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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1. 광주민중항쟁의 배경
1) 광주민중항쟁의 사회구조적 배경
1980년 5월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남지역 민중들이 민주주의를 위한 처절한 투쟁은 엄청난 물리력을 앞세운 군부의 초토화작전으로 일단을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히 발생한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었으며, 마냥 실패한 역사로만 기억될 수도 없는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마무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민중항쟁’으로 불려졌으며, 한국 현대사의 흐름에서 커다란 분수령이 되었다.
1980년 5월 광주가 경험하였던 정치·군사적 상황은 그때까지의 사회구조적 모순이 분출한 것으로, 그러한 모순구조는 우리나라 모든 지역의 사회경제적 구조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광주민중항쟁은 당시 한국의 모든 지역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항쟁이었다. 그러나 광주·전남지역의 특수한 조건, 즉 경제적·정치적·역사적 조건으로 인해 항쟁은 광주와 전남지역에서만 발생하였다.
광주민중항쟁의 사회구조적 배경은 대략 다음의 3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경제적 배경을 들 수 있다. 1950∼60년대의 종속적 원조경제를 거치며 형성·성장해 온 한국의 산업화는 70년대의 대외지향적이고 대기업(재벌) 지향적인 경제개발계획에 의해 더욱 강력한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로 확립되었다. 이같은 개발 전략은 한국경제가 그동안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로 제공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개발전략은 대내적으로는 국민경제의 파탄을 야기하면서 대기업의 지배력을 절대화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선진국에 대한 의존을 더욱 심화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동시에 받고 있다.
이러한 개발전략 및 축적구조가 야기한 폐해는 특히 광주 및 전라도 지역에서는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그동안 한국경제의 성장을 주도해 온 선도산업은 제조업이었으며, 국가의 모든 정책도 수출 위주의 2차산업 육성에 맞추어져 있었다. 따라서 농업의 비중이 상대적으로나 절대적으로나 높았던 이 지역은 그간의 경제개발과정에서 소외되어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1967∼68년의 대한해로 촉발된 농촌 주민의 이촌향도 현상은 1960년대 이후 추진되던 산업화 및 도시화와 맞물리면서 그렇지 않아도 몰락해가던 이 지역의 경제적 기반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게 되었다. 결국 부문간·지역간 불균등 발전을 축으로 진행된 경제개발계획이 이 지역의 상대적 소외를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주·전남지역은 70년대 전반에 걸쳐 경제적 낙후성과 그에 따른 각종 사회적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즉 기업가나 경영주는 만연된 불경기에 시달리게 되었고, 농촌은 날로 황폐해제면서 이농민이 급증하게 되었다. 또한 산업기반은 미약한데도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은 많아서 도시빈민이 양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야기되고 있었다. 광주인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도시자영업자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그들도 점증하는 경제적 곤란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러한 제반요소들은 광주민중항쟁의 전 기간을 통하여 항쟁의 발발과 확산에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정치적 배경을 들 수 있다. 1980년이라는 시기는 그동안 18년에 걸쳐 한국을 통치해 온 박정희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바로 다음 해였다. 대통령의 사망은 그동안 1인 독재체제로 유지되어 왔던 유신체제 자체가 그 토대부터 붕괴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억압적인 체제 하에서 숨죽이고 살아야 했던 민중들이 자신들을 뒤덮고 있던 통제의 그물을 벗어버릴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하기도 했다. 그 결과 이 시기는 그 동안 억눌려왔던 일반 국민들의 정치적 욕구가 분출하면서 정치질서의 재편을 강력하게 요구하던 시기였다. 더욱이 그것은 독재권력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유신체제를 극복하고 민주화를 담보하는 새로운 정치질서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욕구는 ‘5·16 군사쿠데타’ 이후 독재권력에 의해 정치·경제적인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를 당해온 광주와 전라도지역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그러한 원망이 집약적으로 표현된 것이 김대중에 대한 열렬한 지지였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그가 이 지역 출신 정치인으로 유신체제 하에서 가장 심하게 탄압을 받았다는데 기인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보여준 정치적 역량을 신뢰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조건은 1980년 5월 김대중의 체포를 자신들의 정치적 열망이 좌절된 것으로 받아들인 이 지역사람들의 정서에 그대로 투영된다. 이런 점에서 당시 시민·학생들이 계엄령 확대에 맞서 최초로 시위를 전개할 때 외쳤던 주된 구호중의 하나가 ‘김대중 석방’이었다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마지막으로 광주민중항쟁의 발생과 확산에는 긍정적인 의미이건 부정적인 의미이건 지역의식과 지역 간의 갈등이 주된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흔히 ‘지역감정’이라고 표현되는 이 지역 주민들의 정치·사회적 소외감은 기본적으로 지역적 불균등 발전이라는 사회경제적 조건에 토대를 두고 있다. 즉 이 지역이 그동안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왔으며, 경상도 등 타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지역감정’을 설명하는 것은 불충분하며, 여기에 지배권력의 분할통치전략으로 의제화된 ‘반호남감정’과 이에 대응하는 ‘호남의식’, ‘전라도의식’에 대한 설명이 보충되어야 한다 이런 대립의식은 3∼4공화국을 거치면서 독재권력에 의해 형성되고 구조화되었는데, 그로 인해 호남사람들은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지역적 차별성과 ‘반호남감정’의 직·간접적인 피해를 당해야만 했다. 그들은 차별적인 국가정책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타지역 사람들로부터 기피되는 이중적인 피해를 당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 결과 호남사람들은 사회·경제적으로는 서로 상이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호남감정’에 대항하는 지역의식을 내재화시켰으며, 그러한 지역적 연대감이 특정한 정치적 계기를 만나면서 ‘반호남감정’을 구조화시킨 독재권력의 타도라는 정치적 지향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지역의식은 항쟁의 발전과정에서 한계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2) 1980년을 전후한 국내·외 정세
(1) 국제정세
1980년을 전후한 시기 한국의 정세와 그 과정에서 발생한 광주민중항쟁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국제정세, 특히 미국과의 관련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은 사실적인 차원에서의 증명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광주민중항쟁에서 미국이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명시적 혹은 암시적인 평가에서 그 필요성이 제기된다. 더욱이 그러한 평가는 1980년대를 거치면서 ‘반미’를 학생운동의 주요 이슈로 등장하게 하였고, 그 과정에서 일반시민들에게도 반미의식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검토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를 위해 먼저 1970년대의 세계정세의 변화와 그에 따른 미국의 극동전략 및 대한반도정책의 변화를 살펴보고, 그러한 변화가 한국에서 ‘10·26사태’, ‘광주민중항쟁’, ‘5공화국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지형의 변화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였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1970년대의 국제정세는 세계2차대전 이후 비교적 안정적인 성장을 계속하던 세계경제의 침체와 제3세계 국가들의 대두, 미국의 헤게모니 약화로 요약될 수 있다. 결국 이 세 가지는 1945년 이후 세계경제와 세계정치를 실질적으로 주도하면서 ‘세계의 헌병’으로 자처해 왔던 미국의 약화로 집약될 수 있다. 이를 항목별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972년의 ‘석유위기’, 그 직후인 1974∼19754년에 폭발한 ‘세계 동시 스태그플레이션’ 등으로 이어지는 경제적 위기를 들 수 있다. 이러한 경제적 위기는 그때까지 미소 양대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온 세계경제체계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특히 아랍산유국의 독자적인 움직임으로 일기 시작한 석유파동은 그동안 석유업계를 지배해온 미국에 대한 반발이라는 점에서 미국의 세계경영에 커다란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제3세계에서 불기 시작한 민족해방운동의 확산과 그에 따른 강연한 귀결인 반미운동의 확산이었다. 아랍산유국들의 정치·경제적 진출, 1075년 월남의 공산화 등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이러한 움직임은 1978년의 이란혁명, 아프가니스탄의 좌익정권 수립, 칠레와 니카라구아에서의 친미정권 붕괴로 이어지면서 1970년대를 장식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을 결국 세계 도처에서 미국의 입지를 약화시켰고, 미국의 세계전략에 위기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그 결과 세계2차대전 이후 유지되어 왔던 세계체제에서의 미국의 헤게모니가 위협받으면서, 동시에 미국 세계전략의 핵심인 대소련 봉쇄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세계경제의 위기에 따른 선진국들 내에서의 경쟁과 갈등의 강화, 미국의 전략적 거점인 중미, 중동, 인도지나에서의 친미정권의 붕괴, 그리고 그로 인한 주변국들에의 도미노현상 등이 이러한 위기를 가져온 주요 요인들이었다. 더욱이 그 과정에서 붕괴된 친미정권들은 자국 내에서 반체제인사들을 악랄하게 탄압하여 도덕적으로도 지탄받는 정권들이었고, 이러한 점은 그대로 미국의 도덕성까지도 의심받는 결과를 야기하였다.
이러한 정치·경제적인 정세의 변화는 미국의 세계전략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으며, 미국 내에서는 카터 행정부의 등장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여기서는 다른 부분은 생략하고 한반도에 커다란 영향을 이치는 미국의 극동전략을 중심으로 그 변화를 살펴보자. 당시 미국 극동전략의 변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일본의 역할분담과 미·일안보체제의 확립, 중국과의 관계개선이었다. 즉 일본을 대아시아 전략의 초석으로 보고 미·일, 미·중관계를 확대해 나감으로써 이 지역에서의 미국의 헤게모니를 관철하고,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겠다는 것이다.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 그에 따른 미국의 극동전략의 변화는 결국 그 종속변수인 미국의 대한반도정책에도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당시 미국의 카터 행정부가 수립한 대한반도전략은 기본적으로 ‘2개의 한국정책’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즉 한반도의 분단을 상당기간 지속시키면서 거기서 파급되는 항상적인 위험을 이용하여 친미적인 정권을 안정화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사회 내부의 안정화가 선결조건으로 되기 때문에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라는 카드를 이용하여 한국의 인권상황에 대한 개선을 종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한국정부와 미국의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매우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오던 박정권과 미국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했다는 징조는 1970년대 중반부터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인권문제, 주한민군 철수문제 등으로 한국정부를 압박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이라는 이름 아래 핵개발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박동선 사건’이 터지기도 했고, 미국 대사가 당시 야당인 신민당총재를 방문하여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9년 중앙정부부장으로 유신체제의 2인자에 해당하던 김재규에게 박정희대통령이 시해되는 ‘10·26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과 미국과의 관련성은 당시부터 제기되어 현재까지도 매듭지어지지 않은 논란거리 중의 하나지만, 현재로서는 진위여부를 알 수 없다. 다만 결과적으로 볼 때, ‘10·26사건’과 그로 인한 유신체제로 몰락은 한국에서 강력한 친미정권의 수립을 요구하던 미국의 의도와 한국내의 장기독재에 의한 모순의 심화가 맞물리면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볼 때, 향후 한국의 정치 프로그램에서도 이상과 같은 미국의 의도가 매우 영향력있게 반영될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 국내 지배세력의 재편(‘10·26’∼‘12.12’)
1972년 대통령 스스로가 헌법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주도하였던 ‘10월유신’은 유신체제라는 매우 억압적인 통치체제를 탄생시켰다. 유신체제는 대통령에게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막강한 권한과 장기집권을 허용하여 사실상 1인독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국민의 자유와 생존권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억압체제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다. 유신체제는 그것이 이 땅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회운동 진영의 저항에 직면하였다. 물론 박정권은 이에 대해 철저한 탄압으로 일관하였지만, 그에 따라 저항의 움직임도 커져만 갔다. 결국 유신체제와 민주화운동 사이의 극단적인 대립은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김영삼총재의 국회의원 제명처리에 자극받아 일어난 ‘부마항쟁’으로 폭발하였다. 이제 유신체제와 민주화운동 사이의 대립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민중들이 민주화운동에 직접 참여하게 된 것이다.
‘부마항쟁’이 발발하자 박정희정권은 비상계엄과 위수령으로 대처하였고, 공수부대를 투입시켰다. 그리고 공수부대의 폭력적인 진압작전으로 부마항쟁은 진압되었다. 그러나 ‘부마항쟁’은 두 가지 점에서 광주민중항쟁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첫째, 아래로부터 발생한 대규모의 민중적 압력에 대한 권력의 대응방식을 둘러싸고 집권층 내부의 분열을 야기해 ‘10·26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는 점이다. 즉 부마항쟁의 불길은 강경진압에 의해서 일단 잡혔으나, 집권층 내부에서 강경진압을 주장하는 세력과 온건진압을 주장하는 세력 사이에 갈등이 노정되면서 온건파가 강경파를 제거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대립이 원인이 되어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붕괴하였다. 둘째는 ‘부마항쟁’의 진압에 공수부대가 동원되었으며, 그 결과가 만족스러웠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향후 어느 지역에서 민중들의 저항이 발생하면 즉각 공수부대가 진압작전에 투입될 수 있다는 선례가 되었고, 그것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그대로 시행되었다.
아무튼 1979년 10월 26일 당시 권력층의 2인자였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무엇보다도 그때까지 대통령 1인 중심체제로 유지되어온 정치권력구조에 엄청난 변화를 야기하였다. 먼저 박정희정권 아래서 2인자 진영을 형성하며 성장하였던 군부와 공화당, 그리고 정부관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암투가 치열하게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권력의 공백기에 서로 정국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비상사태가 선언되고 계엄령이 포고되면서 권력의 중심은 자연스럽게 당시 최규하정부를 떠받치고 있던 군부 쪽으로 쏠리게 된다.
그러나 정국의 헤게모니를 놓고 알력을 보이는 군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0·26사건’ 직후 군부는 외관상으로는 평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대통령상의 지휘관들로 이루어진 육사 10기 이내의 진영과 사단장급 이하 지휘관의 다수를 구성하고 있던 정규육사 출신의 11기 이하 진영간의 심상치 않는 대립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조짐은 계엄령 하에서 군부에 의해 언론이 통제되고, 더욱이 지금까지 군부에 대한 비판이 금기시되었던 국내에서보다는 외국에서 먼저 인지되고 있었다.
1979년 11월 2일자 뉴욕타임지(이하NYT)는 “한국 군부의 상급 장성들이 이번 주 월요일, 화요일(10월 29, 30일) 양일에 걸쳐 국방부 내에서 비밀회합을 갖고 박정희 독재체제의 법적 근거로 되어온 유신헌법을 폐기할 것을 비공식적으로 결정”했지만, “박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전두환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등 일부에서는 유신헌법의 조기폐지에 반대하여 폐지의 시기에 있어서 야간의 대립을 보였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은 상명하복이 절대명제인 군대체계인 속성상 즉각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그런 가운데 합동수사본부에 의한 김재규사건의 조사가 계속되었고(11월 6일 ‘전모발표’),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이희성 중장(육군 참모차장)이 임명되어 중앙정보부에 대한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군의 공식적인 지휘계통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군 내부의 주된 흐름을 대변하고 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등 군단장급 이상의 상급 지휘관들은 대체로 이른바 ‘온건파’로 분류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비교적 정치색이 약하다고 평가되는 군인들로 앞서의 NYT 보도에 의하면 ‘유신헌법의 폐지→새로운 헌법의 제정→민선정부의 수립’이라는 정치경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경로는 당시 한국민의 대다수가 지지하는 정치일정이었으며, 국민들의 일반적인 정서와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같은 경로는 가장 빠른 시일 내엣 헌법을 개정하고 새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최규하 대통령의 정권이양계획에 대한 11월 10일의 담화문과도 부합하는 것이어서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기도 했다.
한편 뒤에 ‘12·12사태’를 주도하게 되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위시한 군부내 강경파 진영은 유신헌법의 조기철폐를 주장하는 군 상층부에 대해 내심 반발하고 있었다. 이들 강경파 진영은 대체로 정규 육사를 졸업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절대적인 후원 하에 성장한 그룹으로, ‘하나회’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일찍부터 정치색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이들은 수도권내 군부 요직이나 정보계통을 주로 육사출신이 장악하고 있는 관계로 만만치 않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동시에 이들은 자신들의 제거 가능성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들의 위기감은 이건영과 장태완의 핵심보직에의 임명, 전두환의 좌천설 등이 유포되면서 한층 심화되었다.
결국 이러한 위기감에서 전두환을 중심으로 군부내 극우 강경파 소장세력들은 자파세력의 포섭이 완료되자 ‘12·13 개각’ 하루 전이며, 장군 진급심사결과 발표인인 12월 12일을 거사일로 잡아 기습적인 쿠데타를 감행하였다. 박대통령 시해사건의 공범혐의로 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체포하고 이를 대통령에게 재가 받음으로써 정승화를 중심으로 한 군내 상급 장군 층을 일거에 무력화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는 양파 사이의 무력대결 양상으로까지 발전한 데다가, 의외로 최규하대통령이 완강히 재가를 미룸으로써 위기에 봉착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사태를 방관하고, 육사출신의 소장 장교 층들이 쿠데타 진영에 합류함으로써 군의 정상적인 지휘 계통이 붕괴되어 이 결전은 유혈을 동반하 채 쿠데타파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12·12사태’에서 쿠데타군이 승리한 결과 군부 강경파가 정국의 실세로 강력히 부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이제 ‘유신헌법의 폐지→새로운 헌법의 제정→민선정부의 수립’이라는 경로는 표류하게 되었고, 정국에는 암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2·12사태’로 이하여 최규하를 수반으로 한 정부는 빈 껍데기고 군부가 실세임이 드러나게 되었으며, 향후 정국의 변화는 군부의 움직임에 달려 있게 된 것이다.
한편 그때까지도 일반 국민들은 권력층 내부에서 진행된 암투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다. 이들은 ‘10·26사건’ 직후와 마찬가지로 ‘유신헌법의 폐지→새로운 헌법의 제정→민선정부의 수립’이라는 정치일정을 강력히 지지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 사회운동 진영의 주력인 학생들은 방학중이었기 때문에 사태의 변화에 올바르게 대처하지 못했으며, 그러한 변화를 포착할만한 역량도 미진한 상태였다. 여기서 각기 다른 정치일정은 계획하고 있는 일반국민과 새롭게 부상하는 신군부 사이에 대결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3) 80년 봄의 국내정세
한국에서의 유신체제 붕괴는 밑으로부터 쟁취된 것이 아니라 권력층 내부의 갈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민주세력들의 힘에 의해서 성취된 것이 아니며, 그 체제의 정점에 있던 박정희대통령의 사망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형성된 권력의 공백이었다. 즉 박정희대통령을 정점으로 해서 형성된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권력구조는 권력자가 죽어버린 상황에서 그것의 존재 자체가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권력구조 그 자체가 붕괴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신체제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세력들은 향후 정치일정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기득권이 인정되는 극히 제한적인 민주화나 또 다른 독재체제의 구축을 내심 바라고 있었다.
따라서 흔히 ‘서울의 봄’으로 일컬어지는 80년의 봄은 그 이름과는 달리 지배세력과 민주화운동세력이 정권장악을 둘러싸고 위기가 심화되어 갔던 시기였다. 문제의 핵심은 유신체제로 형성된 권력구조가 외피만을 바꿔 입은 채 그대로 권력을 승계하느냐, 아니면 민주화운동세력이 국민의 힘을 바탕으로 민주정권을 수립하느냐에 있었다.
우선 지배세력의 권력중심은 지배체제의 동요로 인하여 정부에서 군으로 급속하게 균형추가 옮겨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지배세력의 핵심에 위치하고 있던 김종필의 공화당은 서서히 권력의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반면에 야당과 재야세력으로 구성된 민주화운동세력은 민주정부 수립이라는 구체적인 문제에 직면하자, 그 내부에서 여러 가지 불협화음이 형성되고 있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을 중심으로 세력이 양분되는 한편 그에 따라서 재야세력의 독자적인 위상은 점차 약화되고 있었다. 이 시기 신민당을 비롯한 야당인사들과 김대중을 중심으로 하는 재야세력이 서로 차기 정권을 노리며 갈등을 노정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세력들이 모두 민주화운동에 가담하면서 운동의 폭발력을 높여주고 있었다.
한편 권력을 향해 치닫는 상층부의 정치상황과는 별도로 80년의 봄은 민중들이 각자의 목소리를 내는 민주화운동의 분출기였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20년 가까이 억눌리며 살았던 민초들은 지배권력이 이완되면서 나타난 해빙기를 맞아 각자 자신들의 요구를 분출하고 있었다.
그동안 유신체제의 철권통치 하에서 그나마 저항세력을 형성하면서 민주화운동의 주력으로 자리잡아 온 대학교는 여러 가지 변화에의 요구로 들끓고 있었다. 당시 문교부가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1980년 4월 19일 현재 각 대학에서는 총학장 퇴진 요구가 21건, 어용폭력무능교수 퇴진 요구가 24건, 이사장·재단의 비리문제가 12건, 시설확충요구가 11건, 학생회 부활 및 학내언론 자율화 요구가 20건 등 각종 시위와 농성이 전개되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학내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게 일고 있었다.
또한 학생운동 지도부들은 자신들의 역량을 학생회의 조직과 학내 민주화투쟁에 집중하여 학생들의 잠재력을 대대적으로 이끌어 내고자 했다. 이와 함께 전국 각 대학의 지도부들은 전국총학생회장단회의를 열어 민주화를 지향하는 학생운동의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학생대중의 분출하는 정치력은 학생운동의 이슈를 점차 제도개선 투쟁을 매개로 정치투쟁으로 전환시키고 있었다.(즉 병영집체훈련 문제가 그것이다.) 4월에 들어서면서 일기 시작한 이러한 정치투쟁은 점차 그 강도를 높여가면서 당시 정치일정에 대해서까지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점차 군부세력 대 학생운동(그리고 넓게는 민족민주운동) 사이에 정면대결의 기운이 높아져가고 있었다.
이와 함께 1960∼70년대 경제성자의 뒤안길에서 고통받으면서도 침묵만을 강요받았던 노동자들은 당시 가히 폭발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는 1980년 1월부터 4월에 이르는 기간에 노사분규 만도 809건이 발생했다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이들 노동자들의 투쟁은 우선 최소한의 경제적 요구, 그것도 매우 열악한 노동조건의 부분적인 개선이나 상태의 악화를 막아내고자 하는 방어적인 투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유신체제의 철폐가 논의되고 있고, 정치권력의 철저한 탄압이 잠시나마 사라지거나 크게 완화된 조건에 고무되어 이들 노동자들의 투쟁도 점차로 변화해 갔다. 그것은 ‘사북탄광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조직적이고 공격적인 양상으로 변모해 갔다.
(4) 신군부의 등장과 헤게모니 장악
‘10·26사건’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군부내 강·온건파간의 대립은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계엄사령관이던 정승화의 체포와 온건파의 숙청으로 이어진 ‘12·12사태’로 일단락되었다. 이제 한국의 상황에서 정치권력의 핵심인 군부는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그의 동료들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에 의해 장악된 것이다.
이들 신군부가 1차적인 세력개편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역시 군부였다. ‘12·12사태’를 주도한 쿠데타세력은 당시 자신들이 편에 섰던 이희성 중앙정보부장서리를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으로 앉히고, 쿠데타의 핵심세력이었던 노태우 9사단장을 수경사령관에, 정호용 2군 50사단장을 특전사령관에 임명하는 것을 골자로 한 군인사를 단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군부는 육군 내의 주요 지위에 진출하여 군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와 함께 전두환장군과 그를 떠받치는 보안사령부가 권력집단 내에서 핵심 중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또한 전두환이 겸직하고 있던 합동수사본부도 그의 권력기반이 되었다. 합동수사본부는 보안사를 핵심으로 중앙정보부, 검찰, 경찰 등의 사찰 및 치안기관을 하나의 체계로 묶은 것인데, 이로써 그 정점에 앉은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국내외의 모든 정보망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두환은 그의 보직이나 계급과는 관계없이 신군부의 우두머리로, 그리고 권력의 배후 실세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렇듯 ‘12·12사태’를 주도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권력의 핵심을 장악했지만 당장 표면에 등장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행정부는 최규하와 신현확을 중심으로 한 관료들에게, 정치는 공화당과 신민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인들에게 맡긴 채, 정국의 변화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권력의 배후에서 실세를 장악한 채 자신들의 권력을 제도화할 수 있는 길을 암암리에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그들은 대통령의 지휘 하에 있는 군인일 뿐이었으며, 따라서 전면에 등장하기에는 적절한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들은 군대라는 물리력을 포함하여 엄청난 힘을 갖고 있었지만, 그 지지기반은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심지어는 유신체제 하에서 여당이었던 공화당마저도 민주화의 대세를 인정하고 유신헌법 철폐의 당위성을 인정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자신들의 지배력을 유지할 수도, 권력을 장악할 수도 없는 처지에 있었다.
더욱이 ‘12·12사태’가 갖고 있는 절차상의 불법적인 측면과 그로 인한 군부내의 동요세력도 만만치 않은 실정이었다. 여기서 이들은 당시 국회의 헌법개정안과 는 다르게 이원집정부제니 대통령간선제니 하는 생소한 헌법개정을 추진하기도 하고, 무력에 의한 권력탈취를 모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규하대통령은 1980년 4월 14일 공석 중이던 중앙정보부장서리에 당시 국군보안사령관인 전두환 중장을 임명하였다. 이는 당시 외신(동경신문, 1980년 4월 15일자)의 논평대로 ‘전사령관이 군의 실권을 장악한 것을 재확인한 것이며, 이 실력을 배경으로 표면에 나선 것을 의미’했다. 당시 전두환의 기자회견 내용은 이미 정치에 대한 군부의 개입을 예고하고 있어 주목된다.
“현시점에 있어서 법이나 포고령을 위반했을 시에는 정치인이든 정치인이 아니든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법에 따라 다스리게 되어있다. 포고령에 위반되는 자를 다스리는 것을 정치관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 ‘5·17’ 비상계엄령의 확대와 항쟁의 발발
1) 80년 봄 광주의 상황
타지역에 비해 산업기반이 취약하고 따라서 노동자들의 수나 조직화가 미약한 광주·전남지역은 당시 학생운동이 민주화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역량이었다. 물론 이외에도 NCC, JOC, 카톨릭농민회, 기독교농민회, YMCA 등의 종교단체나 민주청년협의회, 현대문화연구소, 녹두서점 등 재야 사회단체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대중적인 기반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이 대부분이 학생운동 출신이고, 4년제 대학 2개밖에 없던 이 지역의 특수한 조건으로 인해, 이들과 학생운동은 매우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있었다.
당시 광주·전남지역에 있어서 학생운동의 중심적인 역량은 역시 전남대 학생운동에 있었다. 물론 조선대학교 등에서도 학원민주화투쟁이 활발히 진행되기는 하였지만, 학생운동의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지도역량은 미미한 형편이었다. 따라서 여기서는 전남대를 중심으로 1980년 봄의 상황을 정리해보자.
‘10·26사건’과 ‘12·12사태’를 거치면서 어수선해진 1979년과 그 해 겨울방학을 개학 이후의 일정에 대한 준비로 보낸 학생운동 진영은 1980년 3월 개학과 동시에 “전남대학원자율화 추진위원회(위원장 : 철학과 4년 한상석, 이하 학자추)”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학내 반민주세력 및 반민주적 요소의 일소를 위한 투쟁과 민주적인 학생 자치기구의 건설을 추진하려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학자추’는 결성되자마자 그동안 학생들의 관제 대의기구로 전락했던 학도호국단의 기능을 사실상 마비시키고, 학내 사찰기구였던 학생상담지도관실을 무력화시켰다. 이와 함께 ‘학원자율화공청회’를 열어 그에 관한 일반학생들의 중지를 모으는 한편, 학생들의 관심을 학내민주화 문제로 집중시키는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이들 ‘학자추’의 작업은 나름대로 결실을 맺어 동년 4월 9일 학생회구성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 전남대 학생운동권의 일치된 지원 하에 광천동 노동야학인 들불야학의 강학이었던 박관현(법학과 3년)이 압도적인 지지로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 당시 광천동에 소재하고 있던 들불야학은 광주지역의 운동역량이 총집결한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전남대 총학생회장에 그곳 출신인 박관현이 당선되었다는 것은 향후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광주지역의 사회운동 진영과 전남대 학생회가 굳게 결합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전남대학교 총학생회가 결성되면서 한시적인 조직이었던 ‘학자추’가 해체되고, 명실공히 학생들의 대표기구인 총학생회가 학원민주화투쟁을 주도해 나가세 되었다. 총학회가 주도한 사업중 특히 어용교수 퇴진 문제는 비록 직접적인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하더라도 학생회를 중심으로 전남대 학생들의 내적인 단결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국적인 상황 전개에 영향을 받은 때문인지 전남대에서도 5월초를 분기점으로 투쟁의 초점이 이동하게 되었다. 정부의 구체제 복귀 조짐에 대응하여 학생운동의 이슈가 학내민주화투쟁에서 민주화를 위한 정치투쟁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방향전환은 당시 5월 6일 ‘전남대학교 비상학생총회’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날 비상학생총회는 5월 8일∼14일까지 일주일은 ‘민족민주화성회’기간으로 정했다. 그리고 그에 따라 5월 8일에 열린 민족민주화성회에서는 전남대 총학생회와 조선대 민주투쟁위원회 공동명의로 제1시국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이 선언문에서는 5월 14일까지 비상계엄을 해제할 것을 요구하고 만약 휴교령이 내린다면 온몸으로 거부할 것이며, 양심있는 교수들의 적극적 동참을 호소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때까지 계엄령이 해제되지 않으면 5월 15일부터는 가두로 진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는 동안 5월 13일에는 전남대 교수협의회의 시국선언문이 발표되었고, 광주에 있던 전남고에서는 이들 대학생에 동참하려는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이러는 사이에 일반학생들의 정치적 열기가 날로 고양되어 갔다. 이들은 교내시위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점차 경찰과 대치하기 시작했고, 5월 14일 민족민주화성회 마지막 날 행사에서 학생들은 예정을 하루 앞당겨 당장 가두로 진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전남대 총학생회는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5월 14일 오후부터 가두시위를 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날 오후 2시 총학생회의 지휘 아래 교문을 돌파한 전남대생 7천여명은 오후 3시에는 도청 앞 광장을 점령하고 그곳에서 집회를 강행하였다. 이날의 학생시위는 거리거리에서 시민들까지 시위대열에 가담하여 시위인파는 1만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때 이미 학생시위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타지역과는 달리 매우 호의적이었다.
이날 도청 앞 집회에서는 광주지역 6개 대학(전문학교 포함)과 목포지역 2개 대학의 학생대표들이 공동 서명한 제2시국선언문과 15개항의 강령이 낭독되었다 그리고 만약 휴교령이나 휴업령이 내린다면 일차적으로는 학교 교문 앞에서,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12시 정오에 도청앞 광장에 집결하여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이러한 가두시위는 다음날인 15일에도 계속되었다. 즉 오전에 전남대에서 제3차 민족민주화대성회를 마친 1만여 명의 전남대 학생들과 조선대·광주교대 1만여 명, 전남대교수, 청년, 시민 등 수만 명의 인파가 도청 앞에 집결했다. 또 16일에는 광주 일원의 거의 모든 대학의 학생들과 일반시민 등 5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민족민주화성회를 위한 횃불대회’가 열려 14일 이후 이루어진 시민, 학생들의 민주화시위를 장엄하게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이제 자신들의 의사는 충분하게 전달했으니 정부측의 답변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17∼18일은 쉬고 19일부터 또 다시 성토대회를 벌이기로 하고 잠시 휴식에 들어갔다. 이 휴식이 다음날의 참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한편 학생·시민들의 민주화시위가 연 3일째 계속된 광주지역에서는 이들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서도 별다른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 학생시위에 대한 여론의 엄청난 지지 때문인지 경찰은 시위대의 주변에서 불상사가 일어나는 것을 예방하는 정도로 행동하였고, 이러한 경찰들에 대하여 학생들도 음료수 등을 전달하면서 우호적인 분위기를 가꾸어 나갔다.
이러한 80년 봄 광주지역의 시위는 요구사항이나 발전단계 등 여러 가지 점에서 전국적인 양상과 유사함을 보이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2가지 점에서 다른 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첫째, 타 지역 특히 서울지역의 학생운동이 조직적이지도 체계적이지도 못한 반면에 이 지역은 각 학교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조직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는 점이다. 둘째, 학생들의 시위대와 경찰이 폭력적으로 충돌하였던 타 지역과 달리 광주지역에서는 양자 사이에 일종의 타협이 이루어져 있었고, 이러한 타협을 시민들은 학생들의 정당성을 경찰까지도 인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2) ‘5·17’ 비상계엄령의 확대와 광주
‘10·26사건’으로 야기된 지배권력의 내부적인 혼란이 신군부의 헤게모니 장악으로 일단락되면서 이들은 자신의 권력을 제도화하고, 영구화하는 방안에 고심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학생운동이 최고조에 달하였던 시기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권력의 표면에 나서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군부는 무력으로 사회운동진영을 굴복시키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전면에 등장하여 명실상부하게 권력을 장악한다는 방향으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1980년 4월 30일 계엄사 전군지휘관회의 결정내용이 그것을 증명한다.
“사북난동 사건 등 노동문제, 학원소요사태, 일부 정치인의 학원 내 정치집회 등 최근의 각종 사태에 대해 논의한 다음 ‘이같은 사태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앞으로 이같은 혼란상태를 방치한다면 이는 안정과 질서를 바라는 대다수 국민의 여망을 등지는 것으로 국가안보적 차원에서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을 결의’했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군부의 강경한 입장표명은 학생운동이 학내민주화운동에서 계엄 해제, 이원집정부제 철회,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는 사회민주화투쟁으로 전환하는 것에 대응하는 것으로 군의 개입가능성을 강하게 내비친 것이었다. 또한 동시에 임박한 군의 정치개입을 앞두고 군 내부의 입장을 정리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리하여 당시 한국의 상황은 언론이 ‘안개정국’이라고 표현한 대로 한 치 앞을 바라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여기에서 정치인들 사이의 타협이나 정세에 대한 발언은 정국의 운용에 별다른 힘이 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분명했던 것은 사실상 유신체제의 유지를 꿈꾸는 세력이 그것도 막강한 물리력을 배경으로 엄존한다는 점과, 그러한 기도에 대해 결전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세력 또한 만만치 않게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이들 각각이 갖고 있는 향후 정치일정은 서로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양 세력은 점차 자신들이 입장을 뚜렷이 해가면서 결전의 장을 향해 발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한편 정치권의 각 세력들도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신민당은 5월 14일 소속의원 전원의 이름으로 비상계엄해제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여당인 공화당조차 적극적인 자세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로써 5월 20일 경으로 예정된 임시국회에서 계엄해제안을 양당이 공동 처리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더욱이 여기에 유정회까지도 가세할 움직임을 보이면서 계엄령 하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있던 신군부의 위기감을 부추기고 있었다.
명목상으로나 실질상으로나 궁지에 몰린 군부는 예정대로 무력사용을 통해 위기상황의 정면돌파를 시도하였다. 대학가의 시위가 가열된 5월 12일에는 전군에 비상이 발령되었다. 이와 더불어 전국의 공무원들에게도 비상근무령이 내려졌다. 14일과 15일 전국의 대학이 일제히 가두시위에 나서자 정부는 주요각료 간담회를 열고 학생시위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그 내용은 일절 발표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 공수7여단이 광주지역의 향토방위사단인 육군 31사단에 배속된다는 사실이 전달되었다. 17일 10시 국방부에서는 계엄사전군지휘관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각급 학교 휴교조치, 국회해산, 국가보위비상대책회의의 설치 등을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회의결과는 신현확 국무총리, 주영복 국방부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에 의해 청와대에 보고되었고, 군의 결의를 받아들인 최규하대통령은 17일 자정을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 내의 이미 새로운 불씨를 내장하고 있었다. 즉 ‘5·17계엄확대’는 대다수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절실한 요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고, ‘10·26’이후의 일련의 개혁적인 변화들로부터도 완전히 후퇴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그 자체가 국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봉착할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튼 계엄확대와 더불어 발표된 계엄포고 10호를 통해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대학휴교, 옥내외 집회·시위 및 전·현직 국가원수 비방금지, 직장이탈 및 파업 불허, 언론 사전검열 등의 조치를 취하는 한편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 16명을 연행하였다. 한편 경찰은 이미 5월 17일 오후 전국학생회장담모임을 열리고 있던 이화여대를 급습하여 수십 명의 학생대표를 연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5월 17일 자정을 전후하여 전국적으로 민주인사들에 대한 예비검속을 실행하여 수백 명을 강제연행하고 있었다.
군과 경찰이 이미 행동을 개시한 17일 광주시내의 각 대학은 그동안의 가두시위를 중단하고 학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한산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오후 5시경 서울의 한 여학생으로부터 전국총학생회장단회의가 경찰의 급습을 받았다는 내용의 전화가 전남대 총학생회로 걸려온다. 이 소식에 접한 총학생회 지도부는 우선 사태파악의 임무를 맡은 일부만을 남겨놓고 긴급 대피했다. 그날 밤 자정을 전후해서 광주의 각 대학은 계엄군에 의해 점령당했으며,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 상당수가 검거당했다.
특히 전남대학교에 진주한 부대는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제7공수여단(단장:신우식 준장) 예하의 제33, 35대대 병력이었다. 이들은 당시 “화려한 휴가”라고 명명된 작전명령을 받고 2군사령부에 배속되어 광주지역으로 출동한 상황이었다. 18일 자정에서 1시 사이에 전남대에 도착한 이들 병력(장교 82명, 사병 604명)은 곧바로 도서관, 총학생회실 등에서 철야를 하던 학생들을 급습하여, 곤봉과 군화발로 구타한 후 체포하였다. 이날 전남대와 조선대, 광주교대에서 체포된 학생은 모두 112명이었다.
3) 항쟁의 발발
계엄확대로 인한 당국의 연행을 일단 피한 전남대 총학생회 지도부는 계속 상황을 점검하면서 상호 연락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들어오는 연락은 모두가 절망적인 것들이었다. 비상시의 1차 집결장소인 전남대 정문 앞에는 학생들이 모여 있지 않다는 연락이었고, 지도부의 상당수도 이미 검거되었으며, 검거되지 않은 지도부와의 연락은 두절된 상태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불과 1시간 뒤에 일어날 학생대중의 저항을 예상하지 못하고 일단 몸을 피하게 된다.
그 결과 광주민중항쟁의 최초의 도화선이 된 18일 아침의 전남대 교문 앞 시위는 도서관에 공부하러 나왔다가 계엄군에 의하여 제지를 당하게 된 학생들이나 ‘휴교령이 내리면 그 다음날 10시에 교문 앞에 모이자’고 했던 당초의 약속을 기억하고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나왔던 학생들에 의해 완전히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전남대 정문 앞에는 완전무장한 공수부대 1개팀 8, 9명이 교문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들은 휴교령이 내린 사실을 말하면서 학생들에게 귀가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쉽게 돌아서지 않았고, 10시가 넘어서자 그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던 100여명의 학생들이 정문 앞 다리에서 농성을 시작하였다. 이들의 수가 200∼300여 명으로 불어나자 자연스럽게 노래와 구호가 나오기 시작하였고, 이에 공수부대원들은 무력진압을 개시하였다.
특수훈련을 받은 공수부대와 맨손인 학생들의 싸움은 일방적인 것이었다. 곤봉으로 가차없이 머리를 갈기는 공수부대원들에게 학생들은 부상자 십여명을 남긴 채 쫓겨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냥 도망치지 않았다. 흩어지는 와중에서도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광주역 광장에 재집결한 것이다. 이들은 당시의 사태를 군사쿠데타로 규정짓고 이 사실과 직전의 폭력사태를 시민과 동료 학생들에게 알리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다시 대오를 정비한 300∼400여 명의 학생들은 우선 금남로 도청 앞 과장을 목표로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을 지나서 카톨릭센터 앞까지 진출하였다. 당시 이들이 외친 구호는 ‘비상계엄 해제하라’ ‘김대중씨 석방하라’ ‘휴교령을 철회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계엄군은 물러가라’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 초기 시위대는 아직 소수였으며, 진압경찰대에 대항하지 못하고 쫓겨다니는 정도였다. 따라서 이들의 역할은 아직 정국의 반전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정도였지만, 그러나 당시의 상황에서 이들 시위대는 전시민적인 저항을 유발하는 촉매작용을 하고 있다.
점심시간을 전후하여 한 때 소강상태에 접어들던 시위는 오후 3시가 되면서 또다시 재개되었다. 이때부터 시민, 학생들의 시위양상과 계엄군의 진압작전은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수천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중들은 보다 조직적으로 기동성을 발휘하면서 공격적인 양상을 보였다. 계엄군 또한 공수부대를 시내로 투입하면서 철저한 진압을 다짐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남대, 조선대, 광주교대 등 주둔지로 삼은 대학교내를 나와 오후 1시경 수창국민학교에 집결하였다. 이어 학생시위가 격렬해지자 오후 3시쯤부터 시내에 투입되기 시작한 공수부대는 시내 도처에서 처참한 살육극을 연출한 ‘화려한 휴가’를 시작했다. 이때쯤이면 서울에서는 ‘광주의 혼란’과 ‘북괴의 심상치 않은 동태’를 이유로 제3·제11공수여단과 육군 제20사단의 광주투입이 결정되고 있었다.
이날 공수부대가 처음 투입된 곳은 공용터미널 근처였다. 공수대원들은 3∼4명이 1개조가 되어 학생처럼 보이는 청년들을 무조건 쫓아가서 곤봉으로 때리고 구타하였다. 그들의 손에는 대검이 들려있기도 했으며 실제 대검에 찔린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오후 5시쯤에는 청산학원 근처에서 또다시 처참한 살상극이 벌어졌다. 당시 공수부대가 진입한 곳은 단 30분도 못되어 거리가 조용해졌으며 길바닥에는 군데군데 핏물이 흥건히 고였다.
이날 계엄군은 전국의 모든 주요도시에 진주하였다. 그러나 이들 계엄군에 맞서 저항한 곳은 오직 광주뿐이었다. 사실 학생운동 지도부의 지도력이 마비된 상태에 있기는 광주나 다른 지역이나 마찬가지였다. 휴교령이 내릴 경우의 행동지침도 전국적으로 공통적이었다. 따라서 이날의 전남대 교문 앞 시위는 완전히 우발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시위가 가능했던 이유는 1980년 봄 광주지역의 정치적 분위기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광주지역 민주의 민주화에 대한 요구의 구체성, 치열성을 학생들이 반영하고 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계엄이 확대되는 살벌한 상황 속에서도 그에 굴하지 않고 이렇다 할 지도부나 조직도 없이 즉각 저항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저항의 초기단계에서 엄청난 폭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투쟁의 명맥을 이어간 것은 이름 없는 학생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처연한 투쟁과 그에 대한 공수부대의 만행은 시민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특히 대상을 가리지 않고 자행된 공수부대의 살상행위는 ‘잠재된 민중의 투쟁역량을 폭력적인 방향으로 유도하고, 분출시키는 자극적인 기폭제’가 되었다. 가공할 폭력이 오히려 공포를 사라지게 하고 치열한 연대감과 증오를 낳은 것이다. 이리하여 18일 오후부터는 민중들은 서서히 분노를 폭발하기 시작했으며, 야수와 같은 계엄군의 탄압에 맞서 항쟁을 시작하였다.
3. 항쟁의 전개과정
1) 대중투쟁으로 확대 발전(5월 18일 오후∼20일 오전)
(1) 5월 18일 오후∼당일 저녁
이미 18일 오후부터 시위학생과 시민들은 그날 오전과는 달리 공수부대의 잔인한 공격에 적극적인 공세로 맞서기 시작했다. 이날 오전의 학생시위를 통해 ‘김대중의 체포와 전두환의 쿠데타’ 소식에 접한 시민들은 충격 속에서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김대중이라는 동향 출신 정치인의 핍박과 수난을 전라도 민중 자신들의 그것과 동일시 해 온 광주시민들은 그의 투옥을 민주화에 대한 그들의 열망과 기대가 무참하게 좌절된 것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시위학생들에 대해 야만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에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하면서 학생들의 인내어린 헌신적 투쟁에 공감을 보냈다.
오후에 접어들면서 시민―학생들의 시위양상과 계엄군의 진압작전은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시위대중들은 도심지투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인 기동성을 터득하게 되고 숫자도 수 천명 선으로 늘어나면서 보다 조직적이고 공격적인 양상을 보였다. 계엄군 또한 정호용 특전사령과의 내광(來光州)에 맞추어 그들의 확고한 결의를 과시하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 광주공원 부근에 모여 있던 시위대는 도청 쪽으로 진출하면서 학생회관 앞에서 경찰과 충돌, 페퍼포그차 1대를 불질러 버렸다. 이때부터 시내에 진출한 공수부대원의 진압과 시위대의 경찰에 대한 공격이 번갈아가면서 진행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은 금남로와 충장로 등 광주시내 전역을 누비면서 젊은 사람만 보면 두들겨 팬 후, 옷을 벗기고, 포박하여 연행해 갔다. 이에 맞서 시위대들도 동명동이나 지산동 등지에서 파출소를 습격하거나 파괴하였으며, 시장 관사에 돌을 던지기도 하였다. 특히 그날 5시경에는 농장다리 쪽에서 경찰차를 포위한 시위대가 30여 명의 경찰을 잡아, 방석모와 곤봉 등을 빼앗은 후 이들을 인질로 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 시위대도 장동 로터리 부근에서 공수부대의 공격을 받고 수많은 부상자만 남긴 채 주도하고 말았다.
18일 오후 7시쯤 계림동 광주고등학교 부근에서 청년들과 학생 수백 명이 또다시 공수부대와 충돌했다. 그러나 시위대의 양상은 이미 그전과는 달랐다. 이때부터 시위대들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각목과 쇠파이프, 식칼 등을 들고 공수부대원들과 육탄전을 감행하였다. ‘광주사태’가 ‘민중항쟁’으로 승화되는 순간이었다. 쌍방은 사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치열한 육박전을 벌였고 마침내 공수부대원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이날 저녁 공수부대는 이 지역에 인원을 증파하여 젊은 사람만 보면 무조건 끌고 갔다. 특히 이날 오후부터 진압과정에서 일부 군인들이 경상도사람 특유의 억센 사투리를 사용하면서 ‘경상도군인들이 전라도사람 다 죽인다’는 내용의 유언비어가 나돌기도 했다. 물론 이런 유언비어로 당시의 항쟁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이 지역 사람들의 지역감정에 불을 당기는 결과를 가져온 것도 사실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험악해지자 전남·북 계엄분소에서는 오후 6시에 계엄분소 공고 제4호를 통하여 광주 시내 일원의 통금시간을 9시로 앞당긴다고 발표하면서 시민들에게 빨리 귀가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계엄군에 의한 젊은이들의 연행은 밤새 계속되었고,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또한 시민들은 서로서로 안부를 물으면서 공수부대의 만행에 대한 소식을 전했고, 광주시의 모든 사람들이 공포와 분노로 하나가 되어갔다.
계엄사령부 역시 사태 악화에 대응하기 위한 편제를 이날 밤중으로 완료하였다. 이들은 우선 광주내 전역에서 직장예비군의 무기와 탄약을 회수하여 군부대에 보관하였다. 이날 밤 이들이 거두어들인 무기는 총기류 4,717정, 탄약 115만 발이었다. 또한 계엄군은 밤 11시 20분 경에는 야간경비와 다음 날의 작전을 위한 진압군의 야간배치를 완료하였다. 이들은 광주 시내 경찰서와 파출소 및 도로 교차지점 등 36개 지점을 선정하여, 각 지점마다 계엄군 1개 지대(장교 1명, 사병 10명)와 경찰 2개 분대(24명)를 배치하여 경비업무에 종사하게 하였다. 한편 18일 오후부터는 시내 산수동, 계림동 부근에 유인물이 살포되기 시작했다. 이 유인물들은 광천동의 들불야학팀과 전남대생 일부, 그리고 현대문화연구소의 “광대” 회원들에 의하여 제작된 것이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연결되지 않은 채 진상을 분명하게 알려야 한다는 공통된 신념만으로 분산되어 유인물을 제작하였다. 이들 유인물은 그날 오전 중에 일어났던 공수부대의 학살과 만행 그리고 사태의 진상을 고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학생회나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들이 체포되거나 잠적해버린 상황에서 사태에 대처하려는 시민·학생들의 최초의 조직적인 움직임이었다.
광주에서 이렇게 엄청난 일이 일어난 그날, 그러나 정부와 언론계는 별다른 움직임 없이 평소와 다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다만 최규하 대통령이, 광주에서 공수부대의 만행이 자행되던 그날 오후 4시 30분, ‘5·17 조치’와 관련하여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최근의 소요로 야기된 사회혼란 상태가 더 이상 계속되면 국가의 기강을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할 우려가 있으므로, 국가를 보위하고 3,700만 국민의 생존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고 말했다.
한편 존 위컴 한미연합군 사령관이 ‘광주에서 일어난 상황’ 때문에 예정을 9일이나 앞당겨 이날 급거 귀국하였다. 그는 5월 14일 최근의 한국의 사태와 관련하여 한반도 주변정세 등을 워싱턴 당국과 협의하기 위해 본국으로 일시 귀국했었다. 한국 정부가 ‘광주사태’에 대해 침묵한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 정부도 이날까지 그에 관한 아무런 공식 논평이 없었다.
(2) 5월 19일
공포와 불안으로 하루를 보낸 다음날인 19일 광주지역은 대학을 제외한 초·중·고등학교는 정상수업을 계속했고, 관공서나 기업체, 공장 등은 대체로 정상근무를 하였다. 그러나 시내 중심가의 상가들은 대부분 철시한 상태였으며, 이른 새벽부터 군인과 경찰들이 시내 전지역에 걸쳐서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었고, 금남로는 일체의 차량이 통행할 수 없었다. 또한 시민들이 왕래가 잦은 곳은 대개 계엄군 일개소대 정도의 병력이 주둔하여 젊은 사람들과 차량들이 통행을 통제하고, 검문을 실시하고 있었다. 도시 전체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으며, 어제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시민들 사이에서는 침통함과 함께 숨죽인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시민들은 그냥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시내로 나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펴보자고 하며 몇 명씩 짝을 지어 금남로를 향하여 사방에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경 금남로에 모여든 군중은 3,000∼4,000명으로 불어났으며, 자연스럽게 군경의 저지선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이미 학생들은 별로 없었고, 일반 시민들이 대부분이었다. 모인 사람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군과 경찰은 확성기와 군헬기를 동원하여 해산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해산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으며, 시민들은 공중에 떠서 돌아다니는 헬기를 향해 주먹다짐과 욕설을 퍼붓기도 하였다.
10시 40분부터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적극적으로 시민들의 해산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제의 잔인한 진압에 분노하고 있던 시민들은 그냥 쫓겨나지 않았다. 그들은 최루탄 가스가 자욱해지면 부근 골목의 주택가나 상가에 숨었다가 잠시 후 다시 몰려들기를 거듭했다. 시위대 가운데 섞여있던 학생, 청년층들은 ‘애국가’, ‘정의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의 노래를 불렀고, 시위는 차츰 전투적으로 발전해 갔다. 그들은 도로변의 대형화분을 넘어뜨리고 보도 블록을 깨어서 투석을 했고, 근처의 중앙로 지하상가 공사장 등에서 무기가 될만한 모든 것을 들고 경찰에 저항하였다.
경찰과 시민의 충돌이 시작된 지 30분 정도 지나서 군용 트럭 30여 대에 분승한 공수부대가 도청 앞과 광남로 사거리에 진출하여 시위군중을 압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1시 30분경 또다시 공수부대의 시위진압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잔인한 살육전이 전개되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항의하던 할아버지와 아주머니, 도망가던 여학생, 버스기사, 무등고시학원 창가에서 구경하던 어린 학원생들, 그 모두가 그들의 진압 대상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은 3∼4명이 한 조가 되어 시위현장 주변의 건물이나 집들을 샅샅이 뒤졌으며, 그 안에서 젊은 사람이 발견되면 이유 불문하고 두들겨 팬 뒤, 연행하였다. 붙잡힌 시민들은 팬티만 남기고 발가벗겨진 채 길거리에서 가혹한 기합을 받아야만 했다. 당시 광주지역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그들의 작전명칭이 그러했듯 ‘화려한 휴가’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이러한 폭력은 시내 중심가에 한정된 것만이 아니라 시가지 전역에 자행되고 있었다. 시외로 빠져나가기 위하여 버스에 올라탔던 학생들도 잡혀갔고, 버스나 택시를 몰던 운전기사가 구타를 당하였다. 곳곳에서 부상자가 속출하자 택시기사들은 자진하여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운반했지만, 만약 공수대가 이런 광경을 목격하거나 택시에 실려 병원으로 가는 부상자를 발견하면, 부상자뿐만 아니라 운전기사까지도 구타하였다. 이들의 만행을 보다 못한 진압경찰들이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시민들에게 “제발 집으로 돌아가라, 공수부대에게 걸리면 다 죽는다”하면서 울먹일 정도였다.
공수부대의 야수적인 진압작전에 의해 이날 오전의 시위군중은 완전히 궤멸해 버린 듯, 점심때쯤의 시내는 텅 비워진 채 침통한 정적만이 깔려 있었다. 금남로는 완전히 교통이 차단되었고, 도청 앞은 다시 기동경찰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일부 군병력이 시내 요소요소를 지키는 가운데 대부분의 군 병력은 점심을 먹기 위하여 주둔지로 일단 철수하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19일 오후에 접어들면서 대중의 투쟁은 보다 고양되어 질적인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민중들이 스스로의 생존을 위하여 선택한 것이었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뢰를 표현한 것이었다. 이미 전날부터 시위의 양상은 수세에서 공세로 바뀌어졌으며, 19일 오전부터는 시위의 중심세력이 대학생에서 시민대중으로 바뀌고 있었다. 거기에다 수만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중의 수와 그 구성의 변화, 고교생들의 조직적인 참여시도, MBC·KBS 등 제도언론기관에 대한 공격,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가전을 방불케 한 투쟁의 격렬성 등이 변화된 모습이었다.
금남로와 시내 전역에 걸쳐서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던 공수부대는 시위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오후 1시 30분경 조선대 캠퍼스로 잠시 이동하였다. 금남로에는 공수부대의 경비병력과 경찰병력만이 바리케이트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자 오전에 완전히 궤멸된 것으로 보였던 시위 시민들이 다시금 모여들기 시작했다. 골목골목에 숨어있던 시민들은 슬금슬금 금남로를 향하여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불어난 사람들은 오전보다 훨씬 많은 군중이 되었다. 시위군중과 진압하는 군경 사이에는 돌과 화염병, 최루탄이 오가는 공방전이 벌어졌다. 무장력에 한계를 느낀 시위군중들은 차량이나 기름통에 불을 붙여 경찰 바리케이드에 밀어붙이기도 하였다. 이제 군경도 가스차나 최루탄만 사용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갑자기 시위대에 달려들어 곤봉과 총 개머리판, 대검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해산시킨 뒤 다시 제자리로 물러나곤 하였다. 그때마다 시위대는 흩어졌다가 진압군경이 물러나면 다시 몰려들곤 했다.
이 무렵에는 이미 금남로 뿐만 아니라 충장로 입구까지 시위군중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시내 전역에서 시위대와 출동한 군경이 대치하고 있었다. 이 무렵 카톨릭센터 9층 옥상에서 경비를 서면서 무전기를 통해 상황보고를 하고 있던 6명의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에게 포로로 잡히기도 하였다. 아마도 이것이 시위시민들이 승리감을 느꼈던 최초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잠시였다. 오후 3시 30분경 점심을 마친 공수부대가 급보를 접하고 도청 앞과 광남로 사거리로 다시 몰려들었다. 이들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시위군중들에게 달려들어 시위대를 해산한 후, 일단의 공수대원들이 카톨릭센터로 진입하여 자신의 동료들을 구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포로 공수대원들을 지키던 청년들은 거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얻어맞았고, 일부는 생명을 잃기도 했다.
이때부터 소규모의 공수부대원들은 시민들의 공격을 받아 죽거나 다치기 시작했다. 시위대들은 주위 동료들뿐만 아니라 길가에서 구경하던 아주머니, 노인들까지 처참하게 살상당하는 것을 보고 죽음을 각오하고 공수부대와 서로 죽고 죽이는 육박전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일은 도청 앞 카톨릭센터에서, 양림교에서, 공원다리에서, 양동시장에서, 그리고 시내 곳곳에서 발생했다. 시민들은 맞아죽기 보다는 싸우다 죽는 것을 선택하였다. 이제 군과 경찰은 여러 차례의 인원 증강에도 불구하고 겨우 간선도로와 시 외곽으로 연결되는 국도만을 확보하고 있었고 작전상의 주요지점을 지키는데 급급하였다.
그날 오후 4시경부터는 고등학생들까지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정상수업을 한다고 해서 등교했던 이들이지만, 어제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었고, 밖에서 벌어지는 참상이 전해지면서 가르치는 사람이나, 학생이나 수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오후 4시 쯤에는 전남고와 대동고, 그리고 중앙여고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교정에 모여 시가행진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으며, 광산여고와 정광고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이들 학교의 정문에는 계엄군이 진주하여 이들의 시가행진이 이루어질 수 없었지만, 고등학생들은 방과 후에 수십 명씩 짝을 지어 시위대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고등학교 학생들 중에서 희생자가 속출하였다. 이에 전남 도교육위원회는 광주 시내 37개 고등학교에 대하여 20일 하루동안 휴교조치를 내렸다.
시민들의 저항도 시간이 갈수록 거세어졌다. 오후 4시 30분경에는 공용터미널 근처에서 공수부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공용터미널 지하도 속으로 쫓겨갔던 시민들은 아무도 보지 않는 지하도 속에서 공수대원들의 집중적인 사냥감이 되어 숨져갔다. 후일 여기서 발견된 대부분의 사망자가 자상에 의한 것이었고, 거의 두세 군데의 상처를 갖고 있었다. 또한 로터리 부근에서 피범벅이 된 부상자를 싣고 가던 택시 기사가 부상자를 하차시키라는 명령을 거부했다고 칼에 찔려 죽는 일도 발생하였다.
오후 5시 10분경에는 계림동 광주고등학교 부근에서 장갑차까지 동원한 공수부대를 격퇴시키기도 하였다. 당시 시민들은 장갑차의 눈 역할을 하는 감시경을 돌로 깨뜨리고 장갑차를 포위한 뒤 장갑차에 불을 지르려고 하였다. 그때 장갑차 안에서 뚜껑을 열고 공수대원 한 명이 나오더니 M16 소총으로 앞에 있던 고등학생 한 명을 쏘아버렸다. 그리고는 시민들이 피한 틈을 타서 장갑차를 유도하여 도망가버렸다. 그때 죽은 학생은 조대부고 야간부 학생이었다. 이 학생이 아마도 광주항쟁에서 최초로 총탄에 맞아죽은 사망자일 것이다.
공중에서는 군용 헬기가 상공을 선회하면서 선무방송을 계속하고 있었다. “모든 시민은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거리에 나오면 생명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지금 계엄군은 시내 질서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시민 여러분은 안심하십시오.” 그러나 시민들 중에서 그런 방송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후 7시쯤부터 거리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하늘도 광주의 사태를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는 수군거림이 퍼져나갔다. 도청에서 광남로에 이르는 길은 경찰과 공수부대가 여전히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시내 곳곳에서는 백여 명씩 분산된 시위대가 곡괭이, 삽, 몽둥이 등으로 무장하고 시위를 감행하고 있었다. 이들은 광주역 앞에 있던 KBS 방송국을 공격하기도 하고, 임동파출소로 몰려가 불을 지르기도 하였다. 이날 밤 시위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에서도 통행금지 시간인 7시를 훨씬 넘긴 저녁 10시경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이날 낮부터 광주 시내 종합병원과 개인병원에는 중환자가 줄을 이어 입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행히 계엄군의 트럭에 실려가지 않고 중상을 당한 채 달아났거나 주위의 도움을 받아 계엄군의 무자비한 손길을 벗어났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병원에 옮겨져서 죽어가는 사람들도 많았으며, 광주 시내 병원시설로는 이들 전체를 수용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향후의 사태발전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두 가지 사건이 이날 오후에 발생했다. 하나는 광주민중항쟁이 낳은 최고의 선동가 전옥주의 등장이었다. 항쟁지도부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그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군중들에게 투쟁의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길가 저편의 공수부대원들에게는 심리적인 회의와 이탈을 촉진하였다. 다른 하나는 그 다음날 발생하는 차량시위가 이날 준비되었다는 것이다. 시내 도처에서 무자비한 살상을 목격하고 그들 자신이 부상자를 실어날랐다는 이유로 공수부대의 대검에 난자당하는 일이 속출하자 흥분한 운전기사들이 ‘영업중지와 항의시위’를 다짐하게 된 것이다. 이날도 시민들 사이에는 투쟁을 격려하고 다른 곳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잔혹상을 알리는 유인물이 뿌려졌다.
상황이 매우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날도 정부측에서는 광주에서의 사태와 관련하여 아무런 입장표명도 하지 않았다. 또한 각종 보도매체들도 계엄당국의 철저한 통제 속에서 광주의 상황과 관련된 보도를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이날 밤 계엄군은 시 중심부에서 그때까지 진압을 담당했던 제7공수를 빼내고 외곽지 경비병력인 제3공수와 제11공수를 투입했으며, 일반 계엄군 병력도 훨씬 증원시켰다.
한편 이날, 미국의 태평양지구 공군사령관인 휴즈 중장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북한의 남침으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오끼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의 전술 공군기들은 매우 빠른 시간 내에 한국전선으로 출격할 것이며, 어떠한 북한의 공중공격도 격퇴할 능력을 한미 공군은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2) 무장투쟁으로의 발전(20∼21일)
(1) 5월 20일
지난밤부터 내리던 비는 20일 오전 9시경까지 내리다가 그쳤다. 시민들은 이른 아침부터 비를 맞으며 변두리 지역에서부터 시내 중심가로 몰려들고 있었다. 시내에는 여전히 공수부대가 지키고 있고, 그곳에서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집에 숨어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비가 그치기 시작하면서 오전 10시경 대인시장 주변에는 천여명의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가정주부와 50대 노년층까지도 포함된 이들 시민들은 서로 전날의 피해상황과 살육광경을 이야기하며 분노와 적개심으로 하나가 되고 있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점차 분노하기 시작한 대인시장의 상인들은 장사를 집어치우고 시위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얼마 나아가지 못하고 탱크를 앞세운 공수부대에 의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런 식으로 무리를 지어 사태 추이를 주시하는 사람들이 광주 시내의 곳곳에 모여 있었다.
이들 소규모 시위대와 공수부대와의 접전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공수부대의 진압방법은 어제와는 좀 다른 데가 있었다. 그들은 M16 소총에다 착검하지도 않았고, 말씨도 공손했다. 술 냄새를 풍기거나 눈이 벌겋게 충혈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시민들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사태가 진압되기는커녕 더욱 악화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자, 시민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공수부대의 행동거지가 바뀐 것이다. 그러나 이날 광주역과 공용터미널, 서방 삼거리를 경비하던 공수부대는 화염방사기로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광주 시내 전역에는 무서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20일 오전은 이와 같은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별다른 사건없이 대체로 소강상태를 이루면서 보냈다. 그러다가 점심시간이 지나면서 광주시가지는 다시 팽팽한 대치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어림잡아도 10만이 넘는 인파가 금남로를 뒤덮었다. 이제는 시장의 상인들까지 장사를 치우고 시위에 나서기 시작했다. 시내의 도처에는 “투사회보”라는 지하유인물이 수천매씩 뿌려지고 있었다. “투사회보”는 윤상원이 중심이 된 광주지역의 사회운동 진영에서 관제언론과 정부의 거짓된 선무방송을 이겨내기 위하여 발행한 것이었다.
이렇듯 팽팽한 대치국면은 서방삼거리에서의 충돌로 깨지게 된다. 이때 계엄군이 화염방사기를 사용했다는 말이 후일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아직 확인되지는 않는다. 연이어 동명동 부근에서는 하교하던 중학생들이 늘어선 계엄군들에게 돌을 던지며 저항하다가, 최루탄과 페퍼포그 세례를 받고 물러나기도 하였다. 한편 시 외곽의 곳곳에서도 산발적인 충돌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오후 3시, 금남로의 시위대는 수만 명으로 불어났으며, 그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드디어 경찰의 최루탄이 터지기 시작했다. 금남로의 시위군중과 경찰 사이에 공방전이 시작되었고, 시민들은 잠시 물러났다가 다시 몰려드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이제 시민들은 금남로에 앉아서 농성을 시작하였다. 시위대 안에서 몇 명이 뛰어나와 ‘우리는 왜 싸우는가’를 이야기하고, 지하유인물을 낭독하며, 노래를 선창하는 등 시위를 이끌어갔다. 그 자리에서 스피커를 마련하기 위한 모금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계엄군의 저지선 전면에 섰던 경찰병력이 빠지고 공수부대가 앞쪽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다시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력과 시민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이제 시민들의 숫자는 엄청나게 불어났으며, 그 중에서 도망치거나 방관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들 결사적이었다. 도청 앞 광장으로 통하는 모든 도로에는 시민들의 대열이 물결처럼 밀어닥쳤다. 시위대 안에서 청년 하나가 튀어나와 조금 전에 마련한 스피커를 들고 시위를 독려하기 시작했다. 직접 시위에 참가하기 어려운 여자들과 노약자들은 시위대에 물이나 돌 등을 운반해 주었다. 도청에서 각각의 도로로 나오는 길목에는 군경의 저지선이 쳐져 있었고, 그 뒤로는 분수대를 중심으로 탱크와 수많은 군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 시위군중과 계엄군은 때로는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가 소강상태를 유지하기를 되풀이했다.
그러던 오후 5시 50분경 충장로 입구 쪽의 시위군중 5천여 명은 스크럼을 짜고 도청을 향하여 다시 한번 육탄돌격을 감행하였다. 한번의 충돌을 마친 양쪽은 다시 대치하면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들 시민들중 일부는 경찰들에게 다가가 “광주시민을 적으로 취급하는 공수부대와 사생결단을 내고 싶으니 경찰은 비켜달라”고 요구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보다 조금 이른 오후 3시경부터 무등경기장에는 영업용택시들이 한 대 두 대 모여 들기 시작했다. 버스도 있었고, 화물자동차도 있었다. 오후 6시가 되자 모여든 차량이 200여 대가 넘었다. 공수부대의 만행에 흥분한 운전사들은 시민들의 투쟁대열에 동참할 것을 결의하고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켠 채 무등경기장을 출발하여 저녁 7시쯤 금남로에 들어섰다. 대열의 맨 선두에는 짐을 가득 실은 대한통운 소속 12톤 대형트럭과 고속버스, 시외버스들이 달려오고 있었고, 그 뒤로는 2백여 대의 영업용택시가 금남로를 가득 메운 채 뒤를 따랐다.
일시적인 소강상태에 빠져있던 시위군중들에게 이 엄청난 대열은 다시 새로이 전의를 불사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차량행렬이 금남로에 이르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저지선 앞에서 대치 중이던 군중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이들을 환영하였다. 그들은 곧 손에 쇠파이프, 각목, 화염병, 곡괭이, 식칼, 낫 등을 들고 돌멩이를 던지며 차량을 따라 돌격하였다. 이날 저녁의 차량시위는 광주시민들이 자발적인 항쟁을 새로운 단계로 고양시킨 최초의 주체적 계기였다.
이날 저녁 도청 앞 금남로는 광주에서 군인들을 몰아내려는 시위대와 이들을 진압하려는 계엄군의 육탄전으로 지옥이 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은 개머리판으로 차량의 헤드라이트를 부수며 전진하였고, 닥치는 대로 운전기사들을 끌어내려 두들겨 팼다. 그러나 잠시 물러나던 시위대는 공용터미널을 점거하여 버스를 동원해 온 또 다른 시위대와 합류하여 계엄군을 압박하였고, 군경저지선은 금남로 1가 전일빌딩 앞까지 후퇴하였다.
7시 30분이 되면서 금남로에서는 전체적인 형세로 보아 시위대가 계엄군을 포위하고, 계속해서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시위대와 계엄군 사이에 혈전이 계속되었다. 이 곳에는 시 외곽지역에 거주하는 시민들이 손에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들고 계속해서 모여들고 있었다.
이제 시내 전역에는 금남로의 혈전에 관한 소문이 퍼져 있었으며,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그리고 광주를 지키기 위하여 시내 전역에서 모여들고 있었다. 20일 밤을 지나면서 이제 광주시내에서는 도청과 광주역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지역이 시위 시민들의 결사적인 항쟁에 의해 ‘해방’되고 있었다. 이미 시 외곽지역에는 계엄군의 경비능력이 미치지를 못했으며, 계엄당국의 통행금지는 거의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시위군중은 20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특히 노동청과 광주역의 전투, 그리고 도청 앞의 공방전은 매우 치열한 것이었다. 계엄군의 방어는 필사적이었으나 시위군중은 시시각각 그들을 조여갔다. MBC와 KBS 방송국이 시위대에 점령되어 방송이 중단되었으며, 시내 파출소가 이날 밤 거의 전부 파손되거나, 방화되었다. 밤 9시 20분경에는 노동청 앞 오거리에서 군경저지선을 뚫기 위하여 돌진하던 광주고속 차량에 함평에서 파견나온 경관 4명이 깔려 죽기도 했다. 시위대들은 시간이 지나도 흩어지지 않았으며, 밤이 깊어갈수록 쌍방의 공방전은 고조되었다.
이윽고 MBC방송국이 불타기 시작했다. 광주사태를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고 보도한 시위대들이 불을 지른 것이다. 신역과 도청에 설치된 군경 저지선에는 기름을 싣고 불을 붙인 트럭들이 부딪쳐가도 있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계엄군은 광주역과 도청 앞에서 드디어 발포를 시작했다. M16 자동소총의 연발사격 소리가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거리에 울려퍼졌다. 선두에 섰던 청년들이 돌멩이를 손에 쥔 채 쓰러져 갔다. 이날 밤 거리에는 다음과 같은 선언문이 뿌려졌다.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 무기를 제작하라! 전시민 관공서를 불태워라! 차량을 획득하라! 특공대를 조직 군무기를 탈취하라!”
이제 시내 곳곳에서는 시민들이 자발적인 전투부대가 형성되었고, 그 속에서 다소 경험을 가진 몇몇 지휘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아직 무기를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주위에서 무기가 될만한 모든 것들을 이용하여 계엄군에 저항하고 있었다. 광주 시내의 항쟁이 확대·발전됨에 따라 계엄군은 시내 주요거점만을 지키고 있을 뿐이며, 항쟁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시외로 통하는 교통과 통신을 차단하면서 광주를 고립시키고 있었다.
이날 정부는 오후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최초의 소요사태와 관련하여 전 국무위원이 일괄사표를 제출했다. 과도정부를 주도했던 신현확 내각은 출범 후 5개월 6일만에 물러났다. 그러나 아직도 광주지역의 심각한 상황에 관해서는 단 한마디의 공식적인 언급이나 보도가 없었다.
(2) 5월 21일
20일 자정이 지나 21일 새벽이 되어도 시민들이 항쟁은 그칠 줄 몰랐다. 새벽 1시에 시민들은 세무서로 몰려가 기물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 국민들의 삶과 복지를 위하여 쓰라고 거두어진 세금이 자신들을 죽이고 두들겨 팬 군대와 그들이 갖고 있던 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세무서 무기고에서 시위대는 처음으로 카빈 소총 몇 자루를 입수하기도 했다. 물론 아직 실탄은 없었다. 노동청도 불타 올랐다.
새벽 2시경 전옥주의 가두방송을 선두로 수많은 시위대가 광주역으로 집결했다. 이들 응원군의 도착으로 그때까지 광주역에서 시위를 하던 사람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또 다시 광주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공수부대의 발포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밀려드는 시위대의 필사적인 공격은 새벽 4시경 결국 계엄군을 광주역에서 격퇴시켰다. 계엄군의 중요한 전략거점 중의 하나가 또 다시 함락된 것이다. 이때부터 광주에서 외부로 통하는 모든 시외전화가 ‘고장’이라는 이유로 완전히 끊겼다. 이제 ‘투사회보’등의 지하유인물 외에는 기존 대중언론 매체들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지난 밤 불타버린 두 방송국의 방송과 전남일보, 전남매일의 편집이 중단되었다. 외부의 정보로부터 차단된 광주시는 육지 속의 섬처럼 완전히 고립된 느낌이 들었다.
이날 새벽 1시쯤 광주·전남지역의 향토사단인 31사단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또한 신역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31사단 병력이 지난밤에 어디론가 이동하는 것이 많은 시민들에 의해서 목격되었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31사단 병력이 광주시민과 합세할 것을 두려워 한 군 지도부가 31사단을 무장해제시키는 것이라는 소문이 그럴듯하게 나돌았다. 그 진위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실제 항쟁기간 중에 별다른 이유없이 31사단장이자 전남북 계엄분소장인 정웅이 경질되어 이런 소문을 뒷받침하였다.
항쟁 나흘째로 접어든 21일 아침 지난 새벽의 광주역 전투에서 사망한 시민의 시체 2구가 시민들의 손에 들어갔다. 시민들은 군용 지프차 뒤에다 손수렐 연결해서 그 위에 시체들을 싣고 대형 태극기로 덮어 천천히 시내로 나아갔다. 오전 9시경 금남로를 향하여 몰려든 군중들은 이미 발 들여놓을 틈도 없이 가득 차서 십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때에는 이미 문화전선 팀이 가동되기 시작하여 페인트로 쓴 각종 구호나 선전문구가 차량에 걸렸고, 거리 모퉁이에는 벽보가 나붙기 시작했다. 또한 여러 가지 종류의 천에다 페인트로 쓴 각종 현수막이 도처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주된 구호는 ‘○○○ 반란을 일으켰다’, ‘살인마 ○○○ 을 찔러 죽이자’, ‘김대중 석방하라’, ‘광주시민의 피를 보상하라’, ‘구속학생·시민을 석방하라’, ‘우리는 죽음으로 광주를 사수한다’ 등이었다.
한편 일단의 시위대가 ‘광주사태’ 진압차 내려오던 육군 제20사단 사단장 박준병소장의 지휘용 차량을 탈취하였으며, 또 다른 시위대는 방위산업체인 아세아자동차 공장으로 몰려가 APC 장갑차 등을 징발하여 자체무장을 시작했다. 항쟁기간 중에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가져온 차량은 APC 장갑차 3대를 포함하여 버스, 트럭 등 수백 대에 이른다고 한다. 이후 이들 차량들은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시민들의 수송과 연락, 그리고 광주에서의 항쟁을 그 외 전남지역으로 확산시키는 교통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들 시위대의 식사는 각 동네 아주머니들이 준비하였다. 이미 광주시는 계엄군뿐만 아니라 기존권력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었으며, 시민들 사이에서는 밤새워 함께 싸우면서 얻어진 강한 연대감이 형성되고 있었다. 특히 시장 주변에서는 쌀과 반찬을 모아 지나가는 시위대에게 제공하였으며, 그 외에도 각종 음료수와 부식 등이 지나가는 시위대에게 전달되었다.
오전 10시경 금남로를 메운 10여 만여 인파 속에는 전날 밤 각처의 무기고에서 탈취해 온 카빈총으로 무장한 사람도 있었고, 여전히 쇠파이프나 몽둥이를 든 사람도 있었다. 이 무렵 금남로의 시위군중들은 김범태(27세, 조선대 법대 1년)와 전춘심(31세, 가정주부, 일명 전옥주) 두 명을 시민대표로 뽑아 도지사(장형태)와의 협상을 시도하였다. 이들은 시민들의 뜻을 모아 도지사에게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을 전달하였다.
㉠유혈사태에 대한 당국의 공개사과
㉡연행시민, 학생들의 전원석방과 입원중인 부상자의 소재, 생사를 파악하게 해줄 것
㉢계엄군은 21일 오전까지 광주시 일원에서 완전 철수할 것
㉣전남북 계엄분소장과 시민대표들이 협상을 주선할 것
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은 도지사가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무력한 도지사는 시민들의 최소한의 요구사항도 단독으로 수용할 수 없었으며, 협상은 결렬되었다. 협상의 결렬은 바로 눈앞에 닥친 시민들이 완전무장과 치열한 시가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 무렵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중앙정부 당국으로서는 처음으로 ‘광주사태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의 담화문은 ‘광주사태’를 ‘불순분자 및 간첩들의 파괴·방화·선동’에 기인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계엄군의 자위권을 강조함으로써 발포명령이 이미 내렸음을 암시하였다. 그날 오전 10시 10분쯤에는 벌써 도청광장에 있던 공수부대에 실탄이 지급되었던 것이다.
오전 10시 30분 전남도청에서 내무부로 급박한 상황을 알리는 보고가 올라갔다. “이제 우리는 철수한다.”는 내용의 마지막 교신이었다. 계엄당국과 도청내의 행정지도부는 철수를 위한 마지막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고, 군 헬리콥터가 도청과 전남대, 조선대 사이를 오가며 시체와 무기, 탄약, 주요 기밀서류 등을 옮기고 있었다. 이때에는 이미 도청을 중심으로 30여만 명의 시위대가 계엄군과 밀고 밀리는 충돌을 계속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던 21일 오후 1시 정각, 도청 건물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애국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 애국가에 때맞춰 일제히 요란한 총성이 터져 나왔다. 이로써 많은 시민들이 품고 있던 소박한 ‘사태의 평화적 해결에의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1시 5분경 계엄군의 총격에 분노한 한 청년이 금남로 2가에 세워져 있던 화물트럭에 시동을 걸더니, 공수부대의 저지선을 향하여 돌진해 갔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연발사격에 그 청년도 죽어갔다. 또 다른 청년들이 대여섯 대의 군용차량을 몰고 저지선을 향하여 비무장인 채로 연이어 돌진해 갔지만 모두 다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또한 금남로 주변을 선회하던 군 헬기가 갑자기 고도를 낮추며 제봉로 근처에 기총소사를 하기도 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장을 서둘렀다.
계엄군의 사격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시민들도 총이 필요했다. 시민들이 최초로 확보한 총기는 경찰로부터 노획한 차량 안에서 얻어졌다. 차안에는 카빈 소총 30여 정이 실탄과 함께 실려 있었다. 금남로 지하도에 있던 시민들은 실탄 한 클립과 함께 총을 분배받았다. 이들이 ‘광주사태’에서 최초로 무장한 시민군이 되었다.
한편 총을 확보하기 위하여 시위대중 일부는 광주 근교의 화순, 나주, 영산포, 장성, 영광, 담양 등지로 달려나갔다. 화순 탄광에서는 광부들의 도움으로 다량의 다이너마이트와 뇌관이 확보되었고, 그 외 각 지역의 지서와 예비군 무기창고에서는 카빈 소총 6백여 정, M1 소총 2백여 정, 탄약 5만발 등이 노획되었다. 노획된 무기들은 즉시 광주시내로 반입되어 청년들에게 분배되었다. 이들 무장시위대는 광주시민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시민군’으로 불렸고, ‘적군’인 계엄군에 맞서 싸우는 ‘아군’으로 간주되었다. 무장한 시민군은 주로 광주공원에 있는 시민회관을 본부로 삼았다.
시민군들은 계엄군의 정식 발포가 시작된 지 2시간 20분 정도가 지난 21일 오후 3시 20분경부터 응사를 시작하였다. 시가전은 도청을 중심으로 전남대 의대 방향, 노동청 방향, 공원 방향, 금남로 방향 등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특수훈련을 받은 육군의 정예 공수부대와 비조직적인 시민군이 전투를 벌린 것이다.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무질서하던 시민군도 전투를 치르는 과정에서 차츰 대오와 편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오후 4시에서 5시 사이 광주공원으로 수 백대의 차량에 무장한 사람도 포함된 수 천명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이들 사이에서는 자발적으로 전투지도부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들 지도부들은 무기를 소지한 사람들을 10여 명씩 조를 나누어 편성하였다. 유동삼거리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최초로 조직된 시민군은 약 300∼400명 정도였는데, 이들은 각각 조별로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광주 시내 주요지점으로 배치되었다. 이들 시민군이 배치된 지역은 외부에서 광주로 진입하는 입구인, 학동, 백운동, 광천동, 양동, 서방 등이었으며, 교전 중에 있는 도청으로 투입된 부대도 있었다.
그러던 중 상황을 역전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시가전이 한창이던 오후 5시경 시민군 중 일부(11명)가 전남의대 부속병원 옥상으로 올라가 LMG 기관총 2정을 설치한 것이다. 도청과 병원의 거리는 겨우 3백m 정도였으며 도청의 높이가 4층인 반면에 병원의 높이는 12층이었다. 이제 시민군은 전술적으로 유리한 고지와 우수한 화기를 갖추고 계엄군의 총본부이자 권력의 상징인 도청을 공격하게 된 것이다. 두 정의 기관총이 도청을 향하여 시험발사를 하자 계엄군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결국 오후 5시 30분 계엄군의 총퇴각이 결정되었다. 시민군들에게 완전히 포위당한 계엄군은 우선 퇴각로를 확보해야 했다. 장갑차 1대가 도청과 지원동 입구를 두 번 왕복하면서 길 양 옆에다 M60 기관총을 난사하였다. 그런 다음 계엄군을 실은 군용트럭들이 총을 무차별로 난사하면서 조선대 쪽을 향해 퇴각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곧 어둠을 이용하여 외곽도로로 전 부대가 빠져나갔다. 한편 도경찰국 간부들은 부하들에게 각자 알아서 피신하라고 한 다음 제각기 도청 뒷담을 넘어 몸을 피하였다.
계엄군이 철수한지 한참이 지나도록 시민군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저녁 8시경 시민군 일부가 총을 쏘면서 도청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도청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캄캄한 도청 건물 안은 텅 비어 있었다. 5월 21일 저녁 8시, 드디어 시민군은 교도소를 제외한 광주시의 전지역에서 계엄군을 몰아내고 승리를 쟁취하게 되었다. 피를 흘리며 싸워온 지 4일째, 계엄군은 온 몸을 던지며 전진하는 시민군의 공격 앞에 쫓겨나고 만 것이다.
도청 건물 안에는 여러 가지 잡동사니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어, 계엄군이 얼마나 다급하게 퇴각했는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날의 전투로 시민군에게 노획된 무기는 다음과 같다. 카빈 소총 2,240정, M1소총 1,225정, 38구경 권총 12정, 45구경 권총 16정, LMG 기관총 2정, 실탄 46,400발, 십여 정의 M60 기관총, TNT 4박스, 다량의 수류탄, 뇌관 100개, 장갑차 5개, 기타 각종 군용차량과 수십 대의 무전기, 방독면 등이었다.
도청에서 계엄군이 물러가고 날도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계엄군이 퇴각한 방향인 조선대 쪽의 외곽지역에서는 계속해서 총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도망치는 계엄군을 추격하는 시민군들과 이에 저항하는 계엄군 사이의 총격 때문이었다. 이날 밤 시민군의 암구호는 ‘담배-연기’였는데, 그것은 순식간에 연락업무를 담당하는 지프차에 의해 각 외곽지역을 경계하는 시민군들에게 전달되었다. 이날 밤을 기하여 계엄군은 시 외곽 7개 지역에서 광주를 다른 지역과 차단, 봉쇄시키는 작전으로 전환했다.
이날의 총격전으로 광주시내의 모든 병원들은 총상환자로 만원이었다. 버스나 소형차량들은 주로 부상자나 시체들이 보이는 대로 병원으로 실어 날랐다. 의약품이나 일손도 태부족한 실정이었다. 의사와 간호원들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내려고 전력을 다했다. 또한 병원 앞에는 시위대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못한 가정주부, 아주머니, 아가씨들이 헌혈을 하기 위하여 몰려들었고, 어린이까지도 팔을 걷고 달려왔다. 적십자병원 앞에는 인근 술집아가씨들이 ‘우리도 깨끗한 피를 가졌다’고 절규하며 헌혈을 간청하고 있었다.
이날부터 전개된 새로운 사태의 하나는 항쟁이 더 이상 광주지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목포를 비롯한 전남지역 일원으로 광범위하고도 급속하게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20일 밤 광주시에서 벌어진 시위형태와 유사한 상황이 이들 지역에서도 전개되었다. 이들 지역에서는 무장된 계엄군이 없었으며 그에 맞서는 무장한 시민군도 조직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목포, 무안, 함평, 나주, 화순, 강진, 영암, 해남 등지에서 지역주민들은 ‘광주대학살’의 충격 속에서 ‘계엄철폐, 김대중 석방, 전두환 물러가라’ 등을 외치면서 광주시민들과 행동을 같이 하였다.
한편 이날 광주 시내에 거주하던 미국인 약 200명은 미리 송정리로 빠져나가서 군용비행기를 이용하여 서울로 피신하였으며, 송정리 공군기지에 주둔해 있던 미공군은 그곳의 모든 비행기를 군산과 오산비행장으로 이동하였다. 또한 이날에야 비로소 동아일보에는 모든 비행기를 군산과 오산비행장으로 이동하였다. 또한 이날에야 비로소 『동아일보』에는 「광주사태 대책 강구」라는 표제 하의 기사가 나왔다. 계엄사에서 발표한 내용 그대로 지난 18일 광주 일원에서 발생한 소요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는 짤막한 보도였다.
계엄사가 발표한 바에 의하면 21일 오전 7시 현재 집계된 피해상황은 군경 5경과 민간인 1명 사망, 군경 30명 부상이라고 되어있다. 또한 광주에서 실제 발생한 일들을 대부분 유언비어라고 일축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김대중에 대한 중간 조사내용을 발표하면서, 그가 80년 봄에 발생한 학원시위 사태의 치밀하고 조직적이 배후조종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발표는 실제 광주시민들이 경험하였던 사실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내용이었고, 시민들의 분노를 더하게 하는 것들이었다.
한편 이날도 학생 및 청년운동권은 각종 유인물 작업을 전개하면서 사태의 진전을 면밀히 분석하고 그에 대한 향후 대책을 협의하였다. 이 자리에는 윤상원을 중심으로 정상용, 이양현, 윤강옥, 정해직과 그 외 2∼3명이 참석하였다. 협의 결과 이들은 “현 상황은 표면적인 정치운동에 불과하며, 더 이상 운동이 심화되지 못하고 좌절되어 버릴 것이다. 조직적인 역량이 성숙되지 못한 현상태에서 운동은 분명 일정한 한계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고 정세판단을 했으며, 개인적으로 판단하여 참여하거나 피신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그 결과 윤상원을 제외한 인사들은 일단 피신하였다.
5월 21일에 있은 계엄군의 퇴각은 한편으로는 광주시민들의 투쟁의 산물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엄군의 전술적인 철수작전이기도 했다. 계엄군은 이미 ‘광주지역의 봉쇄-내부교란-최종진압’이라는 단계적 작전개념을 수립하고 있었다. 한편 계엄군의 퇴각이 곧바로 기존 행정체계의 전면적인 붕괴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시내의 모든 질서가 ‘시민군’에 의해 자체적으로 유지되고 있었지만 그것은 기존의 국가권력의 정당성이 상실되고 시민들의 자치가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것을 뜻한 따름이었다. 도청과 시청 등에 의한 행정기능은 여전히 불안정한 채로 유지되고 있었으며, 봉기군은 자체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자원과 역량의 한계 때문에 그들 관료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시민생활의 정상화’를 도모할 수 있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광주시의 검찰청, 보안대, 정보부 등을 통해 보안·정보 업무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들에 의해 시민들과 시민군의 동태가 중앙정부와 계엄사령부에 낱낱이 보고되고 있었다.
3) 민중의 자치와 무장세력의 동요(22일∼25일)
(1) 5월 22일
항쟁 5일째 되는 날이 밝았다. 지난 저녁에 그토록 날뛰던 계엄군들이 물러나고 시민군들이 도청을 장악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시민들은 그러한 현실을 눈으로 확인하고자 도청앞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광주시민의 계엄군에 대한 저항은 피동적이고 자연발생적인 것이었으며, 생존권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지기방어였으나. 실제로 그들의 항전이 담고 있는 역사적인 내용은 훨씬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모두 승리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의 혼란 속에서 길거리에 흩어져 있는 잔해들을 치워내고 더러워진 시내를 깨끗이 청소하였다. 시내 곳곳에서는 총구를 밖으로 내놓은 채 복면을 한 시민군들이 탑승한 차량에 ‘계엄철폐’ ‘○ ○ ○ 처단’ 등의 플래카드를 붙이고 구호와 노래를 외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시민들의 환호 또한 열광적이었으며, 누구든지 서슴지 않고 시민군을 아군으로 부르고 있었다.
날이 밝으면서 광주공원에는 지난밤의 지역방어전투에 참가했던 ‘시민군’들이 모여들었다. 여기에서는 시민군의 재편성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부터 ‘시민군’이 해야 할 일은 자체조직과 병력을 통제하여 계엄군의 반격에 대비하면서 시내의 치안을 유지해야 하는 일이었다. 5, 6명의 청년들이 이곳에 모여드는 차량들에게 번호를 부여하여 등록을 시키고 나름대로의 임무를 부여하였다. 소형 차량에게는 주로 구호, 연락 등의 업무를 부여했고, 대형 차량에게는 병력과 시민들의 수송, 보급, 연락업무를 맡겼으며, 군용 트럭은 전투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또한 이 곳에서는 5백여 명의 무장 시민군을 임시로나마 재편성하여 각 지역으로 신속하게 배치하였다. 특히 시내 중심부의 주요 빌딩들에는 시민군 경계병을 적절히 배치시켰다.
아침 일찍 도청을 접수한 ‘시민군’은 우선 계엄군이 버리고 간 물건들로 어수선한 구내를 정돈한 다음, 도청을 본부로 정하고 1층 서무과를 작전상황실로 사용했다. 상황실에서는 차량통행증과 시내 주유소의 유류를 보급받기 위한 유류보급증, 상황실 출입증 등을 만들어 발부하는 한편, 외곽지대에서 자체방어를 맡고 있던 시민군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기동타격대를 편성, 출동하기도 했다. 또한 이들은 이날 오전 10시쯤에 재개된 도청 행정전화를 통해 전남뿐만 아니라 전국의 다른 지역에 광주의 상황을 전파하려고 하였다. 이와 함께 선전조가 구성되어 옥외방송을 통해 도청 앞 광장에 모여든 시민들에게 사망자의 신원과 인적사항을 발표하는 한편, 시민들의 협조 하에 마이크와 스피커를 장만하여 궐기대회를 추진할 준비에 들어갔다. 시 외곽지역에는 그곳에 배치된 시민군들이 그곳의 계엄군에 대응하여 각 지점에 그들과 2백여 미터의 간격을 두고 바리케이드를 쌓아 대치하고 있었다.
당시 계엄군은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하여 외부에서 광주시내로 들어오는 진입로 7개 지점을 차단, 봉쇄하고 있었으며, 시 외곽의 야산을 중심으로 매복하여 시민군이 통과하려면 사격을 가하였다. 또한 공수대원들은 2∼3명씩 조를 짜서 시 변두리로 잠입하기도 하고, 시민군들이 무질서한 폭도로 변해가고 있다는 내용의 역선전을 통해 시민들과 시민군 사이를 이간시키는 공작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4일간의 폭력적인 진압작전에도 불구하고 시위를 잠재우지 못하고 결국 광주에서 물러나야 했던 이들 공수대원들은 사기가 극도로 저하된 상태였다.
한편 금남로와 도청 주변에 모여든 수많은 시민들은 도청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신문이나 전단을 깔고 앉아, 무엇인가 만족할만한 조치가 발표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낮 12시 30분경 관료, 신부, 목사, 변호사, 기업 등 15명으로 구성된 “5·18 수습대책 위원회”(위원장 : 독립투사 최한영)가 결성되었다. 이들이 그동안 시민들과 항쟁을 함께 한 것은 아니지만, 80년 봄의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대부분 피신한 상황에서 시민들이 공감할만한 다른 대안은 없었다.
이날 오전에 열린 “5·18 수습대책위원회”의 회의에서 결정한 7개항의 수습대책은 다음과 같다.
① 사태수습 전에 군을 투입하지 말라.
② 연행자 전원을 석방하라.
③ 군의 과잉진압 인정하라.
④ 사후보복을 금지한다.
⑤ 부상자, 사망자 전원에 대한 치료 및 보상을 실시한다.
⑥ 전일방송은 즉시 재개하여 사실 보도를 한다.
⑦ 이상의 요구가 관철되면 무장해제 한다.
이상의 것들은 ‘더 이상의 유혈사태 방지와 질서유지’라는 명분으로 결정되었다. 그러한 이러한 내용은 그동안 시민들이 요구했던 것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계엄철폐’도 ‘전두환 퇴진’도 ‘김대중 석방’도 아무 것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오후 1시 30분경 수습위원 중 8명이 상무대에 있는 전남북 계엄분소를 찾아가 군측과 협상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계엄당국은 이렇게 온건한 내용의 수습안조차 수락하기를 거부했다. 협상은 실제적인 성과 없이 끝났다.
22일 아침부터 도청 광장과 금남로를 가득 메운 인파는 협상대표들이 계엄분소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시민궐기대회를 열고 있었다. 이미 이들은 오전부터 도청 앞에서 운반되어 온 사망자의 시신이 담긴 50여 개의 관을 바라보면서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또한 확인 되는대로 도청 상황실에서 발표하는 사망자 명단을 들으며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들은 누구의 통제나 지시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제각기 분수대 위에 올라가 공수부대의 만행을 규탄하고 나름대로의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했다. 자연발생적으로 시민궐기대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 이들은 다소 거칠지만 자신들의 요구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여러 가지 구호나 통곡으로 표현되고 있었지만, 단 두 마디 ‘군부의 퇴진’과 ‘민주정부의 수립’으로 요약된다.
오후 5시가 넘어서야 ‘수습대책위원회’에서는 계엄분소 방문결과에 대하여 협상보고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수습위’는 이렇다할 협상성과를 제시할 수가 없었다. 정시채 부지사의 사회로 8명의 수습위원들이 차례로 분수대에 올라가 협상내용을 설명하면서 자신들의 소신을 이야기하였다. 그들에 따르면 계엄분소장은 개인적으로 과잉진압 부분을 인정했으며, 다른 부분도 상부와 협조하여 들어주겠다면 시간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그들 수습위원들이 유혈방지와 질서유지를 강조하자 시민들 대부분은 이에 공감하는 듯 박수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그들은 다만 사태의 원만한 수습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무기를 회수해야 한다며 시민들을 설득하였다. 그 과정에서 상당수의 시민들이 ‘굴욕적인 협상반대’를 외쳤지만, 적지 않은 무기들이 반납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수습위’의 태도는 시민들의 의사를 거의 반영하지 않은 것이어서, 향후 이들이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날의 협상보고대회에서는 김창길(전남대 3년) 등의 주장으로 “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기도 했다. 당시 대학생들은 남도예술회관 앞에 따로 집결했는데, 이중 전남대와 조선대에서 5명씩, 그리고 나머지 전문대 등에서 5명을 뽑아 총 15명으로 ‘학생 수습위’를 구성한 것이다. 그들은 전남대 교수인 송기숙, 명노근 등과 함께 오후 6시경에 도청에 마련된 상황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송기숙 교수의 제의로 위원장에 김창길, 총무 정해민(전남대 상대 4년), 대변인 양원식(조선대), 무기 관기담당 허규정(조선대), 부위원장 겸 장례담당 김종배(조선대), 기타 총기회수반, 차량통제반, 수리보수반, 질서회복반, 의료반 등의 부서를 두었다. 이제 수습위원회는 유지급 인사들의 “일반수습위”와 대학생들의 “학생수습위”로 이원화되어, 전자는 주로 계엄사 측과의 협상 또는 시민의 설득에 중점을 두고 후자는 실질적인 대민업무를 맡아보게 되었다.
한편 광주지역의 사회운동 진영은 당시 도청 내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한 채 수습위의 활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은 이날 저녁 300여 정의 무기가 회수되고, 그 무기들이 도청 수위실에 무질서하게 쌓이는 것을 바라보면서 ‘수습위’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다. 결국 이들은 ‘수습위’의 협상을 투항주의적 협상태도라고 비판하면서 민중적 봉기지도부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문제의 중대성을 인정한 윤상원은 박남선이 지휘하는 시민군조직과 사회운동 인사들의 유기적 연결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학생수습위”내의 투쟁파를 견인해내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상황실만을 차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학생 수습위원회와는 별도로 무장 시민군과의 직접적인 통일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날 오전 신임 박충훈 국무총리서리가 광주를 방문하였다. 시민들은 국무총리가 광주 시내로 들어와 죽어있는 시신이나 부상자들을 보면 공수부대의 만행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며, 뭔가 자신들의 요구가 정부당국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소박한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광주땅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은 채, 상무대에서 계엄분소장의 보고만 듣고 다음과 같은 간단한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들이 노력으로 광주사태는 호전되고 있다. 시민들은 극소수의 폭도와 불순분자의 터무니없는 유언비어 에 현혹되거나 부화뇌동하지 말라.”
또한 이날 밤 국무총리서리는 저녁 7시 30분에 전국적으로 중계된 TV와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현재 광주 시내는 군병력도 경찰도 없는 치안부재 상태다. 일부 불순분자들이 관공서를 습격, 방화, 무기를 탈취하여 군인들에게 발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은 정부의 명령 때문에 시민들에게 발포하지 못하여 울화통잉 터지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사태는 시청 직원이 사무를 보고 전기, 수도가 공급되며 은행 약탈이 없는 것으로 보아 호전되어 가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와 같은 발언은 광주시민들의 지난 5일 동안 경험하였던 것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었으며, 자신들의 항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시민들의 일반적인 정서와도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신임 총리의 발언은 시민들의 분노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만 초래하였다. 이제 광주시민들은 정부조차도 믿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수습대책위원회’는 무기회수를 결정한 상태였으며, 수습위원들은 도청과 공원 등지를 돌아다니며 무기를 반납하라고 시민군들을 설득하고 다녔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무기들을 반납하기도 했다. 그들은 ‘이제 수습위원회가 구성되었으니 그 곳의 지시를 따라 질서 있는 행동을 하자’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한편 또 다른 시민들은 이들의 무기회수 요구를 투항주의라고 비판하면서 크게 반발하기도 했다. 이들은 문제의 해결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총기를 반납하는 것은 이미 죽어간 사람들을 모독하는 것이며, 항쟁의 의의를 깎아내리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시민들 내부의 분열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최초의 항쟁에서 하나로 뭉쳐졌던 시민들의 역량이 붕괴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더욱이 항쟁지도부가 들어있는 도청 내의 상황은 한층 복잡해지고 있었다. 도청 상황실은 드나드는 사람들이 늘어나 도저히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 버렸고, 계엄군 측의 정보요원이 끼어 들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이었다. 상황실을 장악하고 있던 청년, 학생들은 신변에 위험을 느낄 정도의 상황이었다. 결국 이들 청년 학생들은 무력을 동원하여 상황실에서 사람들을 몰아낸 후, 각자의 임무가 적힌 증명서를 발급하여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게 된다. 그러나 강력한 지도부가 존재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러한 통제가 가능할 리 없었다. 상황은 또 다시 악화되었다.
한편 18일에서 21일까지는 3개의 선전조가 서로 연결 없이 각각 유인물작업을 하고 있었다. 전남대 “대학의 소리” 발행 팀이 최초의 유인물을 제작, 배포하기 시작했고, 광천동 “들불야학” 팀이 윤상원을 중심으로 유인물을 발행했으며, 문화 팀 “광대”가 박효선을 중심으로 유사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22일 이후 이들은 윤상원의 지도를 받아서 조직을 통합하고 「투사회보」를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문안 작성조(윤상원, 전용호), 필경조(박용준), 등사조(김성섭, 나명관, 윤순호), 물품 보급조(김경국) 등으로 부서를 정하고, 등사기 3대를 동원하여 하루에 5∼6천 부씩 소식지를 제작했는데, 이의 배포는 주로 노동자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이날 정부에서는 신임 내각을 중심으로 광주사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또한 국무회의에서는 계엄사로부터 상황을 보고받고 사태수습은 원칙적으로 군이 하기로 하고, 부서별로 양민 구호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이날 계엄군은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하여 외부에서 광주로 들어오는 진입로를 차단·봉쇄하고 시민군 내부의 교란작전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최후의 진압작전인 ‘충정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또 이날 존 위컴 주한 유엔군 및 한미연합 사령관은 그의 지휘권 아래 있는 한국군을 군중 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한국정부의 요청을 받고 이에 동의했다고 토머스 도스 미 국방성 대변인이 밝혔다. 도스 대변인은 “지금까지 북한군이 한국의 현 상황을 이용하려는 움직임이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미국 정부는 오끼나와에 있는 조기경보기 2대와 필리핀의 수빅만에 정박중인 항공모함 ‘코럴시’호를 한국 근해에 긴급 출동시키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광주시민들 사이에서는 “미국의 항공모함이 우리를 도우려고 오는가 보다”라는 소박한 기대를 걸기도 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외신기자들이 광주사태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더욱 증폭되었다. 당시 미국은 북한의 남침에 대비, 한국의 안전에 관한 조치를 선행한 후 한국의 국내 정치문제에 관해서도 미 해정부로서의 후속조치를 마련할 것이라고 보도되었다.
(2) 5월 23일
시민들이 광주시 전역을 장악한 지 이틀째인 23일, 시 외곽지역에서는 간헐적으로 총성이 들려왔지만, 아직 시내는 승리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분위기였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길거리를 청소했으며, 시장 주변 길가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길가에 솥을 걸고 밥을 지었으며, 밤새워 경계근무를 하던 시민군들에게 앞다투어 식사를 제공했다. 이 날부터는 상가들도 띄엄띄엄 문을 열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경 시내의 각 동네에서 모여든 시민들로 도청 앞 광장은 거의 5만여 명의 인파가 운집해 있었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무기회수 문제가 쟁점으로 부각한 정세를 반영하듯이 그에 관한 여러 가지 의견이 오고 가기고 했다. 도청 주변 담벽에는 선전조의 미술팀들이 그려놓은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고, 남도예술회관 벽면과 충장로 방향 YMCA 부근 담벽에는 사망자 명단과 함께 잔혹하게 죽은 시신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도청 앞 맞은편 상무관에는 시체를 담은 관들이 놓여 있었고, 관이 부족하여 아직 입관하지 못한 시체들도 무명 천에 덮여 놓여 있었다. 입구에는 분향대가 설치되어 향이 피워졌고, 수 많은 시민들이 줄을 지어 분향하고 있었다.
한편 지난 밤에 구성된 학생 수습대책위원회는 일반시민 수습대책위원들이 모두 귀가한 상태에서 밤을 새워 대민질서, 홍보, 장례, 무기회수 문제 등을 토의했다. 이들은 다른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지만, 무기회수 문제는 팽팽한 대립을 보였다. 위원장인 김창길 외 몇몇 학생은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무기를 회수하여 반납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부위원장인 김종배, 허규정 등은 시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구조건이 관철된 상태에서 반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에 맞섰다. 수습위 내부가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오전 중에만 천여 정 이상의 총기가 회수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결국 이들은 먼저 일부 총기를 계엄사로 가지고 가서 그 반응을 살펴본 뒤에 총기회수 여부를 결정하기로 잠정 합의하였다.
이날 오전 10시경 수습위원회는 도지사실에 모여 조직을 개편했다. “일반 수습위”는 당초의 15명에서 5명이 사퇴하여 10명이 남았으며, 여기에 전남대와 조선대에 각각 10명씩 참여하여 총 30명으로 “수습위원회”(위원장 : 천주교 대주교 윤공회)를 구성하였다. 이는 전날의 “일반수습위”와 “학생수습위”를 합한 것으로 그 성격은 그 전과 별 차이가 없다. 이들은 이날 오전 중으로 회수된 무기 1천여 정 중에서 2백정을 가지고 계엄사에 반납한 후 연행자 34명을 인수해 저녁 7시 40분쯤 도청에 돌아왔다. 이를 계기로 이들 수습위원들은 무기반납 주장을 더욱 강력하게 제기하였으며, ‘수습위’의 일반적인 분위기도 이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날 저녁까지 시민군이 갖고 있는 무기의 절반수준인 2천 5백정의 카빈소총, M16, 권총 등이 회수된 것으로 집계되었다.
한편 “수습위원회”와는 별도로 상황실을 장악하고 있던 청년들은 시민군의 조직화와 차량 통제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은 시민군을 조직화해 나가면서 고립된 도시의 불리한 점을 깨닫고, 우선 전투장비 및 보급물자의 확보 및 통제와 시민군의 조직체계 수립, 대전차 방어선 구축 등이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시민군의 지휘자였던 박남선 등은 그같은 무기회수를 결코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허락없이 무기를 내주지 말도록 강력하게 무기반출금지 명령을 내렸다. ‘수습위’ 내부에서 무조건 무기반납을 주장하는 세력과 조건부 반납을 주장하는 세력 사이에 갈등이 표면화된 것이다.
이날 오전 11시 반경 도청 앞 광장에는 15만 명이 훨씬 넘는 인파가 모여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이날 궐기대회의 주도세력은 “녹두서점”과 “현대문화연구소”의 야학·문화·민주청협의 회원들로 당시 광주지역의 사회운동을 대표하는 세력이었다.
이들은 내부에서 갈등을 빚는 ‘수습위’로는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시민들의 힘에 의하여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궐기대회를 준비한 것이다. 대회가 열리기 전에 광주지역이 문화운동 팀인 “광대”가 선전 선동을 하면서 분위기를 돋구고 있었고, 궐기대회에 모인 15만 명에 이르는 인파도 이들에게 적극 호응하고 있었다. 궐기대회에서는 자진 등단한 각계 각층의 시민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밝히고 현사태에 대한 의견과 개인적인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들은 모두 끝까지 자신들이 쟁취한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의견은 당시 ‘수습위’의 해결책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날 저녁에는 낮에 궐기대회를 준비하였던 사회운동 인사들이 YMCA 소심당에 모여서 자체 평가회를 가졌다. 그 결과 첫째, 시민들의 피해상황 만으로는 대중 호소력이 약했다는 점, 둘째, 기자재 준비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셋째, 시민들의 의사표현이 감정에만 치우쳐 있다는 점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따라서 홍보부는 다음부터는 기획방향을 광주민중항쟁의 의의나 목적,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부각시키는데 초점을 맞추는 한편, 시민 각계각층의 대표연사를 미리 접수받아 발표하도록 했다. 또한 궐기대회의 진행과정에서 연사의 연설뿐만 아니라, 시 낭독, 노래부르기, 화형식, 촌극 등 다양한 내용을 포함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이날 밤의 모임에서는 도청 상황실에서 파악된 현 상황의 전체적인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이들은 현재의 ‘수습위’로는 이 상황을 헤쳐나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그 대안으로 무엇보다도 강력한 지도부가 필요하다는 데에 의견이 일치되었다. 이와 함께 타 지역과의 연대를 확보하는 문제, 시민군의 조직과 예비군의 동원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이날 밤 일반 수습대책위원들과 김창길 등 학생 수습대책위원들은 무기회수에 주력하였으며, 김창길은 계엄군측 화약전문가를 데려와 도청 지하실에 보관중이던 다이너마이트 뇌관을 제거해 버렸다.
구용상 광주시장은 “80만 광주시민에게 호소합니다”라는 호소문을 통하여 “불행한 마찰로 인명이 더 이상 희생되어서는 안되겠다. 전시민이 머리를 맞대고 수습책을 강구하자”고 호소했다. 한편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는 이날 한국 국회의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미국의 카터행정부는 최근의 한국사태를 이란이나 아프카니스탄보다 훨씬 중시하고 있으며, 한국방위에 대한 미국 정부의 단호한 결의를 모종의 통로를 통해 북한측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3) 5월 24일
수습대책위원회 내부에서 갈등, 시민군과 수습대책위원회의 갈등, 이렇게 상이한 의견들이 끝내 화해할 수 없는 길로 들어선 것은 항쟁 6일째인 5월 24일이었다. 오후 1시경 도청 상황실에서 열린 ‘학생 수습위’에서는 김종배, 허규정 등의 강경한 주장이 관철되어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이 결의되었다.
첫째, 금번 광주사태에 대하여 일부 불순분자들과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현재의
광주항쟁은 전시민의 의지였으므로 폭도로 규정한 점을 해명, 사과하라.
둘째, 이번 사태로 사망한 사람들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하라.
셋째, 5·18 사태로 구속된 학생, 시민 전원을 석방하라.
넷째, 금번 사태로 인한 피해보상을 전시민이 납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행하라.
그러나 이러한 요구사항은 우선 ‘학생 수습위’ 위원장인 김창길부터 찬성할 수 없는 것들이었고, ‘수습위’에서는 더욱 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결국 의견이 모아질 수 없었다. 이러한 갈등은 밤 9시, 도청 상황실에서 열린 회의에서 더욱 팽팽한 대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 날의 회의는 자정을 넘어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었지만, 갈등의 폭은 계속해서 커져만 갔다.
한편 이날 오전에 ‘수습위’는 계엄사 측과의 협상 내용 8개항을 인쇄하여 시내에 배포하였다. 그 내용은 계엄군이 시내에 한 명도 없다는 것과, 과잉진압을 인정하여 연행자 927명 중에서 79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석방했으며, 보상계획 수립과 치료대책 완비, 사실보도에 노력할 것, 폭도나 불순분자라는 용어 사용 중지, 비무장 민간인의 시외통행 허용, 사태수습 후 보복금지 약속 등이었다. 더욱이 이날 아침 8시에 계엄사는 재개된 KBS 라디오방송을 통해 “총기를 소지한 사람은 24일 오전까지 국군통합병원, 기타 경찰서에 무기를 반납하면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내용의 발표를 하면서 이들 ‘수습위’내의 무기회수파를 측면지원하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다수 시민들은 한편으로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크데 반발하고 있었다. ‘수습위’의 미온적인 태도에 대한 불만은 이날 오후에 열린 궐기대회에서 노골적으로 폭발하기 시작하였다. 전날에 이어 오후 2시 30분에 열린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는 10여만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개최되었다. ‘수습위’는 궐기대회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겨서, 행사준비를 방해하기 시작하였다. 스피커의 사용을 못하게 하고, 전원을 끊어버리는 등의 방해를 한 것이다. 그러나 그에 관계없이 궐기대회는 시민들의 협조 속에 열리게 되었다.
궐기대회에서는 수많은 시민들이 분수대 위로 올라가 책임자 처벌과 피의 보상을 외치며 열변을 토했다. 특히 이 자리에서는 ‘수습위’의 협상자세를 투항주의적이라고 비난하는 발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시민들의 ‘수습위’에 대한 불신과 분노는 ‘수습위’를 해체시켜 버려야 한다는 주장으로까지 확산되어 나갔다. ‘수습위’의 협상 내용 8개항이 시민들의 요구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대회 도중에 갑자기 폭우가 내렸지만 시민들은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대회를 강행하였다. 대회 중간에 홍보부에서 준비한 허수아비가 도착하여, 그 화형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이날도 각국 외신기자들의 취재는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시민들은 사실보도를 전혀 않는다는 이유로 국내기자들의 취재는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지만, 사실보도를 하는 외신기자들에게는 협조해주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따라서 국내기자의 도청 출입은 상당한 통제를 받았지만, 외신기자들의 취재영역은 훨씬 자유스럽게 개방되었다.
폭우 속에 계속된 궐기대회가 오후 6시경에 끝나자 대회를 주도했던 청년, 학생들 25명은 YMCA에 모여서 자체 평가와 조직 강화를 위한 회합을 가졌다. 이들은 항쟁 초기에는 지하유인물을 통하여 사태의 진상을 알렸으며, 계엄군이 철수한 후부터는 도청 안에 들어가 항쟁의 조직화와 궐기대회를 준비하였던 팀들이었다. 김영철, 윤상원 등이 주도한 이날 모임에서는 정세분석과 함께 각자가 맡은 역할에 대해 논의하였다. 여기서 결정된 향후 운동방침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재야 민주인사들에게 연락하여 항쟁과정에 적극 참여시킨다.
둘째, 시민들을 최대한 동원하여 궐기대회를 적극 추진한다. 그리고 여기에 필요한 방송을 시설
확보와 유인물, 플래카드, 리본 등을 제작한다.
셋째, 도청내 수습대책위원회의 투항주의적 노선을 자신들이 직접 개입하여 투쟁노선으로 바꿔
나간다. 이를 위해서 도청 내의 일부 투쟁지도부와 합세하여 병력을 차츰 교체시킨다.
당시 ‘수습위’에는 2가지 부류의 의견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나는 민중항쟁의 도덕적 정당성을 인정하지만 더 이상의 무장대체는 유혈사태만을 자초할 뿐이므로 일단 무기를 반납하고 계엄군의 사과를 받아내자는 입장이었다. 다른 하나는 민중항쟁 자체를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시위대의 무기사용을 폭도로 인식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동기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무기반납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현실적으로 동일한 수습책을 제시하고 있었다. 한편 도청 안의 학생들은 무기반납을 주장하는 김창길 등과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는 김종배 등이 대립하고 있었으며, 점차 후자가 주도권을 잡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다 견고한 항쟁 지도부를 준비중이던 민주화운동 진영은 위의 방침에 따라 수습위를 대체할 새로운 준비기구를 편성하였다. 준비기구의 면면을 보면 기회담당에 윤성원, 김영철, 이양현, 홍보집회 담당에 박효선, 김태종, 궐기대회 비용 및 인쇄제작 담당에 송백회의 정유아, 이행자 등으로 구성하였다. 이들은 또한 대학생들을 완전히 조직화하여 그 세력을 기반으로 도청에 진입해 지도부를 구성할 계획을 세우고 다음날부터 YMCA로 대학생들을 집결시키기로 했다.
4)새로운 지도부의 구축과 결사항전(25일∼27일)
(1)5월 25일
23일 이후 광주 새내는 수습대책위원회 내부의 의견대립으로 지도력이 확립되지 못한데다가 정보요원들이 잠입하여 교란작전을 편 관계로 커다란 혼란에 휩싸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25일 아침 8시에는 독침사건까지 발생하였다. 황금동 부근에서 술집을 경영하던 장계범(21세)이 도청 동림국장실에 들어와서 “독침을 맞았다”라고 소리치며 쓰러진 것이다. 이로 인해 도청 안에 간첩이 침투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지만, 후일 이 사건이 정보당국의 교란작전이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수습위’ 내에서의 밝혀져가는 것과는 달리, 시민들은 어느 정도 질서를 회복해 가고 있었다. 시장들과 상점들이 문을 열기 시작하였고, 사회복지단체에 대한 식량공급이나 전기, 수도 등은 관련 공무원들의 지원으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해결되고 있었다. 병원들은 한때 항쟁기간 동안에 발생한 수많은 부상자들 때문에 혈액이 부족하여 곤란을 겪기도 했지만,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시민들의 헌혈로 혈액원마다 피가 남아돌 지경이었다. 치안유지력이 매우 약화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은행이나 신용금고 같은 금융기관에 대한 사고는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금은방 등 일반 상점에서도 별다른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에 발생한 범죄율이 오히려 평상시보다 훨씬 낮았다.
‘수습위’나 시민군들이 필요한 돈은 시민들의 헌혈로 자발적인 성금으로 해결되었으며, 3∼4백명에 이르는 시민군들과 항쟁지도부의 식사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어다준 밥으로 해결되었다. 그 수는 줄었지만 시민군들도 지도부의 의견대립과는 관계없이 대부분이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시민들의 도덕성과 자치능력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날에 이어 25일에 이르러서도 ‘수습위’는 여전히 시민군의 무장해제와 그 거부를 둘러싸고 팽팽한 대립을 계속하고 있었다. 학생 수습위는 이 문제를 놓고 전날부터 이날 새벽 1시경에는 정해민, 양원식 등 학생수습위의 일부 위원들이 이에 가담하여 학생 수습위의 조직이 개편되기도 했다. 수습위는 여전히 무기회수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으며, 이에 맞어, 민주화운동 진영에서는 지역내 재야인사들의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당시 회합에 참여한 재야인사들은 홍남순, 이기홍(이상 변호사), 송기숙, 명노근(이상교수), 장두석(신협이사), 윤영규(장로), 조아라(YWCA총무), 박석무, 윤광장(이상교사)등이었다.
이들은 남동성당에서 회합을 갖고 도청 수습위에 참여키로 결정하여, 이날 수습위의 개편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들 재야인사들도 청년운동 진영 및 항쟁을 주장하는 청년들과는 생각이 달랐다. 이들은 민중항쟁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도 무고한 목숨의 희생을 염려하였다. 또한 당시의 조건에서 무장투쟁의 현실적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이들 재야인사들은 도청부지사실에서 회의를 열고 김성룡 신부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제안한 4가지 사창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최규하 대통령 각하께 드리는 호소문」을 채택하였다. 여기서 채택된 4가지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번 사태는 정부의 잘못임을 시인할 것, 둘째, 사과하고 용서를 청할 것, 셋째, 모든 피해는 정부가 보상할 것, 넷째, 사후에 어떠한 보복조치도 없을 것 등이었다. 여기에서는 김성룡 신부를 대변인으로 한 25명의 광주사태 수습대책위원들이 서면을 했다. 그러나 권력의 장악을 목표로 하는 신군부가 그러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조치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수단은 의로운 ‘죽음의 행진’뿐이었다.
한편 재야인사들의 협조를 얻는데 실패한 사회운동 진영은 새로운 집행부의 구성을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가두방송을 통해 대학생들을 YWCA로 모이게 하는 한편, 사회운동 진영을 대표하여 윤상원이 도청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우선 도청내에서 무기회수를 반대하며 항쟁을 주장하던 김종매, 박남선 등을 만나 협조를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의 서로를 생각이 일치한다는 거슬 확인하고 상호 헙조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의 협조속에 YWCA에 모인 대학생 50여 명을 도청에 투입하였다. 이들은 항쟁지도부의 도청내 실권장악을 돕기 위해 전위세력으로 투입된 대학생 병력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25일 오후 3시부터는 “제3차 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시민들의 참가 숫자는 전날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 약 5만여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이날 도청 본부에서는 지금까지 집계된 사상자 수를 발표하는데, 신원이 파악된 시체가 169구, 신원파악이 불가능한 시체가 40여구, 중환자 520명, 경환자 2,170명, 행방불명 2천여 명으로 발표되었다. 훗날 이 숫자와 계엄사 본부의 집계가 큰 차이가 나서 말썽이 일기도 하였다.
오후 7시경 도청 식산국장실에서는 윤상원의 안내로 들어온 정상용, 김영철, 이양현 등 민주화운동 인사들과 ‘학생 수습위’ 부원장인 김종배, 허규정 등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가 열렸다. 그들은 현재의 ‘학생 수습위’를 구축하고, 자신들이 새로운 집행부를 결성하여 투쟁적인 자세로 임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회의 중에 학생 수습위원장 김창길이 달려와 그들 사이에 설전이 벌어졌다. 한동안 논쟁이 벌어졌으나 이미 조직적으로 참여한 대학생들이 도청내의 주도권을 장악한 뒤였다. 결국 김창길은 자신의 주장이 더 이상 먹혀들지 않는 것을 깨닫고 그날 밤 9시 사의를 표명하게 된다.
5월 25일 밤 10시 드디어 최후까지 투쟁하기로 결의한 항쟁지도부가 탄생하였다. 새로운 지도부는 학생수습위의 일부 투쟁파와 청년 운동권, 그리고 그동안의 무장투쟁 국면에서 전면으로 부상한 기층민중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새로운 지도부의 무기 반납을 중단하고 투쟁의 조직적 지도를 위하여 역할을 분담했으며, 도청 내부의 행정체계를 잡고 민중생활의 정상화를 도모하려고 했다. 그들의 전략은 ‘일면투쟁, 일면협상’ 이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예비군 동원령을 내려 자위대를 편성할 계획을 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계엄군이 총공격해오면 도청 무기고에 있는 다이너마이트의 뇌관이 제거된 사실을 알지 못했다). 또한 대치상황이 장기화할 것에 대비하여 모든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정상화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사항도 검토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현실적인 전망이나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사회적인 조건 속에서 그들에게 그만한 역량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이날 밤 최규하 대통령은 상무대 전남북 계엄분소를 방문하여 소준열 계엄분소장과 장형태 전남지사로부터 상황을 보고받은 뒤, 밤 9시, 10시, 10시 30분 세차례에 걸쳐서 KBS 라디오와 TV를 통하여 광주지역에만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일시적 흥분과 격분에 의해 총기를 들고 다니는 청소년 여러분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총기를 반환하고 집으로 돌아가십시요.-잊어서는 안될 일은 이러한 우리의 대결상황을 북한 공산집단들이 약용하고자 할 것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함께 그는 작전에 동원된 계엄군에 대해서도 담화를 발표하였다. ‘그동안 우리 군이 광주사태에 대처함에 있어 희생을 내고 또 온갖 어려움을 견디면서 자제와 인내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대하여 그 노고를 깊이 치하하며, 광주사태에 임하는 데 있어서 비록 난동의 소행은 잘못된 것일지라도 우리 동포요, 국민이니만큼 인명피해를 극소화하라’는 내용이었다.
(2) 5월 26일
새벽 5시, 농성동에서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이 시민군의 무전기를 통해 도청 상황실에 보고되었다. 이에 전 시민군에 비상령이 하달되었으며, 일반 수습위원들중 이성학 장로, 김성룡의 탱크는 시민군의 바리케이드를 깔아뭉개 버리고 1km쯤 밀고 들어와 한국전력 앞길에 진을 쳤다.
한편 계엄군이 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은 도청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경 이렇게 하여 도청 앞 광장에 모인 수만 명의 시민들은 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정오 무렵 궐기대회가 끝나자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참석자 전원이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시위군중은 금남로를 출발하여 광주공원과 양림교, 청산학원, 계림파출소 등을 지나 다시 도청 앞으로 되돌아왔다.
이 무렵 계엄군과 정부는 한편으로는 최후의 진압작전을 계획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군 내부의 교란 및 항쟁지도부와 시민들의 분리를 위한 작전을 시도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날 항쟁기간 동안 길거리에서 선전을 담당하였던 전옥주와 차명숙이 “저 여자 간첩이다” 라고 외치며 달려드는 정체불명의 사람들에게 체포되어 끌려간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들이 보안대로 끌려간 것으로 보아 정체불명의 사람들에게 체포한 사람들은 군의 정보요원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 동안 이러한 작전을 계속해서 실시해 왔던 신군부와 전교사 측은 이제 폭도와 양민이 분리됨으로써 작전을 실시하기로 여건이 조성되었다고 보고 전교사의 책임 하에 5월 27일 0시 이후에 작전을 실시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에 따라 26일 새벽 사이에 봉쇄명령이 내려 계엄군이 시내로 압축, 전진배치되었던 것이다.
한편 전날 새로 구성된 항쟁지도부는 이날 오전부터 각 부서별로 업무를 담당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항쟁의 확산을 꾀하기 위하여 대변인실에서 많은 수의 외신기자들과 일부 국내기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자회견을 갖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은 25일부터 출근하기 시작한 도청 국장급 간부들, 정시재 부지사, 구용상 광주시장, 일반 수습위원들이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 참석하여 광주시장에게 시민군의 유지와 시내 차안 및 질서유지, 부상자와 사망자의 처리에 관련된 사항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항쟁지도부는 정부에 7개항으로 된 “80만 광주시민의 결의”를 통해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분명히 하였다. 거기에 포함된 7개항은 다음과 같다.
㉠이번 사태의 모든 책임은 과도정부에 있다.
㉡무력탄압만 계속하는 명분 없는 계엄령을 즉각 해제하라.
㉢민족의 이름으로 울부짖는다. 살인마 ○ ○ ○를 공개 처단하라.
㉣구속중인 민주인사를 즉시 석방하고 민주인사들로 구국 과도정부를 수립하라.
㉤정부와 언론은 이번 광주의거를 허위조작, 왜곡보도하지 말라.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단지 피해보상과 연행자 석방만이 아니다.
㉦이상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우리 80만 시민 일동은 함께 투쟁할 것을 온 민
족 앞에 선서한다.
이들 항쟁지도부는 계엄군의진압적전 실행여부나 미국의 의도 등에 대하여 확실한 태도를 견지하지 못했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26일 보다 체계적인 무장조직으로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였다. 그동안 무장투쟁을 총지휘해온 박남선은 지도부의 상황실장을 맡고 기동타격대장에는 윤석주(19세, 자개공), 부대장에 이재호(33세, 한양공대졸, 회사원), 경비대장에 김화성(21세, 식당종업원)이 임명되었다.
이 기동타격대는 5∼6명을 1개조로 각 조마다 조장1명 타격대원4∼5명, 군용 지이프차 1대, 무전기 1대, 개인무기로 카빈 1정, 실탄1클럽을 8개조로 편성되었다. 이들은 상황실장-부대장-조장-조원에 이르는 지휘체계를 구성하고, 유사시에는 상황실장에게 시민군의 총지휘관으로서의 임무가 부여되었다. 이들에게 부여된 주요임무는 시내순찰, 계엄군 동태파악, 계엄군잠입저지, 거동 수상자 체포 연행, 치안유지, 외곽지 시민군과의 연락업무 등이었다. 이 기동 타격대가 이후 계엄군과의 최후 항전을 수행하게 된다. 이와 같이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던 26일 오후3시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참가시민들의 수는 눈에 띠게 줄었지만, 그들 상당수는 ‘계엄 해제’ ‘구속자 석방’ 등의 구호를 쓴 머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는 새로 구성된 항쟁지도부가 계획했던 예비군과 동원조직에 대한 발표가 있었고, 이에 대해 시민들은 적극 호응해 주었다. 한편 항쟁지도부는 대회가 끝날 무렵 오늘밤에 계엄군이 공격해올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시민들 5∼6천명이 금남로-양동복개상가-돌고개를 거쳐 계엄군이 진을 치고 있는 비로 앞까지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26일밤 도청 안에서는 이전의 수습위원들이 계엄군의 진압작전을 알리면서 도청을 빠져나갈 것을 종용하였다. 이들의 종용으로 150여 명의 시민군이 도청을 빠져나갔다. 항쟁지도부도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만류하지 않았다. 지도부는 이미 궐기대회에서 사회자를 통해 최후까지 싸울 수 있는 사람만을 만류하지 않았다. 지도부는 이미 궐기대회에서 사회자를 통해 최후 싸울 수 있는 사람만 남아 달라는 말을 전한 바 있었다. 이렇게 해서 최후까지 도청에 남은 사람이 150여 명이 되었다. 이중 80여 명은 군복무를 마친 사람들이 있었고, 60여 명은 고등학생 및 군 경험이 없는 청년들이었으며, 여학생도 10여 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YWCA대강당에 모여 전투조를 편성하고 여성부에서 준비한 식사를 하였다.
한편 윤상원, 박남선, 김종배, 정상용 등 항쟁지도부 간부들은 따로 모여 작전회의를 가졌다. 이날 밤 11시 최후의 전투를 위하여 광주시내 곳곳에 배치된 병력 현황은 다음과 같다.
계림초등학교 : 30여 명(본부 파견)
유동삼거리 : 30여 명(본부 파견)
덕림산 : 30여 명(본부파견)
(이곳에는 50∼200 명으로 추산되는 예비군 자체방어가 형성되어 있었음)
전일빌딩 : 40여 명(LMG 기관총 설치)
전대병원 옥상 : 수 미상
학동, 지원동, 학운동, : 30여명
(문장오를 중심으로 한 예비군 방어지역)
여기에는 공원부근과 광주시 외곽에 산재되어 있던 훨씬 많은 수의 자체방어 병력은 파악되지 않았다. 또한 이날 새벽 도청 안에는 10여 명의 여학생들을 포함하여 200∼500명 정도의 인원이 남아있었다.
(3) 5월 27일
27일 0시 정각, 자정이 되자마자 도청 상황실의 시외통화가 끊겼다. 전화가 끊긴 것이 계엄군의 공격을 예고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도청 안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홍보부에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결정했다. 박영순(1959년생. 송원전문대 보육과 2년)이 홍보차량에 올라 새벽3시까지 광주시내 전지역을 돌면서 마지막 가두방송을 수행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형제 우리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서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그녀의 애절한 부르짖음은 그 후 오랫동안 광주시민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기억 속에 남아있게 된다.
새벽 2시 30분, 도청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상황실장 박남선이 전체상황을 지휘했다. 상황실에서는 시시각각 계엄군의 진입현황이 보고되어 들어오고 있었다. 계엄군의 이날 밤 광주진입로는 대략 다음과 같다.
지원동→광추천→적십자병원→도청 남쪽(육군 제20사단)
백운동→전대병원→도청 후문(육군 제20사단)
화정동→양동→유동3거리→금남로→도청 정문(육군 제20사단)
서방→계림국교→시청→도청 북쪽(육군 제31향토사단)
또한 격전장이던 광주공원은 7공수, 도청은 3공수, 관광호텔과 전일빌딩은 11공수가 투입되었다. 이날 아침 광주에 진입한 계엄군이 수도군단 상황실로 타전한 「광주 상황보고서」에 의하면 계엄군의 시간별 진입 내용이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1980년 5월 27일
03:30, 작전개시
04:10, 도청에 투입
04:30, 광주공원 7공수 투입
04:40, 관광호텔, 전일빌딩 11공수 투입
04:53, 도청에서 61년대 지원 하에 폭도들과 치열한 교전
04:55, 도청 완전 점령
05:04, 광주보병학교 외곽 배치 완료
05:05, 광주공원 완전 진압
05:10, 62연대 1대대 도청병력증원
05:20, 61연대 2대대 광주경찰서 진입
05:22, 도청 잠적 폭도 소탕 완료
한편 막강한 계엄군에 맞서 시내 곳곳에서는 시민군의 항쟁이 벌어졌다. 3시 40분쯤 계림국교 앞 육교에서는 상당히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지역은 예비군 중대장이 직접 시민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 날 항전의 절정은 항쟁 지도부가 있던 도청에서 이루어졌다. 도청의 인근에서 총성이 울려퍼진 것은 새벽 3시 30분 경이었고,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에게 도청이 완전히 포위된 시간은 새벽4시경이었다. 계엄군의 장갑차 위에서 서치라이트가 도청을 비추는 가운데 계엄군은 항복을 권유하는 최후의 통첩을 방송하였다.
“폭도들에게 경고한다. 너희들은 현재 완전히 포위되었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순간 도청 안에서 총성이 울렸다. 시민군 측에서 발사한 총탄이 계엄군의 서치라이트를 박살냈다. 이것을 신호로 하여 계엄군의 일제사격이 시작되었다. 그와 함께 도청 뒷담으로는 공수대원들이 침투하고 있었다. 시민군들이 하나 둘 쓰러지면서 최초의 방어선은 무너져 버렸다. 이미 시민군들의 실탄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살당한 사람, 사로잡힌 사람, 항복하는 사람이 속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항생지도부의 핵심 인물이었던 윤상원(전남대졸 민주화운동 관련자)이 전사하였다. 한편 YWCA에서는 문화선전조와 고교생들, 그리고 노동자들이 방어중이였다. 이곳에서는 항쟁의 전 기간 동안 열심히 참가하였던 박용준(고아출신, 구두닦이)이 전사하였다.
항쟁의 피로 물든 아침이 밝아 왔다. 마침내 전우에 시체를 넘으면서 마지막 시민군들이 두 손을 들고 걸어나왔다. 생존자는 ‘도청 방황자’, ‘총기 소지자’ ‘특수폭도’ 등으로 분류되어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계엄군은 작전을 개시한지 약 4시간만에 모든 것을 마무리짓고 항쟁을 진압하였다. 그리고 80년 5월 광주민중의 무장 투쟁도 열흘 간에 걸친 역사의 막을 내렸다.
4. 항쟁의 확산 및 지역적 한계
1)항쟁의 확산
광주민중항쟁은 현상적으로만 파악하면 진압군의 야수같은 만행에 맞서 시민들이 살기 위해 저항한 사건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스며들어 있으며, 민중스스로가 역사의 주체임을 선언하면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는 강한 염원이 분출되고 있다. 따라서 항쟁의 초기부터 광주시민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인하고자 했으며, 그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광주사태’의 진상과 무장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하고자 했다. 그러한 자신감이 22일 신임 국무총리의 광주방문을 고대하는 마음으로 나타났으며, 폭도라고 불리는 것에 분개하게 했고, 윤상원의 기자회견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광주시민들의 자신감에 비례해서 항쟁의 확산에 대한 신군부의 두려움은 컸다. 그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항쟁이 타 지역으로 전파되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다. 결국 항쟁 당시에는 전남의 서남부지역을 제외하고는 그러한 확산이 불가능하였다. 그것은 전국적인 수준에서 가능해진 것은 시간이 무려 8년이나 지나서 ‘청문회’가 열릴 때였고, 그 과정에서 부분적이나마 항쟁의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광주민중항쟁 당시 광주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항쟁의 불길이 광주 이외의 지역으로 번져간 것은 항쟁 나흘째인 5월 21일이었다. 그날 오전 ,아세아 자동차공장과 각종 차고에서 차량이 시위군중에게 대거 획득된 것을 계기로 지금까지는 광주 시내에만 국한되어 고립적으로 진행되었던 민중항쟁이 전남 도내 각 지방으로 들불처럼 퍼져나간 것이다. 최초 시위대보다는 전국적인 항쟁의 확산을 목적으로 전주·서울 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들의 의도는 광주-장성 사이의 사남터널 부근에 대기중이던 계엄군에 의해 강력한 제지를 받게 되면서 불가능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광주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번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던 권력층들은 광주에서 북상하는 길을 우선적으로 차단하였던 것이다. 결국 시위대들은 그쪽 방향을 포기하고 주로 전남도내 서남부에 있는 각 시, 군으로 진출하였다.
광주 항쟁이 확산되는 경로를 살펴보면 한 가지 특징적인 점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항쟁이 발발한 지역이 주로 광주 이남 서남해안 지역에 이는 물론 전남지역과 다른 여타 지역을 분리하여 전남을 고립시키려는 신군부와 계엄군의 전략·전술에도 원인이 있지만, 그와 함께 한국사회에서 전라도지역, 특히 전남지역이 갖고 있는 사회경제적인 특수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한가지 특징적인 점은 전남에서 항쟁이 발발한 대부분의 지역이 광주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해 온 시위대에 동조하여 항쟁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각 지역의 민중들은 그 전 광주에서 계엄군에 의하여 처참히 학살이 자행됐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지만, 감정적인 분노에 머무르다가 광주에서 온 시위대에 의하여 그 분노가 실천적인 저항으로 폭발한 것이다. 이러한 점은 항쟁이 발발한 지역이 시위대가 접근하기 용이했던 서남해안 지역에 집중해 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항쟁이 발발한 지역을 지리적인 인접성이나 사건의 선후에 따라 묶어서 그 과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1) 나주·영산포 지역
나주·영산포 지역은 광주시와 인접해 있다는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광주로 통학하는 학생이나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은 지역이다. 따라서 80년 5월 당시에도 광주에서 발생한 일을 어느 지역보다 신속,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또한 이들 지역에는 그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자도 많았기 때문에 신군부와 계엄군에 대한 분노가 매우 강했던 지역이다.
사건이 발생한 5월 17일 이후 불안과 분노로 하루하루를 보냈던 5월 21일 아침 10시 마침내 광주와 나주지역의 교통이 두절되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2시에는 총기를 구하러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에 의해 계엄군의 발포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총과 실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나주경찰서를 습격하고 무기고를 부순 다음 카빈소총 94정, 공기총 151정 등을 획득하여 자체무장을 시작하였다.
이후 이들 무장시위대는 곧바로 나주읍 금성동 파출소에 진입하여 자신들이 몰고 온 군용차량으로 무기고를 부순 다음, 그곳에 보관중인 카빈 소총 500여 정, M1소총 200여정, 실탄50,000여 발을 획득하였다. 이들 무기로 자신들의 무장력을 증강한 시위대는 나주군 노안면, 산포면 등지에서 차량시위를 하다가 당일 오후5시 경 그 중 일부가 획득된 무기를 싣고 광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머지 시위대는 나주, 영산포, 강진군 성전면, 해남군 옥천면 등지를 돌아다나며 광주에서 일어난 사태를 전달하는 한편, 각 지역에서 항쟁에 참여할 청년들을 모으고 있었다.
이들 시위대는 그후 항쟁에 합류하기 위하여 광주지역으로의 진입을 수차례 시도하였지만, 그 때마다 계엄군의 봉쇄망을 뚫지 못하고 많은 사상자만을 남긴 채 물러나야 했다. 이들은 광주진입이 실패하자 23∼4일 경까지 각 지방을 돌며 시위를 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이들 시위대는 헬기까지 동원한 계엄군의 진압작전에 곳곳에서 패퇴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대다수 체포되고 말았다.
(2) 목포·함평·무안 지역
5월 18일 광주지역에서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는 소속이 광주를 빠져나온 사람들의 입을 통해 이들 지역에 전해졌다. 그것은 광주에서 계엄군이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으며. 사상자가 수십명에 이르고 있고, 시민들이 그에 저항해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목포시민들은 분노와 울분을 감추지 못한 채 일촉즉발의 분위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더욱이 목포시민들의 분위기가 더욱 심상치 않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목포시민들은 분노와 울분을 감추지 못한 채 일촉즉발의 분위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더욱이 목포시민들은 이 지역 출신 정치인으로 자신들의 희망이었던 김대중의 연행소식이 함께 전해지면서 목포시민들의 분위기가 더욱 심상치 않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러던 소식이 전해지자 목포경찰서 산하 대부분의 경찰들이 광주지역에서 발생한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동원되어 경찰서와 파출소가 텅텅 비다시피 한 상황에서, 이날 오후1시경 광주로부터 빠져나온 시위대 200여 명이 각목 등으로 무장한 채 택시 1대와 광주고속버스4대에 분승하여 목포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시가지를 차량행진하면서 광주시민의 피해상황과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는 가두방송을 하였다. 또 이들은 ‘계엄해제’ ‘살인마○○○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구속 시민 학생을 석방하라’ 는 구호를 외치며 목포 시민들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이러한 시위는 그렇지 않아도 격양되어 있던 목포지역의 분위기에 불을 붙이는 결과가 되었다. 목포시민들은 이들 시위대를 열렬히 환영하며 삽시간에 2만여 명이 목포역 광장에 운집하였다. 시민들은 오후 4시경부터 ‘김대중 석방’과 ‘계엄철폐’ 등을 외치며 대오를 갖추고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일부잔류경찰들의 제지가 있었지만, 시위대의 기세에 경찰병력들은 흩어져 버렸다. 그리하여 이날 오후부터 목포지역은 상가가 철시하고 각 관공서까지 텅비어 치안의 공백사태가 야기되었다.
21일 밤이 되면서 시위대의 기세는 더욱 사나워져 점차 폭력적인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9시경에는 경찰서와 파출소의 기물이 파괴되었고, 9시 20분경에는 KBS와 MBC 양 방송국의 기물이 파괴되었다. 이미 시위대는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이 불어 시가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10시가 조금 지나면서부터는 무안, 함평 등지에서 자체적으로 봉기한 무장시위대가 목포로 진입, 이들 시위대와 합세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날의 목포지역은 무장한 계엄군만 없을 뿐이지, 상황은 광주와 별 차이 없이 폭발적인 시위양상을 보였다.
이들 시위대는 자정이 넘어서도 수그러들 줄 몰랐다. 22일 새벽 2시경 시위대는 목포역 대합실을 파괴하였고, 인근 연동 파출소 등에 방화하였다. 이들을 계속해서 중앙정보부 목포분실, 시내 모든 파출소, 세무서, 해안경찰대 등을 파괴하고 파출소 무기고에서 무기를 획득하여 자체 무장을 하였다. 이미 기존의 국가기구들은 이들을 제재하거나 진압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한 상태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초보적인 수준에서나마 시민들의 자치역량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22일 오전 11시경 목포시 행복동에 소재한 안철의 집에서 종교계 인사들과 재야인사, 시장 및 경찰대표, 정당대표들이 모여 수습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오후2시경에는 「시민 민주투쟁 위원회」 주최로 “제1차 민주헌정 수립을 위한 시민궐기대회”가 역광장에서 1만 여 명의 시민들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위원장으로 추대된 안철은 “광주시민 학살은 자유시민을 억압하던 유신독재 잔당들과 군인들의 정권욕이 결탁하여 빚어낸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반역사적·반민족적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시민 스스로 치안대를 조직할 것과 시위대가 소지하고 있는 모든 무기는“시민 민주투쟁 위원회”에 반납해 줄 것을 제안하면서 평화적인 투쟁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시민 스스로 치안대를 조직할 것과 시위대가 소지하고 있는 모든 무기는 “시민 민주투쟁 위원회”에 반납해 줄 것을 제안하면서 평화적인 투쟁을 주장하였다. 계엄군의 만행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목포시민들은 광주와 평화적인 투쟁을 주장하였다. 계엄군의 만행을 직업 경험하지 못한 목포시민들은 광주와는 달리 이러한 호소에 동조하였다. 이리하여 목포는 이날 저녁 6시까지 소총 240정, LMG 기관총 2정을 포함한 무기회수가 이루어져 목포 JC회장인 이형래가 제3해역에 반납하였다. 한편 5월 23일 오후 3시경에는 청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목포시민 민주화투쟁위원회”가 목포역 앞에서 구성되기도 한다.
목포지역에서는 이와 같은 궐기대회가 광주지역과 마찬가지로 26일까지 계속적으로 열리고 있다. 그러나 광주지역과는 달리 치열한 실상전이 벌어지지는 않았으며, 따라서 목포 지역의 항쟁은 상대적으로 좀더 온건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항쟁지도부도 광주지역에서 강·온파가 분리된 것과는 달리 초기의 온건한 지도부가 마지막까지 항쟁을 주도하고 있다. 또한 시민들 사이에도 목포 청년회의소와 같은 단체는 진압하기 위하여 정부기관 이상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광주지역에서 민주화를 열망하던 시민군들이 피를 흘리며 진압당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진 5월 27일 목포에서도 마지막 궐기대회가 열렸다. 오전 11시경 목포역 광장에서 “제5차 민주헌정 수립을 위한 목포시민의 결의문(2)”을 채택하면서 항쟁을 계속하기로 다짐했다. 이날까지 목포에서는 시가행진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불꽃이 꺼져버린 상황에서 더 이상의 항쟁이 이어질 수는 없었다.
한편 광주와 목포 중간에 위치한 함평지역을 항쟁의 불길이 비켜갈 리 없었다. 함평지역에 최초로 흉흉한 소문이 전해진 것은 항쟁이 발발한 5월 18일이었다. 이날 이후 이 지역도 광주에서 학교다니는 자식들이나 친척들의 걱정에 분위기가 험악해져 갔다. 그렇게 걱정과 불안으로 몇 일간을 보내는 동안 가끔 광주에서 도망나온 학생이나 젊은이들이 함평으로 들어오면서 광주지역의 참상이 전해졌고, 그때마다 지역민들의 분노도 커져 갔다. 그러다가 항쟁이 발발한지 4일째인 5월 21일 오후 1시경 고속버스, 트럭 등 10여 대에 분승한 광주의 시위대가 함평읍에 도착하면서 항쟁이 폭발할 정도로 고양되어 있었던 것이다.
함평읍민들은 광주에서 온 시위대를 대대적으로 환영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고, 그들과 함께 함평 신광지서 등을 접수하여 총기 100여 정, 실탄2박스 등의 무기를 확보했다. 이 때 경찰들 대부분은 광주지역으로 파견나가 있었고, 극소수의 잔류병력만 남아 있을 때여서 이들 시위대를 제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부장을 갖춘 시위대는 그날저녁 8시경 광주로 진입하려다가 계엄군이 광주 외곽지대를 봉쇄해 버리자 다시 함평으로 되돌아 왔다.
한편 5월 22일에는 외부 시위대가 없는 상태에서 함평군민들이 궐기대회가 열렸다. 이날 아침 함평읍 공원으로 몰려든 수많은 군중들은 읍내를 돌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오후에는 시위차량에 대극기를 꽂은 채 해남, 영광 등지로 빠져나갔다. 그들은 도중에 엄다면 지서 무기고와 군부대를 공격하여 다량의 무기를 획득하기도 했다. 이 무기들은 이후 무안을 거쳐 목포로 반입된다.
5월 23일부터 함평지역의 시위대는 자신들의 본부를 함평 경찰서로 정하고 영광으로 통하는 도로와 함평다리 입구에 바리게이트를 친 상태에서 자체경비에 들어갔다. 이후 항쟁이 끝나는 27일까지 함평은 별다른 움직임 없이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기 함평지역은 평소 경찰이 했던 역할만 지역민들이 대신할 뿐 여느 때와 다름없는 분위기였다.
한편 이와 같은 분위기는 부안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이곳 역시 5월 18일 이후 불안과 분노로 지내다가 광주에서 온 무장시위대가 이 지역에 들이닥친 5월 18일 이후 불안과 분노로 지내다가 광주에서 온 무장시위대가 이 지역에 들이닥친 5월 21일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항쟁을 시작하였다. 이날 오후 2시경 광주에서 온 무장시위대 30여 명이 버스를 타고 무안군에 들어온 것이다. 당시 군민들은 광주에서의 소식을 듣고 분개하고 있던 때여서 즉시 그들과 합세하여 군내를 돌며 시위를 벌렸다.
이들 시위대는 자체무장과 지역내 권력의 확보를 위하여 무안군 현경면에 이르러서는 지서를 접수하였고, 무안경찰서, 청계지서 등을 습격하여 M1 소총, 카빈소총 등 다량의 총기류를 노획하였다. 이어 오후 3시경에는 해제면 지서, 3시 40분 경에는 망운면 지서, 4시경에는 망운명 운암지서를 차례로 접수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자체무장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이들 시위대는 곧바로 인근 목포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후 무안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3) 영암·강진·장흥·해남지역
광주에서 온 시위대는 나주에서 군민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 일단 세력을 확보하고, 자체 무장력을 강화한 후, 세 그룹으로 분리되어 그중 한 그룹은 목포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그리고 남은 한 그룹은 나주에서 영암, 강진, 해남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이중 광주민중항쟁의 확산과정에서 매우 특이한 유형으로 분류되는 지역이 영암이다. 영암지역은 외부에서 시위대가 들어와서 항쟁이 발발한 타지역과는 달리 지역주민들에게 의해 시위가 시작되었다. 영암지역이 항쟁에 휘말린 것은 도청에서 계엄군이 퇴각하고 전남도내 다른 지역이 항쟁이 열기에 휩싸여 가던 5월 22일부터이다. 당시 타지역의 항쟁 소식을 진해들은 지역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이날 아침부터 차량(픽업)을 타고 영암 관내에서 시위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군민들의 지지와 적극적인 참여를 확인한 이들은 시위대의 수가 점점 많아지자 오전11시경에는 영암군 군서면 지서를, 오후 2시 30분 경에는 학산면 지서를, 오후6시경에는 시종면 지서를 접수하였다. 그러나 이들 지서들은 타지역의 항쟁소식을 전해들은 경찰들이 이미 무기를 옮겨놓은 상태였다. 무기고를 열어보았으나 무기가 없자, 이들 시위대는 지서 기물만을 파괴하고 다른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그리던 중 주민들의 제보로 총기를 매자한 곳을 발견하여 120여 정의 카빈소총을 획들하고 비로소 자체무장을 하게 되었다. 이들 무기는 오후 7시 30분경 나주읍 군청광장에 모여있는 시위군중들에게 전달되었다.
다음 날인 5월 23일 10시경, 이들 시위대는 영암군 도포면 덕화리 저수지 부근에서 도포지서의 실탄을 경운기에 싣고 대피 중이던 예비군 중대장에게서 실탄 21,470여 발을 획득하였다. 또한 경찰이 숨겨놓은 총기류 60여 정을 발견하여 자신들의 트럭에 옮겨 실었다. 이들 부기로 무장한 시위대는 광주시내의 항쟁에 가담하기 위해 수차례 광주진입을 시도했으나 계엄군의 외곽 봉쇄망을 뚫지는 못하였다. 결국 영암지역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되었던 시위대는 24일 경 계엄군과 교전 끝에 상당수가 죽거나 다치게되었고, 나머지 시위대도 모두 체포도면서 항쟁은 끝나게 되었다.
한편 강진지역에서의 시위는 5월 21일 에 광주를 빠져나온 시위대가 7,8대의 버스를 타고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미 광주지역에서 발생한 일을 알고 있었던 강진읍민들은 이들 시위대를 열렬히 환영하였으며, 많은 군민들이 시위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러한 시위는 22일 에 도 계속되었는데, 이날부터는 청년회의소 회원, 기독청년회, 강진 농고 학생들, 지역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강진읍교회에 본부를 두고, 상당히 조직저그로 시위를 주도하였다. 다음날인 23일에도 이들의 시위는 계속되어 강진농고 학생들을 중심을 500여명의 읍민들이 자체 가두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날의 시위는 결국 경찰 및 계엄군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날의 충돌로 강진에서의 항쟁은 진압되었는데, 진압과정에서 6명이 부상하여 강진읍 도립병원에 입원하였으며 그중 한 명은 끝내 사망하였다.
시위대의 주요통로였던 나주-해남간 도로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던 장흥지역은 타지역보다 조금 늦은 5월 23일에야 시위대가 들어왔다. 이들 시위대는 버스 3대와 트럭 3대에 분승하여 ‘김대중을 석방하라’ ‘살려내라 내 형제’ 등의 구호를 외치며 장흥읍 일대를 돌아다녔다. 장흥읍민들은 이에 호응하여 장흥고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400여 명의 읍민들이 시위를 벌였으며, 관산면에서도 버스 1대와 함께 많은 군민들이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이들 시위대중 일부는 보성까지 가서 차량시위를 하기도 하였다.
항쟁이 발발한 전남 도내의 군단위 지역에서 가장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항쟁에 참여한 지역은 해남이었다. 해남지역의 항쟁은 해남 청년회의소(회장:황용택)가 주도하였는데, 이들은 5월 21일 12시 30분경 해남 대흥사에서 긴급이사회를 개최하여 대응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날 결정된 사항은 다음과 같다.
㉠민주인사 석방 및 민주 회복
㉡독재자 추방
㉢농어민 보호정책 활성화
㉣광주사태 희생자에 대한 보상
㉤계엄 해제
이들은 이러한 요구사항을 결정한 후, 그것의 관철을 위하여 해남지역에서도 시위에 들어갈 것을 결정하였다.
한편 해남지역에서 이렇게 논의가 진척되고 있던 21일 오후 30분경, 광주에서 온 시위버스 1대가 광주의 급박한 소식을 전하면서 이 지역의 분위기는 급격하게 고양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날 오후 3시경에는 약 3,000여 명의 군중들이 해남읍 교육청 앞 광장에 모여 성토대회를 열고,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이때 시위대의 대표와 해남읍 주둔군 부대장 사이에는 평화적인 시위를 하기로 협약을 맺기도 하였다. 다른 지역에서 주민 시위대와 군경간에 사망자가 속출하는 총격전이 벌어졌던 것을 생각하면, 해남지역의 분위기는 조금 색다른 데가 있다.
해남에서 시위가 한창이던 오후 5시경 광주에서 또다시 시위차량이 대거 진입하였다. 이들은 곧바로 해남읍 시위주민들과 결합하여 오후 6시경부터 해남군 일원을 돌며 차량시위를 벌였다. 이들 시위대는 밤 10시경에는 완도읍까지 진출하여 시위를 벌이는 한편 시위에 참여한 차량마다 소대장을 임명하는 등 매우 조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계속해서 다음 날인 21일에도 해남지역에 집결한 시위대는 새벽 6시부터 해남군 일원과 강진, 영암, 나주 일원, 심지어 무안, 목포지역에 이르는 전남 남부의 전지역을 돌며 차량 시위를 하였다.
지서의 무기를 획득하여 자체무장을 한 것은 해남의 시위대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시위도중 해남군내 계곡지서, 옥천지서, 화산지서, 월송지서, 우수영지서 등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자체무장을 했던 것이다. 또한 22일 오후 1시경에는 해남읍 소재 군부대의 점거를 시도했으나, 해남군 당직자와 군부대장의 설득으로 포기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군민들이 불안감을 느낀다는 지역유지들의 설득으로 이들 시위대는 자진해서 무기 회수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군부대는 그날 저녁 8시 30분 상부로부터 발포명령을 받았음을 밝히고, 시위대 자체수습을 종용하였다. 이에 시위지도부는 군부대에 자체수습을 종용하였다. 이에 시위지도부는 군부대에 자체수습을 전제로 발포시간을 자정까지 연기해 줄 것을 요청하고, 공식적으로 시위대의 해산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시위대의 공식 해산에도 불구하고, 무장세력을 중심으로 한 상당수의 사람들은 시위를 계속하였다. 결국 이들 무장시위대는 23일 새벽 1시경 해남에서 광주로 나가는 길목인 옥천면 소재 우슬재에서 길 양쪽에 매복중이던 군부대와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 전투로 무장지위대 수십명이 사망 혹은 중경상을 입었으며, 나머지는 가까스로 살아나 패주하였다. 그후에도 해남군 일원에는 몇 차례의 알려진 바로는 해만읍 안동리 국도와 해남읍 복평리 국도, 상동리 고개와 백야리 등에서 전투가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5월 24일에는 완도에서 7대의 버스에 분승해 해남으로 오던 시위대가 군부대 앞에서 군병력과 대치해 총격전 일보직전까지 갔었으나, 군부대장과 해남읍장 등의 설득으로 사태가 진정되기도 하였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해남군 일원은 비교적 평온을 되찾고 있다.
(4) 화순지역
화순군은 광주지역과 너릿재 터널을 사이에 두고 바로 인접해 있기 때문에 통학생이나 직장인등 광주와의 인적교류가 많은 지역이다. 따라서 광주사태의 발발과 전시민적인 항쟁이 벌어지고 있음을 이미 잘 알고 있었으며, 그러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광주시민과 일체감을 느끼면서 분노와 함께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5월 21일 오전 11시경 광주에서 내려온 200여 명의 시위대가 ‘전두환’ 퇴진 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화순읍민들은 이들을 열광적으로 환영하면서, 그중 상당수가 시위대열에 적극 합류하였다.
그날 오후 2시 30분 광주에서 계엄군의 발포가 시작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다는 엄청난 소식이 숨가쁘게 전해졌다. 이들 시위대는 발포하는 계엄군에 저항하기 위하여 무기를 구하러 온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화순읍민들은 더 이상 광주의 이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광주시민과 하나가 되었다. 시위대와 합세한 화순 동면지서를 급습, 무기를 탈취해 광주로 실어 날랐다. 오후 3시경에는 송광지서를 접수했으며, 이어 10시 30분 경에는 화순탄광을 진입하여 광부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다량의 TNT를 획득했다. 계속해서 밤 11시경 화순 북면지서를 접수, 무기를 획득한 후 철야시위를 벌였고, 22일 아침 6시경에는 노획 무기 전부를 광주도청으로 운반했다. 또한 이곳의 광부들을 중심으로 화순의 청년들은 벌교, 보성 등을 거치면서 곳곳의 지서와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획득하여 광주로 전달하였다.
2)전남지역 항쟁의 특징
지금까지 광주를 제외한 전남지역에서의 항쟁을 현재까지 밝혀진 선에서 정리해 보았다. 광주민중항쟁은 전남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전혀 항쟁이 이어지지 않았고 전남지역도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던 광주시와는 달리 주로 차량시위가 전개됐으며, 계엄군이 그들 차량시위대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약간의 총격전이 발생하는 정도였다. 전남도민 중 광주민중항쟁으로 피해를 당한 사람은 1990년 12월 18일 현재 사망 36명, 행방불명 12명, 부상 384명, 구속·연행17명 등 총 449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 숫자는 추가 신청한 피해자의 심사가 완료되면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광주민중항쟁 당시 다른 지역의 반응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전남지역으로만 항쟁이 확산된 결과 훗날 광주민중항쟁이 단순히 지역감정에 의해서 일어났다는 타지역의 편견을 야기하는 결과를 빛보기도 했다. 당시 전남지역에서 발생한 항쟁들이 갖고 있는 특징적인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항쟁의 발발이 농촌 내부의 문제의식이라는 해당 지역의 사회경제적인 모순에 근거하여 촉발된 운동이라기 보다는 광주지역의 치열한 투쟁상황과 계엄군의 잔인한 학살이라는 농촌 외적 사건이 몰고 온 충격으로 야기된 측면이 강했다. 따라서 항쟁이 조직적인 농민운동으로 내재화되지 못하고, 농촌사회의 잉여노동력으로 잠재적 실업군을 형성하고 있던 청년, 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진 양상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이들 지역의 항쟁은 자신들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 못했고, 단기간에 항쟁이 마무리되어 버린다.
둘째, 이와 같이 감정적인 차원에서 일어난 시위가 가능했던 또 다른 측면은 평상시 이들의 의사표현을 통제했던 권력기구들이 무력한 상태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당시 이들 지역은 행정기관 및 경찰기구가 상급기관인 전남 도청과 도경의 마비로 명령체계가 완전히 와해된 상태에다가, 이들 경찰들이 대부분 광주지역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하여 동원된 관계로 실제 그들의 근무지역에서는 거의 무방비상태였다. 따라서 해당 지역민들이 전혀 권력기관의 통제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자유롭게 집단적인 의사표현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요인은 또한 이들 지역에서 다량의 무기가 획득되어 광주로 반입될 수 있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셋째, 시위대의 확산경로가 기본적으로 계엄군의 방어전략에 따라 좌우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계엄군의 방어전략에 따라 좌우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계엄군의 기본전략은 광주의 고립화, 그것도 전남 이외의 지역과 광주를 분리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계엄군의 주방어선은 전북과 서울로 향하는 고속도로였으며, 그 외 전남 서남해안으로 통하는 지역은 항쟁이 이미 확산된 후에야 비로소 봉쇄되기 시작했다. 이들 계엄군은 우선 전남권을 완전히 고립시킨 다음, 광주를 고립시켰고, 그런 다음에는 전남 도내에서 무장항쟁이 발발한 지역을 철저하게 장악하여 갔다.
5. 계속되는 광주민중항쟁
1)다시 타오르는 항쟁의 불길
80년 5월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거칠게 타오르던 광주민중항쟁의 불꽃은 27일 새벽 계엄군의 ‘충정작전’과 함께 쓰러져 버렸다. 그러나 그 뜨거운 불씨마저 짓밟혀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 불씨는 혹독한 시절에도 꺼지지 않고 더욱 빛을 발하면서 그날 이후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결코 꺼지지 않는 불길로 지켜주고 있다. 그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랑스러움이었으며, 오욕의 역사가 아니라 긍지의 역사였다. 광주시민들의 자랑과 긍지는 단순한 향토애나 반항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항쟁기간을 뜨겁게 살았던 시민들의 절실한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따라서 권력의 탄압이나 각종 미디어를 통한 왜곡선전에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있다. 광주시민들이 체험한 ‘광주의 진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우선 거의 모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공수부대의 야만적인 폭력에 굴하지 않고 하나가 되어 싸웠다는 점이다. 당시의 상황에서 항쟁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시민들은 한두명의 영웅적인 항쟁이 아닌, 시민 전체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그에 저항했으며, 결국은 승리하였다. 당국에 의해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지키는 길이고, 정의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그 길을 걸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항쟁의 전 기간동안 광주시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가장 인간다운 삶을 꾸려나갔다는 점이다. 광주시가 계엄군에 포위된 채 완전히 고립된 상황에서, 대중매체와 군정보요원을 통한 교란작전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광주시민들은 각자가 갖고있는 것을 서로 나누며,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면서 살았다. 먹을 것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음식을 나누어주었고, 피가 부족한 부상자에게는 피를 나누어주었으며, 일손이 필요할 때는 시민들 누구나가 달려들어 그 일을 해주었다. 행정지도부의 인사들이 의견대립으로 서로 나뉘어 갈등을 빚을 때도 일반 시민들은 하나가 되어 어려움을 이겨나갔던 것이다.
세 번째로 광주시에서 계엄군이 퇴각하고 시민군이 시내를 장악한 이후 다시 계엄군이 진주할 때까지 6일 동안 광주의 시민들은, 특히 이 지역의 민중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도덕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는 점이다. 그 기간 동안 광주시는 공식적인 치안체계가 완전히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완벽한 치안체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토록 많은 총기류 가 시민들의 수중에 있었지만, 그로 인한 불상사는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금융기관이나 금은방 등 평소 범죄자들이 노릴만한 곳에서도 이 기간 중에는 전혀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 시민들에게 공격을 받은 곳은 경찰서 세무서 등 그들을 억압하는 국가권력을 상징하는 것이거나 방송국 등 사실보도를 하지 않았던 보도 매체들이었다.
그러나 시민군과 계엄군이 싸움은 정당성과 도덕성이 아니라 물리력의 차이로 승부가 결정되었다. 외부의 지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구식 개인화기만으로 무장한 시민군이 온갖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계엄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시민군은 항쟁기간 쌓아왔던 모든 것을 무너뜨리며 패배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승리한 계엄군도 광주시민들이 마음속에 이미 뿌리깊게 잡은 자랑스러움과 긍지만은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언젠가 다시 우리들 주변에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5월 31일 계엄사령부는 이른바 ‘광주사태’에 대한 최종 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항쟁기간 동안 “민간인 114명, 군인22명, 경찰4명 등 총 170명이 사망했으며, 민간인 127명, 군인 109명, 경찰144명 등 380명이 다쳤다.”고 공식발표 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장례비와 치료비를 지불하겠다고 발표하면서 광주사태가 종결되었다고 선전포고하였다. 그러나 광주시민들 중 그 누구도 그것을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항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최초로 보여 준 것은 항쟁의 시기에 가족을 잃은 유가족이었다. 이들은 5월 31일 “5·18의거 유가족회”(회장:박찬봉)를 발족시키면서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 및 당국에 대한 유가족들의 건의 및 요구창구를 일원화하기로’ 결의했다 이어서 1982년 6월 23일에는 항쟁시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1차 발기인 모임을 갖게 되었고, 결국 그해 8월 1일에는 광주 무진교회에서 18명의 회원이 모인 가운데 「5·18부상자 무등산 침목회」(후에 ‘5·18광주의거 부상자회’로 개칭)를 발족시키고 있다. 이렇게 해서 한해가 지날 때마다 5월이 되면 그날의 항쟁을 되새기는 행사를 주도하면서 새로운 사회운동 세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편 광주 5월항쟁을 계승하려는 시민·학생들의 몸부림도 그치지 않았다. 최초의 저항은 항쟁이 진압된 지 3일째인 5월 30일 서강대학생 김의기가 광주사태의 진상을 고발하는 글을 뿌리면서 서울기독교 회관에서 투신한 것이었다. 이후 광주사태의 진상을 알리고자 하는 노력이 전국 도처에서 계속되었다. 이후 광주사태의 진상을 알리고자 하는 노력이 전국 도처에서 계속되었다. 또한 항쟁 당시 신군부를 직·간접적으로 도와주었던 미국에 대한 저항은 1980년 12월에 일어난 광주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그 첫 봉화가 올려지게 되었다. 이후 반미운동은 계속 확산되어 1982년 3월의 미문화원 방화사건, 1985년 5월의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2)1980년대의 5월 민중항쟁
1980년 5월 광주를 중심으로 전남지방에서 일어난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은 엄청난 물리력을 앞세운 군부의 진압작전으로 일단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마냥 실패한 역사로서만 기억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과거로서 오늘의 우리에게 그 교훈과 의미를 되새기도록 요구하고 있다.
먼저 광주항쟁은 한국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1980년에 이르기까지 극소수의 사회운동 진영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혈맹관계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주사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미국이 신군부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러한 인식은 급속하게 깨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1980년 광주항쟁 이후 반미운동의 고양을 가져온 원인이 되었다.
다음으로 일반민주주의의 진전을 가져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80년 5월의 광주를, 나아가1980년 봄의 민주와운동을 부정하고 들어선 제5공화국은 자신의 미약한 정당성를 강화하기 위해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체제로 일관하였다. 그때마다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이 모아진 것은 이른바 ‘5월 투쟁’이었다. 1980년 이후 해마다 5월이 되면 광주에서, 그리고 전국의 모든 대도시에서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고 억압적인 체제를 타파하기 위한 국민들의 단합된 움직임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사회에 팽배해 있던 권위주의가 어느 정도 불식되었으며, 정부도 체제유지를 위하여 어느 정도 양보하여 미진한 수준에서나마 일반민주주의의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 동안 각종 지배구조에 억눌려있던 일반 시민들에게 주인의식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광주항쟁의 진행과정에서 수습위원회를 구성하여 사태수습을 꾀하던 지역내 유지들과 시위에 직접 참가하여 항쟁을 주도하던 일반시민들 사이에는 결코 일치될 수 없는 입장의 차이가 있었다. 그 차이는 단순한 차이가 아니었으며, 사태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에서 해결책에 이르기까지 모든 점에서 전적으로 대립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1980년 이후 항쟁의 경험이 준 교훈은 일반시민들의 단합된 힘만이 스스로의 권리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3) ‘광주사태’에 대한 정부측의 입장 변화
정부가 ‘광주사태’에 대하여 최초로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은 사태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던 5월 21일이었다. 이날 계엄사령관 이희성대장이 담화문을 발표하고 처음 ‘광주사태’에 대해 기본적으로 앞의 발표와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그 내용을 정리해 보자.
정부에서는 엄청난 사태로 확대된 원인을 유언비어의 난무와 불순분자의 개입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광주사태’의 성격에서도 소수의 불순 선동분자와 철없는 난동폭도들이 주도한 폭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최악의 상황이 된 원인을 불순분자의 책동과 김대중 연계세력의 활동 때문이었다고 하면서 이러한 최악의 상황에서 계엄군은 최대한 인내하고 자제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최초의 정부측 입장은 이후 7년 간에 걸쳐 광주시민의 불만과 저항에도 불구하고 일관해서 지켜지고 있었다. 그러나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6일까지의 민주화 운동은 이러한 청부 측 입장이 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즉 당시 민주화운동의 결과 ‘6·29 선언’이 나오면서, 그와 동일한 선상에서 ‘광주사태’에 대한 입장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변화가 곧바로 광주항쟁의 정당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광주사태’에 대한 변화된 정부측 입장은 1988년 1월에 구성된 이른바 「민주화합추진위원회」의 건의를 수용하여 1988년 4월 1일에 발표한 ‘광주사태 치유방안’에 잘 나타나있다. 그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80년 5월의 상황 하에서 비상계엄의 전국적 확대는 정당했다.
②당시 광주에서 사태가 확산된 원인은 불순분자의 책동과 함께 계엄군의 과잉진압이 원인이 되
었다.
③지금까지 광주에서 사태가 문제로 남은 것은 정부측에서 부상자와 유가족에 대한 사후관리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며, 이들에 대한 물질적 보상이 중요하다.
④‘5·18’의 성격은 결과만으로 보면 ‘폭동’이라는 시각도 가능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서 ‘학생·시
민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⑤국민화합의 차원에서 전상조사나 책임자 처벌은 불필요하다.
이러한 입장변화는 그동안 ‘5·18 유괴단체’들이 주장한 내용과는 상당히 다른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즉 이들 유괴단체들은 진상조사나 책임자 처벌에 광주문제 해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의 미봉책이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위의 입장을 고수하였고, 1990년에는 그에 따른 보상절차를 모두 마쳐버렸다. 당시 보상금 지급대상자는 사망 154명, 행방불명 39명, 부상후 사망자 73명, 부상자 1,900명 기타 지원금 61명 등 모두 2,227명이었는데, 1992년까지 이중 3명을 제외한 2,224명이 1천4백24억원을 수령하여 99.8%의 지급실적을 보이고 있다. 이외에도 1993년 보상금 추가 신청시에는 사망 16명, 행방 불명자 118명, 부상자 1,478명, 연행·구속자 1,478명 등 2,750명이 보상을 신청하였다.
그러다가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러한 공식적인 입장은 크게 변화하였다. 변화된 입장의 구체적인 내용은 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 5월 13일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특별담화를 발표하면서 드러난다. 당시 대통령은 “80년 5월 광주의 유혈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됐다”며 “오늘의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있는 민주정부”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대통령의 담화는 지금까지 군과 광주시민 둘 다 옳다던 정부의 입장에서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 결과 광주민중항쟁은 이제 ‘3·1운동’ ‘4·19의거’ 등과 함께 민족사의 정통성을 잇는 역사적 사건으로 복권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이를 위해 광주시민과 온 국민이 기념할 수 있도록 광주시에서 기념일을 먼저 제정하기를 희망한다.“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의 명예회복과 기념사업을 위한 각종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는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망월동 묘역을 확장하여 민주화의 성지로 삼을 것이며, 전남도청을 이전하고, 그 자리에 공원을 조성하고 기념탑을 세우겠다고 했다. 또 현 상무대 부지중 5만 평을 광주시에 무상 분양하여 시민공원을 조성하겠다고 했다.
다음으로 대통령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 가운데 아직까지 법률적으로 보상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자진신고의 기회를 주고, 당시 연행·구금되었다가 유죄판결을 받아 사면·복권된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전과를 말소하겠다고 하였다. 이외에도 그는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지명 수배된 사람들의 지명수배를 공식적으로 해제하고 해직자의 복직 등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광주시민들이 줄기차게 요구하였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갈등을 재연하고 과거의 상처를 드러내는 일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면서 “진상규명과 관련해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이는 훗날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라고 믿는다.”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러한 부분은 과거를 용서하기 위해서도 ‘진상규명’과 그에 따른 책임자 처벌이 없는 해결책은 없다“며 대통령의 담화에 반발하고 있다.
아무튼 이러한 대통령의 담화 발표에 발맞추어 정부에서도 여러 가지 후속작업을 추진하였다. 실제 대통령의 담화가 발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5월 25일,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검거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던 598명의 전과 기록이 말소되었고, 이와 관련하여 수배를 받아오던 윤한봉 등 16명의 수배가 해제되었으며, 81명의 특별사면이 이루어졌다. 또한 광주직할시도 “5·18기념사업추진협의회”를 구성하여 추가 피해신고 보상과 함께 망월동묘역 성역화사업 및 상무대 공원조성 등 각종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5추협’은 1993년 8월 광주시가 5월 관련 기념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만든 시장의 자문기구로, 시공무원 7명, 언론계6명, 5월 단체 6명 등 각계대표 37명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이러한 기념사업의 추진방식에 대해 광주시민들과 광주지역의 5월 관련단체들은 관주도의 기념사업 추진이 역사를 왜곡시킬 위험이 있다며, 그에 반대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의 기념사업 추진이 시민들의 의사가 무시된 채 관조도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시일에 쫓기어 너무 급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 결과 시민들의 의견이 사업추진 과정에서 거의 반영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역서를 왜곡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4)항쟁을 보는 몇 가지 관점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난 이후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광주―권력에 의한 학살과 시민의 저항 및 자치권력’의 경험이 드리운 그림자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던 적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딛고 지배권력을 쌓아올렸던 세력들은 그들의 ‘원죄’로부터 한시도 자유롭지 못했다. 반면에 그때부터 과학적인 이론과 강력한 조직을 갖추고 성장하기 시작한 사회운동 진영과 진보적인 움직임은 모두 광주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부터 출발했거나, 적어도 심대한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만큼 광주민중항쟁은 한국사회의 지배의 역사에 있어서나, 변혁의 역사에 있어서나 획기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현대사의 전개과정에서 광주민중항쟁이 차지하는 위상과 그것의 성격 및 의의에 대한 본격적인 해명작업은 이제 비로소 출발점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광주민중항쟁의 성격과 의의를 보는 시각은 크게 보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세 시각은 기본적으로는 한국사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사회경제적 요소들을 반영하는 노리이면서, 현상적으로는 지역적인 자이를 반영하기도 한다. 여기서 이들 관점들이 생각하는 ‘광주사태’의 성격과 의의에 대하여 약술해 보자.
(1) ‘광주폭동상태’에서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이 입장은 ‘광주사태’에서 가해자라 할 수 있는 군부집권세력에 의해 계획적으로 조작되고 보수적인 제도언론에 의해 대량 유포된 것이다.
먼저 ‘제5공화국’ 시기에 집권세력은 이른바 ‘김대중 내란 음모설’에 근거하여 ‘광주사태’가 ‘불순분자들의 책동으로 유발된 목도들의 무장난동’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들이 주장한 ‘광주 폭동사태의 경위와 진상’은 ‘불순분자들’(북한의 고정간첩과 김대중 추종세력을 지칭함)이 “조직적이고 치밀한 배후조정과 교묘한 선동을 통하여 광주지역 시민들의 지역감정을 폭발·흥분시킴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군중심리의 폭발로 유도하여 사태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정국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했던 신군부세력이 자신들의 정치적 진출을 합리화하고, 광주에서 발생한 것과 같은 저항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고자 했던 의도에서 나온 모략선전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와같은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우리나라의 역대정권이 통치에 의해 상습적으로 동원해온 반이데올로기와 지역분할 통치수법에 다름 아닌 것이다. 결국 이러한 주장은 불과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집권세력 스스로에 의해서 부정되어 버린다.
신군부세력과 ‘5공화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었던 ‘광주폭동사태’론은 1980년대 중반에 들어오면서 그 논리적 근거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것은 광주문제에 대한 진상규명 투쟁이 거세어지고, 합법·비합법적인 경로를 통하여 각종 관련자료가 국민대중에게 광범위하게 알려지면서 그 진실이 국민적인 수준에서 공감을 얻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지배세력으로는 새로운 방어논리의 개발이 요구되었다. 이 때문에 개발된 논리가 ‘제6공화국’의 공식입장이 된 ‘광주민주화운동’론 이었다. 이에 따르면 ‘광주사태’는 더 이상 ‘불순분자의 책동이나 유언비어에 의해 유발된 폭동이 아니라 당시 전국적인 민주화운동 추세 속에서 전개된 ’광주지역 학생·시민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규정은 사태전개에 있어서 군부의 ‘과잉진압’을 인정하고 ‘광주시민의 명예를 회복시킨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종전보다 일보 진전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 같은 입장의 논리적 근거가 기본적으로 “광주시민도 정당하고 진압군도 정당하다”는 식의 양시론 혹은 쌍방책임론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2) ‘광주의거’ 또는 ‘광주시민항쟁’으로 보는 시각
이는 당시 1980년 당시 광주지역에서 이루어진 시민들의 자위적인 행위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즉 ‘광주사태’는 ‘5·17쿠테타 조치’에 대한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공수부대의 상상을 초월한 야만적인 살상행위에 대하여 광주시민들이 살기 위하여 저항한 것으로 된다. 따라서 이들은 그 명칭도 폭동 혐의가 짙게 풍기는 ‘광주사태’가 아니라 ‘광주의거’ 또는 ‘광주시민항쟁’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당시 시민들이 총기를 탈취하여 정부권력에 저항한 것에 대해 그 정당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폭력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암묵적으로 은폐하려 하거나 옳지 않은 행위로 본다. 이러한 입장은 항쟁기간 동안 ‘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었으며, 항쟁 이후에도 자유주의적 지식인·언론인·정치인들의 일반적 견해이기도 했다.
이러한 관점은 시민들이 무장봉기한 원인을 계엄군의 과잉진압에서 찾으면서, 시민들의 투쟁동기가 순수했음을 부각시킨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지난 1989년 초의 ‘광주청문회’를 통해 일반대중에게 널리 유포된 이 견해는 적어도 항쟁의 직접적인 발생배경에만 초점을 맞추어 분석한다면 상당 정도 역사적인 사실에 부합되는 논리이며, 따라서 상당히 가한 설득력을 갖고 있는 논리이다. 또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러 수많은 시민들을 살상했던 군부에게 유혈사태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 항쟁의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종전보다 진일보한 논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일반 시민들이 불법적인 권력의 남용에 대하여 저항하게 된 역사적·구조적 원인을 무시한 채, 그러한 투쟁을 발생시킨 직접적인 사건만을 핵심적인 원인으로 포착한다는 점에서 현상적인 인식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더욱이 이 견해는 민중들이 주도한 사회운동을 단지 소극적이고 자기 방어적인 대응의 측면에서만 파악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다. 즉 이들은 ‘광주사태’를 어디까지나 ‘파괴된 자유민주주의의 헌정질서의 복원운동’ 수준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입장은 ‘광주사태’ 당시부터 무장항쟁에 대해 거부감을 표시하였으며, 그 이후 항쟁의 계승이라는 차원에도 명예회복과 피해보상, 기념사업 추진 등에 주력하고 있다. 그 결과 ‘6공화국’에서 제시한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규정과 그에 따른 해결책에 별다른 거부감 없이 동의하고 있다.
(3) ‘광주민중항쟁’ 또는 ‘광주민중무장봉기’론
앞의 두 입장은 그 논리구성에서는 차이가 날지라도 ‘광주사태’를 통해 제기하는 문제수준에서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문제의 초점을 항쟁의 직접적인 발단원인 및 광주학살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책임소재 문제, 누가 옳고 그른가의 정당성의 문제로 한정한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사회운동 진영의 입장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사회운동 진영에서는 위에서 지적한 문제들이 결코 사소한 문제로 취급될 수 없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그와 함께 광주민중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계승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광주민중항쟁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단순히 도덕적·윤리적 차원에 문제를 한정시켜서는 안되며, 그럴 경우 항쟁의 발생원인과 그것의 성격에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모순구조가 희석되는 결과를 빚는다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광주민중항쟁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계급적·민족적 모순이 만들어낸 지배층과 피지매민 중간의 대립이 우리 사회가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특정 국면 속에서 민주와 독재간의 대립으로 집약되고, 이렇게 집약된 대립상태가 다른 요인들과 복합적으로 얽힌 가운데 특정 시기와 특정 장소에서 가장 날카롭고 적대적인 형태로 폭발된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광주민중항쟁은 일단 ‘군부의 거대한 무력에 맞서 싸우면서 민주주의를 쟁취코자 전개된 민중투쟁’으로서의 지위를 얻게 된다. 나아가 그것은 우리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저해하고 억압하는 국내외 세력들에 대한 확고한 인식의 틀을 세워주었으며, 그러한 세력에 대한 투쟁과 민주사회 건설의 주인으로서 민중이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고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5)광주민중항쟁의 의의
계엄군의 도청 진압작전 성공과 더불어 광주민중항쟁의 투쟁국민은 외형상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박정희대통령의 사망에 따른 권력의 진공상태를 메꾸려는 일부 정치군인들은 광주 민중들의 무장투쟁에 대한 효과적이고 무차별적인 ‘충정작전’을 계기로 권력의 실세를 장악함으로써 장차 국가기구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성립된 것이 ‘제5공화국’이다.
그러나 ‘제5공화국’의 주체들이 영원히 승리한 것은 아니며, 광주의 민중들이 영원히 패배한 것도 아니었다. 1980년을 지나면서 광주민중항쟁의 패배는 사실상 패배가 아닌 역사의 승리였으며, 당시 광주에서 죽어간 생명들은 무의미한 버림이 아닌 부활의 영웅이었음을 증명되고 있다.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좌표는 그 역사적 의의로부터 결정되고 있다. 광주민중항쟁이 갖고 있는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위에서 나열했던 관점들에 따라 다양한 입장개진이 가능하겠지만, 그간의 논의에서 대략 다음의 점들이 거론되고 있다.
첫째, 광주민중항쟁은 우리 역사에 면면에 이어져 내러온 민중항쟁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킨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지배층의 권력이 민중들의 억압할 때마다 그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항쟁이 일어남을 알 수 있다. 광주민중항쟁 역시1961년 군사쿠테타를 통하여 ‘4·19’의 민주정신을 부정하고 등장한 억압체계를 구축한 군사정권에 저항하여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 땅의 민중항쟁을 통해 표출되었던 자주·민주의 전통을 계승하고, 그것을 한층 발전시켰던 것이다.
둘째, 광주민중항쟁은 민중의 역사의 전면에 확고하게 부상시킴으로써, 그들을 민족사의 동력으로 확인할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는 의의를 갖고 있다. 그것은 1980년대 전반에 걸쳐 노동·농민·빈민·학생·종교·문화·지식인·재야 등 모든 부문에 걸쳐 민족민주운동의 역량을 압도적으로 성장시켰다. 즉 이와 같은 민족주의운동의 성장이 모두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반성과 계승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위치와 당면과제를 인식하게 되면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셋째, 서양의 역사와는 달리 그동안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는 권력에 대한 무력저항이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었다. 그러한 속에서 광주민중항쟁은 민중항쟁의 합법성을, 나아가 자위적 ‘무장투쟁’의 합법성을 처음으로 확인하였다는 의의를 갖고 있다. 최초의 권력자에 의해서 ‘무장폭도 난동’으로 굴절되었던 광주민중항쟁은 정권 차원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면서 그 합법성을 인정받았다. 갑오농민전쟁, 의병투쟁, ‘3·1운동’등도 아직 확보하지 못했던, 민중이 갖고 있는 ‘무장투쟁’의 권리를 광주민중항쟁은 계속적인 투쟁 속에서 얻어낸 것이다.
셋째, 서양의 역사와는 달리 그동안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는 권력에 대한 무력저항이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한 속에서 광주민중항쟁은 민중항쟁의 합법성을, 나아가 자위적 ‘무장투쟁’의 합법성을 처음으로 확인하였다는 의의를 갖고 있다. 최초 권력자에 의해서 ‘무장폭도의 난동’으로 굴절되었던 광주민중항쟁은 정권 차원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면서 그 합법성을 인정받았다. 갑오농민전쟁, 의병투쟁, ‘3·1운동’등도 아직 확보되지 못했던, 민중이 갖고 있는 ‘무장투쟁’의 권리를 광주민중항쟁은 계속적인 투쟁 속에서 얻어낸 것이다.
넷째, 광주민중항쟁은 억압적인 유신체제를 계승한 ‘제5공화국’의 강압적인 통치 하에서 정권의 도덕성을 부정하는 계기로 작용하여 결국 그 체계를 붕괴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시 ‘제 5공화국’은 각종 정보기구를 동원하여 강압적인 통치를 시행하였지만, 해마다 5월이 되면 광주에서 터져나오는 저항의 물결에 허덕이다가 결국 좌초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광주민중항쟁은 1980년대 전반에 걸쳐서 민족민주운동의 최전선을 담당하면서 각각의 국면을 타개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나아가 그것은 ‘제5공화국’청산문제에 대한 국민적 합의에 도달함으로써 과거의 부도덕한 정권을 청산하는 최초의 선례를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