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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30일 서울 시내 한 치킨집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CEO(오른쪽)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왼쪽),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가운데)에게 일본 위스키 ‘하쿠슈 25년’을 선물했다. /사진=공동취재단
4인용 테이블 위에 초록빛 병이 놓여 있습니다. 모양을 보니 소주는 아닙니다. 지난 10월 30일 저녁, 서울 강남구 삼성역 인근 깐부치킨. 엔비디아 CEO 젠슨 황,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 현대자동차 정의선 회장이 앉은 그 테이블에서 젠슨 황이 선물을 꺼내놨습니다. 자신의 회사에서 출시한 소형 AI PC인 ‘DGX 시스템’ 박스, 그리고 ‘하쿠슈 25년’이었습니다. 초록색 박스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의 협력, 그리고 세상의 미래를 위하여(To our partnership and the future of the world).”
사진기자 김지호가 전하는 위스키의 기록. 사람과 문화, 그리고 취향의 향기를 담았습니다. 조선멤버십 전용 기사입니다. 멤버에게는 더 많은 혜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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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만계 미국인입니다. 위스키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대만 ‘카발란’ 위스키가 떠오를 겁니다. 하지만 그의 손에 들린 건 일본 위스키 하쿠슈. 지난 9월에 다녀온 하쿠슈 증류소가 떠올랐습니다. 그곳을 한 번이라도 다녀온 사람이라면, 그의 선택에 고개를 끄덕였을 겁니다.
산 기슭에 숨겨진 증류소
도쿄에서 서쪽으로 약 두 시간 반. JR 주오선을 타고 고부치자와역에서 내립니다. 역 앞에는 작은 택시 정류장이 있고, 그곳에서 10분쯤 달리면 하쿠슈 증류소 입구가 나옵니다. 차가 산 쪽으로 오를수록 풍경이 점점 녹색으로 물듭니다. 창문을 내리면 상쾌한 나무 냄새가 차 안으로 스며듭니다.
하쿠슈 증류소는 야마나시현 호쿠토시, 일본 남알프스 북쪽 가이코마가타케 산기슭에 있습니다. 해발 약 700m. 이곳은 예로부터 맑은 물로 유명한 지역이라 화강암층을 통과한 지하수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부드럽고 깨끗한 연수(軟水), 이 물이 하쿠슈 특유의 시원하고 투명한 풍미를 만듭니다.
웰컴 하우스를 지나면 곧바로 숲이 시작됩니다. 입구에는 야생 조류를 보호하는 ‘버드 생추어리(Bird Sanctuary)’ 표지판이 서 있습니다. 실제로 새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이 일대는 미나미 알프스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안에 속해 있습니다. 증류소로 향하는 길은 나무 데크로 견고하게 만든 산책로. 양옆으로 빽빽하게 들어선 숲을 거닐다 보면 마치 원시림 가장자리를 걷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약 10분 남짓 걸었을까, 증류소의 파고다 지붕이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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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쿠슈 증류소의 증류동. 초류와 이차 증류에 쓰는 여러 형태의 구리 증류기가 나란히 서 있다. 증류기 모양에 따라 향과 맛이 달라진다. /사진=김지호 기자
숲의 기운이 만든 마법의 술
산토리 2대 회장 게이조 사지는 야마자키 설립 이후, 전혀 다른 환경의 증류소를 구상했습니다. 따뜻하고 습한 교토의 야마자키와 달리, 하쿠슈는 시원한 산속 공기와 청정한 물을 품은 숲의 증류소로 설계됐습니다. 산토리는 하쿠슈를 “산의 공기를 닮은 위스키”라고 설명합니다.
하쿠슈 투어는 ‘위스키가 만들어지는 길’을 따라 걷는 경험입니다. 먼저 당화와 발효 공정. 발효조실에 들어서면 따뜻한 단내와 빵 반죽, 맥아 향이 올라옵니다. 발효조(워시백)는 소나무과 침엽수인 ‘더글러스 퍼(Douglas Fir)’로 만들어졌습니다. 일반 스테인리스 발효조보다 온기를 오래 품어, 찬 산 공기 속에서도 발효가 안정적으로 이어집니다. 약 3일 동안 효모가 당을 알코올로 바꾸며 보글보글 천천히 숨을 쉽니다. 나무로 만든 발효조 안에서 미지근한 온기가 느껴지고, 단내가 은근하게 퍼집니다. 코를 너무 가까이 대면 알코올 증기가 독하게 올라오니, 약간 거리를 두고 맡는 편이 좋습니다.
증류동에 들어서면 구리 증류기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각기 다른 높이와 형태가 눈에 들어옵니다. 목이 긴 증류기는 가벼운 향을, 짧고 통통한 증류기는 묵직한 질감을 남깁니다. 리플럭스 볼의 크기와 곡선에 따라 증기가 되돌아오는 양과 속도도 달라집니다. 같은 원료라도 증류기 형태에 따라 전혀 다른 개성의 원액이 만들어집니다. 하쿠슈는 이런 다양한 증류기를 운용해, 한 증류소 안에서 가벼운 풍미부터 스모키한 원액까지 폭넓은 스타일을 뽑아 냅니다. 맑지만 복합적인 ‘하쿠슈의 맛’이 이러한 설계에서 비롯됩니다.
숙성고에 들어서면 공기가 서늘해집니다. 스코틀랜드의 낮은 더니지 창고와 달리, 하쿠슈는 철제 랙 위에 오크통을 층층이 쌓는 구조입니다. 지진이 잦은 일본의 환경을 고려한 설계이지요. 해발 700m의 일정한 온도와 습도 덕분에, 매년 전체 원액의 2~3%가 ‘천사의 몫(Angel’s share)’으로 증발합니다. 야마자키보다 숙성 속도가 완만하고, 스코틀랜드와 비슷한 템포로 느리지만 안정적인 숙성이 이루어집니다.
투어의 마지막은 시음입니다. 하쿠슈 12년을 구성하는 세 가지 원액을 차례로 맛봅니다. 피트를 거의 쓰지 않은 원액, 약간 가미한 원액, 그리고 훈연 향이 짙은 원액. 세 잔 색은 거의 같지만 풍미는 완전히 다릅니다.
피트를 넣은 원액은 솔잎을 태운 듯한 향이 납니다. 그 연기가 걷히면 달콤한 과일 향이 남습니다. 피트를 쓰지 않은 원액은 산뜻하고 달콤한 과일의 느낌을 표현하는 듯합니다.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지만, 증류기와 발효의 차이가 서로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 셈이죠.
하쿠슈는 공통적으로 녹색 계열의 허브나 솔잎 같은 인상을 줍니다. 코끝에 닿는 첫인상은 시원하고, 뒤로 갈수록 은은한 단맛이 남습니다. 스코틀랜드 아일라의 피트가 불이라면, 하쿠슈의 피트는 숲속 안개에 가깝습니다. 강하지 않지만 오래 남습니다.
하쿠슈 25년 한 잔 시음해보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시음 코너에서는 히비키 30년, 야마자키 25년, 하쿠슈 25년을 각각 20ml에 4000엔 정도로 맛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하쿠슈 25년 한 잔(30ml)에 2만2000엔. 그간 네 배가 넘게 오른 셈입니다. 그래도 증류소가 아니면 맛볼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하쿠슈 25년은 짙은 과일에 발사믹을 살짝 뿌려 훈제한 듯한 향이 납니다. 짙은 과일 계열의 달콤함과 허브, 얌전하게 다듬어진 훈제 향이 입안에서 어우러지며 여운이 길게 남습니다. 솔잎을 가볍게 태운 듯한 피트 향이 지나가면 셰리 캐스크 특유의 단맛이 진득하게 깔립니다.
개인적으로는 25년보다 18년이 더 좋았습니다. 25년은 향이 농축돼 하쿠슈 특유의 맑은 느낌이 살짝 눌린 인상이고, 18년은 허브와 솔잎, 피트의 윤곽이 뚜렷합니다. 하쿠슈라는 이름의 색이 가장 잘 드러나는 술이었습니다. 하쿠슈 18년은 일본에서도 귀합니다. 나리타 공항 면세점에서 운이 좋아야 5만5000엔 안팎에 겨우 구할까 말까입니다.
기념품 매장에는 180mL짜리 ‘하쿠슈 디스틸러리 익스클루시브(48%)’ 미니 보틀이 있습니다. 유료 투어를 마친 사람은 12년을 정가(약 1만6000엔)에 1인 1병 살 수 있습니다. 일본 시중에서는 2만엔 초·중반, 국내에서는 30만원이 넘습니다. 이곳에서 정가로 산다는 건 일종의 특권처럼 느껴집니다.
하쿠슈 디스틸러스 리저브(DR)는 늘 매대에 있는 편입니다. 가장 많이 팔리고,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술. 하쿠슈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출발점입니다. 하이볼로 마셔도, 니트(neat)로 마셔도 청량한 숲의 느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죠.
젠슨 황이 하쿠슈를 선택한 이유를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기계가 세상을 바꾸는 시대에도, 위스키만큼은 여전히 자연이 만든 시간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날 치킨집 테이블 위에 올려진 하쿠슈 25년은, 그런 시간을 함께 나누자는 제안처럼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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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쿠슈 25년. /The House of Sun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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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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