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누방울 포퍼먼스
얀후스 동상뒤로 있는 건물은 국립박물관
틴 성당
물 탑
구청사인데 우리돈 5만원을 주고 대여를 해서 결혼식을 하네요
구시가지 골목길 입니다
곳곳에 성당이네요
카롤교 남문
사람이엄청 많습니다
카롤4세 동상
카롤교와 프라하성
프라하성
카롤교:14세기 체코의 아버지라 불리는 카를 4세(Karl IV, 1316~1387)는 프라하를 급전적으로 발전시켜 프라하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프라하의 구시가지는 팽창하여 신시가지를 개발하였으며 프라하에 최초의 대학을 세우고 아름다운 카를 교(Charles Bridge)를 블타바 강에 놓았다.
이 다리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중 하나라고 한다. 16세의 아치가 떠받치고 있는 카를 교에는 시작과 끝 부분에 탑이 있는데 원래는 다리의 통행료를 받기 위해 세운 것이지만 지금은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다리 양 옆에는 30개의 성인상들이 놓여 있는데 약 300년에 걸쳐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이 조각상들은 모두 성경에 나오거나 성인으로 칭송받는 사람들을 나타낸 것인데 유독 성 요한 네포무크 조각상이 유명하다. 그는 바츨라프 4세가 왕비 조피에의 고해성사 내용을 알려달라고 한 청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이 다리 밑으로 떨어져 죽게 되었다고 한다.
다리는 지금 보행자 전용 다리인데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들, 그리고 마리오네트 인형극을 펼치는 사람들도 있어 흥겹고도 사람의 정이 넘치는 다리이다.
30개의 성인상이 서있다
카롤교 입구 남쪽 탑
블타강을 배경으로 한장
프라하성
15번째 동상인 네포무크성인 동상
네포무크의 성 요한(라틴어: Sanctus Ioannes Nepomucenus, 1345년경 - 1393년 3월 20일) 또는 성 요한 네포무크는 체코의 국민적인 성인으로서 보헤미아 국왕이자 로마왕이었던 벤체슬라우스에 의해 블타바 강에 내던져져 익사를 당하였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성 요한은 보헤미아 왕비의 고해신부였는데, 왕비에 대한 고해성사의 내용을 밝히라는 왕의 요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순교를 당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네포무크의 요한은 고해성사의 비밀을 준수하기 위하여 목숨까지 버린 최초의 순교자이자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방을 받은 사람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으며, 또한 강물에 빠져 익사하였기 때문에 홍수 피해자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블타바 강(Vltava River)
유역면적은 2만 8,093㎢이고 보헤미아 남서부의 보헤미아 산림 지대(슈마바)를 흐르는 두 원류인 헤르나 산의 테플라 블타바 강과 스투데나블타바 강에서 시작한다. 처음에는 남동쪽으로 흐르다가 보헤미아를 가로질러 북쪽으로 흐르며 프라하에서 북쪽으로 29㎞ 떨어져 있는 멜니크에서 엘베(체크어로는 라베) 강으로 흘러든다.
프라하와 체스케부데요비체가 블타바 강 유역에 있다. 강의 중류 유역에 있는 체스케부데요비체에는 넓은 호수지역이 있다. 낚싯바늘 모양의 강의 중류와 하류에서는 물살이 빠르며 이리저리 굽이쳐 흐른다. 이 강으로 인해 형성된 여러 호수에 건설된 대형 수력발전용 댐들은 휴양시설로 이용된다. 주요지류로는 루즈니체·사자바 강(동쪽), 오타바·베로운카 강(서쪽)이 있다.
이 강은 체크의 애국자이자 작곡가인 베드르지히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이라는 제목의 6행 교향시의 부제로도 유명하다.
네포무크성인 동상에 소원을 빌려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화가들도 보이고
카롤교 북쪽 문
체코의 명물 빵인 굴뚝빵집
구시가지를 걸어 프라하성으로 갑니다
백개의 탑이있어 백탑의 도시라는 이름이 붙었다함
유럽의 대중교통 트램
구시가지
프라하성에서 바라본 프라하시내 모습
프라하성 현재는 대통령궁으로 사용
현재 대통령궁
체코 국부 마사리크 동상
마사리크:런던의 체코 슬로바키아 망명정부와 전후의 연립내각에서 외무장관을 지냈다. 토마슈 마사리크의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헝가리군에 복무했고 1919년 독립 체코슬로바키아의 외교관이 되었다.
1921년 외무장관 에드바르트 베네슈의 비서가 되기까지 워싱턴 D. C.와 런던에 주재했다. 1925~38년 영국 대사를 지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런던 망명정부의 외무장관이 되었다. 망명정부의 수석대변인으로서 전시방송을 통해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이는 1944년에 〈국민들에게 고함 Speaking to My Country〉이라는 영문판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1945년 망명정부가 프라하로 귀환한 뒤에도 외무장관에 유임되어 베네슈 대통령의 모스크바행을 수행하고 샌프란시스코 국제연합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마사리크는 소련과의 우호관계 유지를 확신하고 있었으나 소련이 미국의 유럽 부흥 원조계획인 마셜 플랜을 거부하자 실망을 금치 못했다. 1948년 2월 25일 공산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베네슈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 외무장관직에 머물렀으나 수주일 후 직무실 창문 밖으로 떨어져 의문사했다. 스스로 투신했는지 피살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체코시내 모습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