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에 대하여>
무더운 추석날 밤, 아파트 정원 위로 휘영청 노란 달이 떴다. 달빛에 환해진 구름의 조화까지 너무나 어여쁘다. 땅꼬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예전 같았으면 "땅꼬야 저기 봐, 달이야~~" 손가락으로 가리켰겠지만... 몇 차례 실험 후 알게 된 사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금언은 고양이들에겐 통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번쩍 땅꼬를 들어 올려 달을 향해 시선을 맞춰준다. 땅꼬는 환한 달을 잠시 응시한다. 어떻게 느껴질까... 너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
손가락과 달 사이의 거리. 그건 허구의 거리이다. 손가락과 달 사이에 물리적 연장은 없다. 의미의 연장이 있을 뿐이다. 만약 내가 달을 두드리며 소리를 낼 수 있다면, 땅꼬는 달을 볼 것이다. 하지만 저기 봐~~~ 손가락을 들어올려도, 내 시선과 함께 들어올려도 땅꼬는 소리를 내는 나를 지켜볼 뿐이다.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고 달을 가리킨다 해도 땅꼬는 손가락만 본다. 손가락과 달 사이의 허공, 그 허공에 존재하는 가상을 통해 연결되는 의미를 땅꼬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언어도, 지도도... 어떤 종류의 상징도 존재하지 않는 직접성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인간의 아기들은 언제부터 허구의 가상을 타 넘고 직접적 대상과 상징의 의미 사이의 연결성을 깨우치는 걸까? 침팬지는 이런 능력이 있을까? 언어, 예술, 철학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영역일까?
<리듬에 대하여>
귀가하는 나를 마중 나오는 땅꼬와 장군이는 옷을 갈아입으려는 나를 쫓아 옷방으로 들어온다. 궁디팡팡의 시간이다. 두 냥이 엉덩이를 양손에 두고 팡 팡 팡 팡 두드려주다 문득 습관처럼 장단을 맞춘다.
덧배기 장단이다.
“땅도 땅도 내 땅이다, 조선 땅도 내 땅이다. 팡-파 팡-파 팡-파바방, 파방 방-파 방-파바방”
설장고에서 배운 변형을 가해 한참 덧배기 장단으로 놀다 휘몰이로 넘어간다.
“팡팡 팡팡, 팡팡 팡팡. 파바방 파바방 팡팡 팡팡, 으파팡 으파팡 팡팡 으팡”
휘몰이 변주로 몰아간다.
두 냥이 엉덩이를 장고 삼아 신이 난 나와 달리 뭔가 이상한 조짐을 보이는 땅꼬. 고양이 성감대를 자극하는 궁디팡팡이 주는 쾌감으로 흥분이 시작되면 내게 머리를 부비고 구르고 러브 바이트까지 자지러져가는 예전의 땅꼬가 아니다. 어쩐지 그 리듬에 도취되어 길수록 쾌감이 사라지는 것 같다. 쾌감은 멀리 가고 리듬에 집중한다. 그러다 문득 욕구불만이 일깨워진 것인지 냉정하게 나를 쳐다보다 가버린다.
사냥놀이 중, 사냥감이 되는 장난감을 흔들다 또 리듬을 타면 땅꼬의 흥분은 사라진다. 사냥의 충동을 잊고 우두커니 지켜보는 것이다. 그냥 불규칙한, 혹은 단조롭게 반복되는 소리와 달리 일련의 리듬을 이루는 소리는 일종의 도취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이 분명하다. 그 도취는 본능적 욕구를 망각하게 한다. 실용적 목적을 잊게 만드는 어떤 힘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음악의 힘이구나. 음악은 어쩌면 종의 경계를 넘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든 예술 중 음악이 가장 강력한 원초적인 예술이라고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