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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9.21 18:29
호수 2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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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조선일보DB
추계(秋溪) 최은희(催恩喜)는 한국 최초의 일간지 여기자이며, 3·1독립만세운동 때 여학생으로 시위에 앞장서서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이다.
“최 여사와는 도쿄 유학시절 동문수학을 하였고 8년 동안 대한부인회 일을 같이 하였다. 그는 지성인(知性人)이요, 지성인(至誠人)이다. 박학다문하고, 참대와 같이 곧은 사람이며, 부지런하고 끈질기고 열정적인 인물이다.”(박순천 전 민주당 대표)
“선생에 대한 존경은 비단 신문계의 대선배라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선생은 여성으로서 오히려 민족독립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시어 옥살이까지 하신 분으로 알고 있다. 선생의 그러한 의(義) 내지 사회정의야말로 기자정신의 척추라고 하고 싶다.”(언론인 천관우)
“최은희 여사는 3·1운동 때는 경성여고보(경기여고의 전신)의 학생으로 만세시위의 선봉에 섰으며, 왜경에 투옥되어 체형까지 받아 소위 불령선인의 요시찰인이 되었다. 그 후 우리나라 초대 여기자가 되어서는 당시 신문지상에 게재가 금지된 독립운동, 특히 여성운동의 비화들을 누구보다도 많이 탐지하고 몸소 체험하였던 것이다.”(최영희 전 국사편찬위원장)
최은희는 1904년 11월 21일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 연남리 301번지에서 탐진(耽津) 최씨 최병규와 달성(達城) 서씨 서덕경 사이의 5남5녀 중 5녀로 태어났다.
“나의 부계는 한학자로 해주에서 7대를 살았는데 3대 독자이신 내 아버님이 젊어서 내 조부님의 3년상을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경무부 판임 벼슬을 지냈다 한다.… 선친은 뜻한 바 있어 일찍이 승진길을 버리고, 팔도강산을 유람하던 끝에 낙향한 곳이 연고지 아닌 배천이었다. 지리적으로 제2고향인 해주에서 가깝기도 하려니와 풍광이 명미하고 산수가 아름다우며 비옥한 토지와 순후한 인심이 자못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최은희 전집 5’)
최은희의 부친은 배천에 토지를 많이 사고 농장을 장만하였다. 그는 평안북도 운산금광에도 손을 대 채광하는 외국인들과 대결하였다. 광산업으로 3000석지기 전답을 세 번 둘러엎고 일으켰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는 배천읍 일대에 학교 셋을 세웠다. 동흥·영명 두 학교는 나중에 합병하여 동명학교로 되고, 용덕학교는 농민교육을 하였다. 부친의 임종을 지켜본 최은희의 회고담이다.
“배천에서는 군민 일동의 명의로 연두 오복수(五福壽) 한 필에 검정 법단으로 선을 둘러 만장을 지어 연백 군수 이하 민간 유지, 전날의 학교 관계자와 문하생 등 30여명이 와서 9일장을 참례하고 그들이 반우제(返虞祭)를 치렀다. 그날 해주에 있는 인력거 42채가 총동원, 말 여덟 필, 밑가마 셋, 백가마 여덟, 해주와 인근 고을에서 모여든 수백 명의 회장자가 조기와 만장에 싸여 선영으로 모시는 영어의 뒤를 따랐다. 지금의 사회장 같다고 할 것이다.”(‘최은희 전집 5’)
최은희는 1914년 고향의 창동소학교를 졸업하고 해주의 의정여학교 고등과에 입학한다. 이곳에서는 학감 최두현, 교무주임 노선형이 특별히 총명한 몇 학생을 골라 매주 은밀한 장소에서 일제 총독부의 학정과 일본인의 악행을 가르쳐 민족혼을 앙양시켰다.
최은희는 1917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 한층 더 성숙된 동아리 활동을 한다. 박희도(3·1운동 33인의 한 분)의 지도로 20여명으로 늘어난 회원들은 매일신보에 난 가출소녀의 딱한 사정을 접하고, 인천의 사창가에 팔려간 그녀를 구출한다. 교내 모금운동과 스스로 만든 수공예품을 팔아 170원을 마련해낸 것이다.
1919년 최은희는 졸업을 앞둔 경성여고보 본과 3학년에 재학 중인 16세의 소녀였다. 당시 서울 안에 상당수의 여학교가 있었으나 3·1만세시위 대열에 단체로 참가한 여학교는 이 학교뿐이었다. 경성여고보는 전국의 재원과 문벌 있는 가정의 규수들이 모인 곳인 만큼 일찍부터 민족운동 지도자들의 관심이 각별했다. 최은희는 비밀 동아리의 중심이 되어 박희도의 지도로 독립선언문을 입수하여 만세시위에 가담한다.
“육조 앞 광장에는 벌써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파고다공원 앞문으로 나온 대열과 거리의 인파들이 홍수처럼 불어나서 합류하였다. 말을 탄 헌병과 기마 순사들은 말 머리를 이리저리 들이대서 사람들을 헤치며, 손수건을 꺼내 혈서를 쓰는 청년, 손가락을 깨물어 태극기를 그리는 청년들이 이리 번쩍 저리 번쩍 나는 듯이 공중으로 몸을 솟구쳐 올린다. 발을 구르고 몸부림을 치고 열변을 토하는 청년들도 있었다. 그 틈에서 우리 여학생들은 기고만장해서 목이 터져라 하고 독립만세를 불러댔다.”(‘최은희 전집 5’)
시위주동자로 6개월 징역 언도받아
최은희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24일 만에 풀려나나 뒤이어 고향으로 내려가 황해도 배천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동하고 해주지방법원에서 6개월의 징역을 언도받는다. 그녀는 서울에서 남학생들에게 받은 ‘동포여 일어서자’ ‘경고 아 이천만 동포(警告我二千萬同胞)’ 등의 삐라와 독립신문 등을 나눠준다. 이후 도쿄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아홉 차례 연행되었다.
1920년 최은희가 일본 유학길에 오르자 요시찰인의 붉은 딱지가 붙어 서울에서부터 도쿄역에 내릴 때까지 이동경찰이 뒤를 따랐다. 도쿄역에는 오기선 목사가 마중 나와, 그 댁으로 가서 일진영어학교 속성과에 입학한다. 그곳에서는 경성여고보 선배인 최남선의 누이동생 설경과 함께 공부한다. 최은희가 1922년 일본여자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형사가 날마다 학교 정문에서 지키고 있었다. 도쿄 유학생들은 3월 1일이면 히비야공원이나 우에노공원에 모여 독립선언 기념식을 거행하고 만세를 불렀다. 황신덕·박순천·이현경이 사회사업부 한 반에서 행동을 같이했다.
그녀는 어느 비 오는 날 하학길에 뒤쫓는 형사를 반대 방향 전철역으로 이끌어 내 스토킹꾼으로 몰아 핀잔을 주는 기지를 발휘한다. 미행 형사가 뒤쫓아와 원망 어린 하소연을 하자 ‘그런 직업을 그만두면 될 것 아니냐’고 쏘아붙인다. 그녀는 한국인을 업신여기는 도쿄 바닥에서도 한복을 즐겨 입었다. ‘조센징 조센징, 짱고라 짱고라’ 하고 아이들이 줄줄 따라다녔지만, 못 들은 체하고 걸어가면 저희들도 멋쩍어서 그대로 돌아가 버린다. 평상시 학교에는 더러움이 잘 타지 않는 일본옷을 입고 다녔지만, 교내외 특별행사나 학급에서 모임이 있을 때는 자랑스럽게 한복을 입었다.
최은희는 1924년 대학 3학년 때 여름방학을 맞아 춘원 이광수의 집을 방문한다. 그녀는 춘원의 부인 허영숙과 친했다. 산부인과 의사인 허영숙으로부터 한 부호가 진료비를 주지 않아 애를 먹고 있다는 말을 듣고 해결사를 자청했다. 그녀의 인생길이 바뀌는 순간이다. 그 사연인즉 이러하다. 몇 달 전 황금정, 지금의 롯데호텔 부근에 살던 큰 부호가 부인이 산고를 겪으니 개업의 허영숙을 청했다. 진료가 끝난 다음 허 의사는 왕진비, 조산료, 처치료, 간호부 일당 등 항목으로 합계 85원10전의 청구서를 보냈다. 그러나 이 부호는 ‘무슨 돈이 그렇게 많냐. 부당이득이니까 그대로는 못 보내겠다. 회계를 다시 뽑아가지고 오너라.’ 사뭇 명령조였다.
떼먹은 돈 받아낼 만큼 배짱 두둑
이튿날 아침 최은희는 이 부호의 집으로 달려갔다. 주인이 출타 중이라는 말을 들은 그녀는 마루에 돗자리를 펴고 드러누워서는 냉면을 배달시켜 먹고 낮잠을 잤다. 오후에 돌아온 주인은 ‘엉뚱한 돈’이라며 딴전을 피웠다. 최은희가 꿈쩍않고 버티자 타협을 시도하던 주인은 50원에서 60원, 70원, 80원까지 올리다가 그녀가 ‘종일 이 집에서 치마에 묻힌 먼지는 털고 갈망정 단돈 10원도 깎아드리지는 못하겠소’ 하자 결국 제값을 다 주고 말았다.
이때 조선일보는 ‘부인 기자’를 구하고 있었다. 당시는 기혼, 미혼 상관없이 여기자를 모두 부인 기자라고 불렀다. 이광수는 편집고문 이상협에게 최은희를 추천하면서 진료비를 받아낸 일화를 들려 주고 “그만한 배짱과 수완이면 넉넉하지 않겠느냐” 하며 “문장은 내 아내와 편지 왕래하는 것을 보니까 신문기사 쓰기에는 넘치는 정도”라고 했다. 편집국장 민태원도 “나도 도쿄에서 그 아가씨를 보았는데 활발하고 붙임성이 있어 구실을 할 것 같다”고 말해 최은희는 조선일보 여기자로 발탁된다. 추계란 아호도 춘원이 지어 주었다. 허영숙의 아호 춘계와 맞춘 것이다.
1924년 10월 최은희는 대학 졸업장을 포기하고 조선일보에 입사했고 곧 스타 기자로 각광을 받는다. 이름과 얼굴을 알리게 된 계기는 ‘변장 탐방’ 출동이었다. 그녀가 출동하던 날 조선일보는 “이번에는 특별히 부인 기자가 신출귀몰한 변장으로 대담히 출동하기로 하였습니다” 하고 독자의 흥미를 유도했다. 이날 아침 수표동 조선일보 사옥 앞은 그녀의 얼굴을 미리 보아 두기 위해 몰려든 남자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최은희는 ‘땟국물이 시커먼’ 행랑어멈의 옷을 빌려 입고 서대문으로 출동했다. 한 살배기 아기를 들쳐업고 무청까지 한아름 안은 채였다. 그는 무교동, 광화문, 청진동, 종로 등을 거쳐 끝까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신문사로 돌아왔다. 신문사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사람들은 ‘설마 저렇게 차렸을 줄이야 누가 알았담’ ‘나도 어린애 업은 사람을 퍽 주의해서 보았지만 저렇게 반 거지 같은 사람은 안 보았지’라며 탄식했다.”(‘조선일보 사람들’ 조선일보 사료연구실)
최은희가 조선일보에 입사한 지 1개월쯤 후 동아일보에서는 허정숙(허헌 변호사의 딸, 소설가 허근욱의 언니)을 여기자로 채용하였다. 그 뒤에 허영숙(이광수 부인)·이현경(일본여대 출신)·최의순(동경여고사범 출신)이 있었고, 황신덕은 시대일보 기자를 거쳐 동아일보 자매지 신가정 잡지기자로 있었으며, 매일신보에는 김명순(김동인의 소설 ‘김연실전’의 실제 주인공)이 있었다.
기생들까지 팬으로 만들어
어머니 이야기를 하고 있는 최은희씨 장남 이달순씨(왼쪽)와 손자 근중씨.
최은희는 전파에 목소리를 넣어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인이 되기도 한다. 1924년 12월 17일부터 3일간 조선일보 주최 독자를 위한 무선전화 시험 공개방송을 할 때 아나운서로 나서 “지금부터 독자 여러분이 고대하시던 조선일보사 주최 무선전화 공개방송 시험이 시작되겠습니다”고 말했다. 그녀가 하는 일은 거의 여성 최초의 기록이었다. 1925년 7월 대구에서 열린 남조선 여자정구대회에서는 여성 최초로 시구를 했다. 이해 12월에는 조선일보 비행사 신용인(신용욱의 개명 전 이름)의 비행기에 동승한 뒤 5회에 걸쳐 탑승기를 썼다.
1925년 7월 한강 유역에서 대홍수가 발생하자 최은희는 조선여자청년회·경성여자기독교청년회·조선여성동우회 등의 회원들을 중심으로 구호반을 조직하고 자동차에 ‘조선일보 부인구호반’이라는 깃발을 꽂았다. 그녀는 기생들까지도 구호반원으로 동원하는 수완을 발휘한다.
기생들은 자기들 부류 이외의 젊은 여성은 적대시하기 마련이다. 이런 사실을 안 최은희는 술자리에서 역으로 기생들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이에 감복한 기생들은 그후부터 아예 최은희의 편이 되어 최은희가 구호활동을 벌일 때 발 벗고 나섰다. 그들은 권번 기생 40여명에게서 돈을 걷어 조선일보 왕십리 구호소에 수용된 이재민 1500여명에게 자기들이 친히 쌀밥과 고깃국을 끓여 대접하였다.
최은희는 6·10만세운동 직전에는 검찰이 벌인 대대적인 검거 선풍을 특종보도해 ‘신문계의 패왕’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한다. 최은희는 인사동 조선극장에서 4대 일간지 사회부 기자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밤 늦게 나오다 빗길에서 자동차에 타고 있는 종로경찰서 고등계 주임 미와 경부를 발견한다. 그러자 얼른 다른 기자들을 따돌리고 미와 경부를 추적하여 종로경찰서로 들어가 취조실에서 낯익은 얼굴들과 접하게 된다.
“개벽사의 김기전·차상찬·방정환·박달성씨 등을 각각 분리하여 배치한 방 속을 둘러보고, 즉시 거리로 나와 인력거를 잡아 타고 편집국장 민태원씨 댁으로 달려갔다. 대문을 두들겨서 그분을 깨워가지고 자초지종의 전말을 보고하였다. 그는 사회부장, 종로서 출입기자, 공무국 각급 책임자, 배달부까지 숙직사원에게 전화로 집결시켜 놓게 하고, 필자와 함께 인력거로 신문사에 들어갔다. 쥐도 새도 모르게 이 사건을 탐지하여 6월 7일 오전 2시 호외의 요령을 흔든 것은 조선일보 하나뿐이었다.”(‘최은희 전집 5’)
조선일보 최초 여기자로 “각사 역대 여기자 중 제일 활동을 많이 하고 제일 성적을 많이 낸 분”으로 “그의 재필(才筆)과 활완(活腕), 건각(健脚)은 여간한 남자 기자로는 앙망(仰望)도 못할 것”(‘개벽’ 1935년 3월)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녀에게는 적극적이고 당찬 성격 때문에 ‘말괄량이’ 혹은 ‘수염 난 여자’ 등의 별명이 붙었다. 남자 기자도 취재하기 힘든 매음굴·거지굴 등을 누비고 다녔다.
최은희는 “당시 여기자는 명물 중의 명물이었다”면서 “아무리 경비가 삼엄한 곳이라도 무사 통과되었으며 외국 영사관이나 구 황실, 옛날 중신들의 가정에서 연회가 있어 사장에게 초청장을 보낼 때에는 부인 기자에게도 반드시 초청장이 왔다”며 “무관의 제왕 노릇을 톡톡히 했다”고 술회했다. 1927년 2월 15일 민족의 단일단체인 신간회가 탄생하자, 최은희는 차마리아·김활란·유각경·황신덕 등과 함께 자매단체인 근우회를 결성한다.
매년 ‘최은희 여기자상’ 시상
최은희는 1930년 7월 7일 미창(米倉) 이석영(李錫泳)과 결혼한다. 이석영은 일본대학 법과 출신으로 법원에 근무하였다. 최은희는 결혼 후 신문사를 그만두고 집안 살림에 전념하다가 광복 후에는 여권실천운동자클럽대표가 되어 최초의 관립학교 여교장을 탄생시키는 주역이 된다. 1952년에는 대한부인회 활동으로 ‘어머니날’을 제정케 한다. 1968년에는 3·1운동 여성참가자봉사회장이 되어 서울 동작동에 3·1공원을 건립한다.
최은희는 다섯 권짜리 한국여성개화열전을 남기고 1984년 8월 16일 서울 방배동 삼호아파트 자택에서 별세, 대전 국립묘지 독립유공자묘역에 안장된다. 최은희는 투병 중이던 1984년 5월 5000만원을 조선일보에 기탁했다. 조선일보는 그 기탁금을 바탕으로 ‘최은희 여기자상’을 제정하여 1984년부터 매년 시상하고 있다.
최은희는 이석영과의 사이에 3남매를 두었다. 장남 이달순(75·중앙대 정치외교학 박사, 수원대 총장 역임)씨는 최민자(별세·숙명여대 경영학과 졸업)씨와 결혼하여 3남매를 두었다. 장남 근백(47·중앙대 정치학 석사)씨는 정향국(43·국민대 실내디자인 대학원 수료)씨와 결혼하였으며, 정씨가 대표직을 맡고 있는 ㈜공간추계가 최근 조선일보박물관 건립 실내디자인 공모에 당선됐다. 차남 근중(46)씨는 영국 런던대 경제학 박사이며, 딸 근주(44·중앙대 미대 졸업)씨는 수원과학대 경영학과 교수인 김선철(49·고려대 경영학 박사)씨와 결혼했다. 최은희의 장녀 이미순(73·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대학원 졸업, 미국 코넬대 농학 박사)씨는 덕성여대 식품영양학과 명예교수로 김의훈(79·한양대 물리학과 명예교수)씨와 결혼하여 3남매를 두었다. 아들 김형우(34)씨는 영국 런던대 고고학 석사이며, 장녀 보연(39)씨는 미국 새크레드 하트대학 문학사, 차녀 수연(37)씨는 영국 에섹스대학 고고학 석사이다. 최은희의 차녀 혜순(69·서울대 국문학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대 문학 석사, 대만사범대 중국문학 박사)씨는 이화여대 국문학과 명예교수로, 고려대 농학과 명예교수인 김문진(79·서울대 화학교육과 졸업, 독일 기센대 농학박사)씨와 결혼하여 자매를 두었다. 장녀 명혜(36)씨는 영국 브리스톨대학에서 박사과정(영화 전공)을 이수 중이며, 차녀 명수(35·고려대 사회학 박사)씨는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이다.
내가 본 추계 최은희 김후란 시인·전 언론인 나는 서울신문 기자 시절 선생님을 자택으로 가서 찾아 뵙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낡은 커튼을 한쪽으로 밀어 놓고, 작은 마당이 내다보이는 마루에서 소반 위에 원고지를 놓고 글 쓰시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선생님은 한국의 전형적 어머니상으로 꼿꼿한 자세로 앉아 회고담을 들려 주었다. 한번은 기생들을 양성하는 권번의 실상을 취재하기 위해 기생 지망생처럼 차려 입고 잠입하여 남성 기자가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는 회고담을 하시면서 파안대소했다. 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프로펠러 항공기로 서울 상공을 도는 이벤트를 할 때 남자 기자들이 서로 나섰는데 이들을 물리치고 유일한 여기자로 비행 취재기자로 낙착되어 서울 상공을 비행했던 용감한 취재 체험담도 들려 주었다. 최은희 선생님은 선구적인 기자생활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도 투신하셨던 애국지사이다. 참으로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운 역사의 산증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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