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 그 이름으로
누가복음 23장 34절, 요나서 3장 10절 - 4장 4절
2004년 3월 28일 사순절 다섯째 주일
이 시간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몇 년전 일로 기억합니다. 한 아주머니가 서울 전동 철거촌 망루위에서 죽임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철거 용역직원이 망루 밑에 쌓아둔 타이어를 태워 유독가스에 그만 질식한 것이지요. 그러나 언론에서도, 어느 곳에서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으며, 보상은 커녕 시신조차도 경찰에게 빼앗긴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일어났지요. 늦게까지 현장과 집회에 참여한 뒤에 저는 제 보금자리로 돌아와서는 이 날을 돌아보게 되었지요.
그 때 제 마음깊이 찾아온 분노는 철 들고 맞이한 손님이어서 그런지 강한 느낌으로 제 뇌리에 남게 되었습니다. 저는 본디 약한 것을 대변하려는 오지랖 넓은 성격유형을 가졌고, 정의를 외치는 아주 정열적인(?) 사람형입니다. 약한 것을 억압하는 것을 보면 화가 생기고 분에 넘쳐 스스로 주체를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이런 사건을 만나며 남들보다 그 이상으로 흥분을 하게 됩니다.
아무튼 그 때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는데, 바로 요나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요나신드롬! 말씀을 드리자면 우리가 방금 읽은 대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를 하게 되지요. 회개를 했음에게 회개를 선포한 요나는 그것이 못마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에게 심판을 거두고 용서를 했음에도 요나는 그들이 멸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죄를 지은 그들이 처절한 심판과 저주를 당하는 모습을 끝가지 바라는 요나의 모습. 이것은 요나 개인의 모습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지닌 본성과 같은 것이라고, 또 지금 이 순간에도 이런 요나의 모습은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요나신드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저는 고백할 수는 없지만, 억압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의 심판과 저주는 꼭 지켜보고 싶은 것은 저의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들이 잘못을 뉘우쳤다해도, 이미 요나처럼 이들을 믿지 않았을 겁니다. 그 착하디 착한 아주머니가 무슨 죄가 있어 망루에서 유독가스로 죽어야 했단 말입니까. 그 뒤 그들의 심판도 볼 수 없었고, 나의 분노도 다른 분노로 바뀌어가고, 망각의 강은 그 때 그 시간을 데리고 가버렸지요.
다시 펼쳐든 요나서를 읽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금 듣습니다.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4절, 9절)
요나는 대답합니다.
"옳다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9절)"
여전히 저는 요나처럼 고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 요나서 핵심은 요나의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입니다. 당신 만든 것을 보듬고 아끼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화가 나서 죽겠다고 화를 그치지 못하는 요나는 충분히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억압한 정의로운 의롭고 공의로운 분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이웃에게 지니는 분노, 내가 믿었던 사람에 대한 분노, 열등감에 가득한 자존감이 약한 자신에 대한 분노, 별 것 아닌 것에 대한 사사로운 분노, 배신과 미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기 싫어하는 두려움... 이런 분노를 자칫 모든 그르치게 할 수 있습니다.
요나처럼 박을 주면 주는대로 좋다가 벌레가 먹어 박이 사라지면 사라진 대로 불평하고 짜증내고 화가 나 죽겠다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도 그럴 지도 모릅니다. 좋은 것이 주어지면 헤헤헤 그리다가 조금 어려운 것이 주어지면, 불평하고 짜증내고 화를 내는 것은 비단 요나뿐이겠습니까. 정말 무서운 것은 하나님이 용서하고, 하나님이 만든 것을 아끼고 보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자기에게 맞지 않다면 하나님이고 뭐고 없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요나같은 우리 인생은 참으로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꼭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너나 나나 할 것이 없이 우리가 모두가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저는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큰 위로가 되며, 기쁨이 됩니다. 참 예수님 잘 믿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 지를 알지 못합니다."(누가복음 23:34)
조롱하는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두 번 아니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내려도 시원하지 않을 권력자들과 기득권들자들 두고 하시는 말씀 좀 보십시오. 분노로 가득 차, 화가 가득 차 정말 앞을 보지 못하고 무슨 일을 하는 지를 알지 못하는 그들을 위해 용서를 구합니다. 이게 예수님이 이루신 하늘의 뜻입니다. 분노로, 미움으로 화가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 인간과 하나님의 사이를, 또 인간과 인간 사이를, 또 인간과 자연사이를 이을 수 있는 한가지! 자비를 통한 세상입니다.
이 말씀을 저는 다시금 곱씹어봅니다. 예수님은 이 순간 우리를 위해 기도합니다.
"아버지. 저 oo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oo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 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 자비가 있기에 우리는 구원의 길, 참 도를 그 분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나의 분노로 인해 깨어지고 상처받은 모든 관계, 나의 분노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그르친 나의 부족함, 나의 분노로 인해 곪아버린 나의 내면과 건강.. 이러한 나에게 자비로 다가와 나의 손을 잡고 있는 그대로 영혼의 눈이 어두워, 영혼의 힘이 부족해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살아가는지를 모를 때도 용서와 자비로 나를 감싸주시는 그 분이 우리의 주인이며, 친구이며, 스승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저같은 사람은 참 예수님 잘 믿었다 싶어요. 참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길 위의 사랑은 우리에게 참 그만입니다.
자비. 그 이름으로.
그 이름으로 나를 행복의 길로, 하늘의 뜻을 행하는 길로, 구원의 길, 희망의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에게 참으로 감사, 감사드립니다.
끝없은, 자비, 그 이름으로 나에게 우리에게 매순간 찾아오는 그 은총을 잘 누리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이 이 봄, 사순절 다섯째 주일을 살아가는데 큰 힘과 위로가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