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7.10
연일 폭염주의보가 내린 무더위 속에 평창 생태마을에 갔다.
한국 가톨릭 문인협회에서 주최한 행사에 처음 참석한 것이다.
평창 생태마을은 내 모본당, 수원교구 조원동 성당 주임이셨던 김창린 필립보 신부님이 은퇴 후에 계시던 곳이다.
몇 년 전에 친한 신부님이 보좌로 있을 때부터 한 번 가봐야지 가봐야지 하고 벼르기만 했던 곳.
수원교구 신자였을 때는 못 가본 그곳을 이제 서울교구 신자로 가게 되니 느낌이 이상하다.
주임이신 황창현 신부님을 만나면 괜스레, 저도 수원교구 신자였어요, 하고 말하고 싶다.
고향 사투리를 쓰는 사람을 보면, 저도 고향이 같아요,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게다가 황 신부님은 내 모본당 출신이다.
그 누이는 전에 나와 한 미술학원에서 잠시 그림(수채화)을 배운 적이 있다.
그때는 그이 동생이 신학생인 줄도 몰랐고 이리 유명한 사제가 될 줄은 더구나 몰랐다.
하기야 그때 나는 세례 받은 지 얼마 안 돼 '쉬는 교우'였기에 알았대도 흥미 없었을 것이다.
그 누이 역시 그때는 신자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니 그이와 내가 나눈 대화의 주제는 그림에 관한 것과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소식이 다였다.
나중에 내가 '쉬는 교우' 생활을 청산했을 때야 그이 동생이 사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한, 동네 입구에 있던 내 단골 사진관 주인도 그분 형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황 신부님을 직접 만난 일은 없지만 그분을 둘러싼 분들과는 줄곧 연관이 있었던 거다.
이렇다보니 그분은 정작 나를 모르는 데도 나는 혼자 매우 친근한 사이처럼 느껴지지 않겠는가.
그런데 모처럼 가까이 뵙게 된다니 내가 누구인지,
누구랑 친했는지를 알리고 싶은 마음이 불뚝불뚝 솟아남을 느꼈다.
더구나 그분 강의 중에 누이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더욱 그랬다.
그러나 전국구, 아니 이제는 월드 스타가 된 사람의 주변에는 언제나 人의 장막이 겹겹이 둘려지는 법.
그걸 알면서 장막을 비집고 들어가, 일방적인 친근함을 쌍방향으로 개설하려 함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더구나 그분이 유명 강사 되신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인가?
어딜 가서나 비슷한 사람들의 뻔한 시도를 수없이 겪었을 터이다.
그래선지 人의 장막을 적절히 비껴가며 자신을 지키는 기술 또한 세련되어 보인다.
적당히 가까이.
적당히 멀리.
그러기에 그분의 재미난 강의 들으며 마음껏 웃고 끄덕이다가,
그분이 이뤄놓은 것에 손뼉 치며 후원하고,
앞으로 더 널리 유익한 분이 되길 기도하며 돌아가면 된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하루가 감사하다.
좋은 강의 듣고 친환경 먹거리 맛있게 먹고, 탁트인 경치보며 스트레스 날리고 나니.
수고하신 여러분들의 손길이 있어 참으로 편하게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 모임에는 '有名한' 분들이 참 많다.
그래선지 회원들끼리 인사를 나눌 때도 '이름'을 유심히 새겨듣게 된다.
다른 모임에서보다 그렇다.
돌아오는 차에서 '이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자연스럽게 '이름'에 대한 성경의 대표적인 구절이 떠오른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창세 11,4)
하느님 없이 이름 날리기.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은 동기이며, 하느님이 그 탑을 허물어버린 이유이다.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창세 12,2)
하느님께서 아브람을 불러 축복을 내리시며 하신 말씀이다.
하느님은 후에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민족들의 아버지)으로 바꾸어주셨다.
아브라함의 이름은 수천 수만 세대에 걸쳐 휘날린다.
이름은 진정 어떻게 떨치게 되는지,
그 이름의 주인은 누구인지,
이름이 지닌 값(뜻)에 우리는 어떻게 충실해야 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불현듯 내게도 하느님이 지어주신 이름이 있다는 생각,
그 이름으로 그동안 어떠한 일들을 했는가 하는 생각,
앞으로 또 그 이름으로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서,
오늘 하루로 끝나는 피서, 피정이 아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