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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판관공파보 전의록 |
1931년 순흥보 소원전의록 |
1957년 서파공파 파보 전의록(傳疑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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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전의록 |
현재 순흥 2파 소원전의록 |
현재 순흥 1파 전의록 |
藍浦安廷晉譜牒曰 李瑗 中原人 唐元和二年丁亥 東入 江原道 松嶽山下 有三子 長枝春 仲葉春 季花春 新羅景文王四年 甲申倭亂 三兄弟 以平亂功 賜姓安氏 仍改名 邦俊封竹山 邦傑封廣州 邦俠封竹城 邦傑官大將軍云云 |
竹山安氏同源譜云 有諱李瑗(一諱琬) 中國隴西人 唐憲宗元和二年 (新羅哀莊王七年) 丁亥 入我東 居松嶽山下 有子三人 長枝春 仲葉春 季花春 新羅景文王三年 甲申外亂 兄弟三人 俱有平亂功 王以爲安國之臣 賜姓安氏 因更名 曰邦俊竹山君 曰邦傑廣州君 曰邦俠竹城君 東方有安氏 自此始焉 |
竹山安氏同源譜云 有諱李瓊(一諱琬) 中國隴西人 唐憲宗元和二年(新羅哀莊王七年) 丁亥 與其弟璜 入我東 居松嶽山下 時有廣州人 殺其主以叛 安瓊兄弟 挺身安國 瓊安國 故賜姓安氏 弟璜 以本姓移封固城 安瓊有子三人 長枝春 仲葉春 季花春 新羅景文王三年 甲申外亂 兄弟三人俱有平亂功 王以爲安國之臣 因更名 曰邦俊封竹山君 曰邦傑封廣州君 曰邦俠封竹城君 東方有安氏 自此始焉 |
남포(藍浦) 안정진(安廷晉)의 보첩에 이르기를 중국인 이원(李瑗)이 당(唐) 원화(元和) 2년 정해(丁亥, 807년)에 동으로 와서 강원도 송악산(松嶽山) 아래에 살았는데, 아들 셋이 있어 장남은 지춘(枝春), 차남은 엽춘(葉春) 막내가 화춘(花春)이었다. 신라 경문왕 4년 갑신왜란(864년) 때에 3형제가 난을 평정한 공으로 안씨를 사성(賜姓)받고, 이름을 고쳐 방준(俊封)은 죽산(竹山), 방걸(邦傑)은 광주(廣州), 방협(邦俠) 죽성(竹城)에 봉군되었다. 방걸(邦傑)의 관직은 대장군(大將軍) 이며.. 운운(云云) 하였다. |
죽산안씨 동원보에 이르기를, “휘(諱) 이원(李瑗 一諱는 琬)은 중국 농서 사람이다. 당 헌종 원화 2 년(신라 애장왕 7) 정해년(807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송악산 아래에 거주하였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지춘(枝春)이요, 차자는 엽춘(葉春)이요, 막내는 화춘(花春)이었다. 신라 경문왕 3 년인 갑신년(864년)에 외란이 있었는데, 형제 세 사람이 모두 난리를 평정한 공로가 있었다. 왕은 나라를 편안히 한 신하라 하여 안씨(安氏)를 사성(賜姓)하고, 이름을 고쳐 지춘은 방준(邦俊)이라 하고 죽산군(竹山君)에 봉했으며, 엽춘은 방걸(邦傑)이라 하고 광주군(廣州君)으로 봉하였으며, 화춘은 방협(邦俠)이라 하고 죽성군(竹城君)에 봉하였는바, 우리나라에 안씨가 있게 된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였다. |
죽산안씨 동원보에 이르기를, “휘(諱) 이경(李瓊 一諱는 琬)은 중국 농서 사람이다. 당 헌종 원화 2 년(신라 애장왕 7) 정해년(807년)에 그 아우 황(璜)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와 송악산 아래에 거주하였다. 이때 광주 사람이 그 임금을 죽이고 배반하자, 이경 형제는 분발하여 나라를 편안히 하였다. 형 경은 나라를 편안히 하였다 하여 안씨 성을 하사하였으며, 아우 황은 그대로 본성을 갖고 고성(固城)에 옮겨 봉해졌다. 안경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지춘(枝春)이요, 차자는 엽춘(葉春)이요, 막내는 화춘(花春)이었다. 신라 경문왕 3 년인 갑신년(864년)에 외란이 있었는데, 형제 세 사람이 모두 난리를 평정한 공로가 있었다. 왕은 나라를 편안히 한 신하라 하여 이름을 고쳐 방준(邦俊)이라 하고 죽산군(竹山君)에 봉했으며, 엽춘은 방걸(邦傑)이라 하고 광주군(廣州君)으로 봉하였으며, 화춘은 방협(邦俠)이라 하고 죽성군(竹城君)에 봉하였는바, 우리나라에 안씨가 있게 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하였다. |
정확한 연대:
정해년 애장왕 8년 (당 헌종 원화 2년, 807년)
갑신년 경문왕 4년 (당 의종 함통 5년, 864년)
1931년 전의록은 죽산안씨동원보 기록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내용이 거의 유사하므로 출처를 이런 말이 나오는 대표적 문헌인 죽산안씨동원보로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1957년 전의록은 죽산안씨동원보에 없는 내용을 많이 추가했으므로 출처를 달리해야 할 것이나, 1931년 전의록의 출처 기록을 그대로 둔 것으로 보인다. 1957년 전의록과 같은 내용의 더 오래된 죽산안씨동원보가 따로 있다는 주장은 근거없다. 설사 그런 것이 있다해도 찾아내서 확인시켜주어야할 의무는 이를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죽산안씨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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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에 간행된 철성이씨 백세이감(鐵城李氏 百世彝鑑)은 시조 이황(李璜)을 안씨 시조라는 신라말 807년 동래한 이원(李瑗, 또는 李瓊)의 동생이라고 한 유일한 고성이씨 측 기록이다. 이런 설이 최초로 나타나는 안씨 측 기록인 1957년 간행《순흥안씨서파공파보》전의록(傳疑錄)을 참고한 듯 하다. 흔히들 말하는 순흥안씨 추원록(追遠錄, 1658)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이원(李瑗) 동래설은 안씨들 어느 문중에도 전해오지 않았던 것이며 1700년대 말부터 누군가가 지어내서 퍼뜨린 설이다. 이황이 이원의 동생이란 설은 이름 글자가 같은 구슬 옥 변인 것에 착안하여 후대의 호사가가 지어낸 설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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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순흥안씨 홈페이지에는 위 사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속설에, "안씨(安氏)의 초조(初祖) 안원(安援)은 본래 당(唐)나라 종실(宗室)인 농서이씨(농西李氏)였는데, 서기807년(당나라,헌종2, 신라,애장왕8)에 신라(新羅)로 건너와 개성(開城) 송악산(松岳山) 아래에 정착(定着)해 살았다. 그 후 경문왕(景文王) 때 와서 갑신란(甲申亂)이 일어나자 지춘(枝春)·엽춘(葉春)·화춘(花春) 아들 삼형제(三兄弟)가 난(亂)을 평정한 공(功)으로 安자로 (賜姓)하였다. 맏이 지춘( 枝春)은 방준(邦俊)으로 개명(改命)되어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고, 둘째 엽춘(葉春)은 방걸(邦傑)로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으며, 세째 화춘(花春)은 방협(邦俠)으로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다. 순흥안씨는 광주군(廣州君) 안방걸(安邦傑)의 후손으로, 광주안씨(廣州安氏)에서 분적(分籍)하였다." 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정확한 근거가 없어 현재 순흥안씨대종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역사인물에 대한 신상정보를 종합적으로 연구 관리하고 있는 국가연구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http://people.aks.ac.kr)에서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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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안씨들은 1999년 대동보에서 순흥 전의록을 따라 고성이씨 시조를 이원의 동생이라고 끌어들이면서도 고성이씨 족보의 시조 기록은 단 한번도 확인하지 않고,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죽산안씨대동보(1999)의 안씨동원보(安氏同源譜) 권1. 11~20쪽
1. 수정보완(修正補完)
잘못된 것이 있으면 비록 선대에서 하신 일이라 할지라도 시정하는 것이 오늘날의 추세이기에 이에 따라 죄송스러우나 수정할수 밖에 없어 다음과 같이 수정 보완 하였다.
(가) 종전에 발행한 안씨대동보(安氏大同譜)는 본문(本文)에서 동생 되시는 황(璜)공의 사실(史實)이 제외(除外)된 것을 실었는데 이는 우리 안문(安門)에 전해오기를 인조2년(1624)에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켰는데,
① 그가 고성이씨(固城李氏) 이기에 제외 하였다고 한다.
② 고성이씨(固城李氏)도 이괄(李适)의 난 후 일부 파(派)에서는 철성이씨(鐵城李氏)로 바꿨다.(전체의6%이내)
이런 것이 고성이씨 시조 이황이 이원의 동생이라고 볼만한 고증인가? 1957년 순흥 서파공파 전의록 이전의 어느 안씨 기록에도 고성이씨 시조가 이원의 동생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데, 어느 안씨 문중에 그런 말이 전해 왔다는 말인가? 신라 말의 일이 구전으로 1000 년 뒤 조선 말까지 정확히 전해 올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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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안씨들은 고성이씨 시조 이황(李璜)이 807년 동래한 안씨들 조상이라는 이원(李瑗)의 동생이라고 우긴다. 하지만 이존비(李尊庇, 1233∼1287)의 6대조인 이황은 생년이 서기 1000년 이전이 될 수 없으므로 200년 이상 시대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은 형제가 될 수 없다.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1640년 경의 문헌으로 추정되는 궁원록 (窮源錄)에서 "永年 上將軍 以上世代 恐非的傳"이라고 한 것을 들어 고성이씨 계보는 믿을 수 없으며, 이황이 807년 형 이원과 함께 동래한 것이 맞다고 우긴다. 같은 궁원록에 벌써 이황은 한문제 (漢文帝, BC 202 ~ BC 157, 재위 BC 180 - BC 157) 때 사람 이반(李槃)의 24대손이라 하였으니, 807년 동래했다는 이원과 어떤 관계도 있을 수 없다.
궁원록에는 고성이씨 시조 이황(李璜)도 나오고, 그 선대라는 이반(李槃)도 나오지만, 죽산안씨들이 주장하는 이황의 형이라는 이원(李瑗)이나 그 장남으로 죽산안씨 시조라는 안방준(安邦俊)은 어디에 나오는가? 궁원록에 나오는 사람도 못 믿겠다고 하면서 나오지도 않는 사람은 무엇을 근거로 믿어야 하는가? 현재의 고성이씨 계보는 궁원록뿐만 아니라 그 후의 대다수 종합보에도 그대로 다 나오지만 이원이나 안방준 및 안씨동원보 계보는 1900년 이전 그 어느 종합보에도 나오지 않는다. 뭘 보고 맞다며 믿어라는 것인가? [ 궁원록(窮源錄)의 광주안씨, 죽산안씨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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