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 은평혁신파크 상상청에서 수채화동아리 '물색그리다'의 마을화가들 작품 전시회를 연다. 두 작품을 제출해야 하는데 물 그리기 수업에서 시도했던 그림을 크게 제대로 그려보기로 했다.
2022년 2월 중순 경 은정이와 함께했던 제주 여행. 서귀포 남원 해변에 독채 숙소를 구하고 남원 해안을 걸었다. 햇살 좋고 고요한 오전 고요한 바다, 바위에 내려와 쉬고 있는 물새들. 평화로왔다. 봄이 막 상륙하려 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어 간직해 둔 기억을 꺼냈다.
바다색을 내는 연습에서 찾아둔 색상을 배합해 바다색을 결정하고 가운데가 밝은 그래듀에이션을 그려야했다. 하지만 이게 쉽지 않다. 가로로 넓은 수면에 이중의 그래듀에이션을 제대로 그려내는 게 쉽지 않아 수차례 종이를 버려가면서 연습했다. 그리고 물색이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은 종이에 연습 삼아 완성해보았다. 두번째 시도로 완성한 작품이다. 물색은 비리디언과 코발트 블루, 로 엠버를 배합하였다.
첫 연습작과 확연한 차이는 물색 뿐 아니라 하늘 빛이다. 햇살이 부서지는 찬란함의 효과는 종이가 지닌 백색만으로 불가능하다.
땅색 계열인 '로 엠버'를 엷게 하늘의 바탕에 칠해 주는 것이다. 그 바탕이 마르면 그 위에 셀루리안 블루로 하늘과 구름을 표현한다. 그런 옅은 땅빛의 로 엠버 색이 대기의 깊이감을 완성한다.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팁이다.
이 그림을 그리는 중 가을이 깊어져 하늘은 맑고 청명했다. 청명한 하늘이 대지와 맞닿는 부분에 그렇게 엷은 땅빛이 서려있다는 걸 새삼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렇구나.
덕분에 찬란해졌다. 아이러니다. 순수한 흰색이 아닌 엷은 땅색을 바탕으로 한 대기가 더 찬란하고 눈부시고 깊다.
나는 2월의 제주를 좋아한다. 2월의 제주는 다채롭다.
동백꽃과 유채꽃, 매화가 만발하고 감귤을 수확하는 계절이라 지천에 달고 신선한 감귤로 풍성하다. 해변은 따뜻하고 한라산간에 오르면 설원이 펼처진다. 그야말로 '바다 너머 남촌'인 곳이다. 오랜 겨울에 지쳐갈 때 쯤 이른 봄 맞이를 위해 달려가는 곳이 제주 남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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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아름다운 자연, 특히 바다 풍경 곁에 서면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나는 그저 순간 왔다 가는 나그네로구나.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 그리고 떠나고 난 후... 그 아득한 시간 속에서 오늘처럼 해는 뜨고 석양은 찬란하고 물새는 날고 바다는 의연하겠구나. 누구는 태어나고 누구는 임종하고...그렇게 생각하면 스산하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지만...
하지만 생텍쥐페리가 <인간의 대지>에서 표현했듯이 이런 아득한 영원성에 대한 의식을 지닌 존재인 나... 는 기적이다.
"가장 놀라운 일은 자기를 띤 보자기와 그 별들 사이, 지구위 둥근 등 위에 서 있는 한 인간의 의식이 있다는 것, 그리고그 의식 속에 불의 소나기가 거울에 비치듯 비쳐질 수 있다는 것이다. 광물 지층 위에서의 꿈이란 하나의 기적이다. 그리고 난 어떤 꿈을 기억한다."
자연을 화폭에서 재창조하려는 존재도 역시 기적이다. 바다의 기쁨이다.
위 사진이 전시할 그림, 아래 사진이 초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