “이것이 친구를 대하는 너의 우정이냐? 네 친구는 어찌하고 여기에 온 것이냐?”라고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후새가 말합니다.
18~19절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이다/ 19 또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리이까 그의 아들이 아니니이까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 하니라.”
한 마디로 대세를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압살롬을 택했다”고 말합니다.
후새의 말은 겉으로 보기에는 이치에 맞는 말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다윗은 범죄하여 쫓겨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압살롬은 “여호와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택함을 받아”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압살롬이 듣기에도 후새의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습니다. 대세가 자기에게로 기울었다고 판단하였기에, 자신만만했던 것입니다. 즉, 아무리 ‘다윗의 친구’라 하더라도 대세를 따를 수밖에 없다고, 자신을 지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라며 이어 충성하겠다고 하자, 아히도벨에 이어 또 한 사람의 모사를 얻게 된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승리의 기분에 들떠 있었기 때문에 후새의 고백에 그의 본심을 헤아리지 못하고 속아 넘어갑니다.
이쯤 되면 압살롬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이스라엘의 최고의 모사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을 얻었습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줄 알았던 예루살렘 성 진입작전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무혈 입성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 쉽게, 아무 저항 없이 반역이 순탄하게 진행되는 있는 것입니다. 압살롬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도우시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이것은 큰 오해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불의와 정당함은 생각하지 않고, 설사 불의한 일이라 할지라도 순탄하게 잘되면,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과정과 결과를 모두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과정을 눈감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과정이 불의함에도 형통하다면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 종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정에서나 결과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에 앞장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히도벨의 모략>
예루살렘 성읍을 장악한 압살롬은 아히도벨에게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려달라고 합니다.
20~21절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이르되 너는 어떻게 행할 계략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하니/ 21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하니라.”
아히도벨이 내놓은 첫 번째 계략은 '다윗이 남겨 둔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아히도벨의 계략에는 세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1) 다윗과 압살롬 간의 부자지정(父子之情)을 완전히 끊어 놓기 위함이었습니다.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21)
고대 근동 국가에서, 전왕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것은 전왕을 폐위하고 자신이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여 전왕의 권력과 모든 재산을 차지했다는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즉 만일 압살롬이 부친의 첩들을 취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부자지간의 상봉(相逢)을 완전히 끊어버릴 수 있는 확실한 계략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2) 압살롬과 함께 반역에 동참한 모든 자의 우려를 말끔히 해소하고자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1b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하니라.”
그들은 혹시라도, 다윗과 압살롬이 화해라도 하는 날에는 자기들이 모조리 반역자로 몰리어 처벌되고 말 것이라는 염려하였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부친의 첩들을 취한다면, 부자지간의 화해는 물 건너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압살롬의 추종자들은 안심하고 더욱 새 왕을 따를 수 있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3) 그밖에도 아히도벨의 이러한 모략은 다윗 왕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을 갚으려는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즉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조부라는 사실이 거의 분명하므로(11:3), 우리는 아히도벨이 밧세바를 강탈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까지 모살한 다윗 왕(11장)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다가 기회가 오자 다윗에게 복수하고자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아히도벨의 이와 같은 모략은 당시 고대 근동의 사람들 관례에 비추어 볼 때는 정당하다고 평가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히도벨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근동 국가와는 다른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장 나라’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곧 통치 이념이 되는 국가입니다.
더군다나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는 부자 관계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때 이스라엘의 최고 지략가였던 아히도벨이 하나님을 떠나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은 근친상간(近親相姦)을 분명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레18:8 “너는 네 아버지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아버지의 하체니라.”
그러면 그 율법을 어긴 사람에 대한 벌을 무엇입니까?
레20:11 “누구든지 그의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
아히도벨이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을까요? 저는 분명히 알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정치적인 이익을 도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압살롬의 진영에 몸을 담는 순간 이미 그는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다윗을 세우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삼상16:1-13). 그러나 그가 범죄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왕위를 보전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떠나기로 작정했기에, 그는 이방 나라에서 관행적으로 행해지던 계략을 지혜랍시고 내놓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민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사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욕심, 즉 죄를 부르는 결과를 얻게 될 것이며 결국은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약 1:15).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이 배신하면 더 무섭습니다. 지식으로 성경을 잘 알고, 신앙생활을 통해서 교회의 속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타락하면 더욱 강력한 사탄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징계 또한 더욱 심각합니다.
히6: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압살롬의 반응>
아히도벨의 전략에 압살롬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22절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옥상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아버지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니라.”
'옥상에' 장막을 쳤다는 대목에서, 다윗이 목욕하던 밧세바를 바라보고 음욕을 불태웠던 곳인 다윗성의 왕궁 옥상(11:2), 바로 그곳일 것입니다.
결국은 나단 선지자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는 순간입니다(12:11). 즉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죄에 대한 징계로서 장차 그의 처들이 백주(白晝)에 겁탈당할 것이라고 선고하셨는데, 이제 아히도벨의 불의한 모략에 의하여 예고된 심판이 그대로 성취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저지른 죄는 가볍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징계가 완성되었으나, 그의 죄 역시 하나님의 앞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레20:11).
결국, 압살롬은 그 죄로 인해 요압과 그의 부하들의 칼에 무참히 살해되었습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안 보시는 것 같으나 행한 대로 정확하게 갚으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도 하나하나 현실화 되고 있습니다.
압살롬의 아버지의 하체를 범한 죄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방식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때때로 그 유혹에 넘어갈 때가 있습니까? 눈앞에 이익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지금 당장 불편해지거나 손해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분명 근시안적인 삶이요, 영생을 바라보지 못하는 삶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자칫 우리가 아히도벨처럼 될까를 조심해야 합니다. 한때 하나님의 선한 일꾼으로 쓰임 받았다가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하나님의 길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좁은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은 악한 일에는 둔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는 지혜로워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고, ‘주 안에서’ 행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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