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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성배씨(盆城裵氏)의뿌리 나는 나의 뿌리에 대하여 여러 자료들을 모으기도 하고 공부도 한다. 그러나 충분한 량도, 깊이도 없어 그저 수박 겉 핥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가 더러 있다. 나의 뿌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평생 반려자로 한 집에서 같이 살고 있는 아내의 뿌리를 공부해 본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닐지 모르겠다. 하기야 관심은 가져도 자료도, 기회도 부족한 게 사실이기도 하다. 다행히 요즘은 인터넷이 세상을 바꿔놓고 있으므로 공개된 자료로나마 애들의 어머니기도 한 아내의 뿌리에 대해 알아보고 자료로 남겨둠으로써 후손들이 자랑삼아 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이 글을 쓰게 하였다. 내 처가는 분성배씨(盆城裵氏)다. 흔히 분성배씨 시조를 배현경(裵玄慶, ?~936)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배현경은 고려 개국 때 무신으로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고, 왕건을 태조에 추대함으로써 왕건이 즉위한 뒤 1등 공신으로 녹훈(錄勳)되었던 인물이다. 배현경은 당초에는 성이 없이 백옥삼(白玉衫)이란 이름만으로 궁예(弓裔)휘하에 마군장군(馬軍將軍)으로 있었으나, 궁예의 포악정치에 민심이 흉흉해지자 홍유(洪儒-의성홍씨 시조)ㆍ신숭겸(申崇謙-평산신씨 시조)ㆍ복지겸(卜智謙-옥천복씨 시조)등과 함께 왕건을 추대해 고려를 건국하고 사성(賜姓)받은 것이다. 고려 6대 성종13년(994) 태사(太師)로 추증(追贈)되어 태조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고, 조선이 개국한 뒤에는 고려왕들을 모시고 제사지낸 숭의전(崇義殿)에 배향되었으며, 평산 태백산성에 있는 태사사(太師祠)와 나주 초동사(草洞祠)* 고성의 수림서원(繡林書院)* 등에도 배향(配享)되어 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 초동사 : 무열사(武烈祠)라고도 한다. 전남 나주시 다시면 영동리에 있다. 전남도 지정기념물 57호. 조선 정조 21년(1797)무열공 배현경, 금현 배정지, 정절공 배극렴을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 (배정지는 고려시대 무신, 배극렴은 고려말 왜구를 토벌하고 조선개국을 도운 인물) * 수림서원 : 문화재자료 34호, 고성군 마암면 화산리에 있다. 배현경, 배정지, 배인경, 배명관, 배상곤, 배경 등을 모신 사당. 고종(1863~1907)때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복원됨. 분성(盆城)은 김해의 옛 지명으로 본래는 가야(伽倻-駕洛)국이었으나 신라에 병합된 법흥왕 때 금관국(金官國)으로 불리다 문무왕 때 소경(小京)이 되었으며, 경덕왕 때 김해로 고쳐졌다. 고려 태조가 부(府)로 강등시켜 임해현(臨海縣)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고려 성종 때는 금주(金州)로, 원종 때는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가 되기도 하였고 충선왕 때 다시 김해부로 고쳐지기도 했다. 조선 태종 때 도호부를 설치했고 세조 때 진(鎭)을 두기도 했으며 고종 때 군(郡)으로 승격되고, 1906년 양산군의 2개 면을 병합하기도 했다. 1981년 김해시(市)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른다. 어쨌든 분성배씨 시조를 중시조 배현경으로 아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고려 창업의 일등공신 배현경의 6세손 배원룡(元龍)이 분성배씨 시조다. 그는 고려 때 삼중대광으로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진 배사혁(斯革)의 4형제 중* 장남으로 공민왕 때 병부상서(兵部尙書)겸 도원수(都元帥)를 지냈고 분성군(盆城君)에 봉해져 분성배씨 시조가 된 것이다. (분성배씨 대동보) * 첫째 원룡이 분성, 둘째 천룡(天龍)은 성산(星山), 셋째 운룡(雲龍)은 달성(達城), 넷째 오룡(五龍)이 흥해(興海)파 시조다. 이외에도 곤산ㆍ경산ㆍ화순ㆍ함흥 등 무려 136본까지 기록한 문헌도 있으나 현존하는 배씨 본관은 10본 내외다. 그렇다면 배현경은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1985년 경제기획원 조사에 의하면 전국에는 배씨가 32만 명이 살고 있다고 되어있다. 배씨 시조는 신라개국 때 박혁거세를 임금으로 추대한 6촌장 중 한 분인 금산가리촌장(金山加利 村長)배지타(裵祗陀)이고, 배현경을 중시조(中始祖)인 것이다. 그러니까 배현경은 경주배씨 중시조인 것이다. 1985년 조사당시 분성배씨는 13,202가구 53,568명이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경주배씨 시조는 신라개국을 이끈 6촌장 중의 한 사람인 태사공(太師公)배지타(裵祗陀), 중시조는 고려개국 일등 공신 배현경, 분성배씨 시조는 배현경의 6세손 배원룡(裵元龍)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배씨 가문을 빛낸 평가 할만한 인물은 고려시대 개국공신 배현경의 후광으로 번영을 누렸으며 조선조에도 영의정1, 청백리1, 공신2, 문과급제자를 47명을 배출했다. 특히 분성배씨는 파조 배원룡이 고려조에 출장입상(出將入相-전쟁시는 장군, 평시에는 재상이 됨)한 공으로 분성군에 봉해졌고, 조선조 배명후(裵孟厚)는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 때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냈으며, 배세적(裵世積)은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벼슬은 현감에 그쳤으나 청백리에 올랐다. 배대유(裵大維)는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광해군 때 이조참의에 올랐다가 인조반정 후 대북파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삭직(削職)되기도 했으며 글씨에 능했다. 배경남(裵慶男)은 임란 때 경상도 유격장으로 당항포(堂項浦)해전에서 이순신 장군 휘하 좌별도장(左別都將)으로 출전하여 승리함으로써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그의 아들 배홍우(裵弘愚)는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 인조반정 후 현감을 지냈다. - 2005. 12. 2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